‘코를 골다‘
남편이 시를 쓴다면~~~
이런 시가 나올지도 ㅎㅎ


오랜만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괜히 반갑고 반갑다!



최정례

코를 골다

코를 골았다고 한다. 내가 코를 골아 시끄러워 잠을 못잤다고 한다. 그럴 리 없다. 허술해진 푸대자루가 되어 시끄럽게 구는 그자가 바로 나라니, 용서할 수가 없다. 도대체 몸을 여기 놓고 어느 느티나무 그늘을 거닐었단 말인가. 십년을 키우던 고양이 코기토도 코를 골았었다. 그 녀석 죽던 날, 걷지도 못하면서 간신히 간신히 자기 몸을 제집 문 앞까지 끌고가 이마 반쪽만을 문턱에 들여놓은 채 죽어 있었다. 아직도 녀석은 멀고 먼 자기 집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끌고가기 너무 고단해 몸을 버리고 가는 자들, 한심하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내 숨소리에 놀라 깨는 적이 있다. 내 정신이 다른 육체와 손잡고 가다가 문득 손 놓아버리는 거기. 너무나 낯설어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싶은데 물어볼 사람이 없다. - P84

곽재구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104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 P104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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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발견 -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사랑하는 법
캐스린 슐츠 지음, 한유주 옮김 / 반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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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1월 돌아가신 아버지는 우리 3 남매에겐 더 없이 다정하고 세심하신 분이셨지만, 엄마와 결혼을 하고 군대가셨다 심장 판막에 이상이 생겨 의가사 제대를 하신 이후 몸이 계속 좋지 않으셨다.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 결국 퇴직하시고 계속 앓으셨기 때문에 우리 온 가족은 조금씩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그 충격이 여기 이 캐스린 슐츠와는 다른 강도로 다가왔던 거 같다. 엄마와 우리 3 남매는 늘 하던대로 엄마는 홀로 힘들게 우리 3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 위해 고군분투 장사를 하시고 우린 학교 갔다 오면 누군가 한 명은 엄마를 도와드리고 우리는 그저 우리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아버지께선 우리에게 더없이 다정다감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성격이 강하고 한편으론 우악스럽게 느껴지기도 한 우리 엄마와의 일상은 쉽지 않았고 불화의 연속이었으며 그래서 더욱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살아내느라 너무 바빠서 그걸 여유롭게 돌아보고 되새겨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더 오래 사시다 우리와 좋은 시간을 보내셨더라면 아마도 그 충격은 이 책의 작가와 같은 상실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난 아버지를 약간 어려워하면서도 너무 좋아했으니까...!



캐스린 슐츠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가지게 된 상실과 애도의 시간들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같지는 않겠지만 누구나 이러한 감정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공감하게 될 거라고 본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내 남동생이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겪은 상실감보다 젊고 건강했고 아버지를 닮아 다정하고 천상 선비 같았던 우리 남동생이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병으로 급작스럽게 하늘나라로 가버렸기 때문에 그 충격과 상실감, 애도와 눈물, 비탄과 후회의 시간은 길었다. 당시 9살, 초등학교 2학년이 막 되었던 조카가 이제 대학생이 되었을텐데... 지금도 생각만 하면 눈물 나는 최고의 눈물 버튼이다. 가끔 여동생과 통화하면서 동생 얘기만 하면 목소리가 먹먹해지면서 둘 다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눈물 흘린다. 남동생은 아버지가 가신 후 우리 집안 여자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착한 우리 남동생을 계속 생각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이 잊혀지는 게 맘이 쓰이기 때문이다. 잊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까...



캐스린 슐츠는 '1부 상실'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상실의 아픔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언제든 상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올 것임을 알기에 작가가 이끄는대로 함께 애도해나가는 친절한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애도하는 중이라도 우리의 일상은 충실하고 행복과 기쁨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게 된다. 상실과 애도의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나 혼자 이렇게 기뻐하고 웃고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 고민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행복한 시간 속에 우리 동생이 영원히 함께 있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팠기 때문이었다. 



'2부 발견'의 시작은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들판에서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발견한 소년 '빌'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 이야기의 결말은 놀라운 인연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1부에서도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놀라운 발견의 순간들에 대해 조곤조곤 들려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발견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전 작가는 사랑하는 여인 C를 만난다. 결혼을 결심하게 될 정도로 소중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서로의 닮은 점을 기뻐하고 차이점을 알아가면서 천천히 평생의 반려자,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도 들려준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과정을 듣다 보면 나의 인생에서도 이러한 소중한 일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C의 고향마을에 정착하게 된 캐스린 슐츠는 C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는데 '빌'은 그녀의 아버지였던 것... 이 부분을 읽으며... 음, 이 작가 글을 풀어나가는 실력이 정말 뛰어난데... 오호....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3부 그리고'에서는 이 단순한 접속사가 가진 놀라운 힘을 말한다. 그리고는 한 단어와 한 단어, 하나의 개념과 다른 하나의 개념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우리와 세계가 연결될 때 어떤 상실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삶은 찰나이기에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것임을 말한다. 그 결과 '그리고'는 한낱 접속사와는 달리 연속된다는 기분을 안겨준다. 슐츠는 그녀 C와 결혼을 하고 나서 행복한 일상, "매일의 비범함(remarkableness)"을 경험하는 현재를 영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일본어로 "모노노 아와레"라 부르는 것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는 바꿀 수 없는 운명에 공감하고 불쌍히 여기며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단다.

 작가가 지금까지 말한 '상실과 발견'의 감정은 "찰나의 폭로를 통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깨닫는 느낌이다. 삶이 얼마나 근사한가, 얼마나 허약한가, 얼마나 찰나인가. 이 감정이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조그만 위치에 대한 반응에서 일부 비롯되기는 해도, 경이로움awe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 감정에는 너무 많은 일상이, 또 너무 많은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얘기하는 감정은 광휘도 공포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감사한 마음과 갈망, 그리고 예측된 슬픔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어단어에서 이 감정과 가장 가까운 혈족은 '달콤 쌉싸름한bittersweet' 일 것이라고 말한다. '달콤 쌉싸름한' 이 행복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해도, "이 단어의 내밀한 기원은 우리가 세계와 마주할 때의 필연적인 측면, 즉 우리가 가진 전부를 언젠가는 상실하게 된다는 문제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유형의 '그리고'에 대해 이 말이 가장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슬픔은 어떤 형태건 우리의 슬픔과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자각". '그리고'에는 이토록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단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캐스린 슐츠는 아버지의 상실 이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상대적으로 어머님에 대해 소홀한 것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하지 못하는 집안의 모든 대소사와 교육과 육아를 챙기면서 자신의 일도 잘 챙기신 분이셨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몫이 결코 아버지에 뒤지지 않았다고...

남동생이 떠나고 난 후 오랜 시간 동안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남동생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엄마의 자부심이었던 동생은 남편의 대신이자 집안의 가장이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대단한 존재였다. 적어도 엄마에겐 그랬다. 그래서 우리와 엄마 사이엔 서로 이 공감이라는 것이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거나 대화를 하게 되면 그 즉시 서로의 해묵은 감정들이 올라와 싸움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렇게 강건하고 괴팍하고 독선적이고 독립적이어서 혼자서도 잘 드시면서 뭐... 천년만년 잘 살아가실 것 같던 엄마가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특별히 병이 있으셨던 건 아니고 영양실조... 영양 불균형으로 쓰러지셨다고 했다. 특별한 병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동안은 엄마도 일흔이 훨씬 넘은 노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던데다 워낙 사이도 안좋으니 차라리 자주 만나지 말자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는 혼자서도 잘 사실 줄 알았다. 나이가 드시면서 원래도 좋아하지 않았던 육류를 전혀 드시지 않아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영양 불균형으로 쓰러지신건데... 영양불균형으로 그럴 수 있단 것에 깜놀!!! 한동안은 골고루 반찬을 해서 갖다 드렸는데 너무 멀고 번거롭고 특히 엄마와 우리의 음식 취향이 너무 달라 빠른 포기. 그런 후 차라리 엄마에게 고기를 보내드리는 것이 낫다 싶어 코스*코 가서 고기를 사서 한 번 먹을 양 만큼 소분해서 냉동시켰다 보내드린다. 스테이크용, 국거리용, 보쌈용, 구이용, 장조림용.... 소화도 잘 되고 부드러운 고기를 다양하게 보내드리려다보니 그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더 나이가 드셨고 그렇게라도 안하면 안드시는데 엄마가 이걸 또 엄청 좋아하신다. 의외로! 그래서 몇 년째 계속 해나간다. 그렇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더해지면서 조금씩 서로의 앙금이 풀려나가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엄마의 삶을 공감해주고 격려하는 대화도 하게 되었다. 우리를 위해 무언가 남겨주려 애쓰지 말고 엄마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가고 싶은 여행 마음대로 하시라고.... 내일 당장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건강할 때 하시라고... 이런 말들이 엄마의 감성을 건드렸나 보다. 요즘은 엄마와 거의 싸우지 않는다. 꽤 됐다~~^^ 그동안 몰랐던 건데 엄마와 어찌하면 잘 지낼 수 있는지 알게 된 것이 동생이 하늘나라 가고 내가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다. 정말 안된 말이지만 동생이 있었다면(동생아 미안 ㅠㅠ) 아마 평생 엄마와 불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엄마와의 튀르키예 여행을 예약했다. 작년 가을 떠나려다 어그러져 엄마가 엄청 속상해 하셨다. 내가 엄마와 여행 가기 싫어서 취소한 걸로 오해하셨던 건데 이젠 엄마가 원하면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노인네는 이제 말끝마다 내가 언제까지 멀리 비행기 타고 여행을 갈 수 있겠냐고 반 협박조로 말씀하신다. 그러니 지금 건강이 허락할 때 꼭 딸하고 여행 가고 싶으시다니... 어쩌겠는가. 엄마가 경비를 다 내신다니 덕분에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럭셔리 여행을 가게 생겼다.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갈 밖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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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2-27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저도 아빠의 몇 번에 걸친 수술과 입원을 겪으면서 상실이라는 게 나에게도 이제 훅, 다가오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은하수 님의 리뷰을 읽고나니 제가 이 책을 사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덜 아픈건 아니겠지만,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은하수 님.

은하수 2025-02-27 12:59   좋아요 0 | URL
상실은...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아무리해도 막을수가 없죠. 안타깝게도 다가오고야 말죠!
이 책 저도 작년에 시작했는데... 이제서야 다 읽었어요. 근데 읽길 너무너무 잘했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 읽는 중에 엄마 연락와서 정말 엄마랑 여행가기 싫은 거냐고 물어보셔서 철렁했거든요. 엄마가 마냥 편하진 않아도 여행조차 가기 싫을 정도는 아닌데 싶어... 안쓰러웠어요. 그런 엄마가요. 다시금 살다보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되네 싶더라구요. 상실을 겪고나서 후회하는거보다 지금 좀더 잘하고 싶어졌어요^^

꼭 완독 하시길요~~^^
 

2장. 발견~~ 3.그리고


...나는 이렇게 느낀다. 사랑하는 이를 발견하는 
일은 (심보르스카의 시 제목을 빌리자면) "경이"다. 우주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없는 시공간이 너무나 광대해서다. - P230

누군가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게 종이와 펜, 그리고 천 년의 시간을 주면서 어느 날 사랑하게 될 사람을 묘사해보라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녀와 같은 사람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런 나날들을 보내던 와중에 나는 한없는 경이와 감사를 느끼며 C에게 묻곤 했다.  - P232

이 질문에 대해 가장 확실한 답변일지도 모를 
그녀의 집 한가운데 서있자니 이보다 심오하면서도 신비로운 질문은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서 그녀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어떻게 여기서 그녀는 나와 함께하게 되었을까? - P233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건 한없이 경이롭다. 
우리 감각의 척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엄청나게 작은 데 비해 이 세상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바뀔지도 모른다. 발견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가 발견에서 절망이 아닌 경이를 느낀다는 점이다.
끝없이 드넓은 이 우주에서, 삶이 무한히 변이하는 가운데,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경로들, 그리고 가능성들 중에서, 나는 여기 이 집, C의 곁에 있다. 그녀는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내 손을 잡고 거실을 나와 주방으로 간다. 나는 장작 난로 선반에서 그것을 집어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직 내가 뭘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운석이야, 그녀가 말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소년 시절 들판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발견했던 바로 그 운석이라고. - P233

최근 나는 이런 매일의 비범함remarkableness을 거의 압도적이라 여기게 되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극기주의와는 딱히 관련이 없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감정들에, 특히 하나의 감정에 민감해졌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언어에는 이 감정을 지칭하는 이름이 없다. 아마 포르투갈어로 사우다지 saudade, 일본어로 ‘모노노아와레‘라 부르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이 감정은 찰나의 폭로를 통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깨닫는 느낌이다. 삶이 얼마나 근사한가, 얼마나 허약한가, 얼마나 찰나인가. 이 감정이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조그만 위치에 대한 반응에서 일부 비롯되기는 해도, 경이로움awe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 감정에는 너무 많은 일상이, 또 너무 많은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P284

이런 이유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숭고sublime라 부른 것(물리적인 세계의 비인간적이고 광막한 장엄함이 불러내는 찬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과도 다르다. 내가 지금 얘기하는 감정에는 광휘도 공포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감사한 마음과 갈망, 그리고 예측된 슬픔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어 단어에서 이 감정과 가장 가까운 혈족은 ‘달콤 쌉싸름한bittersweet‘일 것으로, 사포Sappho가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표현하려고 고안한 그리스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사랑의 기쁨을 사랑의 고통으로 처음, 그리고 영원히 땜질한 이는 사포였다. 그러나 ‘달콤 쌉싸름한‘이 행복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해도, 이 단어의 내밀한 기원은 우리가 세계와 마주할 때의 필연적인 측면, 즉 문제를 어느 정도로 감각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드러낸다. 우리가 가진 전부를 언젠가는 상실하게 된다는 문제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유형의 ‘그리고‘에 대해 이 말이 가장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형태건 우리의 슬픔과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자각.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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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논하는 사람은 드물어졌지만, 
적어도 연애담에서는 행복이 여전히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문학에서 사랑을 바라보는 방식은 자주 암울하고, (톨스토이처럼) 기쁨보다는 고통을 강조하며, 난기류가 만족감보다 먼저 찾아오고, 로맨스보다 비극이 앞선다. 제인 오스틴이나 발자크, 동화, 로맨틱코미디, 로맨스 소설처럼 이 규칙에는 수많은 예외가 있지만, 사랑을 분홍빛으로 전망하는 시각조차, 사랑을 지속하는 것보다는 획득하는 것에 집중한다. - P224

"그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결말이지 이야기가 아니다. 이 표현은 행복을 고정된 상태로 간주하며,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으로 본다. 이런 유형의 사랑은 찾아내면 이내 
지루해진다. 더 나쁘게는, 실제로는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 P224

이는 고릿적부터 끈질기게 이어진 관념이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실제로는 한낱 욕망이며, 욕망은 늘 아직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것이라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가 마침내 사랑을 찾아낸 이후가 아니라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전한다. 소년은 소녀를 만나고, 소년이 소녀를 잃고, 소년은 소녀를 다시 만난다. 낙관적인 이야기에서도 사랑을 얻는 순간 종결이 찾아온다. 우리 대부분이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에. - P225

다시 말해서 로맨스 작가들은 대개 사랑의 시작이나 끝에 매달리면서 그 중간을 무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별로 관심이 없기에 작가들은 중간을 최대한 짧게 만들 방법을 강구한다.  - P225

하지만 실제 연인들은 정확히 반대를 행한다. 중간을 가능한 한 길게 만들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이들은 중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미 가진 것을 욕망하는 일이 완벽히 가능하다는 의미다.  - P225

나는 C가 바로 옆에 있지만 짜증 나 있거나 
딴생각에 빠졌을 때, 그녀가 다른 도시에 가 있는데 나는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그녀를갈망한다. 그녀는 내 품에서 잠들어 있는데 나는 실존적인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그녀가 내 곁에 있기를 절망적으로 원하면서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그녀를 갈망한다. 응답받은 연인들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욕망이 항구적으로 형태를 바꾸기에 고통받는다. 우리가 욕망하는 건 동시대 문화가 기본적으로 갈구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 P225

상실은 세계를 축소하지만, 발견은 풍성하게, 풍부하게, 재미있게 한다. 나는 C와 만나고 사랑에 빠져 있었고, 바람이 불어와 눈부시게 반짝이는 겨울철 밀은 내 눈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녹색으로 보였다. 나는 들판 한구석에서 필멸자들의 세상을 떠나 저들만의 마법 왕국으로 향하는 듯 날아오르는 수백 마리의 흰기러기들을 보았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시골로 이사를 왔고, 바다의 힘으로 대지 위에서 장애물 없이 불어대는 바람에 기대어 오후 달리기를 했고,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처럼 순수한 상쾌함을 느꼈다. 
나는 C의 부모님과 자매들을 비롯한 대가족들과 가까워졌고, 부활절 아침이면 그들과 같이 교회에 가고, 크리스마스면 그들의 트리 아래 선물을 놓는다. 나는 태어난 집과 마찬가지로 근사한 또 하나의 집을 발견했고, 그 전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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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간되어 나왔다니 읽어보고 싶다!

예상은 했지만 책값이 이리 후덜덜할 줄이야...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신청사유는 소장가치 충분한 신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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