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언어》 카메라에 남겨놓은 사진

한 ‘영역‘을 한꺼번에 전부 볼 수 있도록 눈의 근육을 풀고 뒤로 물러나 앉는다. 여기저기로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매우 엄격한 노력을 요구하지만 사진 찍는 연습으로 이보다 더 좋은 훈련은 없다.
ㅡ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중에서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중에서 발췌해놓은 글들이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 글들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어 읽으며 자꾸 나도 모르게 ‘흠, 좋은데! 그렇지, 그렇군!‘ 이렇게 공감하게 만든다. 따라해보고 싶게... 하....

작가가 직접 찍었다는 사진도 찬찬히 오래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프레임 밖의 세상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카메라로 다시 사진을 찍어보고 싶은 욕구가 새록새록 솟아난다. 우선, 이 밤이 지나면 카메라 다시 꺼내와서 메모리에 남은 사진이 뭘까 찾아봐야겠다. 마지막 사진이 언제적인지 너무 궁금하다!



프레임은 사진가가 조작한 시각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프레임이 사진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프레임 안에 들어온 것과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 것, 프레임 안에서 빼버려도 상관없는 것은 무엇인지가 종종 사진에서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ㅡ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중에서


***내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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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카메라로 충분할까

대학 시절, ‘사진 미학‘이라는 강의를 들었고 첫 수업에 선생님은 일회용카메라로 사진 찍어오는 과제를 내주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화되며 DSLR 열풍이 불던 시기였기에 일회용카메라를 파는 곳은 많지 않았다. 여러 상점을 돌고 돌다가 안국역 근처 슈퍼마켓에서 먼지 쌓인 것을 한 대 찾았다. 손바닥에 딱 들어오는 작은 카메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레버를 돌린 뒤, 셔터를 누르니 "틱" 하고 볼품없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이런 카메라로 뭘 찍어오라는 걸까? 모두에게 디지털카메라를갖고 오라고 하면 부담을 가질까 봐 그랬나? 렌즈를 돌려가며 멋지게 찍고 싶은데..."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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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중에서...

큐클럭스클랜(3K,KKK) 패거리에게 죽임을 당한 다정한 천재였던 이솝 형과 어머니 같았던 수 아주머니.
너무 끔찍한 죽음에 한동안 계속 읽어가기가 힘들었다. 하...

하지만 절망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젊은 영혼은 회복도 빠르다. 예후디 사부가 슬픔에 잠식되어 가는 동안에도 공중 곡예 훈련ㅡ공중 제비 돌기, 호수면 위로 미끄러지듯 걷기, 높이 날아 오리기 등ㅡ을 계속해 나갔고, 결국 성공적인 공연을 해내고야 만다.

계속되는 성공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시련..!
어떻게 극복해나갈지 흥미진진하다.
역시 폴 오스터구나 싶다!


그러기를 얼마쯤, 나는 너무 약이오르고 내 무능력에 화가 치밀어서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주먹으로 마룻바닥을 내리쳤다. 그리고 마침내는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여 벌떡 일어서서, 머리를 세게 부딪쳐 기절해 버릴 작정으로 곧장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펄쩍 뛰어올랐다가 어깨가 벽에 쾅 부딪치기 직전의 눈 깜짝할 순간에, 나는 내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앞쪽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허공으로 돌진하면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무중력의 파도에 실려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처 알아차릴 틈도 없이 나는 벽에 부딪쳤고, 고통을 못 이겨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내몸왼쪽 전체가 충격의통증으로 욱신거렸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20분동안 천장이 떠나가라 웃어 젖히며 춤을 추듯 방안을 빙빙 돌았다. 

나는 비밀을 깬 것이었다. 알아낸 것이었다. 직각따윈 생각하지 마,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원호(圓弧)를 생각해, 탄도(彈道)를 생각해. 그것은 처음엔 올라가고 다음엔 움직이는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올라가면서 나아가는 유연하고 끊기지않는 동작으로 나를 에워싼 허공의 거대한 품을 향해 날아오르는 문제였다.
- P111

그 시점에서 내 당면 문제는 지속 시간, 즉 공중에 얼마나 오래 떠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초기의 결과는 대략 3초에서부터 15초까지에 걸쳐 변화가 심했고 내가 움직이는 속도도 지독히 느려서 갈 수 있는 거리는 고작 2미터 내지 2미터 50센티미터, 그러니까 내 방 한쪽 벽에서 다른 쪽 벽까지의 거리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 그 동작도 활기 있게 사뿐사뿐 걷는 것이 아니라 공중 곡예사처럼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유령의 걸음걸이 같은것이었다. - P112

그렇더라도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연습을 계속했다.
이제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용기를 잃어 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가는 중이었고, 어느 것도 내 앞길을 막지는 못할 것이었다. 비록 내가 전과 마찬가지로 15센티 내지 20센티보다 더 높게 떠오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당분간 이동에 정신을 쏟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그 일에서 어느 정도 숙달이 되고나면 상승으로 관심을 돌려 그 문제에도 부닥쳐 볼 셈이었다. 그것은 의미가 있는 생각이었다. 설령 내가그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 계획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날짜가 촉박해지고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상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 P112

다음 한 시간 동안 나는 예전의 기록을 두 배로 올려 30 내지25센티미터 높이까지 떠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었을 때는 땅에서부터 족히 70, 80센티미터는 떠올라, 예후디 사부의 육감이 옳았으며 공중 부양술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예언자적 통찰력이 있었음을 증명했다. 땅에서부터 그런 높이로 떠올라 돌아다닌다는 사실상 바야흐로 날기 직전이라는 것을 느끼는 데서 오는 스릴은 굉장했지만, 60센티미터가 넘는 높이에서는 몸이 비틀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져서 똑바로 선 자세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높이까지 떠오른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마치 내 몸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하나로 연속되지 않은 것처럼, 머리와 어깨는 위쪽에서 따로, 무릎과 발목은 아래쪽에서 따로 놀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일어설 때마다 몸을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했다. 본능적으로 몸 전체를 땅 위로뻗친 자세가 발바닥만으로 지탱하는 자세보다는 더 안전하고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자세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겁이 났지만 우리가 연습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나는 머리를 가슴에 묻은 자세로공중에서 천천히, 몸의 어느 한 곳도 땅에 스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완전한 원을 그리며 공중제비를 넘을 수 있었다. - P122

그날 밤 사부와 나는 기쁨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우리에게는 모든 일이, 상승과 이동을 한꺼번에 정복하고 상당한 높이로 올라가고 하는 꿈같은 일들이 다 가능해 보였다. 
나는 그때가 우리에게 가장 굉장한 순간, 우리의 장래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절정에 달했던 날로부터 꼭 하루 뒤인 6월 6일, 내 훈련은 갑작스럽게 회복할 수 없이 중단되었다. 예후디 사부가 그처럼 오랫동안 두려워해 왔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 일은 너무도 무자비하고 흉포하게 일어나서 우리의 가슴에 엄청난 파괴와 격변을가져왔고 우리 둘 중 누구도 다시는 전과 같아질 수가 없었다. - P123

우리가 말발굽 소리를 들었던 것은 틀림없이 10시가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처음엔 희미하게 우르릉거리는 소리, 몇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일어나려는 것처럼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 비슷한 땅울림이었다. 그때 나는 연못가에서 두 번 연달아 공중제비를 넘은 뒤사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부는 평소 때의 침착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대신, 갑자기 겁에 질린 몸짓으로 내팔을 움켜쥐었다. 「잘 들어 봐라.」그가 말했다. 그리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저 소리를 잘 들어 봐라. 그놈들이 오고 있어. 그개자식들이 오고 있어.」 나는 귀를 곤두세웠다. 분명히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몇 초가 지나자 나는 그것이 우리 쪽으로 우르르 달려오고 있는 말발굽 소리와 말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움직이지 마라.」 사부가 말했다. 여기 그대로 있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꼼짝도 하지 마. - P123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나무 뒤에 서서 큐클럭스클랜패거리가 벌이는 소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십여 필의 말에 올라탄 십여 명의 사내들이 마당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껑충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소리를 질러 대는 살인마들. 우리에게는 그들을 저지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들이 불타는 집 밖으로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끌어내어 그들의 목에 로프를 걸고, 길가에 있는 느릅나무 가지에다 따로따로 매달았다. 이솝은 울부짖었고 수 아주머니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채 몇 분도 안 되어 두 사람 모두 숨이 끊겼다. - P125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이 내 눈앞에서 살해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예후디 사부가 손으로 내 입을 가리고 있을 동안 눈물을 삼키려고 애쓰면서 지켜본 것뿐이었다. 살육이 끝나자 두 명의 3K 단원이 마당에 나무 십자가를 박고 거기에다 휘발유를 끼얹은 다음 불을 붙였다. 그 십자가가 집과 함께 불타오르는 동안 3K 단원들은 사방으로 총을 쏘아대며 큰소리로 떠들어대다가 모두 말에 올라 시볼라 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때쯤엔 우르릉거리며 타오르던 목재들은 뜨거운 불덩어리로 작열했고 그 살인자들 중 마지막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쯤에는 이미 지붕이 사방으로 소나기 같은 불똥을 튀기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마치 태양의 폭발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의 종말을 목격한 듯한 느낌이었다. - P125


그곳에서의 공연은 의상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이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관객들도 내가 등장하는 - 거기에서는 등장을 하는 일이 연기 못지않게 어려웠다 - 순간부터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예후디 사부는 남부풍의 선전을 철저히 해두었고, 내 허클베리 핀 의상도 아주 수수해 보인 덕분에 우리는 그들의 허를 찌를 수 있었다. 
여섯인가 일곱 명의 여자들은 기절했고,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고, 어른들은 놀라고 믿어지지가 않아 입을 쩍 벌렸다. 30분 동안에 걸쳐 나는 공중에서 의기양양하게 걷고, 공중제비를 넘고, 반짝이는 널따란 호수면 위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그들을 뇌쇄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미터 50센티미터쯤 되는 높이까지 떠올라 그때까지의 기록을 경신한 다음, 천천히 땅으로 내려와 인사를 하는 것으로 공연을 마쳤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솥과 냄비를 두드려 댔고, 색종이 조각을 하늘로 던져 올렸다. 

그것은 내가 맛본 첫 번째 승리였다. 그 느낌이 너무도 황홀했다. 그때까지 경험했고 앞으로 경험하게 될 어떤 승리보다도 더 황홀했다. - P164

나는 사부가 그 간이식당에서 보인 행동이 자랑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 어머니의 오빠는 믿을 수 없이 교활한 인간인 데다, 어떤 일에 마음을 정한 이상 자기의 목표에서 눈을 돌리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그가 주장하는 얘기를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쩌면 사부는 그에게 25퍼센트를 주겠다고 약속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제 그것은 모두 물 건너간 일이었다. 내가 원했던 단 한 가지는 그 개자식을 내 삶에서 영원히 몰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는 나를 벽에다 수도 없이 여러 번 집어 던지곤 해서 내게는 그에 대한 증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 돈을 요구할 정당한 권리가 있건 없건, 그는 단 한 푼도 받을 자격이 없었다.  - P183

그러나 슬프게도내가 어떻게 느끼건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또 사부가 어떻게 느끼느냐도 그것은 모두 슬림에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뒤쫓아오리라는 것, 그의 손이 내 목을 조를 때까지 계속 뒤쫓아오리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 P183

나는 팝콘을 한 봉지 사 들고 자리에 앉아 어둠속에 흩어진 다른 사람들을 잊어버린 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 20분이나 30분쯤 되었을 때, 뒤에서 뭔가 이상하면서도 어쩐지 향긋한 약 냄새가 풍겨 오는 것이 느껴지더니,
그 코를 찌를 듯 강한 냄새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려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기도 전에, 그 자극적인 약품에 적신 헝겊이 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풀려나려고 버둥거리면서 안간힘을 썼지만 어떤 손이 내 얼굴을 뒤로 밀어 젖혔고, 다시 저항해 볼 힘을 끌어모을 수 있기도 전에 온몸에서 힘이 쭉빠졌다. 내 근육은 기운을 잃었고, 살갗에서는 땀이 흥건히 배어났고, 머리는 몸에서 떨어져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거기에서부터 어디로 옮겨졌건, 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 P187

운명의 장난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납치는 내게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내게는 커다란 행운, 나를 마침내 궤도에 진입시켜 준 연료가 되었다. 
나는 한 달이 넘게 공짜 선전이 되었고 슬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을 때쯤엔 이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 미국에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키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내 탈출 소식이 일대센세이션, 첫 번째 센세이션을 훨씬 능가하는 두 번째 센세이션을 일으킨 덕분에 그 이후로는 어떤 나쁜 일도 있을 수 없었다. - P219

이제 나는 희생자였을 뿐만 아니라 영웅,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굉장한 일을 해낸 꼬마로서 단순한 동정을 넘어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런 일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나는 지옥에 던져졌었다. 
밧줄로 묶이고 재갈에 물린 채 죽은 것으로 치부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달 뒤에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머리에 바람이 들어서 기고만장해지기에 족한 일이었다. 미국이 내 발밑에 있었고, 예후디 사부 같은 사람이 줄을 당기고 있는 이상 내 인기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 P220

내가 슬림보다 한수 위였다고는 해도, 그가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경찰이 사우스다코타의 오두막을 급습했을 때는 여기저기 찍힌 지문과 한 무더기의 더러운 빨랫감 외에는 범인들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겁을 먹고 다시는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빈틈없이 경계를 했어야 옳았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 걱정을 하기에는 케이프코드가 너무도 평화로웠다. 
또 슬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은 이상 그런 일이 다시 생기더라도 ㅡ내가 살아 나온 것이 얼마나 위기일발이었는지는 금세 잊어버리고 ㅡ 그를 뭉개버릴 자신이 있었다. 

예후디 사부는 나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고,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내가 어디를 가건 그가 함께 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나는 납치를 당했던 일에 대해 점점 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그 일을 생각할 때가 있더라도 그것은 주로 내가 도망쳐 나올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슬림이 무릎을 얼마나 심하게 다쳤을까 궁금해하는 정도였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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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중에서


그 뒤로 나는 오랫동안 앓았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고, 열이 몸속에서 타오르는 동안 내 다음번 주소지는 점점 더나무로 짠 상자가 될것 같아 보였다. 나는 처음 며칠을 위더스푼 부인 집의 2층에 있는 손님 방에서 몹시 앓으며 보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또 몇 주일이 더 지나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온 기억도, 그와 관련된 어떤 기억도 없다. 사부와 이솝이 내게 들려준 말로는, 수 아주머니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 침대 옆에 붙어 앉아 물수건을 갈아주고, 내 목구멍으로 죽을 떠 넣어 주고, 하루에 세 번씩 의자에서 일어나 자기의 오글랄라 드럼으로 치는 특별한 박자에 맞춰 내 침대 주위를 돌며 인디언들의 주신(主神)에게 나를 너그러이 굽어살펴 다시 낫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문을 영창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해가 되었을 리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진찰하기 위해 의 - P47

사를 부른 일이 전혀 없었는데도 내가 정신이 들어 완전히 회복된 것을 생각한다면, 나를 살려낸 것은 그녀의 비술(術)일수도 있다. - P48

누구도 내 병에 의학적인 이름을 갖다 붙이지는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그 병이 몇 시간씩 눈보라 속을 헤맨 탓에 생겨난 것 같았지만 사부는 그 설명을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일축해버렸다. 그의 말로는 내 병이 <존재의 아픔>이라는 것으로, 조만간 나를 덮치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내가 다음 단계의 훈련으로 진입할 수 있으려면 내 몸에서 독이 제거되어야 했는데,
위치토에서 맞닥뜨린 그 뜻밖의 사건 덕분에 6개월 내지 8개월가량 단축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심한 충격을 받아 복종을 하게 되었으며,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기가 꺾이자, 그 정신적 충격이 병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 내게서 원한이 사라졌고, 죽음 직전의 악몽에서깨어났을 때는 내 속에 있던 증오가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P48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첫 번째 단계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밖에 다른 일들도 있었는데, 그중 몇 가지는 며칠 뒤 내 열이 다시 치솟았을 때 일어났다. 
어느 날 이른 오후, 잠을 깨고 보니 방안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침실용 변기를 써볼 셈으로 침대에서막 빠져나오려는 참이었는데, 베개에서 귀를 떼자 문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후디 사부와 이솝이 복도에 서서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얘기인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이솝이 감히 사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나를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말라는 얘길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 온갖 못된 짓과 불쾌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이솝이 내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자신이 죽도록 부끄러웠다. 사부님은 저 애의 영혼을 망가뜨렸어요.」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이제 저 아이는 죽음을 맞는 자리에 누워 있어요. 그건 공평하지 못해요. 나는 저 애가 걸핏하면 말썽을 피우는 개구쟁이라는 건 알지만 저 애의 마음속에는 단순한 반항 이상의 것이있어요. 나는 그걸 느꼈고,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또 설령 내 말이 틀렸더라도 저 애가 사부님한테서 받고 있는 것 같은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어요. 누구도 그런 대우를 받아선 안 돼요.」 - P49

나는 누가 그처럼 내편을 들어준다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이솝의 얘기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말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날 저녁, 내가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 예후디 사부가 살며시 방으로 들어오더니 땀으로 흠뻑 젖은 내 침대가에 앉아 내 손을 잡아 쥐었다. 나는 그가 거기에 있을 동안 내내 잠이 들은 척 눈을 감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된다. 월트.」 그가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너는강인한 녀석이고 아직은 죽을 때가 되지 않았어. 우리 앞에는 네가 상상도 못 할 굉장한 일, 놀라운 일들이 놓여 있으니까. 너는내가 너를 미워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그건 단지 네가 대단한 녀석이라서 이런 시련을 견딜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너한테는 타고난 소질이 있다. 나는 그 재능을 전에 누가 펼쳤던 것보다도 더 멀리까지 펼쳐줄거다. 내 말 듣고 있니, 월트? 나는 너한테 죽지 말라고 하고 있다. 나한테는 네가꼭 있어야 하고 아직은 나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있어.」 - P50

내가 상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재난에 가까운 두 가지 사건을 겪어야 했다. 12월 초의 어느 날, 이솝이 잘 따지지 않는 복숭아통조림을 따려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그 상처는 처음엔 얼마 안 가서 곧 나을 단순한 찰과상, 아무것도 아닌 상처로 보였지만 당연히 그래야 하듯 딱정이가 앉는 대신 생인손이 되어 엄청나게 부어올랐고, 사흘째가 되자 불쌍한 이솝은 열이 몹시 올라 침대에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때 마침 예후디 사부가 집에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다른 재능 외에 의학에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 P77

그녀는 너무 인정이 많은 간호사였다. 얼마쯤 뒤에는 사부가 그녀의 울음소리에 정신이 흐트러져서 그녀를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끓인 물이 한 양동이 더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지금 당장 해요. 빨리 서둘러서.」
그것은 단지 그녀를 몰아내기 위한 핑계였다. 나는 수 아주머니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내 옆을 지나 무턱대고 계단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과 그다음에 벌어진 일을 모두 똑똑히 다 보았다. 
그녀가 첫 번째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고, 중심을 잡으려고 하는 사이 무릎이 꺾이고, 다음에는 그녀의 육중한 몸이 곤두박질쳐서 쿵쿵 계단을 굴러 내려가 바닥에 부딪칠 때까지. 그녀는 온 집안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래층 바닥으로 나가떨어졌고, 뒤이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왼쪽 다리를 움켜쥐고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이 등신같은 늙은 년! 그녀가 자기에게 욕을 해댔다. 이 멍청하고 모자란 늙은 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망할 놈의 다리를 분질렀어.」 - P80

이윽고 나는 평온할 정도로까지 잠잠해졌고, 조금씩 조금씩 어떤 느낌이 내 몸을 타고 퍼져 나가 근육들 사이에서 발산되며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으로스며 나왔다. 이제 내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가슴속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몸에서도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에 초연하고 무관심한 채 잔잔한 무감각의 파도 위에 떠 있었다. - P82

내가 처음으로 그 일을 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일이 일어나려고 한다는 최소한의 인식도 없이, 내 몸이 아주 천천히 바닥에서 떠오르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 움직임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너무도 절묘하리만큼 가벼워서 나는 눈을 뜨고 나서야 내 팔다리가 어디에도 닿지 않고 허공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닥에서 높이 떠 있지는 않았지만 ㅡ 기껏해야 2, 3센티쯤 ㅡ 나는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밤하늘의 달처럼 고요히 떠오른 채 허파 속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공기의 흐름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엔가 나는 떠올랐을 때와 똑같이 느리고 가볍게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때쯤에는 내게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갔고 내눈은 이미 감겨 있었다. 그리고 방금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나는 세상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돌멩이처럼 꿈도 없는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 P83

나를 잠에서 깨운 것은 말소리와 나무 바닥에 끌리는 신발 소리였다. 눈을 뜨자 예후디 사부가 입고 있는 검은 바지의 왼쪽가랑이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 녀석아.」 그가 발로 나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차가운 부엌 바닥에서 선잠을 잔 거냐?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 한잠 자기에는 썩 쓸 만한 곳은 아닌데.」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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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컬렉션 박스의 비닐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어내고 <공중곡예사>를 꺼냈다.
언제나 최애작가인 폴 오스터의 컬렉션 박스 세트의 커버 색상은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ㅡ좀 야단스러운 색상이어서 구매를 망설였다 ㅡ자꾸 보면 좀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사놓고 보니 그렇다~~


내가 물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내게 그러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 기술을 하룻밤 새에 배운 척하려는 건 아니다. 예후디 사부(師父)는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세인트루이스의 길거리에서 푼돈을 구걸하고 있던 고아인 나를 찾아냈고, 그 뒤로 3년 동안 꾸준히 가르친 다음에야 내가 사람들 앞에서 묘기를 보이도록 허락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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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5-27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스 엄청나네요 멋집니다!

은하수 2023-05-27 08:46   좋아요 1 | URL
어머... 멋짐을 바로 알아보시다니요
전 첨에 너무 강렬해서 거부감 일었거든요~~
엄청난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최고의 폴 오스터죠!
세트인데 4권이라 아쉽습니다

서곡 2023-05-27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예 ㅋㅋㅋ 너무 튀어서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박스 자체로 하나의 작품 같네요 현대미술요! 즐독하시기 바랍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은하수 2023-05-27 18:09   좋아요 1 | URL
한 권, 한 권 표지가 멋집니다
양장본이라 묵직하니 책을 잡는 느낌이 좋아요~~

비 오는 주말이지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