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와 원숭이왕>
아래 하(下)에 한획만 더하면 아닐 불(不)이 되는구나! 전호리 그 사람이 참 ... ㅎㅎㅎ

삼리촌(三里村) 변두리에 있는 조그마한 통나무집. 번잡한 마을 사람들의 민가와 북적이는 사당에서 멀리 떨어진, 수련 잎과 분홍 연꽃과 즐겁게 노니는 잉어가 가득한 시원한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있는 이 통나무집은, 근처의 번화한 도시 양주(揚州)에 사는 방탕한 시인과 비단옷을 입은 그의 애인에게는 운치 있는 여름 별장이 될만한 곳이었다. - P433

그런데 아뿔싸, 혹시 이통나무집을 눈여겨본 문인이 있었다면분명 실망했을 텐데 왜냐하면, 다 무너져 가는 집이기 때문이었다.
주위의 대나무 숲은 손질이 안 되어 엉망으로 자라 있었다. 나무 벽은 뒤틀리고 썩어서 곳곳이 구멍투성이였다. 짚을 엮어 인 지붕은 높이가 들쑥날쑥해서 먼저 얹은 켜가 나중에 얹은 켜의 구멍으로비죽 솟은 모양새가…… - P434

…실은 이 통나무집의 주인이자 유일한 거주자인 전호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전은 오십대였지만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깡마른 체격에 낯빛은 누렇게 떴고 변발은 숱이 적어서 돼지 꼬리처럼 가늘었으며, 날숨에서는 걸핏하면 가장 싼술과 그보다 더 싼 차의 냄새가 풍겼다. 전은 어릴 적에 당한 사고 때문에 오른쪽 다리를 절었는데, 지팡이를 짚는 대신 발을 끌며 느릿느릿 걸어 다녔다. 겉옷은 온 사방에 기운 자국이 가득했으나 그래 봤자 수없이 뚫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속옷을 감출 수는 없었다. - P434

대다수 마을 사람과 달리 전호리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지만, 사람들이 아는 한 그는 과거시험의 첫 번째 단계조차 합격한 적이 없었다. 이따금 전은 다관에 들러 마을 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 주거나 관청의 공지를 읽어 주고 그 대가로 닭 반 마리나 만두 한 접시를 대접받았다.
그러나 전호리가 생계를 해결하는 수단은 따로 있었다. - P434

안나가 볼 건가? 원숭이 왕이 물었다.
전호리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원숭이 왕은 그의 꿈속에 나타나곤 했고, 깨어 있을 때면 머릿속에서 말을 걸기도 했다. 남들은 관세음보살이나 부처에게 기도를 드렸지만 전은 원숭이 왕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원숭이 왕이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 요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볼일인지 몰라도 기다리라고 해. 전호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자네 고객 같은데. - P435

도움을 구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호리는 송사, 즉 ‘소송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휘두르는 지현이나 향신 같은 이들에게 전은 송곤(訟棍), 즉 ‘소송 거간꾼‘이었다. - P439

다도를 즐기는 문인과 은자(銀子) 쓰다듬기를 즐기는 상인 같은 무리는 무지렁이 농민들이 민원을 작성하고 소송 전략을 짜고 증언과 심문에 대비하도록 돕는다는 이유로 전호리를 경멸했다. 
어쨌거나 공자님 말씀에 따르면 이웃끼리 소송을 하는 것은 무도(無道)한 짓이었으므로, 분쟁이란 유가(儒家)의 지식을 갖춘 향신이 조정해 줄 오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전 같은 자가 감히 교활한 농민들을 부추겨 윗사람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예(禮)에 기반한 계급 질서를 뒤집어엎으려 하지 않는가! 대청율례」에 따르면 소송 원조, 소송 방조, 소송 교사, 궤변을 포함한 변론・・・・・・ 하여튼 전이 하는 짓은 뭐든 다 범죄였다. - P439

그러나 전호리는 아문이 사실은 복잡한 기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않는 것을 꿰뚫어보았다. 양자강 유역 곳곳에 있는 수차(水車)가 그러하듯이, 복잡한 기계에는 틀과 톱니와 지렛대가 있었다. 영리한 사람은 이곳저곳을 슬쩍 누르고 당겨서 이런저런 일을 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전을 싫어한다 해도 문인과 상인 역시 가끔은 전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런 경우에는 보수 또한 두둑했다. - P439

"됐다, 넘어가자." 지현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씨가 말하는 불의한 것이란 게 도대체 뭐냐? 계약서는 사촌 해 씨에게 낭독시켜 이미 들어 보았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불을 보듯자명하거늘."
"안타깝게도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청컨대 계약서를 가져오게 하시어 다시 살펴보도록 해 주십시오." - P443

무슨 계획이 있는 거지, 그렇지? 원숭이 왕이 물었다.
실은 아무 계획도 없어. 그냥 시간을 버는 거야.
음. 나는 적의 무기로 적을 공격하는 게 언제나 즐거웠다네. 내가나타 태자와 싸울 때 놈이 쓰던 화륜(火輪)으로 화상을 입혔다는 얘기, 자네한테 했던가?
전호리는 겉옷 소매 속으로 슬며시 손을 집어넣었다. 평소에 필기도구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 P443

계약서의 법률 조항은 길고도 복잡했지만, 핵심 문구는 단 여덟자에 지나지 않았다.
上賣莊稼 下賣田地
"계약 조건은 채무자가 담보물 환수권을 채권자에게 매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문구에 따르면 과부 이 씨는 사촌에게 ‘위의 작물과 아래의 토지를 판다‘라고 약속한 셈이었다.
"흥미롭군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전호리는 계약서를 든 채로 머리를 연신 끄덕거렸다. 역 지현은자신을 낚으려는 수작인 줄 알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무
"대관절 뭐가 그리 흥미롭다는 게냐?"
"아아, 진실을 티 없는 거울처럼 밝게 비추시는 영명하신 지현 나리, 이 계약서는 나리께서 직접 읽어 보셔야 합니다." - P444

전호리는 계약서를 든 채로 머리를 연신 끄덕거렸다. 역 지현은자신을 낚으려는 수작인 줄 알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대관절 뭐가 그리 흥미롭다는 게냐?"
"아아, 진실을 티 없는 거울처럼 밝게 비추시는 영명하신 지현 나리, 이 계약서는 나리께서 직접 읽어 보셔야 합니다."
어리둥절해진 역 지현은 아역에게 계약서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후, 지현의 눈은 튀어나올 듯이 동그래졌다. 계약서에, 검고 또렷한 글씨로, 매각의 핵심 조건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上賣莊稼, 不賣田地
"위의 작물은 팔되, 토지는 팔지 않는다." 지현이 중얼거렸다.
어찌된 사태인지는 명확했다. 계약서는 해 씨의 주장과 일치하지않았다. 해 씨가 지닌 권리는 작물에 대한 것뿐, 토지 자체는 아니었다. 역 지현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이 민망한 상황에서 분통을 터뜨릴 표적이 필요했다. -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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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와 원숭이 왕>
˝(미국에서) 유색 인종 작가의 글은 오로지 자전적 고백일 때에만 가치 있는 것으로 대접받습니다....˝ 라고 켄 리우 작가는 미국 문단의 폐쇄성을 말했다. 하지만 그는 ‘18세기 중국에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망상형 조현병 환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과거에 일어난 대학살의 진실을 증언하는 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도 당당히 써내는 중국계 작가로 성장했고 서양 독자에게 낯선 경이감을 선사하는 작가로 우뚝 섰다.


삼리촌(三里村) 변두리에 있는 조그마한 통나무집. 번잡한 마을 사람들의 민가와 북적이는 사당에서 멀리 떨어진, 수련 잎과 분홍 연꽃과 즐겁게 노니는 잉어가 가득한 시원한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있는 이 통나무집은, 근처의 번화한 도시 양주(楊州)에 사는 방탕한 시인과 비단옷을 입은 그의 애인에게는 운치 있는 여름 별장이 될만한 곳이었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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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있었던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 7편, 그리고 짧은 에세이까지 읽고 나서 작가에게 드는 이 친근감의 원인이 뭘까 잠시 생각해본다.
공통점이라고는 ‘여자라는 것‘ 한 가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타비아 버틀러,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보다 훨씬 심한 부당한 대우 속에서 자란 약자 흑인 여성이었지만, ‘훗날 자신이 SF를 쓰는 작가가 될 거라는 것‘을 여섯 살 이후로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기어코 이루어 냈다는 것이 흑인 여성 작가로 우뚝 선 그녀의 대단함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읽고 매일 일정하게 쓰기를 행하고 워크숍이나 글쓰기 모임에 나가 기꺼이 자발적인 평가를 당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아무리 두려워도 거절 당하더라도 글은 꼭 출판사에 보내야하고, 영감이나 재능 따위는 잊어야하고 쓰는 습관으로 승부해야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고 늘어지기˝ 즉, 집요함을 가지는 것. 그것이 작가 자신과 우리를 얼마나 먼 곳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안다면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작가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백퍼센트 작가의 경험이라는 것에 ... 뭘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이러한 긍정적인 집착, 물고 늘어지기, 집요함 등(프로르 시크리벤디)은 작가에게만 통용되는 법칙은 아닐 것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ㅠㅠ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거라고요. 그래서 그게 제일 어려운 거고요...



7편의 소설에 작가의 후기가 있어서 내가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말들이니까 작가가 직접적으로 하는 말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겠지만 어쨌든 옥타비아 버틀러 자신이 직접 쓴 후기라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궁금증도 직접 말해주니 이중의 효과이기도 하다. 친밀감 증진과 궁금증 해소라는!

예를 들어, 소설 두번째 수록작인 <저녁과 아침과 밤>은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으스스 무서웠다. 거기에 나온 DGD(듀리에ㅡ고드 질환)라는 병은 자신을 죽이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그러나 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유전이 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DGD의 원인은 ‘헤던코‘라고 하는 치료제의 일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던코‘는 세상에‘ 존재하는 암의 상당수와 많은 바이러스 질환의 치료제‘이자 DGD의 원인이다. 이 질환자들은 대부분 단명한다는 것이 통례였으나 ‘헤던코‘의 개발회사가 기증한 병원에서는 환자의 충동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다른 관심사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환자가
평화로운 상태로 오래 사는 실험이 진행중이었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작가가 이런 병에 대한 아이디어는 대체 어디서 얻는지, 정말 이런 병이란 것이 생길 수 있는지, 우리가 많은 실험을 거치고 개발한 신약의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후기에 설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세 가지 유전질환의 요소를 가지고 듀리에ㅡ고드 질환을 만들었다. 첫번째는 헌팅턴병이다. 유전되고, 우성이므로 부모 중 한 명에게 유전자가 있으면 피할 수 없다. 이 병은 단 하나의 비정상적 유전자에 기인한다. 또 헌팅턴병은 환자가 중년에 이르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헌팅턴병에 더하여 페닐케톤뇨PKU 증을 이용했다. 유아가 특별한 규정식을 먹지 않으면 심각한 지적 장애를 유발하는 열성 유전 질환이다.
마지막으로는 심각한 지적 장애와 자해행위를 유발하는 레슈ㅡ니한 질환Lesch-Nyhan Disease을 이용했다.
나는 이 세 질환의 요소에 나만의 특별한 비틀기를 추가했다. 페로몬에 대한 민감성, 그리고 자기가 몸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살덩이는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환자의 지속적인 환각이 그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많은 종교와 철학에 나타나는 생각을 차용해서 극단으로 밀어 붙였다.˝ (169/459)


특별한 비틀기, 페로몬에 대한 민감성 ㅡ이 부분이 독특해서 인상적이었지 ㅡ 그리고 진정한 살덩이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기 몸을 물어뜯는 환자들의 모습은 진짜 끔찍, 끔찍 그 자체였다. 이것은 지옥... 지금도 생각나.... 계속 생각날 듯 ㅠㅠ

                                  *********************************************************

이와 반대로 <마사의 책>은 소설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작가의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유토피아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마지막 작품은 예외였다. 작가인 주인공 마사에게 어느 날 전지전능하신 ‘신‘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할 일은 이렇다. 너는 인류가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낭비 심한 청소년기에서 살아남도록 도울 것이다. 인류가 덜 파괴적이고, 더 평화롭고, 더 지속가능한 생활 방식을 찾아내도록 도와라. ˝


도와라!!!
한 마디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전권을 위임하겠단 말이다.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너무 무섭고도 두려운 어마무시한 권력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결정은 없을 것이므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더 무섭고 힘든 결정이 되는 것이다. 나라면 대체 뭘 선택할 수 있을까. 하나를 선택할 수나 있을까. 그것에 따를 피해를 상상할 수 없으니 어떠한 결정도 내리기가 진짜 어려울 거다. 신은 뜬금없이 왜 내게 이런 어마어마한 결정을 맡겨놓고 피하지도 못하게 하는건지 신을 원망하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겠지. 피할 길은 없는데도...


마사는 꿈으로 해답을 내놓는다. 사실 해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마사는 그랬다. 제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꿈을 꾸게 하고, 개인의 관심이 바뀌면 꿈도 달라지게 하는 거다. 무엇을 욕망하든 자는 동안 꿈에서는 가질 수 있고, 그것을 물리치지도 피할 수도 없는데, 그 대신 그 꿈은 현실보다 훨씬 더 깊게, 속속들이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만족이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시도에 있지 않고 그 꿈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유토피아를 주고 싶˝은 것이 마사의 이유이다.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밤마다 자신만의 유토피아, 대립과 투쟁을 갈망하든 평화와 사랑을 원하든 꿈속에서 천국을 경험한다면 깨어있는 동안 파괴하거나 지배하거나 정복하려는 욕구를 줄어들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물론 이것의 폐해도 분명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작가는 조금도 유토피아를 믿지 않고, 내 유토피아는 누군가의 지옥일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내밀하고 개인적인 꿈속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에서 유토피아가 가능하겠는가˝(418/459)라고 말한다.
이것이 옥타비아 버틀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이다. 냉정하지만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박불가‘로군! 이런 생각이 들었다가, 한편으론 따뜻하고 희망적인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많은 SF작품들도 있는데... 이렇게 살며시 입속말로 속삭여보다 말았다. 두고 떠나는 세계는 유토피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세상일테니까.



난 유토피아라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현실이기를, 좀만 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이기를 바랄 뿐이었지 이상적인 사회, 무릉도원식의 유토피아를 원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지만 유토피아가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아니다. 이미 난 유토피아는 인간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상상 속의 산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세상이 있을수가 있나. 꿈꾸고 있네? 이런 생각을 했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은 나와 같은 것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그래서 꿈속에서나 경험해보라는 거겠지! 살짝 비틀린 듯한 작가의 허탈한 웃음 한 스푼 투척에 나도 그냥 웃을 밖에.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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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중 <모노노아와레>
ㅡ 삶의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는 감정,
모노노아와레!

우주선의 찢어진 돛을 수리하고 귀환할 산소가 바닥난 채 우주 저 멀리로 추락해가는 히로토.

‘돌 하나하나는 영웅이 아니야, 하지만 모든 돌이 힘을 합치면 영웅적인 일을 할 수 있어.‘

어딘가 비장미가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나지막하게 들리는 아빠의 목소리!

˝산책하기 좋은 날이구나. 그렇지?˝





"히로토, 모든 것은 지나가는 법이란다. 지금 네 마음을 차지한그 기분, 그건 ‘모노노아와레‘라는 거야. "삶의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는 감정"이지. 태양, 민들레, 매미, 해머, 그리고 우리 모두 다. 인간은 누구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라는 물리학자가 정리한 방정식에 지배 당한단다. 그래서 우리 모두 결국에는 사라질 운명을 타고난 짧은 패턴일 뿐이야. 그 수명이 1초든, 아니면 100억 년이든."
- P388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끗한 거리를, 천천히 거니는 사람들을, 풀밭을, 저녁놀을. 그러자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아빠와 나는 계속 걸었다. 우리 둘의 그림자가 살짝 겹쳐졌다.
바로 머리 위의 하늘에 해머가 걸려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무섭지 않았다.
- P388

막 너머의 별들은 다시 봉인된다. 돛의 표면은 완벽한 거울이다.
"항로를 수정하라. 수선 작업 완료" 나는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작업 완료 확인" 해밀턴 박사가 말한다. 슬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남자의 목소리로.
"일단 너부터 돌아와야지." 민디 "지금 항로를 수정하면 넌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잖아."
"괜찮아, 베이비." 나는 마이크에 대고 속삭인다. "난 안 돌아가. 연료가 부족하거든."
"우리가 구하러 갈게!"
"이 버팀대 사이를 나만큼 빨리 이동할 순 없어." 나는 민디에게 부드럽게 말한다. "이 패턴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도착할 때쯤이면 난 이미 산소가 다 떨어졌을 거야." - P400

나는 민디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 슬픈 얘기는 그만하자. 사랑해."
그런 다음 무전을 끄고 우주로 나아간다. 사람들의 마음이 약해져 쓸데없이 구조대를 파견하지 않도록. 그렇게 나는 추락한다. 우산 같은 태양 돛 아래로 멀리, 멀리.
내가 지켜보는 동안 태양 돛은 방향을 틀고, 그 너머의 별들은 위용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이제 뒤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태양은 뜨지도 지지도 않는 여러 별 가운데 하나일 뿐. 나는 그 별들 사이에 둥둥 떠 있다. 혼자서, 동시에 그들과 함께.
새끼 고양이의 혀가 내 마음은ㆍ 할짝거린다. - P401

"바둑에도 영웅이 있네요."보비의 목소리.
민디는 내가 영웅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던 사람일 뿐이다. 해밀턴 박사는 호프풀호를 설계했으니 그 역시 영웅이다. 민디는 내가 잠들지 않도록 해 주었으니 역시 영웅이다. 내가 살아남도록 기꺼이 나를 보내 준 내 어머니도 영웅이다. 내가 옳은 일을 할 방법을 가르쳐 준 내 아버지도영웅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것은 타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그물속에서 차지하는 자리이다.
- P401

"산책하기 좋은 날이구나. 그렇지?" 아빠가 말한다.
이윽고 우리는 함께 거리를 걷는다. 지나가면서 본 풀잎 한장, 이슬 한 방울, 저무는 해의 힘없는 햇살 한 줄기까지, 기억할 수 있도록, 한없이 고운 그 모두를.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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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8번째 단편 <레귤러>
《종이 동물원》에는 총 1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레귤러>는 8번이다. 환상소설과 SF를 넘나든다. 장르소설을 읽는 듯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멋지다.

고급콜걸을 노리는 범인을 쫓는 루스의 활약도 멋지다. 인질이 된 딸을 죽게 만들었단 죄책감에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일을 하고 있는 루스. 그러나 예전의 나약한 엄마이자 여자는 이제 아니다. 새로 태어나고자 한다.
레귤레이터라는 장치는 루스의 척추 맨 위에 삽입되어 있는데 언제라도 냉철한 판단을 내릴수 있도록 하는, 즉, 사용자의 명령에 따라 기본 감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원하는 신체 부위 어디라도 이식하거나 합성하여 상상할 수 없는 강한 몸으로 대체할 수 있다. 생물학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걸까?




슬픔은 묵직한 역기처럼루스를 찍어누른다. 샤워부스 바닥에 주저앉아서, 루스는 몸을 잔뜩 옹송그린다. 이내 몸이 들썩거리지만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 덕분에 눈물이 흐르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루스는 레귤레이터를 켜고 싶은 충동에 맞서 싸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몸에게 쉴 시간을 줘야 한다. - P281

레귤레이터, 즉 루스의 척추 맨위에 삽입된 칩과 전자회로의 집적체는, 대뇌의 가장자리 계통 및 주요 대뇌동맥과 연결되어 있다.
기계 공학과 전자공학의 용어에서 빌려온 이름에 걸맞게 레귤레이터는 대뇌 및 혈관 속에서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같은 화학 물질의 농도를 유지한다. 그러한 물질이 너무 많으면 걸러서 배출하고, 부족하면 분비시킨다.
- P281

그리고 레귤레이터는 사용자의 명령을 따른다.
이 장치를 몸에 심은 사람은 기본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공포, 경멸, 쾌락, 흥분, 애정 같은 감정을 법 집행기관의 실무자는 반드시 심어야 한다. 이는 생사가 걸린 결정에서 감정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자, 선입견과 불합리를 제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발포를 허가한다." 통신용 이어폰 속의 목소리가 말한다. 루스의 남편이자 강력계 책임자인 스콧의 목소리이다. 스콧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하다. 그의 레귤레이터는 켜져 있다. - P282

캐리는 루스의 총을 보고 악을 쓴다.
"난 죽기 싫어요! 안 돼요, 제발!"
"일단 여길 벗어나면 이 여자는 풀어줄 거야." 남자가 말한다. 캐리의 머리 뒤에 자기 머리를 감춘 채로.
루스의 양손은 권총을 쥔 채로 덜덜 떨린다. 배 속이 파도치듯 올렁거리고 귓속에서는 맥박 소리가 쿵쿵 울리는 와중에도, 루스는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경찰은 이미 출동했으니 아마 5분 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남자는 달아날 시간을 더 벌려고 캐리를 곧바로 놔주지 않을까?
남자가 두 걸음 더 물러선다. 캐리는 이제 발버둥치거나 뻗대는 대신 미끄러운 바닥을 스타킹 신은 발로 조심조심 디딜 뿐이다. 남자가 시키는 대로 따르려고. 그러면서도 터져 나오는 울음은 참지못한다. - P304

루스는 가능성을 냉정하게 검토하고 싶지만, 그리하여 결정을 내리고 싶지만, 후회와 슬픔과 분노가, 참을 만한 수준으로 레귤레이터가 감추고 억눌렀던 그 감정들이, 이제 더욱 날카롭게 솟구친다.
잊기 위해 쏟았던 노력만큼이나 생생하게 온 우주가 총구 위쪽 가늠자의 조그마한 점으로 쪼그라들어 흔들린다. 젊은 여성이, 살인범이, 시간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조금씩 사라져 간다.
루스에게는 부탁할 곳도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다. 오로지 자신뿐, 성난, 겁에 질린, 부들부들 떠는 자신뿐이다. 루스는 발가벗겨진 채 혼자이다. 루스 자신은 항상 알고 있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남자는 문에 거의 도착했다. 캐리의 절규는 이제 알아듣기 힘든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
- P305

루스가 쏜 첫 번째 총알은 캐리의 허벅지를 파고든다. 총알은 살갗과 근육과 지방을 관통하여 뒤에 있는 남자의 무릎을 박살 낸다.
남자는 비명과 함께 수술칼을 놓친다. 캐리는 쓰러지고, 총에 맞은 다리에서 피가 솟구친다.
루스가 쏜 두 번째 총알은 남자의 가슴에 명중한다. 남자는 바닥에 고꾸라진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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