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의 글 《책 대 담배》에서 읽었던 문장들을 여기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에서 만났다. 심지어 작가도 ˝내 오랜 신조가 되어 준 문장˝이라며 글을 이어 나간다.
작가들에게 있어 ˝예술적 글쓰기˝란 그리도 중요한 논제인가보다.

명징성, 정직성, 정확성, 진실성 같은 것들이 오웰에게는 심미적 가치들이요 즐거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흔히 시사하는 시각적 미려함과 반드시 비슷할 필요가 없다. 1946년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는 그런 문제 전반을 다룬 글이다. 글을 쓰는 몇 가지동기 중 하나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다.  - P306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그에 상응하는 단어들과 그 적절한 배열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미치는영향이나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과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발견하는 즐거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놓쳐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 

그도 젊었을 때는 "결말이 불행하고, 자세한 묘사와 매혹적인 비유로 가득한, 그리고 어느 정도 소리를 위해 택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화려한 구절이 가득한, 거창한 자연주의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화려함에대한 애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면, 따분한 책들을 쓰고 화려한 문구나 의미 없는 문장,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빠져 있었던 것은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있던 때였다." - P307

윤리적 목적이 심미적 수단을 첨예하게 한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한다. 그를 무의미에서 구해낸 것은 정치였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나는 장식적이거나 그저 묘사적인 책들을 썼을지도, 그리고 내 정치적 방향성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종의 시사 논설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사 논설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심미적 요구나 즐거움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하게하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내 우선적인 관심사는 사람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 P308

뒤이어 내 오랜 신조가 되어준 문장들이 나온다. 

"하지만나는 책을 쓰는 일도, 그저 좀 긴 잡지 기사를 쓰는 일도, 그것이 또한 심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의 눈에는 무관하게 보일 대목들이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살아서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줄곧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땅의 표면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들과 쓸데없는 정보 조각들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무관하게 보일 만한 것이란 일련의 즐거움들과 개인적인 열심들이다. 마치 ‘빵과 장미‘에서 장미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이란 많은 사물에 대한 폭넓고 길들여지지 않은 흥미, 특히 뒤이은 문장에 나오는 땅의 표면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일 터이다.) - P308

명정성, 정직성, 정확성, 진실성 등이 아름다운 것은 그런것들 가운데서 비로소 대상이 진실하게 재현될 수 있고, 앎이 민주화되고, 사람들이 힘을 얻고, 문들이 열리고, 정보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계약들이 준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그 글에서 흘러나오는 것에서도 아름답다. - P309

오웰의 작품에는 더 인습적인 종류의 아름다음 바다의 숲에서 영국의 초원에 이르는 자연 경관, 그 모든 꽃들과 두꺼비의 황금빛 눈알에 이르기까지도 있다. 
하지만 윤리와 심미성이 별개가 아닌 이 아름다움, 진실과 전일성의 언어적 아름다움이야말로그가 자신의 글쓰기에서 도달하고자 노력했던 핵심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런 아름다움은 언어와 그것이 묘사하는 것 사이,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 한 공동체나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종의 온전함이요 유대감으로 작용한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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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3-04-1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저는 이 책의 제목을 오월의 장미라고 알고 있었을까요. 오늘에야 은하수님 글 보고 알았어요. 오월이 아니고 오웰이라는 것을요. 이 책 다른 알라디너분들도 페이퍼에 올리신 책인데.. 그때도 오월로 보였어요 ㅠㅠ

은하수 2023-04-11 20:50   좋아요 0 | URL
ㅎㅎ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한번 각인되어 버리면 계속 그리 보이잖아요?~~
다른 플친님들도 이 책 좋았단 분이 많으시더라구요
저도 오늘 마무리했는데...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오월의 장미도 근데 잘 어울려요.
 

1930년대 초에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대기근을 부인하는것도 거짓이었다. 공개재판에서 사람들을 고문하여 인정하도록 강요했던 범죄들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죽었으며,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거짓말을 했고 죽음에 이르렀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아예 감을 잃어버렸다.  - P198

러시아혁명의 주동자들이 동료혁명가들에 의해 처형될 때마다 역사는 매번 다시 쓰였다. 처형자들이 처형당했고, 심문자들이 굴라크로 보내져 자신이 심문했던 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책들이 금지되었고, 사실들이 금지되었으며, 시인들이 금지되었고, 사상들이 금지되었다. 그것은 거짓말의 제국이었다. 거짓말이라는 언어에 대한 공격은 다른 모든 공격에 필요불가결한 기초이다. - P198

오웰은 1944년에 이렇게 썼다. 

"전체주의가 진짜 무서운것은 그것이 ‘가혹 행위‘를 자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진실이라는 개념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통제하려 한다." 
이를 밑바탕으로 한 것이 빅브라더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 - P198

진실과 언어에 대한 공격은 가혹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만일 실제로 일어난 일을 지워버리고 증인들을 침묵시키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지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납득시킬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침묵과 복종과 거짓을 강압한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결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거나 위험하게 만들어 아무도 감히 그러려고 하지 않게 된다면, 얼마든지 범죄를 영속시킬 수 있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진실이라는 옛말이 있다. 진실에 대한 상시적인 전쟁은 국내적으로나 전 지구적으로나 모든 권위주의의 기반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권위주의는 우생학과 마찬가지로, 권력은 불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이다. - P199

윌링턴에 그 정원을 만들고 정원에 장미를 심으면서, 오웰은 특정한 토양에, 그리고 싫든 좋든 자신의 것이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상과 전통과 유대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셈이다. 
또는 어쩌면 그는 하류 지향적 선택들을 통해, 자기 이마에 흘린 땀으로 자기 먹을 것의 상당 부분을 생산하고 자기 염소들을 마을 공유지에 풀어놓아 풀 뜯게 함으로써, 그런 전통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니, 그 도피가 취한 형태조차도 농촌의 목가와 전원적 이상에 관해 깊이 뿌리박힌 관념들로 가득했다. 그 역시 그런 영향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 P249

장미를 심은 그해에 그는 이렇게 썼다. 
"영국이 비교적 안락하게 살기 위해, 수억 명의 인도인이 기아선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도, 택시를 타거나 한 접시 딸기에 크림을 얹어 먹을 때마다 그런 사태에 동조하는 것이 된다."
설령 크림 얹은 딸기가 설탕 넣은 차와는달리 실제로 손수 생산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10년 후 그는 다시 그 주제로 돌아가 동료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인도를 해방시키든가 여분의 설탕을 얻든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어느 편을 택하겠는가?"  - P249

나는 자연계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움의 상당 부분은 그림으로 포착될 수 있는 정태적이고 시각적인 미려함이 아니라, 패턴과 반복으로서의 시간 그 자체, 날들과 계절들과 해들의 리드미컬한 지나감, 달의 주기와 조수, 태어남과 죽음에 있다고 종종 생각한다. 조화와 구성과 일관성처럼, 패턴 그 자체도 일종의 아름다움이며,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가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그 리듬이 깨진다는 데 있을 것이다. - P256

에브리맨판의 두툼한 오웰 에세이 선집 서문에서 존 캐리John Carey는 이렇게 선언한다. 
"그는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법이 거의 없고, 어쩌다 그럴 때도 허름하고 으레 무시당하는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 두꺼비의 눈알이라든가, 울워스에서 파는 6펜스짜리 장미 묘목 같은 것들에서 말이다." 나는 그가 자주 아름다움을 칭송했다고 말하고 싶다.  - P256

그처럼 으레 무시당하는 것들은 엘리트계급의 확립된 아름다움이 아닌 다른 아름다움들, 일상적이고 평민적이고 무시당하는 것들의 어여쁨을 발견케 함으로써 아름다움의 정의를 확대하는 수단이 된다. 
그 탐색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인습에 매이지 않게 한다. 1984의 암울함조차 그의 외로운 반항자가 감탄하고 열망하고 즐기는 것들에서 그저 평범한 풍경과 붉은 산호 조각을 넣은 유리 문진 같은 것들에서 건져내는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다. - P257

"보거나 들은 것을 바꾸고자 하는 아무 바람 없이 그저 보거나 듣는 것." 아마도 오웰의 가사 일기는 그런 기록일 것이다. 노동과 재배와 사소한 사건들의 짤막한 기술에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와 다르게 어떠했으면 하는 바람이 별로 들어 있지 않다. 

서사ㅡ허구, 신화, 동화, 저널리즘ㅡ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어갈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기 쉽다. 가령 정치가가 부패하고, 강이 오염되고, 노동자가 착취당하며, 사랑하는 이는 사라졌다는 식으로 말이다. 
가장 안정적인 아동용 책들도 나름대로의 상실 위기를 담고 있으며, 없는 연결을 찾고자 한다. "바꾸고자 하는 아무 바람 없이" 존재하는 것이란 정태적이다. 그것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은혜로부터 실추되기 전, 또는 재결합, 시정, 그 밖에다른 형태의 복구가 이루어진 다음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는 만일 사태가 제대로 굴러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적어도 암암리에는, 가치이자 목표로서 들어 있다. 서사는 종종 옳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옹호하고 복구하려는 욕망에 내몰린다.
- P259

긴장은 비서사적 예술에도 존재한다.
예술가 조이 레너드Zoe Leonard는 에이즈 위기 동안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며, 동료 예술가이자 활동가 데이비드 워나로비치David Wojnarowicz에게 그런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자 워나로비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이, 이것들은 아름다워요. 우리는 이것들을 위해 싸우는 거예요. 우리가 화를 내고 불평하는 것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고자하는 목적지는 아름다움이에요. 만일 당신이 그걸 놓아버린다면, 우린 갈 데가 없어져요."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바꾸기를 원치 않는 무엇인 동시에 가고자 하는 곳, 나침반 또는 북극성일 수
있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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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만에 다시 읽는데 오히려 더 재밌게 느껴진다. 그 사이에 오웰에 대한 공부가 좀 되어서 그럴지도....!
요즘 나의 독서는 온통 오웰과 장미와 전체주의, 그리고 페미니즘에서 - 뭔가가 계속 나를 돌리고 있는거 같다-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이게 좋은건지 싫은건지 분간이 잘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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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요?"
방을 둘러본 게드는 마법사의 눈으로 바닥에 깔린 돌들 중하나를 잡아냈다. 다른 것과 똑같이 거칠고 습기로 축축한, 무겁고 모양이 일정치 않은 바닥돌이었다. 그러나 게드에겐 그것의 힘이 느껴졌다. 그것이 큰 소리로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게드는 숨이 탁 막혔고 잠시 동안 욕지기가 일었다. 그 돌은 이 탑의주춧돌이었다. 이곳이야말로 탑의 중심부이며, 몹시, 몸서리칠정도로 추웠다. 그 무엇도 이 작은 방을 따뜻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돌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해묵은 무시무시한 넋이그 속에 갇혀 있었다. 게드는 봤다 못 봤다의 대답도 없이 그저서 있기만 했기에 이윽고 세레트가 호기심 어린 눈길을 흘끗 던지곤 돌을 가리켰다. - P187

"저게 테레논이에요. 그토록 귀중한 보석을 이렇게 깊고 깊은보물 창고에 처박아 둔다는 게 이상한가요?"
게드는 여전히 대답 없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세레트는 게드를 시험하려 한 듯했다. 그러나그 돌을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한다는 건 그 돌이 어떠한 돌인지전혀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할 만큼 충분히알지 못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나에게 이것의 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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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 담배 쏜살 문고
조지 오웰 지음, 강문순 옮김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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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 담배> 가장 기억에 남는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하여


  이 책은 조지 오웰이 여러 지면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산문집이다.  대부분의 글들이 책, 작가와 관련이 있거나 자신의 경험이 깊게 녹아들어 있는 글이라서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작가 조지 오웰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책이나 작가에 관한 한 조지 오웰은 상당히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지만 약간의 위트를 가지고 글을 풀어내고 있다.  


  우선, 표제작인 '책 대 담배'에서 작가가  한 해 동안 책에는 약 25파운드, 담배에는 40파운드 정도의 돈을 썼다고 했으니 책보다는 담배에 훨씬 많은 금액을 썼다는 계산을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애연가이니만큼 책과 담배를 비유하여 설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매년 출간되는 책을 추정치로 하여 한 사람이 1년 동안 평균 3권 정도의 책을 산다고 계산해보면 고작 1 년에 책에 들이는 돈이 1파운드 정도라는 결과도 보여준다. 대영제국인데... 흠, 이 정도면 심히 걱정스러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책을 읽지 않는 현상의 원인을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에게 두지 않는다.


  과거나 지금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책 소비가 계속해서 저조하다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현상이 적어도 독서가 개 경주나 영화를 보러 가는 것, 그리고 펍에 가서 한잔하는 것보다 재미가 없어서이지 돈이 훨씬 많이 들어서 ㅡ구입해서 읽든 빌려서 읽든 ㅡ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13)



  독자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결국 책을 재미없게 만든 작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매우 맞는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책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개탄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구나...!  계속해서 '서평가의 고백'에서는 한 해 백 편 이상의 서평을 쓰는 사람들의 고충과 현실을 묘사하였는데 또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써야 할 서평이 너무 많아서, 혹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여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50 페이지 정도를 읽어야 서평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서평을 쓰기도 하고, 책 같지도 않은 쓰레기를 들여다보며 "맙소사, 이런 걸 책이랍시고." 하는 절규를 내뱉는 이러한 작가, 또는 작가이자 서평가의 찬사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기 전까지 대부분의 책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평론이 객관적으로 정직하게 써진다면 열에 아홉은  "이 책은 하잘것 없다"일 것이고 평론가 당사자의 반응 역시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가 없고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의 평론을 쓰지 않을 것이다."일 것이다.(18)



  서평가와 작가를 두루 거쳐본 오웰이 하는 말이니 거의 백퍼센트의 확률로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럼 책 살 때 무엇을 참고해서 책을 사야하나... 요즘은 서평이 너무 일반화되어 있어서 책 사기 전에 당연한 순서로 미리 읽어보게 된다. 서점에 가서 옛날처럼 한 권, 한 권 다 들쳐보고 내 맘에 들어오는 내용일 때만 산다면 지금처럼 미친 듯이 책을 들이는 일은 줄어들까. 생각해보면 그땐 오로지 나의 흥미와 감을 믿고 샀었다. 물론 실패의 경험도 많았지만 지금처럼 순식간에 책꽂이의 빈자리가 줄어드는 마법을 부리지는 않았었다.   




  오웰 자신의 작품을 어느 쪽에 두었는지 예로 들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은 가는 바다. 자신의 책은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 아닌 것이다. 그럼 어느 쪽에 속할까? 꽤 훌륭한 책일 것이다!  아무튼 세상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책들이 많이 있으며,  "문명이 지속돠는 한 우리에게는 가끔씩 여가가 필요할 것이므로 가벼운 문학이 놓일 지정석은 언제나 있을 테고"(45) 그래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 필요한 것이라는 작가의 피력에 일견 동의를 하고 말았다.  파렴치하고 무례한 많은 손님들, 과다한 근무시간, 끔찍할 정도로 추운 겨울의 책방을 생각하면 넌덜머리가 나서 책방은 결코 운영하지 않을 것이고 또 오래된 책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 더 이상 끌리지 않으며 요즘에도 이따금 책을 사긴 하지만 빌려볼 수 없을 때 뿐이고 더 이상 쓰레기 같은 책을 결코 사지 않는다(책방의 추억)니 그 또한 -너무 단정적으로 말해서 살짝 빈정이 상하긴 하지만 - 찬동할 수 밖에.  이렇게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작가의 태도는 내가 생각해도 꽤나 설득력이 있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 작가의 적은 작가! 뭐 이런 논리가 성립되는 것인지... 책에 대해서도 작가, 서평가, 책방의 추억 등등 모두 비판적이기만 한데 작가는 그럼 왜 글을 쓰는 것인가?




  그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나는 왜 쓰는가'에서 간단하게 나마 설명해 놓았다. 오웰이 자신이 대 여섯살 무렵 어른이 되면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습작기까지의 기간, 그리고 첫 책이었던 <버마 시절>을 출간하기까지의 배경을 주욱 설명한다. 



  내가 굳이 이런 배경 설명을 하는 이유는 작가가 어릴 때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모르고는 그 작가의 글쓰기 동기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쓰는 글의 주제는 작가가 살아가는 시대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ㅡ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처럼 혼란스럽고 혁명과 같은 시대에는 ㅡ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작가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한 가지 특정한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된다.(58)



  작가가 글을 쓰는 네 가지 중요한 동기를 제시하는데,

  1. 온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거나 사후에 기억되고 싶거나 어렸을 때 자신을 막 대했던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다는 등등의 욕구.  이것이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것은 사기와 다름 없다는 것.

  2. 미학적 열정. 외분 세계의 아름다움, 또는 단어와 단어의 올바른 배열이 주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려는 열정 등등.

  3. 역사적 충동.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찾아내 그것을 후대를 위해 보존하고 싶은 욕구 등.

  4. 정치적 목적. 정치적 이라는 단어를 가능한 한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쓸 때. 정치적인 편향이 없는 책은 이 세상에 단 한권도 없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 중 앞의 세 충동이 네 번째 충동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웰이 말하길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화려하고 기교를 한껏 부린 책을 썼을지 모르고, 또한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버마에서의 제국 경찰 노릇을 5년간 하면서 일종의 팸플릿 작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기에 권위에 대한 혐오감이 커졌고 생전 처음 노동 계급의 존재를 완전히 아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이후 히틀러의 등장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결정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싸우는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6년과 1937년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말도 안되며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미학적, 지적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는, 예술적 글쓰기로 만드는 것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한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쓸 때 나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고 말 테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폭로하고 싶은 거짓과 관심을 둬야 할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책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최우선 관심사는 독자들이 내 생각을 듣게 하느냐다. 그러나 미적 경험이 없다면 책을 쓰는 일은 물론이고 장문의 잡지 기사를 쓰는 작업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63)



  선전물 한 장을 쓰더라도 미적 경험을 중시하였고 노골적인 선전글을 쓸 때조차 전업 정치인이 본다면 관련성이 부족한 글이 상당히 많지만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문제이며 이는 오웰이라는 작가의 진실성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카탈루냐 찬가>에서 작가의 이러한 진실성의 문제가 잘 드러난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누명을 쓰고 명예를 훼손 당한 일을 참지 못한 오웰은 작품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될 여러 챕터(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잘 드러내는 글인데 함께 내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변호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를  포함시킴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한 것이다. 실제 책을 읽어보면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음을 곧 알아볼 수 있으며, 스스로 한갓 보도물로 만들어버린 그 행동을 수긍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다. 나는 우연히 영국에서 극소수만 알 수 있는 내용, 즉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우연히 접했다. 내가 그 사실에 분개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64)





  이 작은 책은 내가 처음 읽는 작가 조지 오웰의 글이었다.  우화적인 소설도 싫어하고 전체주의라는 말도 정말 싫어해서 아무리해도 <1984>나 <동물농장>은 책장이 펼쳐지지 않았었지만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를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책을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웰의 장미>는 나에게 여러모로 참 고마운 책이 됐다.  페미니즘과도 맞닿아 있는 작가의 책을 보면서 오웰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다른 책으로 계속해서 확장되는 독서 경험을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 잘 만들어진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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