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일천向의 십삼 킬로미터 유로는 동해에 닿기까지 다섯번을 굽이쳤고, 그 하구에 자리한 어촌마을 이름은 향일포였다.
향일천은 물이 차가워서 언저리가 서늘했고, 흐름이 빨라서 초겨울에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떼들은 아가미를 왈칵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산맥의 가파른 사면을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를 스치고 굽이치는 자리마다 우뚝한 직벽이 들어섰다. - P12

터미널에서 향일포까지는 해안도로로 팔 킬로미터였다. 마을버스가 다녔지만 이춘개는 그 팔 킬로미터를 걸었다. 버스에서 혹시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마주치게 될 일이난감했다. 이춘개의 기억 속에서 향일포는 오래된 그림처럼 얼룩으로 바래있었고 그 향일포를 다시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 P15

이춘개는 아침 아홉시에 북부 제3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간첩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십사 년을 선고받고 십삼 년을 복역한뒤 삼일절 특사로 잔여 형기 십 개월이 사면되었다. 만기 출소나별 차이 없었다. 두 주일 전 교도소 총무과장한테 불려가서 사면출소 통고를 받았을 때 향일포의 어촌마을과 바다가 천장 벽지의 쥐 오줌 자국처럼 흐리게 떠올랐다. 거기서의 밥과 거기서의인연이 결국은 십삼 년 동안의 징역살이로 이어진 것이었다.  - P16

십삼 년 만에 보는 새똥섬은 이춘개의 눈 속으로 뛰어들어올듯이 확실했다. 여기가 거기로구나, 여기가 바로 새똥섬이 있는향일포로구나. 새똥섬을 바라보면서, 이춘개는 마을로 들어가기를 머뭇거렸다. 향일포와의 연고는 십삼 년의 복역 중에 모두증발해버린 것이어서 새똥섬의 확실성은 오히려 환각 같았다. - P19

방향은 미리 정해놓지 않았으나 저절로 정해졌다. 피란민 사태는 북쪽에서 밀려내려왔다. 이춘개는 남쪽으로 휩쓸렸다. 어래포구에서는 열자짜리 전마선에까지 피란민들이 매달렸다
전마선엔 엔진도 돛도 없고 노 한 쌍만 달려 있었다. 이춘개는어래호에 가족과 피란민들을 태우고 포구를 떠났다. 피란민들은 이춘개가 골라서 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배가 시동을 걸고후진으로 출발할 때, 뱃전을 잡으려던 피란민 몇 명이 물에 떨어졌다. 이춘개는 물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널빤지를 던져주고 배를 돌렸다. - P27

이춘개가 조업중에 군사분계선 북쪽 어래진 포구로 흘러들어가 체포되기 전날은 오후에 안개가 끼었고 저녁에 안개가 걷히면서 보름달이 떴다. 겨울 바다에 안개가 끼는 것은 찬물과 더운물이 원양에서 부딪치기 때문이며, 이때 깊이 내려갔던 명태가수면 쪽으로 올라온다고 늙은 어부들은 말했다. 이춘개는 어렸을 때부터 명태와 더불어 살았다. 명태를 잡는 일은 논농사나 밭농사와 같았다. 포구마을과 사람들의 생애는 명태 냄새에 절여졌다. 아이들은 명태를 먹으면서 자랐고 명태를 팔아서 학교에다녔다. 마을의 개들과 갈매기들은 명태 대가리와 내장을 먹어서 발육이 좋았다. 겨우내 명태는 조류처럼 몰려왔다. 어부들은명태잡이를 나갈 때 ‘명태 건지러 간다‘고 말했다. - P30

어래호에서는 어구 취사도구 항해장비 이외의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래호 나포는 정보 가치가 낮은 사건으로 분류되었다. 이춘개 일행은 억류 육 개월 만에 송환되었다. 선원들은공해상에서 남북 경비정 간에 인계되었다. 배는 증거물로 압수되었다. 송환되던 날이춘개 일행은 향일포선착장에서 합동조사단에 인계되어 도청 소재지 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뿐 아니라 여러 정보기관의 수사관들이 번갈아서 심문했다. 수사관들은 월경경위와 해성 조건, 선박상태, 그리고 북쪽에서 무슨 내용을 조사받았고 거기에 뭐라고 진술했는지를 반복해서 물었다. - P36

공작원들은 어래진에서 출발했다. 공작원들은 이춘개가 어래진에서 심문받을 때 그린 향일포 해안의 약도를 들여다보면서새똥섬과 바위들의 위치를 숙지했다고 심문 과정에서 진술했다. 공작원들의 소지품에서 비닐 코팅한 약도의 사본이 나왔다.
수사관들이 약도를 들고 향일포에 와서 현장과 대조했다. 모든시설물들이 약도와 같았고, 새똥섬과 그 주변 바위들의 위치도틀리지 않았다. 이춘개는 송환 후 남쪽에서 조사받을 때, 북쪽에서 약도를 그린 사실을 진술하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약도를 그렸나? 라고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 똑같은 어촌마을의 생김새를 그려 냈다고 여겼다. 수사기관은 이춘개가 지령을 받고 내려와서 공작원의 상륙을 인도한 것이라고 혐의를 설정했다. 이춘개는 체포된 지 한참 후에야 자신에게 다가오는 혐의를 감지할 수 있었다. 혐의는 굳어져갔고, 마련된 결론을 향해 심문은 진행되었다. - P40

흰겨울 산맥이 뼈를 드러내며 이춘개의 화폭 위쪽으로 흘러갔다. 아침 바다는 빛과 어둠이 섞여서 출렁거렸다. 빛 한 가닥이 향일천 물줄기를 거슬러서 상류로 올라가며 고래 그림이 새겨진 바위쪽을 향했다. 화폭에 보이지 않지만, 바위 속의 고래들이 깨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이춘개의 화폭 가장자리에서, 작살을 쥔사내가 고래 등 위에 올라서서 일출의 바다로 나아갔다. 작살은사내의 키보다 크게, 길게 그려져 있었다. 고래떼의 항적이 빛의 궤적을 그리며 길게 이어졌고, 마을이 시간 위로 말갛게 떠오르고 있었다. - P45

이춘개가 죽은 해 겨울에 명태가 많이 잡혔다. 명태는 물결처럼 밀려내려왔다. 먼바다에서 고래들이 솟구치며 연안으로 다가왔다.

-<명태와 고래> 중에서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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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구름이 반달을 가리자 잠시 사방이 캄캄해졌다.
달이 다시 나타난 순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앞의 정원에,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귀부인이 서 있었다.
나풀거리는 흰색 비단 겉옷은 소매가 펑퍼짐했고, 폭이 넓은 허리띠는 은색이었다. 얼굴은 눈처럼 하얬고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늘어진 머리카락은 숯처럼 새카맸다. 그 자태가 내게는 유랑극단의 무대 주위에 걸려 있던 그림 속 당(唐)나라 시대 절세미인들과 비슷해 보였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달빛을 받은두 눈이 일렁거리는 연못처럼 반짝였다.
그 표정이 어찌나 슬퍼 보이던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그 여자를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79

염은 어머니를 위해 바닥에 남겨 둔 닭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내 생각엔 이 땅에서 요술의 힘이 빠져나가는 중인 것 같아."
나 역시 무언가 잘못됐다고 의심하던 터였지만, 그 의심을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았다. 소리 내어 말했다가는 사실이 되어 버릴 것같아서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염은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의 소리를 열심히 탐지했다. 그러다가 일어서서는 내 손을 잡고 본당의불상 뒤로 나를 끌고 갔다. - P88

염의 목소리는 잔잔한 가을 연못처럼 담담하고 냉정했지만, 말자체는 정곡을 찔렀다. 우리 집을 찾는 손님이 점점 뜸해지는 와중에 짐짓 기운 있는 척하려고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문을 외우는 연습이나 춤추듯이 검 휘두르는 연습을 하며 보낸 세월은 다 헛수고였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산속에 혼자 살면서 요술에 필요한 식량조차 제대로 사냥하지 못하는 염의 처지를 생각하며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염의 목소리는 한순간 떨리는 듯하다가, 다시 도도해졌다. 연못의 수면에 물수제비를 뜨는 조약돌처럼.
이내 돌아선 염의 표정은 앞서처럼 차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거." - P92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방 천장의 대들보에 목을 맨 아버지를 발견했다. 멍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내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평생 사냥한 요괴들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다 이미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을 낡은 요술의 힘으로 연명하는 존재였고, 그 요술 없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 -<즐거운 사냥을 하길> 중에서 - P95

고된 작업을 하는 사이에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제 센트럴 거리에 늘어선 술집에서는 기계 팔이 손님에게 음료를 제공했고, 신계(新界)의 공장에서는 기계 손이 신발과 옷을 바느질했다. 빅토리아피크의 저택에서는 내가 설계한 자동 빗자루와 자동 걸레가 조심스레 복도를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들었다(직접 볼 기회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장치들은 바닥을 청소하다가 벽에 부딪히면 부드럽게 튕겨난다고 했다. 하얀 증기를 빠끔빠끔 뿜는 기계 요정처럼. 이로써 외국인들은 마침내 중국인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필요 없이 이 열대의낙원에서 즐겁게 살 수 있었다. - P103

마침내 그날이 왔다.
창문을 통해 비친 달빛이 아파트 바닥에 희끄무레한 마름모꼴을그렸다. 염은 그 마름모 한복판에 서서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새 얼굴을 움직여 보았다.
매끈한 크롬 살갗 아래에는 수많은 초소형 압축 공기 구동 장치가 숨어 있었다. 저마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그 구동 장치들 덕분에 염은 원하는 표정을 자유자재로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 두 눈이 달빛 속에서 흥분을 머금고 반짝였다.
"준비됐어?" 내가 물었다.
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 P107

나는 염이 그린 도안을 발전시켜 크롬 살갗이 접히는 정교한 구조와 금속 뼈대의 복잡한 연결 부위를 설계했다. 경첩 하나하나를결합하고, 톱니바퀴 한 개 한 개를 조립하고, 모든 전선을 납땜질하고 이음매를 용접하고 구동 장치 하나하나에 윤활유를 발랐다. 그렇게 염의 몸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내 눈앞에서 염은 마치 은빛 종이접기 구조물처럼 접혔다가 펼쳐지기를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곳적의 전설에 나오는 존재처럼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크롬 여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중에서 - P108

그리고 지금, 만약 저 늙은 물소를 탈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때의기분을 다시 만끽하고 남은 하루를 후련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릴리는 얕은 진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늙은 물소는 여전히아무것도 모른 채 우물우물 되새김질만 했다. 진창 가장자리에 도착한 릴리는 물소의 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파자점술사> 중에서 - P144

"중국인은 점술의 일환으로 문자를 발명했어. 그래서 모든 한자는 그 속 깊숙한 곳에 마법이 깃들어 있지. 나는 한자를 토대로 사람의 고민을 읽어 내고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네.
 자,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 줌세. 낱말을 하나 떠올려 보게. 아무 낱말이나." - P148

테디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유리 조각을 꺼냈다. 커다란 거울을깨뜨려서 만든 조각이었고, 날카로운 가장자리에는 접착테이프가둘러져 있었다. 테이프에는 먹물로 적은 한자 몇 글자가 보였다.
"중국에서는 수천년전부터 거울로 재앙을 쫓아냈다네. 이 조그만 거울을 무시하면 안 돼. 이 안에는 굉장한 마법이 깃들어 있거든.
다음에 또 아이들이 자네를 괴롭히면 이 거울을 꺼내서 얼굴 앞에들이대게." - P153

화창한 가을날 오후였지만, 릴리는 한기를 느꼈다. 릴리의 상상 속에서 주위의 들판은
이 아열대의 섬을 꽁꽁 얼어붙게 한 백색 테러의 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freeze(얼어붙다)‘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릴리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 단어를 적어 보았다. 간 선생이 했을 법한 방법으로단어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알파벳들이 흔들리며 서로를 쿡쿡 찔러 댔다. ‘z‘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고, ‘e‘는태아처럼 옹송그린 죽은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내
‘z‘와 ‘e‘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free (자유롭다)‘만이 남았다.
괜찮아, 릴리 양, 테디와 나는 이제 자유롭다네. 릴리는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간 선생의 미소와 따뜻한목소리를 붙잡으려고. 자네는 정말로 영리한 아가씨야. 자네 또한파자점술사가 될 운명이라네. 미국에서. -<파자점술사> 중에서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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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십 년 만에 연락을 해왔다는 이유로 정은이 돈을 빌려주지 않았을 때 혜수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지갑을 연 것이었다. 정은은 그런 혜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건 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빌려줬다니 제정신이야? 너야말로 너무 야박한 거 아냐? 정은은 혜수와 오래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보다 서로자주 만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초중고 시절 이미평생의 우정을 모두 나누었기 때문이라고도 그 시절에 서로의 아주 깊은 데까지 보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자주 만나지 못해도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런 나약한 말들> - P136

"그 부장이라는 사람도 그래. 당연히 회사 비품인 줄 알았겠지.
그 돈이 충분하냐고? 너무 과하게 준 거 같은데. 사진들 좀 없어진게 대수야? 부장도 알고 있어? 그 사진에 나오는 사람이 네가 스토킹하던 사람이라는 거."
"뭐? 스토킹?"
"일방적이었잖아. 너 혼자 좋아한 거고."
"뭐? 나랑 선생님은 진짜 친했어. 너도 잘 알잖아."
"애들은 다 수군거렸어. 정은이 걘 아직도 선생님 쫓아다니냐고, 중딩도 아니고 왜그러냐고, 친구없어서 선생님이 챙겨주던시절은 그만 졸업해야 하지 않겠냐고. 난 차라리 잘됐다 싶어. 그사진들이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도 없지. 너 혼자 과도하게부여한 의미밖에 없지. 그건 진작에 버렸어야했어. 네 손으로 직접 삭제했어야 했다고. 끝을 냈어야 했어. 근데 이젠 그럴 수도 없으니 영영 청승 떨겠지."
<그런 나약한 말들> - P138

정은은 더는 화를 참지 못했다. 정은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짓던혜수가 "맞아, 난 널 잘 모르지" 하고 시인했을 때, 정은은 혜수가그렇지 않다고 자신에게 맞서 소리쳐주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았다. 난 너를 알아, 내가 왜 몰라? 나는 너를 아주 잘 알아, 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혜수는 자신을 잘 모른다고 말했고 정은은 마치 이세상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나약한 말들>
- P143

승호가 애써주었지만 이번에도 잘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신청일 기준으로 생일이 보름 정도 지나버려 더는 만 삼십오 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담당자를 붙들고 공고일 기준이 아니었느냐고 거의울다시피 물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하여튼 쉬운게 없었다. 그래도 식당은 계획대로 열기로 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 - P163

내가 취업에 실패할 때마다 아빠는 "남들 하는 것 좀 봐봐라. 사람이어떻게 저 좋은 것만 하고 살겠노?"라고 했다. 그런 게 삶인가? 모욕을 견디는 것......그렇다면 나는 이제야 겨우 살아가는 흉내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 <마음에 없는 소리>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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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너무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환상문학의 세계를 만난것 같아 설렌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은 최근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 우연히 알게 된 책인데,
이 책에 수록된 14편의 단편, 중편이 모두 고른 작품성을 가지고 있을지 이제 겨우 두 편의 단편- 두 편 모두 내 마음을 충분히 흔들어 놓았다- 을 읽은 채로는 알수 없겠지만, 충분히 기대해봄직한단 생각이 든다.
옮긴이의 말을 참고해보면,
우선 2011년 미국의 SF 판타지 문학계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작가라는것을 알 수 있다. SF 판타지, 환상문학상의 양대 산맥이라는 휴고상과 네뷸러상 뿐만 아니라 판타지문학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라는 세계환상문학상마저 석권하면서 파란을 일으킨 작품이 이 책의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이며, 지은이는 당시 서른여섯 살이었던 ‘오래된 신예‘ 켄 리우이다.
작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없이 읽었다고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양적으로 이보다 더 좋을수는 없는 빼어난 작품이란 것을 느낄수 있다.

‘종이 동물원‘에 등장하는 엄마의 편지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우리나라에서 한동안 성행했던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로 불리는 국제결혼 정책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시아인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미국 남성이었던 아버지가 홍콩의 결혼 소개소 책자에서 엄마를 보고 결혼을 하게 되었고 행복한 삶을 꿈꾸며 미국에 오지만 엄마는 영어를 할줄 몰랐고, 고립된 삶을 살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낳았지만 영어를 할줄 모르는 엄마와 오래도록 대화가 단절된 생활을 이어간다. 아들이 어릴 때 우는 것을 달래기 위해 엄마는 종이호랑이를 접어주었고, 염소와 사슴, 물소도 접어 주었다. 한때 아들은 엄마가 만들어준 동물들과의 놀이에 푹 빠져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느덧 신발상자에 밀봉되어 다락방 구석에 박혀사는 신세가 된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병이 들고 종이 호랑이 안에 온 마음을 담은 중국어 편지를 남기고 죽는다.

엄마가 남긴 편지를 남의 도움을 받아 읽게된 아들의 마음은 짐작하고도 남지 않을까...
엄마가 온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남기고 돌아가셨다는 소재 자체로 이미 눈물샘을 장착하게 만든다.
눈물 줄줄 흐르는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면 얼른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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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를 만든 민족은 많지만 ‘자기 ‘를만들었던 민족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시유(施釉) 후 섭씨1,200~1,300도 정도의 고온에서 본벌 구이를 하는 자기를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했다. - P272

청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만 발달한 특이한 자기이고 유럽에서는 18세기 중국의 영향으로 겨우 자기가 등장한다"는 설명에 이어 "도자기는 흙과 불의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도자기를 이해할 때는 기술과 미(美)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는데, ‘기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아, 어렵겠다"
는 생각이 엄습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마이센 같은 어여쁜 찻잔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어떤 왕과 귀족들이 아끼고 사용했느냐 같은 것이었는데, 수업은서양이 아닌 동양 도자에 관한 것이고 유물로서의 도자기에 대한 것이었으니 내 생각과는 왜 거리가 있었다. - P272

그 잔을 선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릇 사치는 돈 아까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식기는 최대한 좋은 걸 쓰려고한다. 그건 스스로를 대접하는 마음 같은 것. 최근에 읽은여행작가 김남희 에세이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에도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자 먹더라도 예쁜 그릇을 꺼내제대로 차려 먹는 것이 최소한의 디그니티(dignity)를 지켜준다는 그 이야기에, 아마도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백퍼센트 공감!
이건 혼자 살지 않아도 식구들이없는 시간 홀로 밥을 먹을 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딸아이든 아들이든 예쁜 그릇에 반찬, 국, 밥을 담아 먹게 했다. 취직하여 서울에서 혼자 있는 딸아이에게도 혼자 예쁘게 담아 먹으라고 어여쁜 백자세트 그릇을 사서 보내고 열심히 모아 두었던 앤티크 찻잔들도 여럿 보내주었다. 가끔 퇴근 후 저녁 상 차림 사진을 보내오는데 짬짬이 예쁘게 담아 먹는 모습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안심이 되곤한다.
이 문장들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니 우리딸도 공감하는 모양이다.
딸램이 읽고 나에게빌려준 책이기 때문에 안다! 한 권의 책을 딸과 돌려 읽으며 감정의 공유도 경험한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느낌이 들어 좋다. - P279

화려하고 섬세한 그릇과 마찬가지로 잘 깨지지 않는만만한 그릇 역시 참으로 귀한 존재. 사람 사귐도 그렇지않나, 나는 생각해 본다. 다루기 조심스럽고 까다로워서 쉽게 다가서기 힘든 사람들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항상 곁에있는 튼튼하고 듬직한 사람들의 중요함을 종종 잊어버리지만, 결국 오래 남아 곁을 지켜주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 P280

청춘이란 그렇게 서슬 푸른 것이다. 지금은 부드럽고푸근한 정요 백자 같은 사람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모난 성미에 정 맞아 보기도 하고, 싸늘한 성정 때문에 미움받기도 해보아서 이제는 그만 동글고 눅진하게 살고 싶은, 40대란 뭐, 그런 시기인 것이다. - P281

약을 먹어야만 잠들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생길때도 있고, 걱정 많고 항상 신경이 칼끝 같은 성격이 원망스러울 때도 물론 있다. 그럴 때는 또 다른 의사의 말을 떠올린다. "당신이 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건, 당신 인생에서 그 성격이 가진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기 때문이에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의 성취는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성격 덕이라는걸. - P291

알고 보니 나는 이미 라틴어 단어를 꽤 많이 접했었다. 학교의 문장(紋에는 ‘veritas lux mea(리타스 룩스 메아)‘ (진리는 나의 빛)라고 적혀 있었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외치는 ‘carpediem (카르페 디엠)‘(순간을 즐겨라)‘이라는말도 익숙했으며, 미술사 수업 시간엔 서양 옛 그림의 주요 주제인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vanitas(와니타스)‘(허무)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고전 라틴어에서 v는 영어와 w와 비슷하게 발음된다.) 그리고 『장미의 이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마지막 문장,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덧없는 이름뿐.) - P302

매시간 학생들이 제출한 퀴즈 답안과 과제를 꼼꼼하게 고쳐서 돌려주곤 했던 선생님은, ‘Angelus‘ (천사)의 격 변화를 설명하던 날 라틴어와 한국어 가사가 함께 적힌 악보를나눠주며 [파니스앙젤리쿠스]를 가르쳐주었다. 가사를 한줄 한 줄 번역해 주며 학생들에게 합창하게 했던 그는, 짖궂은 학생들의 요청에 큰망설임 없이 강단에 서서 직접 그노래를 불렀다.

Panis angelicus 천사의 양식
fit panis hominum; 인간의 양식 되고
Dat panis coelicus 천상의 양식
figuris terminum: 주님의 형상을 완성하네Ores mirabilis! 오! 묘한 신비여!
Manducat Dominum 주님을 먹는다네
pauper, servus et humilis.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 - P304

다소 떨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러나 진지하게 그는노래했다. 신(神)의 언어인 라틴어로 그가 주님의 양식을 노래할 때 나는 정신의 고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어떤 감각, 조물주의 커다란 손이 하늘로 들어올려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교수 자리가 날지 불확실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서양 고전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심한 시간강사와, 졸업 후에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쓸데도 없어 보이는 라틴어 가의를 듣겠다 마음 먹은 학생들...... 그 낡고 허름한 지상의 강의실에서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고, 그 언어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 삶의 잉여였지만 분명 ‘위안‘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하지만 유용한 것만이 반드시 의미 있지는 않으며 실용만이 답은 아니라는 그런, 위로. - P305

교양이란 학식과는 다르다. 교양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더 비정하거나 덜 비정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틈입할 여지를 준다. 그러한 자유라도 있기에, 우리는 지치지 않고 생(生)의 수레바퀴를 유연하게 굴릴 수 있는 것이다. - P308

Sapiens nihil facit invitus nihil iratus
현명한 이는 어떤 것도 마지못해 하거나 분노한 채로하지 않는다. - P308

아무리 낡고 지루하다 해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기본은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묵직하게 앉아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부의 기본은 언제나 아날로그다. 대학에서의 마지막수업이 그걸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 덕분에 시간만 충분히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되었다. - P324

책을 장악한다는 것은 날뛰는 야수의 목덜미를 낚아채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틀어쥐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나를, 책이라는 맹수를 길들일 수있도록 정교하게 훈련시켰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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