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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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11월'을 지나 '불확실한 그해 봄'을 지나는 팬데믹 기간 동안 확실한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뿐이었다. 미국에서 그렇게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도 없었을 거다. 코로나 초기, 혼란 속에 확진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또 그렇게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정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는 빠르게 봉쇄되었고 멀리 집을 떠난 사람들은 한동안 그곳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작중 화자인 노년의 작가는 2020년 봄, 뉴욕이 봉쇄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지인의 앵무새를 돌보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전임자였던 지인의 친구 부부의 아들이 불가피하고도 무책임하게 도시를 탈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버려진 앵무새는 지능이 높고 영리한데다 활달하기까지 해서 이틀 이상을 돌보는 사람이 없이 버려진 채로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말에 지인의 앵무새를 돌보기 시작한다. 앵무새의 이름은 '유레카'이다. 유레카와 작가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둘은 이러저러한 놀이를 하기도 하고 하는 사이에 약간의 유대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뉴욕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온 호흡기 내과 의사가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자신의 집을 내어주면서 유레카가 있는 지인의 집으로 들어와 동거를 시작한다. 



산책을 즐기는 작가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점점 긴 시간 동안 밖에서 머물게 되었고 유레카와 같은 야생 동물들과의 유대, 교감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이어져 나가는 생각의 방향을 읽어나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다큐멘터리로 보았던 내용들도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나가는데. 그 생각이란 크레이크 포스터라는 사람이 제작한 프랑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내용이다. 그가 우울증에 시달릴 때 그에게 삶의 활력을 다시 찾게 도와준 문어와 우정을 쌓아나갔던 시간들을 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 우정과 유대감은 분명 문어의 호기심과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문어가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다시 일어나 자신감을 되찾는 자신을 보게 해준다. 그러한 자신감을 함께 다이빙을 시작한 어린 아들에게 불어 넣어주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는 아들이 더 위대한 교훈을 체득하는 걸 지켜본다. 그것은 '온화함'이다. 온화함은 자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배우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크레이그 포스터는 말한다... ... 아마도 영상에 담긴 증거가 없었더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생의 문어와 인간의 다정한 상호작용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114~115쪽)



이러한 다정함과 온화함이야말로 팬데믹 시기에 처한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을 읽으면서 그래서 너무 좋았다. 다정함, 온화함.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이다.

팬데믹으로 도시가 봉쇄되었지만 작가의 산책과 유레카와의 놀이, 그리고 먹고 자는 일상은 계속되어야 하고 작가는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견해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글을 생각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어서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한다. 



작가가 잠든 어느 날, 앵무새를 버리고 도시를 탈출했던 대학생이 연락도 없이 불쑥 돌아온다. 노년의 작가와 에코 테러리스트이며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어린 대학생과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릴 때부터도 어려움을 겪었던 대학생 '베치'와는 결과적으로 함께 동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고 피해다니기에 좋을 정도로 넓은 집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어려움을 인정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세대를 뛰어넘고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도시에서 두 사람은 그 관계에서 일말의 안정을 찾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그해 봄의 불확실성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노 작가의 생각의 갈래들은 여기로 저리고 흘러가는데 독백인 듯한 어린 시절의 회상들이 에세이처럼 편하게 읽힌다. 한편으로는 노년의 작가로서의 생각들에 공감이 가기도 했다. 그리고 노년의 작가와 Z세대 대학생의 연결이 흥미롭게 다가와 따뜻함을 느꼈다. 노 작가 생각의 한 편...


    "그날 그렇게 바위에 앉아 있으려니 차가운 물속의 손이 시리기 시작했지만, 중대한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인 것 같아서 집중력을 잃고 싶지 않아 그냥 참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가는 건 이 지나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 한 방향으로 빠르게 흐르고 붙잡거나 멈출 수 없다. 그게 어른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피할 수 없는 힘이다. 삶도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지나간다. 나는 그걸 이해했다.하지만 아직 어린애라 두려움을 몰랐다. 그저 내 마음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에 대한 흥분 뿐이었다. 나는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249쪽)




노작가의 일상은 온통 작품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니까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재밌으면서도 코믹하고 유머러스해서 하나도 심각하지 않았다. 때론 뭐 이런 생각까지 다하지? 싶은 하등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이야기들도 들려주고 있어서 이 작가가 꽤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인가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평생 심각한 정신적 외상은 겪지 않고 살아내는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자세가 아닐런지... 그래야 힘든 시기를 잘 버텨낼테니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바닷가의 루시>도 같은 팬데믹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을 소재로 했는데 이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일단 그 저변에 심각함이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였고 루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윌리엄과 무사히 잘 견뎌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메인 주 바닷가로 탈출한 루시의 이야기가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나의 처지와 감정과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힘들고 감정 소모가 많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이 걱정되고 만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럴 수 없어 몹시 괴로웠다.  



그해 봄, 온통 불확실성 투성이인 시간에 난 마스크를 끼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사가 모기업이 위치한 곳으로 이전을 하게 되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고 다행히 출퇴근이 원활하지 않은 30km 이상의 거리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 해 봄부터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1년 과정 수업을 듣게 되었다. 집에서만 갇혀있다시피 생활했지만 그 덕분에 힘든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다. 저녁에는 아파트 바로 옆 공원으로 매일 운동을 다녔다.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 더 멀리까지 갔다올 때도 있었다. 오로지 할 게 공부밖에 없어서였는지 다행히 성적은 굉장히 잘 나왔다. 6개월 과정의 줌으로 하는 원격 강의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색다르면서 어색하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재밌었다. 문제는 학과 과정이 끝나고였다. 아파트 문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마스크를 끼어야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너무 어렵고 조심스럽던 시기여서 무언가 집중하던 일이 갑자기 끝나버리니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그 힘든 시간과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곳이 지금 이곳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건 잘한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그 시기를 돌아보니 인생이 정말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를 덜렁 들어 데려다 놓은 것처럼 의외의 곳에서 살게 되었지만, 직장을 다니고 또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보낸 시간 동안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고, 이곳으로 이사한 후엔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대문 밖을 나설 수 있고 동네를 산책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가족들도 건강하게 잘 지나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난 루시보다는 노작가와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저 긍정적인거 말이다. 그래서 다행이지 뭔가. 그리고...느닷없이 창궐한 코로나는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노작가와 베치와 유레카의 동거는 아기를 낳은 집주인이 돌아오면서 끝나게 된다. 베치는 로프트 아파트를 세 내어 떠나면서 유레카를 데려갔다. 노작가 나름의 애정을 쏟았던 유레카를 향한 마음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유레카의 야생성을 키워주고 싶어하는 베치의 노력을 인정하기로 했다. 별로 필요하지 않는 문장일 수도 있는데 작가는 다시 자기만의 몽상에 빠져 이러한 생각을 들려준다. 


    에드먼드 화이트에 따르면, 제임스 메릴이 한 젊은 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팬은 왜 우리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할까? 우리의 알맹이는 책 속에 있기에 결국 빈 껍데기만 만나게 되리란 걸 깨닫지 못한 걸까?>


    질문: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써주기를 바랍니까?

    

    빼어난 글솜씨뿐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아는 크나큰 마음까지 겸비한 사람. (307쪽) 






<불확실한 봄이었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이 문장 말고는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책이 1880년에 시작되었다는 것도(나중에 찾아보기 전까지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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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우울증은 가상의 틱 장애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한 시간이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나거나 입 한구석이 따끔거리기를
기다렸다.
"내틱 증상 보여?" 남편에게 물었다.
"아니."
"내 틱 증상 이제 보여?" 남편에게 물었다.
"아니."
"내틱 증상 이제 보여?" 남편에게 물었다.
"안 보인다니까!"
20대 초반에는 실제로 오른쪽 눈꺼풀에 틱 장애가 있어서, 이것이 오른쪽 안면 근육으로 확산되면서 
뽀빠이처럼 눈을 찡그리게 되는 증상이 종종 
나타났다.  - P19

알고보니 반측안면경련증이라는 희귀한 신경 근육 질환을 앓았던 것인데 귀 뒤의 뇌 신경 두 줄기가 꼬이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스물여섯살 때인 2004년에 피츠버그의 어느 의사가 미세한 스펀지 조각을 삽입해 꼬였던 두 신경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내 
경련증을 고쳐주었다. - P19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잘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낸다고, 자존심이 너무 세다고, 혹은 야심이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자책한다. 샤마는 그 시에서 자기 가족의 자존심을 이카로스에 비유한다. "보라, 우리가 하늘에 너무 가깝게 솟아올랐다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추락이 우리를 끝장내지 못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지고, 비명을 지르며.
오 허세부리지, 너희 생각만큼 나쁠 리는 없으니." - P47

작가 제프 창은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라고 적으면서,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그 불확실함에 동의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아시아계 미국인 의식이라는 관념은 도대체 존재하는가? 그것은 W. E. B. 뒤부아가 한 세기도 더 전에 확립한 이중의식 같은 걸까?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딱지에 칠해진 페인트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이 용어는 거추장스럽고, 버겁고, 나의 존재 위로 어색하게 올라앉아 있다. - P50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가들이 블랙팬서와 손잡고 저항운동을 벌였던 1960년대 말 이후로 우리만의 대중운동이라고 일컬을만한 것이 없었다. 쓰기가 조심스러운 "우리"라는 대명사는 앞으로 하나의 공통된 집합체로 결속될 것인가? 아니면 갈라진 상태로 우리 중 일부는 여전히 "외국인"이나 "갈색인"(brown:인종 범주라기보다는 피부가 갈색인 중남미,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계 사람들을 아우르는 용어로 최근 영미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옮긴이)으로 남고, 다른 일부는 부를 늘리거나 인종 간 결혼으로 백인 세상에 "입장할 것인가?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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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소재로 한 작품을 불과 얼마 전에도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바닷가의 루시》도 직접적으로 팬데믹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었다. 

엊그제 읽었던 올리비아 랭의 에세이《정원의 기쁨과 슬픔》도 작가가 팬데믹 기간에 영국 동부의 서퍽주에 커다란 정원이 딸린 저택을 구입하고 정원을 가꾸어 나가는 과정,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인 에덴과 존 밀턴의 《실낙원》을 연결지었고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정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과 그럼에도 정원을 가꾸어 나가는 기쁨과 의미에 대해 쓴 작품이었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이 작품도 팬데믹 기간 동안 어느 작가에게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불확실한 세상과 일상의 평범함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세 작품이 전혀 다른 문체와 언어로 쓰여져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단 것이 놀랍다.

소재만 같을 뿐이었다.




문어가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다시 일어나서 깨진 조각들을 맞추고 자신감을 되찾는 자신을 보게 해준다. 이제 그는 신예 자연주의자로서 아버지와 함께 다이빙을 시작한 아들에게 그런 자신감을 불어넣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어린 아들이 더 위대한 교훈을 체득하는 걸 지켜본다. 그것은 온화함이다.
온화함은 자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배우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크레이그 포스터는 말한다. - P114

아마도 영상에 담긴 증거가 없었더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생의 문어와 인간의 다정한 상호 작용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 역시 그걸 쉽사리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이 지닌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에 대한 우리의 추정은 늘 크게 어긋났으며, 이제야 마침내 그걸 깨닫기 시작했으니까. - P115

만일 우리가 처음부터 더 큰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동물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이 너무도 빈번히 파괴적 충돌을 일으켜 온 자연 안에서살아가는 법에 대해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방문객이 아닌 자연계의 일부라고 느끼는것, 거기 경이로운 차이가 있다고 크레이그 포스터는 말한다.) 그랬더라면 인간들 사이에 만연한 우울도 많이 줄었으리라. 그 모든 멸종들을 막을 수 있었을 테고 우리 종, 지구 전체가 구원될 수 있었을 것이다. - P115

나는 인간의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자연과 생명에 대한 본능적 사랑)를 믿는다.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친밀감, 그들과 가까이하고 연결되고 싶은 갈망,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우리 DNA에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세상을 점점 더 흉물스럽게 만들고 종내는 완전히 망쳐 버리려는 인간의 욕구는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P117

나는 유레카가 나와 놀고 있지 않을 때, 내가 거기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때 그 새를 지켜보는 게 좋았다. 새들은 세상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룡이다. 나는 그 경이로운 사실을 마음에 담고 유레카를 지켜보는게 좋았다. 어린 시절 한때 나는 공룡들에게 빠져서 살았다. 그땐 나중에 브론토사우루스가 내 마음속에서 느릿느릿 돌아다니지 않는 날이 몇 해씩 계속 되리라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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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기쁨과 슬픔 - 인간이 꿈꾼 가장 완벽한 낙원에 대하여
올리비아 랭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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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낙원인 정원은 세상의 해로움과 맞서는 곳, 인간과 비인간을 배려하는 육신과 정신의 피난처이지만, 누구나 꿈꾸는 아름다운 정원은 이제는 공동의 비용으로 누리는 ˝개인의 사치˝가 되었다. 그럼에도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활짝 열려 넘쳐 흐르는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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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자기 활동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 활동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물건들이 루이 16세와 그가 만든 자물쇠보다 나을 것이 있겠냐고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적도 있다) 또 예술과 혁명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은 틀렸으며, 예술은 "불안 없이 번영하는 삶"에서 나오므로 사회질서의 대격변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자본주의의 부산물, 아름답지만 무의미한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P210

모리스가 이해하는 예술은 사치와 무기력함이 아니었다. 예술가에게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양분과 갈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다음 문장은 무척 거대한 신념의 보루를 보여준다.

예술의 영역은 인간에게 충만하고 합리적인 삶의 진정한 이상을 제시 - P210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에서 아름다움의 인식과 
창조, 즉 진정한 즐거움의 향유는 일용할 양식만큼이나 사람에게 필수적이라고 느껴져야하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도 단순한 반대 때문에 이를 박탈당해서는 안 되며 그럴 경우에는 그에 맞서 
힘껏 저항해야 한다!
- P211

...정원을 가꾸는 이들처럼 모든 사람은 하고 싶어서.
뭔가를 만드는 일에 대한 순수한 사랑 때문에 일을 한다. 노동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는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없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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