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관은 귀에 선 밋밋한 억양으로 단호하게 강제 퇴거 명령을 전했다. 통역관은 주민들에게 골짜기의 경작지는 식민주의자의 재산이 되었다고 했다. 
"총독의 명령에 따라 너희는 원숭이들이 사는 산악지역으로 돌아간다. 이 땅은 이제 너희게 아니다. 왕에게 영광을, 위대한 제국에 영광을" - P52

처음에는 아무도 통역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느 누가 그들을 움직이게 한단 말인가. 먼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터전으로 삼은 이곳에서 몰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이 왔다. 남자들은 누구도 이곳에 남을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땅은 몰수되었다. - P52

새뮤얼의 가족은 숟가락 하나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그의 어머니가 발이 채여 넘어지는 통에 업혀 있던 동생이 이마를 찧어 혹이 났어도 계속 달렸다. 내내 칭얼거리던 동생은 이제는 아파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럼에도 그들은 피와 침을 흘리면서, 불타는 골짜기의 시꺼먼 연기 구름에 쫓기며 저 앞 푸른 하늘을 향해서 앞으로 앞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 P52

도망치는 새뮤얼 가족을 기다리는 것은 이미 벌거숭이가된 황무지와 마을뿐이었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자리처럼 눈길 닿는 곳마다 파괴되어 있었다. 그들은 먹을 만한 것을 찾아 대치는 대로 뒤지고 잎자루, 뼈, 도둑맞우 둥지를 뒤졌지만 끝내 주린 배를 잡고 밤을 새워야 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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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용정

둘은 비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쨌든 두 분 덕분에 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지난 몇 년간 지하활동을 했습니다. 정세는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비관적으로 보이는 이 순간이 바로 종말의 전야라는 걸 저는 유격구에서 배웠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당신은 이제 완전히 변절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박길룡이 혁명의 배신자라면 당신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군요. 응당한 대접을 내가 해주리다."
최도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최도식은 몸을 움츠렸고, 자전거가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 P333

"내사 절대로 이정희를 죽이지 않았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을 뿐이오."
최도식이 소리쳤다.
"그렇게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것일 뿐이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가 물었다.
"거야, 당신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이었지비."
"그 편지......." - P334

그가 말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남자아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아직 열 살도 넘지 않은 게 분명한, 최도식의 아들들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한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새 시대의 아이들. - P334

"그 편지, 내게 전해줘서 고마웠습니다. 그 얘기 하려고 왔습니다. 이제 가보죠. 어서 집으로 들어가세요."
그는 울고 있는 아이들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버지를 지나쳐 골목을 빠져나갔다. 한참 걸어가다가 그는 우산을 그 집 앞에 던져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는 그 집 앞으로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저녁 내내 그는 비를 맞으며 용정 시내를 하염없이 걸어다녔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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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 태어나는 대부분의 조선 여자아이들이란 혀로 제 코를 핥는 당나귀보다도 못한 동물이었다. 그 아이들은 언제나 다른 남자의 소유물에 불과했으니 혀로 제 코를 핥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아편 연기와 맞바꿔지고 마작패 몇 개 놓이는 위치에 따라 앞날이 결정되며 봄에 빌린 곡식 덕택에 낯선 곳에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  - P120

 그게 여옥이처럼 어여쁜 여자아이라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루처럼 단단한 종아리로 뛰어다녀야만 하는 여자아이라면 결국 갈 곳이라고는 남양의 지주 집 뒷방에 갇혀 사진기를 향해 수줍은 듯이 가슴을 풀어헤치는 그 첩과 같은 인생이거나 몸값을 받을 수조차 없는 처지인데도 마작들에게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거나, 운이 아주 좋다면 용정의 술집에서 돈 많은 남자들을 농락하는 여인이 될 터였다. 혁명의 도리라는 건, 아마도 그런 처지의 자신이. 누구인지 그 여자아이들이 결국 깨닫게 되누 일을 뜻하리라.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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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백합, 비둘기, 태양, 이 모든 것을옛날엔 사랑의 환희에 젖어 사랑했었네.
하지만 나 이제 더이상 사랑하지 않네, 내가사랑하는 것은 조그맣고 예쁘고 순수한 그 한 소녀,
그녀는 모든 사랑의 샘물, 그녀 자신이 바로
장미, 백합, 비둘기, 태양이기 때문이라네. - P40

그이 주 동안, 나는 하이네의 시를 적은 수많은 연서를 용정의 정희에게 보냈다. 답장은 없었지만, 정희에게 그런 편지를 보낼 수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최초의 연애 감정을 뜨겁게 달구는 장작은 이처럼 혼자 지내는 고독의 시간들이었다. - P41

용정에 돌아왔을 때, 내 가방 속에는 근간 『문예춘추』도, 시세이도의 향기도 없었다. 나는 우리가 늘 앉아서 얘기하던 6월의 언덕배기에서 가방을 뒤졌다. 그 안에는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한 개의 반지가 있었다. 월급을 다 털어 대련의 금은방에서 사온 반지를 내밀며 나는 정희에게 결혼해달라고 말했다. 부리가 붉은 새 한 마리가 우리 앞에 앉아 깡총거리며 뛰다가 다시 날아갈 때까지 나는
반지를 들고 있었다. 싫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무렵, 정희가 입을 열었다. - P41

"당신의 표정을 보니……… 내가 지금 이 반지를 받지 않는다면, 일요일 오후 우리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는 일은 이제없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남자가 많겠지. 나는 당신에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싫다면 여기서 그만두겠소."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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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 생물학자이자 온실가스 흡수원으로서의 고래에 대한 주도적인 연구자인 조 로만은 알래스카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래의 개체 수 회복이 기후변화를 약화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국제 통화기금IMF 역량개발 협회의 연구는 식물 플랑크톤이 1퍼센트만 증가해도 20억 그루의 다 자란 나무가 갑자기 생기는 것과 맞먹는 효과를 낸다고 밝혔다. - P99

나는 고래를 매립지로 보내겠다는 발상, 즉 고래를 일종의 유해 산업 폐기물처럼 취급하는 발상에 충격받았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은 고래를 대기 오염의 최악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치유하는 메커니즘으로, 공기를 정화하는 수단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고래를 온실의 정원사로 규정한 것이다. 안도의 숨을 쉬면서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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