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공간의 위로》 그레텔 에를리히
‘와이오밍 주‘라는 황량하고 낯선 공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어 오히려 열린 공간이자 위로의 공간이 될 수도 있음을....
나에겐 카우보이들의 고향이기도 하고 크로우 족, 샤이엔 족, 쇼쇼니 족, 아라파호 족, 수 족 인디언들의 고향이기도 한 공간임을 알게 한 시간들...
오늘 아침엔 이 아름다운 산문의 대미를 장식할
‘12장 폭풍, 옥수수 밭, 엘크‘를 남겨두고 있다.

오전에 친구들이 놀러올 거라 맘이 바쁘다. 그래도 6쪽 남짓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와이오밍의 가을‘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자꾸 나를 재촉한다.
가을걷이 하는 카우보이들과 목장주들의 모습인데
이 정도면 우리로 치면 깊은 겨울이지 싶지만, 그리고 너무 고생스럽다 싶지만 이런 척박한 평원에서의 삶이 그래서 더 아름답고 충분히 가치있다는 것을 느낀다.

지난주에 구름 덩어리들이 여름의 녹색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더니 폭풍을 풀어놓았다. 폭설은 권투 선수의 주먹처럼 난폭했다.
나무를 내리치고 건초 밭과 곡물 밭을 사슴 침대처럼 짓눌러놓고금빛으로 탈색된 옥수수는 난데없는 난투극에 휘청거렸다. 우리는밤새도록 미루나무 줄기가 부서지며 내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 "망할, 지난밤에 무서워서 식탁 아래에 웅크리고 잤다니까." 한 이웃목장주가 내게 말했다. "나무가 우리 집 지붕을 뚫고 들어왔지 뭐유." 고속도로를 따라 전선들이 말의 고삐처럼 떨어져 있었다. - P174

폭풍이 다코타 주를 지나 동쪽으로 불어오면서 푸른 하늘이 짙푸르게 변했다. 하늘은 냇가와 마른 황무지를 조용히 파란 잉크로 물들였다.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절제된 행동으로 미루나무,
갈대, 야생화는 스스로를 불그스름한 색, 녹갈색, 적갈색, 암갈색, 황갈색으로 물들였는데 우리는 이러한 현란하고 과다한 스펙트럼의 색감이 우리를 향해 달려올 찬바람과 추위의 징조임을 알고 있다. - P174

프랑스 사람들은 가을 나뭇잎을 고엽 feuille 
morte 이라고 부른다. 나뭇잎들이 마침내 서리에 의해 부패되면 비와 함께 쓸려 내려가고나무는 스스로와 절연하기로 작정한 듯 모든 잎을 털어내 버린다. - P174

가을 내내 우리는 두 개의 목소리를 듣는다. 한 목소리는 모든것이 익었다고 말하고 다른 목소리는 모든 것이 죽어간다고 말한다.
이 패러독스는 매력적이다. 일본어의 ‘아와레‘라고 하는, 영어로는 거의 번역할 수가 없는 이 단어는 ‘아름다움과 비의가 공존함‘이라는 의미다. 언젠가 우리는 이 약탈자 같은 멜랑콜리에 대항해야만 한다. - P175

가을은 목장주들에게는 한 해의 마무리를 의미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건초를 쌓아두고 소와 양을 모아서 젖을 떼어 출하하고 한살 된 수송아지와 망아지는 판다. "우리는 이맘때 좋아해요. 특히 소값 오르면 기분 째지죠." 3대째 목장을 운영하는 남자가 말했다.
이번 주에 나는 빅혼 산맥에서 소와 송아지를 모으는 일을 돕는다. 이달 초에 1미터의 눈을 내리게 한 폭풍은 이제 강하고 지속적인 비를 몰고 온다. 소를 타는 일은 스키를 타고 하는 터치 풋볼 게임과 비슷한데, 소와 카우보이들은 서로 부딪치고 송아지는 뒤로 뛰어가고 말은 미끄러진다. 오늘 두 번이나 나와 함께 말이 미끄러져 가파른 비탈길 위에 세게 넘어졌지만 진흙과 눈이 너무 깊게 깔려 있어서 멍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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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마지막 단편인 표제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중에서...

‘매기‘라는 이름의 인공지능과 하나가 된 새로운 인류로의 진화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인류는 이미 매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며 2천 년간 전파신호의 유령으로 살았고, 매기의 
예측대로라면 앞으로 지구가 생존 가능한 상태로 정화되고 안정되는 1만9천 년 동안 이 낯선 문명을 더 지속할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로 인류가 영구히 지속 가능한 생체 인공지능을 얻게 될지도 모르죠. 우리는
그 일부가 될 겁니다. - P299

그때까지 인류는 현실의 자연법칙들과 인간의 범주를 심각한변형 없이 지켜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과연 그 보존이의미가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미 진짜 세계의 원형에서 한참 멀어진, 훼손되고 변질되어 원본을 짐작할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현실의 실감을 기억하는 자로서, 진짜 세계는 매기가 주는 그 어떤 영화의 감각과도 확연히 다르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P299

개는 천만 번쯤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늘 개를 환대했던 두 팔을 내뻗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죠. 어쩌면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던 것도 같습니다. 개는 달려오던 힘과 속도 그대로 저를 관통해 지나갔습니다. 저는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었지만 심장이 꿰뚫린 것처럼 놀랐습니다. 돌아보자 깜빡이며 윤곽이 흔들리고 있는 까만 개 역시 멈춰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류가 일어난 겁니다. 거의 현실처럼 보였던매기가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을 저는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 P327

우리는 이미 매기의 실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잘 체감하지 못하지요.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완벽에 틈새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을 알게 된 겁니다.
무수한 반복으로 오류가 끼어들 확률을 올리는 것. 매기가 확률로 세계를 유도하듯, 우리도 확률로 매기를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견고하고 단단한 확률이 통제하지 못하는 우연의 순간. 그 특별한 우연을 만드는 것은 방대한 반복이었습니다. 혜경. 오래전 개가 사라지는 장면을 만들었던 당신은 대체 어떤 영감에 이끌렸던 겁니까? - P327

"존엄한 인류의 일부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이야?"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서 발화했습니다. 정확한
문장으로 물음으로써 스스로의 질문을 선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엄한 인류는 요람 안의 인류와 요람 밖의 인류가분리되어 발전한 후 다시 결합한 상태로 예측됩니다. 존엄한 인류가 영원히 존속하기 위해선 이 분리와 결합의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요람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당신은 나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나갈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조건은?"
- 세계를 의심하고 세계를 부순 자. - P329

혜경. 이미 우리보다 앞선 세대에 요람을 나간 자들이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십니까? 어느 날 갑자기 생을마감한 위대한 디렉터, 영화의 범람 자체를 열렬히 사랑했던 어느 뷰어,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은둔형 외톨이들 중에 혁명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기를 떠나 진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어쩌면 이미 작은부락, 혹은 원시 도시의 형태를 이루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매기가 지구의 회복 기간을 거짓으로 공개한 이유는최고 명령인 인류의 존엄한 존속에 필요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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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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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은 뛰어났지만... 읽는 내내 기분이 나빴던 소설 ... 가독성이 전부는 아니란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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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1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죠! 저는 이 반전에 놀라긴 했고 또 가독성도 뛰어나지만, 그런데 찜찜했어요. 정해연 작가의 다른 책도 읽었는데 그것도 찜찜하더라고요. -.- 그래서 정해연은 그만 읽으려고 합니다.

은하수 2024-06-14 12:0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그러셨군요..
저 끝까지 읽어야하나 고민많이 했는데... 끝까지 역시 쓰레기여서 대실망. 거기다 뭔가 결말도 그럴 조짐이었는데 읽고나니 더 기분이 진짜 드러웠어요.
말할 수 없이 드런인간의 끝이 또 맘에 안들어요.
아무튼 저도 저 작가책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네요. 읽을 책을 걸러주었으니 그나마 소득이네요.
 

진도가 너무 안나간다. 기본적으로 정말정말 싫어하는 소재라서 그럴거다. 끝까지 읽어야하나 고민중인데 그래도 누군가가 죗값을 치루는 건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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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열린 공간의 위로
5월이었고 혼곤한 낮잠에 빠졌다가 이제 막 깨어난 참이었다.
우리 개한테 배운 대로 세이지브러시 옆에 바짝 붙어 웅크리고 잤는데 그래야 바람을 피할 수 있어서다. 내 앞에는 방대한 하늘이 펼쳐져 있고 먹구름 속에서 난데없이 우박이 날아와 내 머리를 한 대때리고 간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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