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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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족 살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하는 하세베 가오리, 그리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쳐 내는 무명의 각본가 가이 치히로의 스토리가 교차된다. 좀 더 길었어도 좋았을 마지막의 에피소드들... 일몰은 모두에게 중요한 모티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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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미나토 가나에

이 사람은 영화감독이다. 사건에 관해 캐묻는 바람에 언론사 기자로 착각할 뻔했지만.
"감독님은 이 사건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시는군요."
"네, 맞아요."
"요즘 세상에는 그렇게 희귀한 사건도 아닌 것 같은데요. 하물며 재판도 끝났는데 더 파헤칠 게 있나요?"
그러자 감독이 입을 꾹 다무는가 싶더니 시선을
테이블로 떨어뜨렸다.
이윽고 아이스커피가 나왔다. 종업원이 가게 이름이 인쇄된 코르크 받침을 깔고 그 위에 유리잔을 놓았다. 그리고 빈커피잔을 치우다가 테이블 위에 스푼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감독은 거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 P74

감독은 테이블 한쪽 편에 밀어 두었던 클리어 파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나를 봤다.
"나는 이 사건의 진상에 의혹을 품은 게 아니에요. 다만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어요. 
죽은 후에 주위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말만으로 다테이시 사라라는 사람이 규정되는 건 불합리하잖아요. 나는 실제의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를 살해한 오빠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가 어떤연유로 살해되어야 했는지 알아내서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그런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굳이 영화관에 가서, 돈을 내면서까지.
감독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 P75

"마히로 씨는 알고 싶지 않아요?"
"사라 씨나 그 사건에 관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진상을 아는게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각본가잖아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원동력이 된 적이 없어요?"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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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시선을 감당할 준비를 하고서 얼굴을 들었다. 역시,
변함없는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았다.
"감독님은 작품에서 리얼을 추구하고 있잖아요. ‘한 시간전‘에서도, 죽음을 전혀 미화하지 않았죠. 그래서 평가가 높았겠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비슷하게 높았어요. 소중한 사람을자살로 잃은 사람의 심정을 짓밟고 있다고 말이에요. 하지만감독님은 자신의 신념을 굽힐 마음이 없………는 거죠?"
"네, 맞아요." - P251

"이렇게 인식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실제로 발생한 일은 사실, 거기에 감정이 더해지면 진실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요. 재판에서 공표되는 내용은 사실뿐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감정이 따르잖아요. 그 감정을 배려할 필요가 있으니 재판에서 판가름하는 것도 그 진실이어야 마땅할 텐데, 과연 그게 진짜 진실일지."
"진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아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이 있고, 감정을 뒤에 갖다 붙인 게 아닐까, 하는 거죠.
피고인의 범행 당시의 기분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라, 재판에유리한 감정을 나중에 덧붙여서, 그걸 발표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아하"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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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미나토 가나에
역시나.. 가독성 최고!


ㆍ에피소드 1
떠오르는 것은 그 아이의 하얀 손. 잊히지 않는 것은 그 손끝의 온도, 감촉, 나눴던 마음. - P9

지금도 그게 학대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훈육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엄마도그렇게 말했다. 순서는 반대였을지 모르지만. - P9

부모가 내게 손찌검했던 기억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엄마에게 자주 혼났다. 컵의 물을 쏟거나, 그림을 그리고 난 다음 크레파스를 제자리에 정리하지 않으면 엄마는 "조심해야지!"
하거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 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베란다로 쫓겨나는 것은 그런 일 때문이 아니었다. - P9

ㆍ에피소드 3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기 위해서인데, 어째 나는 과거의 자기 모습마저 비천하게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좋을지 모른다. 스스로는 순수하다고 여겼던 모습도 누군가의 눈에는 비천하게 비쳤을 수 있으니까.
오히려 그 무렵부터 내 눈은 동정이라는 이름의 베일을 쓴경멸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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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함정임

황금 장미를 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오후의 정적과 석양. 몽파르나스 묘원을 산책하는 나는 자주 저 먼 하늘을 본다. 하늘 이외에 달리 어디를 볼 것인가. 죽은 자들의 빈집들과 그들의 상징들, 그리고 이제는 먼지보다 가볍게 사그라진 그들의 육신을 처음부터 짓누르고 있는 현재의 검고 붉고 흰 묘석들. 영원과 순간의 교차가 파도처럼 휘몰아쳐 메마른 가슴팍을 찔러대고, 나는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울음을 울고 싶어진다. 나를 위해서도 저들을 위해서도 아닌 단지 이 세상 혹은 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위해서 우는 것이다. 울음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 P68

막강한 돌조차도 고사목처럼 삭은 몸을 내보이는
저 시간의 위녁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이 덧없는 발
길과 저 덧없는 마음의 경미한 충동들을 이리저리 흘려보내며 마침내 도달한 곳이 ‘세기의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1914~1996의 집이다.

열다섯 살 반, 날씬한, 오히려 연약하다고 할 수 있는 육체, 아기 젖가슴, 연한 분홍빛 분과 루주를 바른 얼굴. (중략)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고, 아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 P69

모든 것이 ‘거기 있다‘ 또는 ‘거기 있었다‘. 실존철학자들과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즐겨 쓰는 이 시제時制만 달리한 두 문장에는 아찔한 의식의 벼랑, 시간의 벼랑이 가로놓여 있다. 나는 삶이 혹은 글쓰기가 권태로울 때는 지루한 허공에 침을 뱉기라도 하듯 뒤라스의 작품들을 충동적으로 펼쳐보곤 한다. 유년을 송두리째 인도차이나의 이방인으로 보낸 뒤라스적인 벼랑 의식이 나를 다시 글쓰기의 욕망으로 인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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