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뒤 가끔 그는 고든 핀치와 대화를 나눈 뒤 며칠 동안의 일을 회상해보았지만, 명확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죽었는데도 오로지 고집스러운 의지력 덕분에 습관적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며칠 동안 자신을 스쳐간 장소들,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묘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상황이 드러나지 않게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강의를 하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빠질 수 없는 회의에 참석했다. 그동안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P300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봄 오후의 밝고 산뜻한 온기 속에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자신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길가와 앞뜰에 늘어선 층층나무들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매단채, 그의 눈앞에서 반투명하고 엷은 구름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생명이 꺼져가는 라일락꽃의 달콤한 향기가 사방을 흠뻑 적셨다. - P301

캐서린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쾌활하면서도 냉혹했다. 그는 핀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는 캐서린의 질문을 무시해버리고 그녀에게 웃음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쾌활한 분위기를 만들어보려는
자신들의 마지막 노력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죽은 시체 위에서 생명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 P301

하지만 결국은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음속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바탕으로 몇 번이나 연습한 공연 같았다. 문법적으로 정확한 두 사람의 말 속에 그들이 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완료형에서 시작해서 ("그동안 우린 행복했어요, 그렇죠?")과거형으로 나아갔다가("우린 행복했어요.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같아요) 마침내 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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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0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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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순수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두 남녀의 사랑과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적 사랑이 만나 두 사람 앞에 놓인 ˝남자와 여자, 평민과 귀족,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삶과 죽음 등 모든 갈라진 것을 극복하는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삶을 기꺼이 짊어지는 사랑, 타인을 사랑하는 진정한 삶으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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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절한 외침, 이 절규가 너무 고귀하고 아름답다. 마리아의 심장에 가 닿기를 ... ...

˝,,,,, 왜? 대체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걸까요?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게걸스럽게 탐하지 않고는 여자를 쳐다볼 수도 없는 걸까요?˝
...... 어쨌든 세상이 인생의 가장 성스러운 것을 가장 천박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하지만 마리아! 그러지 말아요. ... ... 그렇지만 저 소란스런 바깥세상에는 괘념하지 말고, 두 마음이 순수한 마음의 언어를 쓸 수 있는 우리만의 성전을 지킵시다. ... ˝(150쪽)


넷째 회상
나는 곰곰 생각을 모으려고 하다가는 얼른 생각을 털어버리고, 돌아가신 후작 부인의 초상화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고 어릴 적에 자주 보았던 
두 장정이 후작 따님을 침대에 누인 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 그 모습!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얼굴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두 장정들이 나가자, 이윽고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냈다.
옛날 그대로의 그윽하고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그 눈. 그녀의 얼굴은 순간마다 생기를 띠더니 마침내 온 얼굴에 웃음을 함빡 머금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예요. 우리는 변한 게 없는 것 같군요. 나는 ‘지이‘라고는 부르지 못하겠어요. 또 ‘두우"라고 부를 수도 없으니 영어로 말해야겠는 걸요. Do you understand me?"

*독일어 Sie는 예의 바르게 쓰는 존칭, Du는 친한 사이에, 특히 남녀 간에는 애인 사이에 쓴다. - P53

다섯째 회상
그때부터 아름다운 삶이 열렸다. 매일 저녁 
나는 그녀를 방문했고, 우리는 곧 서로가 진정한 옛 친구임을, 서로 ‘두우‘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사이임을 절감했다. 우리는 서로 지금껏 늘 함께 어울려 살아왔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켜는 감정의 현치고 이미 나의 영혼 속에서 울리지 않은 음이 없었고, 내가 입 밖에 낸 생각치고 그녀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라고 응해오지 않은 생각은 없었다. - P62

여섯째 회상
자연이 차별 없이 분배하는 아름다움은, 인간이 그것을 자기것으로 하지 않으면, 말하자면 노력하여 쟁취하지 않으면 만족을 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아름다움은 마치 여배우가 여왕 의상을 입고 무대로 나오는데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그 의상이 결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드러내듯이, 오히려 불쾌감을 줄 뿐이다. 그러나 참된 아름다움이란 우아함이며, 우아함은 모든 압박과 육체적, 세속적인 것이 정신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추한 것까지 아름답게 하는 정신의 현존인 것이다. - P95

그렇게 내 앞에 서 있는 환영을 관찰하면 할수록 나는 그 환영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풍기는 고귀한 아름다움을, 그 온 존재에 비치는 영적 깊이를 알아보았다. 오, 그토록 엄청난 축복이 내 곁에 가까이 있었다. - P95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게 지상의 행복의 절정을 보여주고 나서, 나를 인생의 넓은 사막으로 팽개치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 이 땅에 얼마나 엄청난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한번 사랑하고 나서 영원히 고독해져야 한단 말인가! 한번 믿고 나서 영원히 의혹에 빠져야 한단 말인가! 한번 빛을 보고 나서 영원히 눈이 멀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엄연한 고문이다. 인간이 행하는 여타 모든 고문도 이 고문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니리라. - P95

마지막 회상

너의 오빠라도 좋고
너의 아버지라도 좋다. 아니, 너를 위해 세상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바로 이 ‘무엇‘에 대한 이름을 찾아내야만 했다. 
세상은 이름 없는 것을 결국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모든 다른 사랑의 원천인 저 순수하고 전인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내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내 편에서 그녀에게 나의 혼신의 사랑을 고백했을 때, 왜 그녀가 놀라움과 언짢은 기색을 보였는지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태도가 그녀의 사랑에 대한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는 없었다. - P137

어차피 우리 자신의 마음속이 불가사의한 것투성이인데, 왜 인간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모조리 알려고 하는가? 자연에서든 사람의 속마음에서든, 자신의 가슴 속에서든, 우리를 가장 매료시키는 것은 해명할 수 없는 것들 천지가 아닌가. 우리에게 이해되는 인간, 해부용 표본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태엽을 지닌 인간들 앞에서는 수많은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경우처럼 우리는 냉담하게 된다. 만사를 해명하려 들면서 내면의 기적을 일체 부인하는 윤리적 합리주의자들이야말로 생명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기쁨을 망치는 자들이다. 
어느 존재 안에나 운명이니 영감이니 성격이니 하고 이름 붙일 수 있는 풀어지지 않는 요소가 있는 법이다. 이처럼 영원히 남는 요소를 인정치 않고, 인간의
행동거지를 분석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야말로 저
자신은 물론 인간을 모르는 위인들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엊저녁에 절망했던 모든 것에 대해 알기를 깨끗히 체념했다. 그러자 이제 내 미래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P137

통계학자들은, 매시간 한 사람의 심장이 찢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왜? 세상 어디에서나 타인간의 사랑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하물며 남녀 간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요.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경우, 한쪽 여인은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경우 한쪽, 아니면 두 남자 다 희생이 됩니다. 

왜? 대체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걸까요?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게걸스럽게 탐하지 않고는 여자를 쳐다볼 수도 없는 걸까요? - P150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손 안에 잡힌 그녀의 손이 뜨거운 마음의 악수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안에서는 파도가 일고 폭풍이 치고 있었다. 층층이 쌓인 구름이 그 폭풍에 의해 걷히며 내 앞에 펼쳐지는 푸른 하늘은 지금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보였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그녀는 결정의 순간을 마냥 미루려는 듯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왜라니요? 마리아!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느냐고,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이 대답이 미흡하다면, 당신 옆에 놓인, 당신이 그토록 애독하는 책으로 대답을 대신하지요."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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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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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오전에 수영 끝나고 회원님들과 주민자치센터 앞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잠시 커피 타임을 가졌다. 처음엔 요즘 배우고 있는 영법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는 게 우리들의 국룰... 평영이 너무 안된다는 둥, 웨이브를 하는데 뭔가 자세가 어색하다는 둥, 연결 동작이 잘 안되고 너무 어렵다는 둥, 발 따로 팔 따로... 어깨를 눌러주라는 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둥,내가 하는 건 웨이브가 아니라니까 ㅠㅠ... 이런 이야기를 열나게 하다 보면 새삼 결론은 "언니... 그만두지 않고 계속 같이 가주셔셔 넘 고마워요"로 끝난다. 


그러다 갑자기 포근해진 날씨 이야기로 넘어가고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또 나가서 마냥 걷고 싶다니까 이구동성으로 자기들도 그렇다고 하는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는 마음껏 편히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마땅히 갖춰져 있는 곳이 아니다. 집에서 바라보는 한적한 시골 동네로서의 풍경은 더없이 고즈넉하고 아름답지만 실상은 변변한 산책로나 안전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인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진 않은 곳이다. 그럼에도 2021년 11월 지금의 용인 양지면으로 이사온 이후 다음 해 봄부터 동네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오늘은 집 앞쪽 동네로, 내일은 저 초등학교 뒷 동네로 또 다른 날은 총신대 앞쪽까지 가리라 하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이 집도 슬쩍 구경하고 저 집도 슬쩍 구경하면서 온 동네를 걸어다녔는데 지치지도 않고 그 짓을 그 다음 해까지도 했던 거다. 그것도 혼자서!




어느 날 약간의 불편함을 안고 계속 하던 산책 중에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건데 뭔지 모르게 올라오는 불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거다. 번듯한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도시 외곽 지역은 변변한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넘 속상했고, 걷다 보면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옆으로 비켜서야 한다는 것이 기분이 상하면서 같은 용인시민인데 난 왜 이런 환경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건가 싶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간다는 것에도 화가 났다. 오랜 시간 즐겁고 행복했던 산책이자 운동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혼자 노는 것도 좋았지만 그때쯤엔 나도 모르게 나도 어딘가엘 가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 거다. 혼자 여기저기 산책을 다녀도 사람을 사귀는 건 불가능하고 아무리 시골이고 주택단지라 해도 나 어릴 때처럼 옆집이랑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프게 자각하게 된 거다. 그래서 용인 수지에서는 물이 너무 무서워 엄두도 못내던 수영 강습에 용기내어 등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 혼자서도 그다지 우울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여유로우니 만족도도 높았는데도 어딘가에 소속이 된다는 것과 누군가와 교류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과 교류하는 삶에 순응하게 된 것이다.^^




정기현 작가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는 직장을 잠시 쉬면서 동네를 산책하는... 혹은 배회랄지 탐험이랄지... 아무튼 동네를 산책하는 '기은'이 나온다.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준영'을 만나는데 예배가 있는 주일을 제외하면 평일의 교회는 도서관이나 베이커리에 가까운 곳이었다. 교회 사모의 권유로 평일 낮에 교회에 나가 책도 읽고 빵도 마음대로 먹고 그러다 평일 낮 시간에 교회를 찾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었던 준영을 만난 것이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별다른 대화 없이도 시간을 함께하는 과정을 담담하고 보여준다. 우연히 어느 날 같은 시간에 귀가를 하게 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준영으로부터 기둥에 있는 낙서에 대해 듣게 된다. "김병철 들어라. ~~~"로 이어지는 낙서들... 동네 곳곳에 경고조로 쓰여진 낙서를 찾아 어느 날은 아예 날을 잡아 특정한 낙서를 찾아 동네를 샅샅이 훑다시피 돌아 다닌다. '기은'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낙서를 찾아 샅샅이 훑고 다니는 모습 어디에서도 나와 닮은 점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는데도 난 '기은'의 그런 행동들이 이상하게 너무 이해가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걸을 때의 '기은'은 원래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동네의 비밀을 파헤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진 산책으로 변해간다. 어떠한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지만 '기은'의 산책이 자아내는 무언지 모를 슬픔의 분위기는 준영을 만나면서 변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영에게 낙서의 비밀을 알아내서 이야기해 주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낙서를 찾아내고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까 초조해하기도 한다. 그러한 슬픈 마음의 정서가 준영과의 미래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아늑함"을 느끼는 부분에서 설렘이 감지되었다. 아... 기은이 그 마음을 "슬픔을 아는 마음"이라고 하면서 어째서 "아늑함"을 떠올리게 된 건지 알듯 모를듯했지만 그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산책은 이러한 서사가 끼어들 여지도 없었고 "슬픈 마음"으로 나에게 집중하는 산책은 아녔지만 오히려 어이 없이 이게 뭔가 싶은 자괴감만 남기고 끝나버린 데 반해 -하지만 이로 인해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나의 실패한 산책으로 인한 방향 전환도 사실은 대단히 긍정적인거 아닐까? - '기은'의 산책은 정말 약간의 설렘이 느껴지는 "아늑함"을 남기게 되어 좋았다. '기은'이 다른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김기태 작가의 단편 <일렉트릭 픽션>은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한 남자의 밋밋해 보였던 일상이 기타를 배우기로 하면서 크지는 않지만 변화하게 되었고 그 변화의 방향이 평소의 생활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교류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의 전환이어서 희망적으로 비쳤다. 거기다 소설의 구조가 특이해서 마지막에 "엇!" 하는 감탄사를 사용하게 된다. '전기 기타를 치는 그'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전기 기타를 치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 독특한 구조가 된다. 맞게 말한 건가?.... 특이한 구조로 기억에 남을 듯한데 작가와 선우은실 평론가의 대답을 읽어보니 이와 같은 서술 방식이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도 왕왕 발견이 된다고 해서 작가가 이러한 서술 방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문지혁 작가의 <허리케인 나이트>는 작가가 실제로 미국에 거주하던 시절에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구성이 되었다. 작품 속에서 허리케인이 몰아친 날 집에 물이 차서 친구의 집에 피신하게 되었는데 대형 로펌에 근무하다 자신의 법률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 피터의 집은 '럭셔리 콘도미니엄'의 펜트하우스였다. 외국어 고등학교 동창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이지만 대치동에서 한 해에 몇 십명이 입학하는 고등학교 출신이었던 피터와 중곡동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의 사회, 문화, 경제, 가정환경의 차이는 자석의 S극가 N극의 사이만큼 멀기만 했지만 내가 써서 인쇄한 소설을 우연히 읽었고 재미있었다며 다음에 또 보여달라는 피터의 말을 들었던- 불편한 - 기억을 떠올린다. 피터와의 사이는 이렇게 불편한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던 피터의 펜트하우스에서 랍스타를 저녁으로 먹고 쉬고 있는데 허리케인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갑작스레 정전이 발생한다. 안전하다 믿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러한 설정에서 유발되는 은근한 긴장감이 소설을 읽는데 흥미를 더한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건 고등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다가 작은 소동이 벌어진 사건을 들려주는 데서 온다. 골대 근처에 주차된 자동차에 소지품을 올려두고 용준(피터)이와 아이들이 농구를 하던 사이 차는 사라져 버리고 아이들의 냄새나는 옷이나 양말 따위의 것들은 근처에 있었는데 유독 용준(피터)이의 - 롤렉스 -손목시계만은 찾지 못했던 것. 괜찮냐고 묻는 친구에 비해 너무 침착하고 무덤덤한 친구 피터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거리감이 유발하는 긴장감과 불편한데도 계속 이어지는 두 사람의 동행, 그리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세계조차 무너진다면...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데 이 단편 전체의 인상을 바꿔버리는 결정적인 몇 개의 문장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집의 별점이 대거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 ... ... 아니, 이제는 내 롤렉스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어느덧 시계는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이 더 길고, 피터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롤렉스가 함께할 것이므로.(172쪽)" 

내가 훔쳤지만 결코 빼앗지는 못했고 착용할 수도 없었던, 그래서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내가 살 수도 없는 물건 때문에 겪는  내면의 갈등은 계속 되겠지. 




퀴어 소설의 지향점이 어디일지 고민하며 썼다는 서장원 작가의 <리틀 프라이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상실감'과 욕망의 기록들도 읽는 재미가 있었고, 작가가 추천해 주었던 김원영의 <희망 대신 욕망>,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도 읽어 보고 싶다.

마지막 수록작인 최민우 작가의 <구아나>도 재미있었다. 연인 사이인 '도윤'과 '해영'은 동거하는 사이인데, 해영의 오빠인 해준이 두 사람의 집에 방문하는 사건을 계기로 도배도 하고 집안을 단장하게 된다.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지만 무작정 관습에 순응하기를 망설인다. 오빠인 해준이 해외 이민을 가게 되면서 가족 사긴을 찍자는 제안을 하는데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도배를 하고 나니 거슬렸던 집안의 소소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바꿔 나가기로 하고 가장 먼저 문손잡이를 바꾼다. 3개의 문손잡이 중 2개가 고장나 있었는데 문손잡이를 바꿨다고 큰 변화가 있을 거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고치는 거야"라는 '해영'의 말에서 희망이 보였다. 전셋집이지만 사는 동안 내 집이니 문손잡이를 바꾸고 싱크대 수전도 바꾸고 욕실 곰팡이도 다 닦고 벽이랑 바닥 줄눈도 새로 그리고 후줄근한 상부장도 교체해서 멋진 집에서 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흔들의자의 다리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금속 곡선이 방금 이뤄진 간단한 성취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어디든 무엇이든 붙들 것이 있다면 그 다음은 어찌어찌 해나갈 수 있었다(281쪽)" 

그래서 현실의 모든 커플들이 이런 희망적인 결말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따뜻하고 세심하게 바라봐주는 작가의 시선이 나는 참 와닿았다. 결혼 적령기의 자녀가 둘이나 있으니 이게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보이는 거다. 우리 딸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남자 친구와 결혼을 결정한 걸까, 우리 아들도 '해영'과 같은 여성을 만나게 될까... 뭐 이런 생각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정말 사람이란 어쩔 수가 없는 건지 나도 모르게 생각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엊그제 사다 놓은 화분에 물을 주었더니 꽃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천리향의 향기는 썬룸에 진하디 진한 향수를 뿌려놓은 듯하다. 제라늄의 작은 얼굴도 선명해졌고. 책상 앞에 창문을 열고 있어도 오늘은 바람이 차지 않고 상쾌하다. 책 보다 컴퓨터 검색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풍경에 취한다. 이런 평범한 일상과 인생이 이 작품집 속에도 있다. 마지막까지 읽기를 잘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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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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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보다 우수상을 받은 작품에 더 공감되는 작품집이었다. 김기태의 <일렉트릭 픽션>은 그의 단편집 읽고 낮아진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려주었고,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의 마지막 몇 문장이 단편 전체의 인상을 확 바꿔줌. 정기현, 최민우 작가의 단편은 특히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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