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숲 속의 저택 1943년 2월부터 유대인 은신처이자 지하활동의 중심지인 하이네스트에서, 브릴레스레이퍼르 가의 놀라운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42년 7월을 기점으로 네덜란드 전역에서 베스테르보르크 및 동쪽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는 쉼없이 운행됐고 유대인들은 은신처를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3년 차, 폭력을저지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고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독일군의 압력 없이도 순조롭게 굴러갔다. 어느 앳된 네덜란드 경찰이 이렇게말했듯이 "유대인 한두 명쯤 곤죽이 되도록 패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일요일을 보냈다고 할 수 없지." - P165
물론 핍박받는 이들을 돕는 비유대인 네덜란드인 역시 존재했다.하지만 이 경우 사달이 나기가 너무 쉬웠다. 은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호해 주는 이들의 제한된 식량을 얻어먹고 살며 충분치 않은 공간에 얹혀 지낸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맡겨진 아이들은 절대 말썽을 부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금방 알아챘다. 보호처를 제공하는 이들의 호의가 그들에게는 곧 생명줄이었으나 그 생명줄은 언제고 쉽게 끊어질 수 있었다. - P166
야니와 보프는 두 자녀와 함께 공식적으로 나르던에 전입 신고를 했으나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은 불법 체류자에 수배령까지 내려져 있었다. 피트에와 요세프는 거주지로 등록된 암스테르담을 이탈한 상태였다. 야피는 유대인인 데다 자전거 보관소 사업을 통해 저항활동을 한 반국가 세력이었다. 에베르하르트는 독일군 탈영병이었고, 유대인 여성과 자식을 낳음으로써 아리아인 핏줄을 더럽힌 민족의 수치였다. 린테는 유대인이자 에베르하르트의 탈영을 도운 공범이었다. 야니의 경우, 유대인 등록을 하지 않은 것도, 법적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결혼이 금지되기 전에 남편을 만난 것도 모두 천운이었다. - P166
완벽한 행정력과 빈틈없는 통계 수치는 네덜란드의 유대인 추방이매우 효율적이고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행방이 묘연한 유대인의 수가 무시하기 힘들만큼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약 2만 5,000여 명의 유대인의 행적이 묘연했다. 대부분이 등록 신고를 하지 않았고 거취도 불분명했다. - P166
5. 동료 미크는 나르던행 기차에 올라 어슴푸레해지는 암스테르담의 정경을바라봤다. 지난번 하이네스트를 방문했을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활동 노선은 정해졌다. 행동이나 관망 그 어떤 것도, 결정이 되돌리기 힘들게 굳어지는 걸막을 수 없었다. 저항투사들은 비정한 현실과 마주하는 중이었다. 순진하면서 다소 즉흥적이기도 했던 활동 방식은 점점 조직적이고 야심찬 계획으로 발전했다. 독일군 역시 더 폭력적으로 저항투사들을진압하기 시작했고,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저항군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초기의 저항 운동은 문서 위조, 은신처 제공, 지하 언론과 방해 공작에 집중돼 있 숫자가 날로 늘어났다. 그리고 보복당하는 사례도 급증했다. - P211
점점 더 많은 동지를 잃기 시작했고 미크 앞에 놓인 선택지는 그의 마음을 한층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헤릿 판데르베인과 등기사무소 테러에 대해 의논 중이었다. 이 작전은 여러모로 엄청난 후폭풍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또 다른 저항단체인 CS-6는 유대인 강제 이송이 시작된이후 무력 대응으로 노선을 변경했고, 친구 헤릿 카스테인은 나치 부역자 살생부를 추렸다. 미크는 자신이 전하는 소식이 브릴레스레이퍼르 자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임을 알았다. - P211
불과 몇 년 사이 암스테르담 거리 풍경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변해 버렸다. 물론 로테르담과 달리 암스테르담의 역사 지구는 아직 폭격당하지 않고 보존돼 있었고 운하와 강도 변함없이 중앙역에서부터카레 극장까지 묵묵히 흘렀다. 하지만 도시에 색채를 입히는 주역이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취를 감췄다. 상인과 일꾼, 점원, 배우와 악사, 지식인과 밤마실을 즐기는 사람들, 도서관 사서, 매일같이 술에취해 비틀거리는 단골손님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동물원 사육사까지 수만 명의 암스테르담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집을빼앗기고 기차에 실려 베스테르보르크로 보내졌다. 그저 그뿐이었다유대인 이름 카드가 보관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이민 중앙사무소에도 빠른 변화가 찾아왔다. 1943년 한 해를 지나며 ‘암스테르담‘이라고적힌 상자는 거의 텅 비게 됐다. - P222
5월과 6월, 대규모 유대인 검거가 마지막으로 시행됐다. 5월 26일,암스테르담 중심가에서 검거된 유대인들은 마위데르포르트 역으로 이송됐다. 아끼는 인형을 꼭 껴안은 아이들과 아름다운 모자를 쓴여성,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은 남성, 갓 파마를 한 할머니....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그들을 베스테르보르크로 데리고 갈 기차가 역에 도착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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