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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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직업에 귀천을 따졌기 때문에 이 말이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제가 없다면 말도 없었을 테니까.


문제가 없었기에, 문제 삼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귀천이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말로만 또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각종 직업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이 말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야 한다.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인 일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누구냐에 따라 귀천을 따진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와 직업에 성별이 없다를 연결시킨다면, 직업에도 성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예전 책들을 보면 특정 직업을 상징하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늘 특정 성별이 선택되곤 했으니까. 그만큼 직업에도 성별을 따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성별을 따지는 것이 인권을 위배하는 행위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당연히 직업에도 성별을 따지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성별이 할 수 없는 직업은 없다고 여기는 사회라고 봐야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특정 성별에게는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 또한 알게 모르게 그 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것이 점점 약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하다.


이제는 그런 압박을 없애야 한다. 어떤 직업이든 못할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냐 없냐로 따져야지 성별로 따져서는 안 된다. 또한 직업에 귀천을 따져서도 안 된다. 귀천을 따지지 않을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특정 성별, 특히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하기 힘들었다고 여기던 일들을 한 여성들이 있다. 열 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들이 택한 직업을 보면, 화물 노동자, 플랜트 용접 노동자, 먹매김 노동자, 형틀 목수, 건설현장 자재정리·세대 청소 노동자, 레미콘 운전 노동자, 철도차량정비원, 자동차 시트 제조 공장 노동자, 주택 수리 기사, 빌더 목수가 있다.


여전히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이 적지만 이제 이 직업들은 여성들이 할 수 없는 직업은 아니다. 당연히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이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이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이들이 그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을 때 겪은 일들이 마음에 걸렸다. 성차별도 차별이지만, 우선 화장실 문제. 바깥에서 일을 하는데 화장실이 없을 때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생각해 보라. 이것 자체가 가장 큰 성차별 아닌가. 화장실 문제가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성차별 문제 역시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노조를 중심으로 성인지 감수성 교육 등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 건설 현장에서 노조가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노조를 무슨 '건폭'이라고 폭력배 취급한 사람이 있었으니... 노조에 속한 건설 노동자들의 생활이 많이 힘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지도자인 양 하는 시대는 갔으니, 이제 노조를 범죄시하는 그런 시각들은 사라질 거라 믿는다.


처음에 시작한 아들이 어려움을 겪고,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은 '당당하라'다. 주눅들 필요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참여하라고. 못한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부딪쳐 보라고. 그리고 남들이 무시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또한 직업에 성별도 없다. 그냥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빌더 목수의 말로 맺는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엄청 멋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막노동'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요.' (빌더 목수 이아진 편에서.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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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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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로드의 글이다. [자미]를 읽고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은 다음에 읽게 된 글. 두 책을 이미 읽었기에 로드의 주장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함을, 그런 점을 평생에 걸쳐 이야기했던, 여성이자 레즈비언이자 흑인이고, 어머니, 시인이자 전사였던 사람.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으면 전사가 되려 했을까? 아니 전사가 되었을까? 전사로서 싸우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 오드리 로드라고 할 수 있다. 글로, 행동으로, 자신의 삶 전체로 차이를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보여준 사람.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감동적이다. 특히 첫글에 실린 이말. 1960년대에 인기를 끌었다는 포스터에 실린 말을 로드는 인용한다. '그는 흑인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형제입니다!' (36쪽)


무엇이 문제일까? 여기서는 차이를 무시하려 한다. 왜 흑인이 아니라고 하나? 물론 흑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라고,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흑인인 것은 명확하다. 그래서 이 글은 흑인이라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뭉뚱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로드는 이 문장을 바꾼다.


'나는 흑인 레즈비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37쪽)


'그'에서 '나'로 주체를 바꾸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서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면서 형제, 자매라는 말로 함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함께함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그 차이를 품고 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오드리 로드의 이 말이 바로 이러한 차이의 인정, 함께함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다.


'우리는 우리의 차이 속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가장 취약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들 중 두 가지는 차이를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 차이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177-178쪽)


이것, 차이를 다리로 만드는 법. 이것에는 차별에 대한 분노, 그것을 고치려는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알 수 있다. 분노가 배제와 적대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했던 것.


'내가 배워야 했던 것은 통제나 억제가 아니라 나의 분노를 행동의 원료로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나의 분노에 양분을 대는 바로 그 억압적 환경을 바꾸는 행동의 원료로 분노를 활용하는 방법 말이다.'(63쪽)고 하고 있으니, 이 말에서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차이를 없애라고 주문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흑인 레즈비언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정말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36쪽)라고.


그렇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무작정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한 연습을 통해서 고정관념이 무너져 가게 될 테니까.


이렇듯 오드리 로드의 글을 읽으면 고정관념에 갇힐 새가 없다. 고정관념에 숭숭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뚫린 구멍으로 차이가 들어온다. 차이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다리가 된다.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다른 생각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나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 이런 상태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오드리 로드가 시인이자 교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


로드의 이 말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다른 무엇보다 배움의 장치이다. 진실한 감정을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배우는 것들이 있다. 함께 소통한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진실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가르치는 일이다. 참된 시를 쓴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다.' (145쪽)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차이를 무시하거나 차이에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여 그러한 차이들이 세상의 어려움이라는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들이 될 수 있음을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서 깨닫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로드의 말처럼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오드리 로드의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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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 호모심비우스
최재천.팀최마존 지음 / 더클래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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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외면할 수 없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온몸으로 덤벼들자.'(20쪽)


이런 마음가짐, 행동이 바로 양심이고 양심의 실천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욕인가? 그럼에도 자신이 양심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양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런데 양심을 잊고, 또는 잃고 사는데 남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양심 없음은 사회를 어둠으로 몰아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들, 또 생명체가 아닌 존재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이처럼 양심이 없다는 말을 들어도 다 같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더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양심 없는 행동이, 말이 다른 존재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양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재천 교수의 강연 중에 양심과 관련이 있는 강연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총 7개의 강연이 실려 있는데, 영상으로 볼 수도 있게 큐알코드를 제공하고 있으니, 책을 읽고 또 영상을 찾아 봐도 좋겠다.


첫 강연은 서울대 졸업 축사로 시작한다. 서울대라는 이름이 지닌 가치를 우리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누리고 사는지도 다 안다. 그렇게 큰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신들의 말, 행동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다른 존재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최재천 교수는 강연의 마지막에 '부디 혼자만 잘 살지 말고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끌어주십시오'(40쪽)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사회에서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집단이 서울대 출신들이라면, 그들은 그보다 더 남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지닌 양심일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를 보면 서울대 출신들도 그들 나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지만.


다음은 복제한 반려견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복제한 반려견은 진짜 반려견일까라는 질문을 하는데, 여기서 진짜란 세상을 떠난 반려견과 똑같은 존재라는 의미다. 아니라는 것이 최재천 교수의 주장이다. 복제를 했다고 해도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세상을 떠난 반려견을 잊지 못해 복제 반려견을 들이려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여기에 복제 인간에 대한 문제까지 더해지면 과연 우리는 복제를 어떻게 봐야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세 번째, 네 번째 강연은 수족관에 갇힌 동물 이야기다. 제돌이로 대표되는 돌고래와 롯데아쿠아리움에 있는 벨루가 이야기. 


대양을 누벼야 하는 그들이 수족관에 갇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인간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존재의 생활과 환경을 제약하는 것이 지구라는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이 된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고, 자신들의 본성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데, 그것을 인간이 막고 있는 현실. 그래서 그들을 자신들이 본래 살던 환경으로 보내주자는 운동을 하고,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기업 이야기도 있지만. 벨루가는 지금도 롯데아쿠아리움에 있으니.


다섯 번째, 여섯 번째는 과학자(연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 이유도 양심 때문일 것이고,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금에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연구처럼 보이는 그러한 연구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주장.


진정 과학의 발전을 위한다면 기초 연구비를 꾸준히 오랫동안 지급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국가가 해야 한다. 기업은 당장의 성과를 내는 연구에 지원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연구에는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국가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러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것에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마지막 강연은 호주제 폐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우리나라는 호주제라는 제도는 없다. 호주제가 가부장제를 대표하는 남녀불평등을 상징하는 제도였기에 폐지는 당연하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호주제가 폐지되고 나서도 과연 남녀불평등이 완전히 해소되었느냐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한번에 해결할 수는 없으니...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한번에 청소한 헤라클레스는 없다고 해야 할 테니... 이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진화와도 어울린다면, 서두르지 말고 그렇게, 마치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듯이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것이 바로 '양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연구실에서 연구에만 전념하지 않고 사회를 향해, 권력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바로 최재천 교수의 '양심'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인용한 말. 그것이 바로 양심이니, 그런 양심 버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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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평전 - 솥에서 난 성자
김형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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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어렸을 때 이름은 박진섭, 그 다음 이름은 박처화, 그 다음이 박중빈. 오랜 구도 끝에 진리를 발견한 사람. 발견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린 사람.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일제시대. 민족이 억압을 받던 시대. 민중을 구원한다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민족 구원? 아니다. 민족이라는 한계를 정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세계인을 구원하려는 목표를 세운다. 이것이 종교다.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 지금은 특정 집단에 국한되어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있지만, 종교의 처음이 그랬을까?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었던가. 누구나 나와 같은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 나만이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깨우치는 세상. 그렇다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강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과정.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소태산! 한자어로 살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대였고, 호(號)라든지 자(字)라든지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한자를 썼으니, 박중빈 역시 자신의 호를 한자로 음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솥에 산'이라고 부른다. 솥을 생각한다. 솥이 무엇인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공간 아닌가. 그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열기와 습기 등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을 견뎌내면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것을 하는 존재가 바로 솥이다.


쌀과 물을 넣고 끓이면 밥이 되듯이 솥은 하나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솥에 산'이라는 이름에는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한 자신을 말해주고 있으며,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게 한다는, 함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솥에는 어떤 존재들이 들어갈까? 소위 귀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갈까? 아니다. 솥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간다. 그냥 보통 존재들. 그것들이 솥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 나온다. 그렇다고 솥에 보통 것들, 귀하지 않은 것들만 들어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솥에는 귀한 존재들도 들어간다. 당시 귀하던 고기도 솥에 들어가 삶아지지 않던가. 그러면 다른 음식이 되어 나온다.


즉 '솥에 산'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 약한 하층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권층도 포함한 모두를 아우르는 진리. 그것을 설파하고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 맞게 소태산은 약한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간척사업을 해서 식량난을 해결하고 자금을 확보하려든지, 당시 가장 약한 층에 속했던 여성들도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활동을 하게 한다든지, 일제 순사 출신까지도 포용을 하며, 일본인인 경찰 고위 관료조차도 함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다양한 종교를 아우른다. 진리의 길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 사람을 배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끌어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도록 할 뿐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도 강조한다.


지금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소태산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엄혹한 일제시대, 어떤 사람들은 소태산이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3.1운동 당시 제자들의 태도에서도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소태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때가 오지 않았다는 판단도 있고, 종교를 민족의 한계로 국한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있다.


이런 소태산의 모습에서 예수나 부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들 역시 민족적 요구와 진리 추구 사이에서 민족의 입장에 서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민족의 경계 내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로 설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종교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경계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핍박을 받고 있지만,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 전체는 아니니, 다른 민족의 성원들과 함께 그러한 억압을 떨쳐내고 진리의 길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솥은 자신에게 들어온 존재들을 가리지 않는다. 그 각각 다른 존재들이 솥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일, 내가 어거지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소태산은 그런 일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된 법은 어디로 갈까? 일귀하처(一歸何處)라고 묻는다고 한다.


어디로 가긴. 다시 만법(萬法)으로 가지. 그 만법은 예전과 같은 만법이 아닌 변한 만법. 즉 만이지만 하나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솥에서 다른 존재로 하나가 된 존재는 다시 여럿에게로 돌아간다. 여럿에게로 돌아가는 하나. 그 만법과 하나가 바로 원이다. 일원이다. 돌고돈다.


하여 원불교의 상징이 원이다. 돌고 돎.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소태산 박중빈.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남겼던 진리의 길. 그것은 희망의 길이자 행복의 길이었을 것이다. 솥 속에서 다른 존재로 변한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태산이 우리에게 보여준 진리의 길일 것이다.


참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평전이었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만법귀일이 아니라 만법이 만법으로,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만들고 더 높고 튼튼하게 쌓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너는 몰아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해야 할 존재라는 것. 솥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기를 함께 견뎌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뜨거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안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소태산의 사상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종교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일생을, 고민을, 그가 한 실천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로 이 책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부처님 오신 날. 소태산 그의 사상과 실천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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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빈·송규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창비 한국사상선 20
박중빈.송규 지음, 허석 편저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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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 박중빈은 들어봤는데, 송규는 처음이었다. 하긴 원불교 신자도 아니고,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원불교를 창시한(?) 사람이 박중빈이라는 사실은 역사 시간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 다음을 이은 사람까지야.


종교 지도자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사상가로도 볼 수 있다. 사상가로 이들을 보면 굳이 종교라는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이 책에 실린 박중빈의 [대종경]을 보아도, 특정 종교로 국한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근본은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종교들이 나왔지만, 그것은 방편에 불과하고, 그 종교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는 것이 박중빈의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이비 종교는 뺀다. 박중빈 역시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종교나 사상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들의 사상이 무엇일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사상 아니던가. 그 행복이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적 부를 뜻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사상가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를 실천하면서, 그 진리를 후대에 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행복 추구를 모든 사람들이 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를 이룬 사회가 될 터이다.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가니, 어떤 특정한 종교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정전]과 [대종경]이 수록되어 있고, 정산 송규가 쓴 [정산종사법어] 중 일부와 천부경 해설이 실려 있다.


무릇 모든 종교의 경전이 그렇듯이 좋은 말, 경청해야 할 말, 실천해야 할 말들이 실려 있다. 박중빈이나 송규가 말하듯이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 그럴 듯한 말만 늘어놓아서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쉬운 말로 표현을 하고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이해하는 데서 그치면 안 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더 부연할 것도 없고...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는, 정말 우리가 명심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말이구나 했다.


'세상에 세가지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나니, 하나는 마음에 어른이 없는 사람이요, 둘은 모든 일에 염치가 없는 사람이요, 셋은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이니라.' (288쪽. 대종경, 요훈품 38)


햐, 이 구절, 누구에게 딱 맞는 구절 아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를 훈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뻔뻔하게 잘못을 하고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 그러니 그것이 악인 줄도 모르고, 혹 악인 줄은 알지만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은 알리라. 그만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하니, 이들을 어떻게 제도(교육)할 수 있단 말인가. 박중빈 같은 사람도 힘들다고 했는데... 참.


그러니 요훈품에 나오는, 특별히 잘나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이 말이 다가온다. 보통 사람이라고 공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그 사람에게 특별한 수행법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니.


'대중 가운데 처하여 비록 특별한 선과 특별한 기술은 없다 할지라도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한 공을 쌓는 사람은 특별한 인물이니, 그가 도리어 큰 성공을 보게 되리라.'(288쪽. 대종경, 요훈품 40. )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일, 박중빈은 도를 닦기 위해 특별히 출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서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꾸준히 하는 것, 다만 그것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책을 읽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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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03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새기고 또 새깁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되지 않아야할텐데요...ㅠㅠ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kinye91 2025-05-03 12: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려먼 잘 들을 수 있는 귀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