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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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197쪽) 

절충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양쪽을 다 편드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느 한쪽으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하면 작품을 완전히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에 대한 평가가 완벽하게 일치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작가에 대한 평가로 인해 작품도 평가가 달라진다면, 외적인 이유로 작품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여러 작가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답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의 독재자였던 밀로셰비치를 지지(?)했다고 알려진 페터 한트케를 저자는 비판하고 있지 않다.


한트케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끝까지, 아마 이 책에서 저자에게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작가는 페터 한트케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밀로셰비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면을 보면 작가에 대한 평가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작가를 평가하는 데는 수많은 자료들이 필요할 테고, 어떤 면에서는 시간(역사)도 필요할 테다. 그러니 동시대의 작가를 평가하면서 그의 작품을 그와 연결지어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작가의 잘못이 명백한 경우는 예외다. 범법자를 저자 역시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범법자들의 사고방식이 작품 속에 은연 중에 나타날 수도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작가의 사상이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 경우는 판단하기가 쉽다. 범죄를 옹호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인데... 그러한 작품이, 가령 나치의 학살을 옹호하는 작품이라든지, 반유대주의를 선전하는 작품, 아동 성착취를 지향하는 작품 등등은 그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허용이 되지 않을 것이고,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더더욱 허용되지 않을 테니까) 대부분의 작품은 표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니, 이런 경우는 공론을 통해서 작품을 검증해야 한다고 한다.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대입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니,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사상을 찾아내는 읽기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 많은 것들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수 있으니, 그러한 읽기를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때는 몰랐고 또 옳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고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역사로부터 관점이 달라지고,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날 수 있으니까. 작가와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행적도 역사를 통해서 새롭게 밝혀진 것들이 있고, 그러한 새로운 사실들로 인해 작품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다고 작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떻게든 작품 속에는 작가의 사상과 경험이 녹아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작품 속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자신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펼치면서 사람들을 호도하려 할 때, 아마도 그 작품은 작가를 옹호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호응을 받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외면받을 것이다.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작품들에는 무엇이 있다. 작가가 잘못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작품 속에는 사람들을 끄는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은 세월의 힘을 견뎌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으라는 메시지가 있기에 살아남는다. 그 무엇을 찾는 읽기, 토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잘못된 행위를 한 작가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작품은 작품 나름대로의 생명이 있으니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여러 사람의 (동시대인과 미래 세대들) 읽기와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대에 거스르는, 즉 시대에 맞지 않는 작품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공론장의 역할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도 적용이 된다. 한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작가가 잊혀지기도 하고,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던 작품이 새로운 사실들의 발견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어 비판받는 경우도 있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나 작가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작가란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작품은 그러한 작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다.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독자들도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사는 시대의 공론장 속에서 작가와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리기보다는 이 작품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논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지녀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인가 하는 점을 살펴야 할 테고. 그러한 작품은 역사의 심판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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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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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이 있다. 긍정으로 쓰는 말이다. '개천에서 용난다'와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천'이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용'은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존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자수성가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사람을 말한다. 과거와는 단절된 현재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때 과거는 극복해야 할 무엇이지 자신을 이루고 있는 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지 않은 것, 떨쳐버려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이 지나온 과거다. 


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무시를 한다. 개천을 빠져나온 용이 다시는 개천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자수성가한 사람 역시 자신이 자란 환경에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곳은 지워버려야 할 곳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는 이곳의 사람들, 그리고 미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자수성가란 말과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능력주의'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곳을 벗어났다는, 그러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자신이 그곳을 벗어난 것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일까? 노력이나 능력도 있었겠지만 우연이나 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환경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신은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환상을 지니고 있으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된다. 자신과는 다른 무능력한 사람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경멸받아 마땅한 사람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노력을 한다. 능력을 발휘하려 한다. 한데 어떠한 조건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우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 속에 갇혀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디디에 에리봉이 쓴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이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노동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곳을 벗어난 그는 랭스에 살고 있는 부모님을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시대에 갇혀 지낸 존재라고, 교류도 하지 않는다. 형제들과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잘났으니까. 노력을 해서 벗어났으니까.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함께 본 사진들을 통해 다른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렇게 무시했던 그들의 삶이 무시당할 삶은 아니었음을. 그들 역시 그런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그것이 랭스로 되돌아간 그가 깨달은 것이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뒤돌아보는 경우가 드문데, 그는 뒤돌아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성소수자이자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성소수자에 대한 글을 쓰고, 성소수자에 차별에 맞선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이 편견과 모욕에 갇혀 살고 있음을,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제약을 받고 있음을 이해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는 되는데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그것도 가장 가까운 노동계급인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는 여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하나가 아님을. 노동계급 출신의 사람들이 계속 어렵게 살아가고,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것도, 그들이 어쩌다 극우세력에 투표를 하는 것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극우세력에 투표를 한다고 비판만 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단지 개인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랭스를 되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는 커다란 조건이 두 개 있었음을, 하나는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것과 또다른 하나는 성소수자라는 것을.


성소수자로서의 삶,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이해하면서 노동계급을 이해하려는 자세는 지니지 않았음을 깨달으면서, 이제 그는 과거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살피는 관점을 지니게 되는 것, 개천에서 난 용이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다시 개천에 가서 개천을 살피는 일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능력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성공한 디디에 에리봉을 통해서. 몇몇 성공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다수의 사람들을 비판하는 관점을 버려야 함을. 그들을 틀 지우고 있는 환경을 파악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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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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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를, 영국에서 주는 유명한 문학상을 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노벨문학상을 타는 데 이바지한 작품조차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런 책을 읽힐 수 있느냐고 도서관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운동을 하는 나라에서, 과연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비치될 수 있을까?


있겠다. 왜냐하면 읽히기 전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또 대부분 책을 도서관에서 퇴출시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도, 제대로 읽지도 않으니까. (다 그렇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대부분은 그렇겠지만)


오드리 로드의 책은 꽤 번역이 되어 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블랙 유니콘]. 그리고 [자미]. 물론 오드리 로드에 대한 평전도 있다.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평등을 향한 오드리 로드의 주장을 담은 책이기에 도서관에 소장하는 것을 별로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평등을 반대하지는 않으니까. 지금은 성소수자에 대한 불평등을 대놓고 자행할 수 없는 시대니까.


하지만 성소수자로 자라나면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자미]는 다른 대우를 받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직도 성소수자 이야기가 전기로 나오면 그것을 읽는 학생들이 성소수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렇지만 이 책은 도서관에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저자가 전기나 회고록, 또는 자서전이라는 이름 대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서 '자전신화'라고 했는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서전과 신화를 합친 말. 그렇다. 이 책이 쓰인 때가 1980년대 미국이지만 미국에서도 과연 이때 성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면에서 그러한 불평등, 어려움을 겪고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이제는 성인이 된 흑인이자 여성이고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성소수자인 오드리 로드의 성장기는 거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성장하기 전에 스러져 간 사람이 많으니까. 잊힌 사람도 있고, 스스로 물러난 사람도 있으니, 이 책에서도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한 친구 제너비브(제니)의 이야기도 있듯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화'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사람'이라는 그러한 말이 생각나듯이, 오드리 로드는 살아남아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니,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자전신화'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더라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으니, '위인전' 읽히기 좋아하는 이 나라에서 오드리 로드의 이 이야기는 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 (사실 읽은 책이 [시스터 아웃사이더]밖에는 없지만)과는 다르게 20대까지 삶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즉 운동가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주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그러한 운동가가 되는 오드리 로드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흑인으로 태어나 겪게 되는 일들, 흑인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온갖 차별들, 여기에 흑인여성 레즈비언으로 겪게 되는 더 많은 일들이 시간 순서대로, 오드리 로드가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일, 감정, 사랑 등이 펼쳐진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가는 오드리 로드를 만날 수 있으며, 그가 경험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랑으로 오드리 로드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불평등을, 불합리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이 책이 여성들에게만 의미가 있지는 않다. 이 책에서는 레즈비언으로 나오지만 이는 오드리 로드가 그러한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고, 성소수자들이라면 대다수가 겪었던 일들이기 때문에, 성에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말고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고 그렇고.


이 책 제목이 된 '자미'는 캐리아쿠 말로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여자들로부터 받은 삶들이 오드리 로드를 '전사'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전사'가 나오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떤 책을 두고 도서관에 있을 만하다 아니다는 논쟁도 할 필요가 없어야겠고.


20대 초반까지의 삶을 다룬 이 책을 먼저 읽고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 이 책에서 오드리 로드가 깨달아가는 것들이 어떻게 주장으로 발현되고, 사회를 바꾸는 '전사'로서 하는 주장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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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물 (리스타트 에디션) - 우리는 이미 최악의 독재 속에서도 변화를 일궈냈다
조국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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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11시. 헌재 선고가 있기 전에 이 책을 읽고 싶었다. 윤석열 대통령(이후 직위 생략)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조국이라는 생각에.


윤석열이 검찰총장이 될 때 민정수석으로 검증을 담당했던 사람이 조국이고,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이 되자 가장 반대를 하고 조국에 관한 수사를 한 사람이 윤석열이니, 둘은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자신들도 상극인 줄 몰랐으리라. 검찰 개혁이라는 대의 앞에서 한 편에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윤석열이 검찰 개혁을 하겠다고 한 것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검찰총장이 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고, 적어도 조국은 그렇게 믿었을 테니. 


(윤 총장에 대해 당시 집권세력 전체가 기만당했고 그 결과 오판을 했다-41쪽 => 이 말은 좀더 생각해 봐야 한다. 당시에도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하니...집권세력 전체는 아니고, 당시 검찰개혁을 추진에 매진하던 집권세력이라 하는 편이 좋을 듯. 왜냐하면 윤석열은 검찰개혁을 하겠다고 면접 때 이야기했다고 하니, 검찰개혁에 다른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을 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둘이 '법'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 반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국은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법의 지배 rule of law'를 말하고, 그것이 법치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윤석열은 '법을 이용한 지배 rule by law'(67쪽)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는 법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놓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법은 변해야 한다. 그리고 법을 변하게 하는 사람은 법조인이 아니라 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판결을 통해서 법조인이 법을 시대에 맞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시대를 읽고 사람을 이해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법조인의 법 적용은 달라지니, 법을 바꾸는 존재는 시민들이라고 해야 한다. 즉 시민들을 위한 법인 것이다. 


반대로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법은 고정불변의 것이다. 법은 어떤 형태로든 지켜져야 할 것이다. 문구 그대로... 아니, 문구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조인의 선고대로. 따라서 법을 이용한 지배에는 약자를 고려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법을 알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800원을 횡령했다고 해고된 운전기사의 이야기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법을 이용한 지배다. 이런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수천억 원을 횡령한 사람들이 처벌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같은 법조인들(법조인들을 판사, 검사, 변호사로 나누면, 이들이 모두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자신과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 판사-판사, 검사-검사, 변호사-변호사가 서로를 같은 법조인들이라고 여긴다고 정리하자)에게도 법은 무한정 관대하다.


조국은 그러한 법의 적용에 반대한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부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지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들은 이 책에 나온 법가의 '상앙'의 예를 자신들에게도 적용해야 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지닌다.


조국은 이 책에서 자신의 그간 행적을 통렬히 반성하고 있다. 자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할 수 있었음에도 또는 해야만 했음에도 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자신을 비롯해 우리 사회가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조국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지금은 영어의 몸이 되었지만, 그가 적절히 견제하지 못한 '법을 이용한 지배'를 하고자 하는 자들로 인해 교도소에 갇힌 몸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조국이 책임을 지는 것은 교도소에서 나온 다음에 어떻게 실천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한 많은 개혁들, 정책 방향들을 이제 '조국혁신당'을 통해서, 그 당을 통해서 다른 당들과 연합해,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아직은 그가 교도소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조국혁신당'은 건재하니, 그 당을 통해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이 책의 맺음말에서 루쉰의 말을 빌려 '등에 화살이 박히고 발에는 사슬이 채워진 몸이라 날지도 뛰지도 못하지만, 기어서라도 앞으로 가려고 한다'(325쪽)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국의 결심이겠지.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2014년이다. 그 책의 전면 개정판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 이후의 일들도 이 책에 나온다. '법'을 통해서 자신의 신념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 그가 어떻게든 앞으로 가려고 한다 했으니, 지켜볼 일이다. 우리 역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고.


헌재 선고를 앞두고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윤석열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 그가 말하는 '법의 지배'와 '법을 이용한 지배'가 어떤 쪽으로 갈지 판가름 나는 날. 


우리 사회는 다시 '법을 이용한 지배'를 허용할 것인지, 이제 다시는 그런 '법을 이용한 지배'는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줄지, 그리고 디케가 눈물을 흘리지 않게 만들지 눈 부릅뜨고 지켜보기 위해서... 


그 전에 이 책을 읽으면 좋겠지만, 그 후에 읽어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그가 또 우리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덧글


내가 읽은 책은 2023년 판인데, 이 글을 쓸 때 알라딘 상품 검색에서 찾을 수가 없다. 내용이 아마 달라지진 않았으리라. 혹 추가된 내용이 있더라도 큰 의미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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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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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마지막 글이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책으로 엮어 나온 글들이다.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 나치의 광기를 피해 라틴아메리카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츠바이크다.


참으로 어두운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서도 빛을 발견하려고 했던 사람이니 그의 글을 읽으면 어떤 위로를 받는다. 지금 시대에 그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이 시대 역시 어두운 시대임을 반증하겠지만.


나치의 광기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다면 지금 우리 시대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대두하는 신나치들... 이와는 다르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우리들 생활을 잠식해서 자본으로 인한 무역전쟁과 국가간의 전쟁까지 일으키려 하는 모습, 그리고 여전한 종교 갈등. 당시에는 유대인이 약자였다면 지금은 유대인이 강자가 된 세상. 강자와 약자의 처지는 바뀌었지만 어두운 시대는 사라지지 않았으니...


처음에 실린 글은 자본주의 시대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물론 이 글은 대놓고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필요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안톤이라는 사람을 통해 츠바이크는 이런 세상을 꿈꾼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모두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22쪽)


처음에 만나는 글부터 따스하게 다가온다. 어둠보다는 밝음이 먼저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다 다음 글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라는 글이다.


용기, 이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고,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용기, 잘못을 잘못이라고, 잘못이 아님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그때에.


그런 용기가 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어두운 시절에'라는 글이다. 어두운 시절이 그때만이 아니고 지금도 어두운데, 여기서 우리는 별을 찾아야 한다. 그 별을 찾아 보여주고, 별과 같은 삶,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용기이기도 하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몸과 숨을 분리할 수 없듯이 영혼과 자유를 분리할 수 없음을 인식하기 위해 먼저 어둠의 시간이, 아마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 우리에게 닥쳐야 했습니다.' (116쪽)


어둡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나는 별을 보고 자신의 삶을 그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는 말. 명심해야 한다.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느 글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특히 마지막 글은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미래를 선취하고 있음을,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미래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언급한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가 쓴 [묵시록의 네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츠바이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소설에 등장한 하르트로트라는 인물이 히틀러의 전신임을 보여주면서 '작가가 정치학 교수보다 당대와 미래를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보여주었다'(130쪽)고 하고 있으니,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현실의 세상을 바꿔갈 수 있음을 생각한다.


이처럼 이 책은 어두운 시대 빛을 보여주는 츠바이크의 글들을 모아놓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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