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미친 사람들 - 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 흄세 에세이 6
카렐 차페크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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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스페인 여행기다. 그는 스페인으로 가는 여정에서 특급열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지금은 기차 여행도 빠르다고 할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특급열차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교통수단이었으리라. 그런 교통수단을 타면 사람이 주체가 되지 않고 객체가 됨을, 무엇을 할 수도 없이 그냥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게 되어 '관에 드러누운 시체처럼 잠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14쪽)고 한다.


그럼에도 특급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을 때는 그 나름의 묘미가 있다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국경을 넘을 때, 다른 집들과 다른 언어, 다른 경찰들, 다른 색깔의 토양과 다른 풍경을 지닌 낯선 세계로 들어간다는 건 언제나 내게 새로운 기쁨으로 다가온다'(16쪽)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체코를 떠나 독일,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에 도착하게 된다.


스페인에 도착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데, 인물, 풍경, 풍속 등을 소개해주고 있다. 지금도 우리에게 낯익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으며(세르반테스,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고야 등등),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톨레도 등 많이 들어본 지역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투우 경기에 대한 소개도 하고 있으며, 플라멩코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투우는 동물학대로 요즘은 거부되고 있지만 한때 스페인에서 대유행했던 행사였으니 차페크가 그것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페크는 투우에 대해서는 양가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반려동물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렇다고 투우를 그냥 거부하지는 않는다.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지닌 고유한 풍습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고 있다.


영국 편처럼 날카로운 풍자는 없지만 스페인의 다양성에 대해서 잘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다양성이 필요함을, 그런 다양성이 우리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여행이 필요하고.


꼭 여행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다양한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자신만의 관점에 빠져 있지 않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엘 그레코를 이야기하는 글에서 '눈이 자신의 비전에 열정적으로 고정된 사람은 모두 조금 미친다. 혹은 적어도 그는 비전의 소재와 형식을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자신에게서 가져오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진다.'(55쪽)고 했다.


미쳤다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에 집중한다는 의미고,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다는 것이 고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에 대두되었던 예술의 흐름으로 매너리즘은 이상적인 형태와 조화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예술표현을 하는 경향이라고 하니, 바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차페크가 말하는 매너리즘은 자기 습관에 빠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쓰는 뜻과는 거리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세계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세계도 중요하다는 것. 즉 나만 옳다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차페크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 다양한 사람들, 풍습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차페크의 이런 생각은 이 책 말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지금도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이기도 하고. 여행을 하면 다름을 통해서 나를 다시 보고, 나를 더 풍요롭게 하듯이, 그만큼 다른 존재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게 된다. 그의 마지막 말로 스페인 여행기를 맺고자 한다.


'... 자신들만의 문명화된 모습이 받아들여져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사랑에 대해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으니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 우리가 이렇게 만나 기쁘니 국가들의 연맹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다만 주의할 점은, 그 나라들이 제각기 개성을 살려서 꾸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는 저마다 다른 머리카락 색깔과 다른 언어를 가져야 하고, 그 나라만의 독특한 관습과 문화를 지녀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그 나라만의 신을 가질 권리도 있어야겠지요. 왜냐하면 모든 차이점을 그 자체로 소중히 여겨질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기에 우리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우리를 구분 짓는 모든 것으로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어봅시다!' (219쪽)


이런 혜안이라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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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 - 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흄세 에세이 5
카렐 차페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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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왜 읽을까?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다른 사람이 가본 다음에 그곳에 대해 알려주기 때문일까? 단지 가보지 못한 곳을 알려준다는 이유로 여행기를 읽기도 하겠지만, 여행기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여행기는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한다.


거울에 나를 비추면 내가 보인다. 그런데 그 내가 진짜 나일까? 내 모습을 대칭되게 보여주는 것이 거울 아니던가. 그렇다면 여행기는 나를 살펴보게 하되,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차페크가 영국 여행을 하면서 썼던 글이라고 하는데, 단지 영국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차페크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다른 무엇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여행기의 목적이기도 하겠다.


차페크 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머가 이 책에도 어김없이 담겨 있다. 또한 풍자와 해학도 넘쳐나고.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지금의 영국과는 엄청나게 다른 과거의 영국, 무려 100년 전의 영국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우리가 맞아, 영국은 그래, 하는 것들을 만나볼 수 있어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압도적인 느낌에 휩싸이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 그리고 아주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죠.' (10쪽)


이것이 바로 여행기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고, 여행기에 이런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제목을 '대놓고 다정하지 않지만'이라고 붙인 이유는 영국인들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차페크의 내용에서 따왔다고 할 수 있다. 기차 여행 내내 아무 말도 없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함께 가는데, 내릴 때 키가 작아 짐칸에서 짐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으면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짐을 그냥 내려주는 영국 사람들 이야기... 대놓고 다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을 차페크는 그러한 예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단순하게 영국 여행기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영국인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제목을 붙인 것은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다정한 표현을 하지 않는 영국 사람들의 모습과 더불어 거리의 모습을 '런던의 거리는 그저 삶이라는 물줄기가 집에 닿기 위해 거쳐가는 홈통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삶을 살지 않거든요. 무언가를 보거나 얘기하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지 않아요.'(22쪽)라고 비판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대놓고 다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무언가를 만들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반대로 광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연히 들르게 된 하이드 파크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여러 활동들을 한다. 즉, 우연한 장소에서는 서로 관계를 맺지 않지만 광장에서는 활발한 관계들이 맺어지고 있는 것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이 두 장면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역시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다. 그러나 광장에서는 무언가가 일어난다. 이 광장에서 차페크가 본 영국의 하이드 파크에서 일어난 일처럼 수시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또 다른 활동을 하는 많은 집단들이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광장을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아닌가 하고...


차페크가 런던의 거리를 보면서 천편일률적인 집들에 놀라는 장면(13쪽)이 있는데, 아마도 그가 서울에 오면 사각에 하늘 높이 뻗은 형태의 건물들만 즐비한 모습에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물론 빌딩 숲 사이로 고궁들과 한옥이 남아 있는 서울의 모습을 보고 다른 표현을 하기도 하겠지만.


그는 근대 예술과 과거의 활동들을 보면서 예술에서 '발전이라는 건 없습니다. '전진'과 '퇴보'가 아니라 끝없이 새로운 창작이 이어질 뿐이죠. 역사와 다양한 문화, 수집품, 세계 각지의 보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뿐입니다.'(47쪽)라고 하면서 예술에서 등급을 매기거나 발전, 전진, 퇴보라는 평가를 하는 것이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 예술에서 어찌 우월을 따질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


이처럼 차페크는 영국 여행을 하면서 영국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여행기가 거울의 역할을 하고, 앞에서 인용했듯이 다름과 비슷함을 통해서 충격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영국인들은 어디서나 영국인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국인들을 비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영국은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세계라고 생각하는지 차페크가 우려했던 것들을 '브렉시트'를 통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면서 다시금 반복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가 길지 않은 영국 여행임에도 영국의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영국의 모습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조국인 체코에서 반복하지 않게 하자는 마음을 담아 이 여행기를 썼다고 할 수 있다. 


차페크 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유머를 보자. 영국 음식은 맛없기로 유명한데, 우리나라 출신으로 영국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장하준 역시 그 점은 언급하고 있으니... 그런데 그 맛없음을 차페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음식이 그들의 성향과 이렇게 연결이 될 수 있다니... 그의 표현으로 이 글을 맺는다.


'훌륭한 영국 요리는 한마디로 프랑스 요리입니다. 보통의 영국인을 위한 보통 호텔의 보통 요리를 맛보면 영국의 우울함과 과묵함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죠. 압축한 소고기에 맛없는 머스터드를 발라 씹어 먹으면서 어느 누가 환하게 웃고 떠들 수 있겠어요? 이에 붙은 타피오카 푸딩을 떼어내면서 어느 누가 큰 소리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분홍빛 덱스트린에 담근 연어를 먹다 보면 누구든 지독하게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죠. 살아 있을 때는 물고기였다가 식용이라는 우울한 상태가 되면 '신발 밑창 튀김'으로 돌변하는 것을 아침과 점심, 저녁으로 먹고, 가죽을 우린 듯 시커먼 홍차로 하루 세 번 위를 그슬리고, 칙칙한 데다 미지근하기까지 한 맥주를 마시고, 특색 없는 만능 소스와 절인 채소, 커스터드와 양고기를 먹으며 살아왔다면 보통의 영국인에게 주어진 육체적 쾌락은 다 누린 셈이니 이제는 과묵함과 진지함, 엄격한 도덕성을 포용하기 시작합니다.'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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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3-06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페크 님이 남긴 글이 새로 나왔으면 찾아봐야겠습니다

kinye91 2025-03-06 14:14   좋아요 0 | URL
저도 차페크 작품들을 찾아 읽고 있어요.
 
모든 순간의 물리학 -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물리학의 대답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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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을 읽었다. 과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우주에 관해 서술하는 방식이 (그것이 비록 번역을 통해서였지만) 너무도 아름답다고 느꼈을 뿐이다. 이렇게 쉽고 읽기 편하게 과학 내용을 설명할 수가 있을까. 어려운 수식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과학책이라니... 


물론 로벨리는 과학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고 과학에 무지한 사람도 읽을 수 있게 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과학 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이라면 과학에 대해서는 수학과 마찬가지로 어렵다는 관념을 먼저 깔게 된다. 시험을 위한 과학, 시험을 위한 수학. 말로는 삶을 위한 과학, 수학이라고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던가.


그래서 이 책 역시 제목을 보는 순간 읽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많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라니... 과학하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 많은데 모든 순간이 물리학이라니, 이런 무슨 터무니 없는 말을.


하지만 우리가 과학없이는 살 수 없다. 비록 과학이론을 몰라도 우리 삶에 과학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럴 때 과학에 흥미를 불어넣어주는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와, 과학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


'이 책에 소개된 강의들은 현대 과학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9쪽)라고 시작하며에서 로벨리는 말하고 있다. 


그가 소개하는 내용은 과학의 여러 공식들, 수식들이 아니다. 어떻게 과학이 우리 삶에 들어왔고, 우리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시작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줄 뿐이다.


상대성이론이 나타나기 전까지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을 간단히 살펴본다. 그러면서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상대성이론이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게 했는지를 알려준다. 이런 과정에서 전문적인 지식은 필요 없다고... '아인슈타인의 예측에서든 리만의 이론에서든 그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만 인정할 줄 알면 됩니다'(29쪽)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전문적인 지식은 과학자에게 맡겨도 된다. 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학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과학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점을 명심하면 된다. 그러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과학이 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좁은 시야를 넓혀주며 하나의 시각만을 고집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런 면을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관계를 통해 잘 보여준다. 서로 다른 이론을 주장하지만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던 두 과학자. 양자역학에 관한 장에서 이들을 등장시킨다. 뭐, 양자역학이야 워낙 어렵다고 하니 말할 것이 없겠지만, 한가지 불확정성이라는 말은 기억이 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수많은 계기들이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나,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는 상태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과학이론을 설명하는데, 편하게 읽게 만든다. 그냥, 과학이 아름답구나 하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그러면서 이 책의 마지막을 인간으로 맺는다. 바로 과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추구하는 것도, 그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도 바로 우리 인간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우주를 탐험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서니까.


로벨리가 말하고 있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호기심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을 향한 것이지요.'(133쪽)라는 말. 그러면서 그는 지금 우리 시대를 걱정하기도 한다. 


'아마 지구상에서 개인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종은 우리 인간뿐일 것입니다. 나는 조만간 우리가 만든 문명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역시 진정으로 멸종에 이르는 모습을 의식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종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134-135쪽)


과학을 하는 이유도, 우리가 과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연에 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한계를 알아야 하니까. 그가 과학지식을 우리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며 그러한 다양성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우리들의 삶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음을, 그래서 다 안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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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 체코 대표작가의 반려동물 에세이
카렐 차페크.요세프 차페크 지음, 신소희 옮김 / 유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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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맞다. 재미있다. 웃으면서 읽고, 맞다, 맞다 맞장구를 치고,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하기도 한다.


차페크 글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을 무척 재미 있게 읽어서 이번엔 반려동물 이야기야? 하면서 읽게 된 책.


개와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들과 함께한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펼쳐보이고 있다. 가끔은 개나 고양이가 말하듯이 표현하기도 하고...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내용도 있지만, 차페크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자. 지금 생명을 대하는 잣대로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으니. 다만 현재에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야함은 명심하고.


키우던 개가 강아지를 낳았을 때 차페크가 한 행동은 지금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물론 그가 직접 실행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게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강아지들을 죽이게 한 것.


지금이야 중성화 수술이다 뭐다 해서 개체수를 어느 정도 조절을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없었으니, 태어나는 많은 생명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 개에 관한 이야기에서 차페크 역시 많은 강아지들로 인해 자신이 한 행위를 서술하지만, 그런 행위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는 개를 반려동물로 여기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애견이라고 하기보다는 함께사는 생명체로 인식하고 있음은 뒷부분에 나오는 고양이 이야기로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가 행한 잘못은 잘못으로 인식하고 그가 반려동물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차페크가 만든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왜 개 꼬리가 짧아졌는지, 왜 개가 땅을 파는지, 어째서 풀밭을 세 바퀴 도는지, 개의 품종에 따른 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지어내 개에게 들려준다. 그것을 우리가 듣고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고양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많은 고양이 새끼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하던 고양이가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고양이 새끼들을 분양하기 위해 모임에 참여할까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모습이 분명 진지했을 텐데, 읽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렇게 반려동물들과 함께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개와 고양이 이야기를 하다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에게 돌아온다.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차페크가 살았던 시대는 인간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으니... 다행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차페크는 2차대전 전에 세상을 떠서 학살을 면했지만 형인 요제프는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하니...


그는 개와 고양이에 관한 글을 쓰다가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한다.


'야생동물이란 믿음을 모르는 짐승이며, 길들여짐이란 그저 서로를 믿는 상태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 인간도 서로를 믿는 만큼만 야생동물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6쪽) ... 신뢰가 없는 상태는 야만의 제1단계이며, 불신은 정글의 법칙이다. 불신을 부추기는 정치는 야만의 정치다. 사람을 믿지 않는 고양이는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 야생동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 또한 상대를 야생동물로 보는 것이다. 상호 신뢰는 인류 문명보다 오래된 체제이며 그로 인해 인류는 인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 상태를 깨뜨린다면 인류가 만든 세상은 야생동물의 세계가 되고 말리라. (207쪽)


익살스러운 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바로 반려동물과 지내는 생활에 믿음이 있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것이 동물과 동물,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는 차페크의 마음이 이렇게 글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계는 과연 차페크가 말하는 믿음이 있는 세계일까? 반려동물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인간끼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재미있게 낄낄거리면서 읽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 생명과 함께 사는 일은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도 살피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금 깨우쳐준 차페크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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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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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하라고 한다. 낯선 곳으로 가서 낯익은 자신과 결별하는 경험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늘 가던 장소만 가지 말고 다른 장소에 가보는 일. 자신을 고정된 삶에서 변화 있는 삶으로 바꿔가는 일. 습관적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다. 여행은 그러한 경험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솔닛의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행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솔닛이 가보았던 낯선 장소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런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 잃기 안내서]는 '길 찾기 안내서'다. 우리는 길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가고 있던 길을 다르게 본다. 그때서야 의식한다. 의식을 하면 되돌아보게 되고, 앞을 살피고 좌우를 살피게 된다. 또한 빠르게에서 느리게로 바뀌게 된다. 살펴야 하니까.


길을 잃는 일은 길을 찾는 일의 시작이다. 그러니 길을 잃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솔닛의 말을 빌려 정의하고자 한다.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42쪽)


자, 여기서 잃는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다. 찾음이다. 그것도 이전에 있는 것에 무언가를 더 보태는 일. 그것이 바로 '길을 잃는다'가 지니는 의미다.


인생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실수와 실패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인생에서 실수와 실패가 없을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다음 인생이 달라진다.


길을 잃었다고 주저앉으면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그곳이 자신의 마지막 장소가 된다. 하지만 길을 잃었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면 그곳은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 시작하는 장소가 된다. 새로운 시작,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실수와 실패가 마지막 장소가 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면 누구나 실수나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이 이미 닦아놓은 길로 가려고 한다. 그냥 그렇게...


여기에서 솔닛의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154쪽)


이런 점에서 솔닛의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길을 잃으라고, 실수를 해보아야 한다고, 실패도 겪어보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실수와 실패가 용인이 되고 또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하여 솔닛의 이런 주장은 개인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야 한다고, 그런 일들은 이미 길을 잃어본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이런 주장을 솔닛은 글쓰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


'글쓰기는 즉각적인 대답이나 상응하는 대답이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도 있는 대화, 아니면 긴 시간이 흘러서 글쓴이가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다.' (186쪽)


이렇게 먼저 대화를 시작한 솔닛. 우리는 그 대화를 이어받아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길 잃기가 여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길 잃기가 나를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무언가를 더 보태어서 돌아오게 하는 여행. 그것이 바로 솔닛이 말한 길 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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