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너무도 멀리 와버렸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어디서 멀리 왔을까? 바로 흙에서다.


  흙에서라고? 흙은 바로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지금도 우리 발 밑에...


  발 밑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그들에겐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땅만 보인다. 땅은 있되, 흙은 없는 상태.


  그것이 현대 도시인들의 생활이다. 김기택 시인은 그래서 '그는 새보다도 적 게 땅을 밟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흙이라 하지 않았는데, 흙이 아니더라도 땅이라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야 할 것에서도 멀어졌는데, 하물며 흙이랴!


시골에나 가야 아니면 등산을 가야 흙을 밟게 되는데, 그래서 흙의 소중함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흙에 대한 애정을 담은 시집이 바로 이 [흙의 경전]이다. 흙을 경전처럼 소중히 여긴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기후 재앙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모습이 이 시집에 담겨 있다. 물론 흙과 멀어지는 사회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겪은 개발, 독재, 분단 등이 이 시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흙'이다. 땅이다. 무엇에 덮이지 않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러한 땅.


그래서 이 시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땅에 살아가는 존재, 논이나 밭에 내려온 새들도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 이런 인물들에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유흥이라는 이름으로 - 이 시집에 골프장 건설로 땅을 잃게 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니, 골프장을 과연 땅이라고, 골프를 치는 사람들을 보고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골프장에 깔린 잔디들은 도시에 깔린 아스팔트, 콘크리트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을 흙에서 멀어지게 한 역사가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주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시집의 뒤에는 연작시가 실려 있는데, 우리 개발의 역사 속에서 흙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개발로 인해 우리는 기후 재앙이라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니, 흙, 땅.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날이 더워지고 있다. 흙과 멀어져 더더욱 더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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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탁 걸리는 것이 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도 마음에 걸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왜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을까'


  쉽게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면...


  '귤을 만지작거리면

  껍질의 두께를 알 수 있듯이'


하지만 알 것 같은데 결국은 모른다. 아니, 애초에 알 수가 없다.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말이다. 말은 기호이기 때문에, 이 기호를 둘러싼 많은 의미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말을 하는 입(혀)를 아무리 살펴도... 말이 밖으로 나와 다른 존재에게 가 닿을 때까지 그 의미, 그 위력을 알지 못한다.


'혀를 굴려보면

말의 두께도 알게 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같은 말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자리가 정해졌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앉는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자세를 지니고. 그러니 하나의 말에도 수많은 의미가 겹쳐 있다. 


'창틀엔 무수한 손

의자 모서리엔 많은 무릎이 겹쳐 있다'


이때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내려 한다면, 오히려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상대의 말을 내가 더 많은 의미를 덧붙여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것이 말의 역할인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지 않은가. 상대의 속, 두께를 가늠하지 않고 앞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


'숨어 있는 의미를 헤아리려

애쓰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내가 한 말들을 잘 살펴야 한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또는 상처를 입은 말들을 하지 않았던가. 잘못된 말이 있었다면 그 말들을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그 말이 지닌 위력을. 좋은 말은 상대와 나를 연결해주는 못과 같은 역할을 하니.


'못이 가득 쌓인 상자 안에서

휘어진 못을 골라내면서'


하지만 잘못된 말은 우리를 잘 연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낸다. 상대만이 아니라 말도 제대로 쓰이지 못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지점에서 부적절한 말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생각한다

빗나간 망치가 내려친 곳을'


자, 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듣는 귀가 중요하다는 말과 같다. 잘 듣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늘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으려 해야 한다. 그런데도 잘 들리지 않으면, 무언가 이상하면 멈출 수밖에 없다. 다시 뒤돌아봐야 한다.


'두 귀를 세우고 뛰어가던 토끼가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처럼'


이때 나를 멈춰 세우는 말은 남의 말이 아니다. 바로 내 말이다. 잘못 나온 말. 상황에 맞지 않는 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 그 말이 화살처럼 나에게 와 박힌다. 아, 말을 걸러내지 못했구나. 


'앞니가 툭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다'


후회가 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발화된 말.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주워담으려 해도 말은 이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말 자체가 혼자라 아님을, 내가 홀로 앉아 있다고 해도, 그 자리가 내 자리라 해도 이미 누군가가 앉았던 자리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앉을 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붉어진 두 눈엔 이유가 없고

나의 혼자는 자꾸 사람들과 있었다'


엄청난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그 많은 말들 중에 남에게 상처주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서로를 이어주는 말들이 아니라 서로를 떨어뜨리는 말들. 그런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 제 자리만 지키려고 하는, 그 자리는 내 자리야 하지만, 아니다. 세상에 지정석이라 해도 나만의 자리는 아니다. 지정석 역시 함께 앉는 자리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19현대문학상수상시집 수상작 '지정석'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말이 나만의 것이 아니듯, 자리 역시 나만의 자리가 아님을... 그래서 더더욱 조심해야 함을.


작은 따옴표(' ') 안의 문장은 수상작인 안미옥의 '지정석'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2019 현대문학상수상시집.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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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에 관한 시가 많다. 


  '슬픔'


  이는 자신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세상과 불화할 때, 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감정 아닌가.


  무언가가 틀어져 있다는 마음. 그런 슬픔이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이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슬픔을 느끼는 주체가 자신이고, 이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행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슬픔은 이기적인가? 아니다. 타인을 위한 슬픔이 있다. 연민이라고도 할까? 무릇 종교는 그러한 연민, 즉 남을 위한 슬픔에서 오지 않았던가. 나만이 아니라 남도 나와 같이 고뇌, 번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느끼는 마음, 슬픔.


시인은 '이기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남보다는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목과 비슷한, 접미사 '-들' 하나 차이인 시를 보자.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김경미,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95년. 16쪽. 


이 시를 보면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꽃은 생명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고, 물을 먹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조차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슬픔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자신만이 지니고 있으려 한다. '벽 위의 박수근'은 박수근 그림을 의미할 텐데, 가난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박수근의 그림.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고, 그 가난함이 슬픔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러한 가난함을 이겨낼 마음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기적인' 슬픔이 된다.


오로지 자신만의 슬픔을 간직하겠다는 것. 이는 사회적인 관계를 떠나 자신의 세계 속에만 머무르겠다는 선언이 될 텐데... 그러한 슬픔은 정호승의 '슬픔'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그 힘으로 다른 존재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것,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슬픔으로 치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김경미의 시에서 슬픔은 오로지 개인적인, 자신에게만 머무는, 그 슬픔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그러한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자신을 유폐시킬 수밖에 없다. '굴원의 불빛'이란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드러난다. 세상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결국 자신 속에 빠져버리는 것. 그래서 시인은 '그냥 가만히 귀양갈까 해요'('굴원의 불빛' 중에서. 49쪽)라고 하는데,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아마도 시인은 지독한 슬픔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나 보다. 그러한 슬픔을 이겨내는 시보다는 슬픔에 빠져 있는 그러한 시들이 많은 것을 보니. 하지만 우리는 시인의 슬픔에 빠져 함께 허우적 댈 수는 없다. 


시인과 더불어 슬픔에 푹 빠져버린 경험, 그 경험을 통해서 슬픔의 밖으로 나가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 그것이 이 시집을 읽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 아닐까? 어쩌면 시인은 자신의 이기적인 슬픔을 통하여 사람들이 슬픔에서 벗어나 홀로가 아닌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시인이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본다'고 한 것은 이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고. 따라서 이기적인 슬픔은 나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로 확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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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년째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분노라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가?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분노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김수영 시인의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에 보면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집에는 이상하게도 앞을 보지 못하는, 또는 눈을 빼버린이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눈이 없는,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들이 많이 나오는 시집이다.  


  '시력을 잃은 눈동자가 씹힌다'('훔친 사과' 중에서 - 18쪽), '맹인 여자를 만났다'('사라지는 마을' 중에서-35쪽),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기차' 중에서-44쪽), '고양이의 노란 눈알이 떽떼구르르 굴러나왔어요'('고양이는 고양이일 뿐' 중에서-58쪽), '금방 어디론가 사라질 눈' ('좌절' 중에서-59쪽), 등등.


보지 못하는 눈과 보지 않는 눈은 어떻게 다를까? 보지 않으려 들면 보이지 않으니, 결국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어쩌면 우리는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입만 열고 산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작은 일에는 분노하지만, 특히 자신에게 관계된 일에는, 정작 분노해야 할 일에는 눈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면 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반 년째, 눈 멀고 귀 닫고, 그러나 입은 열어 자기 소리만 내는 그런 존재들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태도가 통하고 있는지... 아무리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적어도 옳고 그름은 판단해야 하지 않나. 옳고 그름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하고, 하고 싶은 행동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런 사람이 눈에 띄지 않으면 좋으련만, 왜 이리 눈에 잘 띄는지...


하여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내 마음이 타 버린다. 분노는 불이다. 이 불을 마음의 평정이라는 물로 꺼야 하는데,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 분노를 잡아 멈추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마냥 분노에만 머무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를 위해서도, 또 분노에 차 있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가득 차 있는 분노들을 끌 수 있는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반대가 되어야 한다. 귀를 열고, 눈을 뜨고, 그러나 입은 좀 다물고. 


윤진화 시집을 읽다가 6개월... 분노로 들끓던 내 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분노를 잡아챌 수 있기를 바라고.


     분노


육중한 무게의 분노가 헐떡인다

조금만 더 가면 저 분노를 낚아챌 수 있다

분노가 운동화 끈을 더 단단히 동여맨다

출발선에서 나와 함께 출발했던 분노,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먼저

앞서간다

유유자적 신문을 꺼내 읽는다

  -저개발지역 철거민 참사, 연쇄살인범 강호순,

  주한미군 만취 상태 방화, 장애인 쇠사슬 감금

  ......

또박또박 큰 소리다

나이보다 커져가는 붙잡고 싶은 저 분노, 

뒤돌아서 웃는 아멸친 분노, 

비워둔 수신함에 쌓이는 스팸 메일만큼이나

지워버리고 싶은 분노가

다시 뛴다

속도를 낸다

분노가 내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가 놈의 목을 감싸 넘어뜨린다

허방에서 뒹굴다 진흙이 묻은 분노,

고개를 서서히 꺾는다

분노가 입가의 피를 쓰윽 훔치더니

내 목을 짓누른다, 속삭인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나도 저 뒤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다

분노의 눈물이 내 몸을 적신다


윤진화, 우리의 야생 소녀. 문학동네. 2011년. 70-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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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족이라는 말이 광고에 쓰이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진짜 가족처럼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말을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말로 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은 조금 희생을 해도 그것이 가족이니까 하고 넘어가지 않나 하는 생각.


지나친 생각이다. 가족을 그렇게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이 포용보다는 배제를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때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가족이라는 개념이, 그러니까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말은 나쁠 수가 없다. 빅이슈 이번 호를 보면 표지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가족'은 다름을 인정하되 함께하는, 즉 함께한다고 해서 모두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솔직히 가족 구성원들도 같지 않다. 다 다르지 않나, 그러니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살고 있지 않나. 똑같을 수 없는 존재, 그런 존재들이 이 지구에 모여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긴다면 누가 누구를 배제하고, 또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그런 세상은 아니겠지.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에 좋은 감정과 좋지 않은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역시 말이란 어떤 맥락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가족이라는 말이 지닌 양가 감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많이 다르다. 이 젊은 정치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치를 싫어하지는 말되 정치인을 싫어하자고 말하고 싶다.'('정치는 당신의 삶에 관심이 있다'중에서 120쪽)


정치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련다. 다만, 그가 한 말. 그렇다. 정치는 우리의 생활이다. 하여 정치를 싫어하면 안 된다. 다만, 정치인은 싫어해도 된다. 어떤 정치인? 제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나서는 정치인,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정치인.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 내 편 네 편을 갈라, 우리가 남이가를 몸소 실천하는 정치인, 혐오 표현을 혐오 표현인지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아니라고 우기는) 내뱉는 정치인 등등. 그런 정치인은 싫어해야 한다. 아니, 싫어해야 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정치인이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라는 말이 서로에게 힘을 주는 쪽으로 쓰이는 그런 말이 될 수 있는 사회, 어쩌면 [빅이슈]가 추구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닐까 한다.


내가 읽는 [빅이슈] 335호는 아래 사진과 같은 표지였는데, 검색해보면 다른 표지 모델이 나온다. 두 표지가 함께나온 듯. 그렇지만 내가 본 책의 표지가 이것이고, 여기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말이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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