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하면 즐거움을 떠올린다. 설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기대. 망설임. 


  그런데 정호승 시의 여행은 그러한 것들과 거리가 있다. 정호승 시에서 여행은 삶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여정이다.


  결코 쉽지 않은, 그러나 가야만 하는 길. 하여 이 시집을 읽으면서 삶은 여행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가볍게, 즐겁게, 조금은 망설이지만 그럼에도 기대가 더 많은 여행이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나아가는 구도의 길.


  시인의 말에서 '시는 내 인생이라는 여행의 동반자이자 스승이다'(125쪽)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는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자 마음이 된다.


시인은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슬픔, 낮은 곳, 어려운 곳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것이 여행이다. 하여 여행은 자신을 걸고 슬픔으로 가는 과정이 된다.


슬픔에게 말을 거는 과정을 넘어서 이제는 슬픔과 하나되기 위해 가는 길, 그것이 여행이다. 이러한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여행은 궁극적으로는 홀로 가야 한다.


자신이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할 여행, 이것이 곧 삶이다. 함께하지만 홀로 갈 수밖에 없는 삶.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읽어야지 했던, 제목만 보고 시집을 골랐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이것은 여행을 하면서 읽을 시집이 아니라,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을 갖고 읽을 시집이라는 생각.


         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정소승, 여행, 창비. 2013년. 초판 3쇄. 10쪽


이런 내용과는 좀 다를지 모르지만, 이 시집에 실린 '사과'(44쪽)라는 시도 역시 여행이란 이러해야 한다고 하는 듯한 생각을 했다.


구족회화 작가들이 그린 사과 그림이 화랑에서 나와 행상을 하는 청년에게 건네져 많은 사람들이 사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시. '그것이 그들 사과가 가장 원하는 일이다'('사과' 마지막 행. 44쪽)라고 하고 있으니...


사과도 이러한 여행을 바라는데, 사람의 여행 역시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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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오드리 로드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상당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았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낸 시를 쓰기도 했다고 했는데, 마침 시집이 번역이 되었으니 읽어봐야지.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겪은 일들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물론 번역이 된 시라서 영어로 어떤 표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오드리 로드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다.


  유니콘 하면 뿔 달린 말이다. 주로 하얀 식의 말을 떠올린다. 왜일까? 그만큼 백인 신화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을 주무르던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니콘 하면 하얀 색의 말을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진 백인들은 처음에 흑인이나 인디오들이 인간인지 아닌지 가지고도 자기들끼리 논쟁을 했다고 하니, 그것도 모자라 자연사박물관에 그런 사람들을 전시까지 했다고 하니, 그들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이야기, 신화들이 지금도 사람들 무의식에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고정관념에 틈을 낸 사람이 오드리 로드다. 유니콘을 검은색으로 표현했다. 그렇다. 왜 상상 속 동물인 유니콘이 꼭 하얀색이어야 할까? 유니콘 역시 다양한 색깔을 지닌 말로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이 인정받는 세상, 이것이 바로 오드리 로드가 꿈꾸었던 세상 아닌가 한다. 


'초상'(90쪽)이란 시에서 오드리 로드는 이렇게 말한다.


'강인한 여성들은 / 자신의 증오가 / 어떤 맛인지 안다 / 나는 언제까지나 / 바람 부는 곳에 / 둥지를 지어야 하겠지' ('초상' 중에서)


피해가지 않는다. 정면으로 맞서려 한다. 그것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나아가려는 오드리 로드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여성이 말한다'(24-25쪽)에서는 '나는 여성이었다 / 아주 오래전부터 / 내 미소를 조심하라 / 나는 오래된 마법과 / 정오의 새로운 분노 / 당신에게 약속된 / 드넓은 미래를 품은 위험한 존재 / 나는 / 여성이고 / 백인이 아니다.'('여성이 말한다/ 중에서)라고 하면서 자신이 여성임을 백인이 아님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한 존재가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더라도 그것이 오드리 로드가 나아갈 길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1부에서는 흑인 신화에서 언급되는 여신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백인의 세계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갇혀 있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전승되어온 신화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신화를 신화로만 삼지 않고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로 나오게 하고 있다.


당당하게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가려는 존재,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덧글


한 가지 바로잡을 것이 있다. 93쪽에 실린 시 '앨빈 형제'(93쪽)에서 '우린 함께 브라우니에서 나올 수 있었어'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번역자 주에 브라우니(Brownies) : 초콜릿 케이크, 7-10세 또는 11세까지의 어린 아이들로 구성된 스카우트단 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드리 로드의 자서전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자미]를 읽어보면, 52-56쪽 정도에 앨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이 시에서 말하는 브라우니는 학급에서 우수 모둠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속한 모둠을 말하는 것이다.


오드리 로드는 앨빈이 숫자를 읽을 수 있는 덕분에, 자신이 글을 읽는다는 능력과 합심하여 둘이 브라우니 모둠에서 페어리 모둠으로 옮겨가게 된 이야기를 이 부분에서 하고 있다. 그러니 스카우트 단이 아니라 학생들을 수준별로 구성했던 모둠, 그것도 보통 또는 열등하다고 인정한 아이들이 속한 모둠이 '브라우니'다. 이렇게 주를 달아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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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이 그림이 된다. 문자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와 다르다. 낱말을 가지고 그림을 만든다. 그림이 시가 된다. 글자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시들. 그런 시들을 모아 놓았다.


  한글을 가지고 디자인을 한 옷들과 다른 상품들도 있고, 또 시에 한글 그림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이번엔 약간 다르다. 시집을 펼치면 두 쪽이 하나의 시를 이룬다.

  왼쪽 면에는 시인이 평소에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구절이, 오른쪽 면에는 그 구절과 통하는 그림이, 그림 밑에는 짧은 시나 제목이 있다.


타이포그래피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냥 오른쪽 면만 보면서 제목을 추측하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제목과 그림에 쓰인 글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도 좋고.


  이 시집 제목이 된 시는 이렇다. 왼쪽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그리고 그림에는 쌍둥이로 추정되는 사람이. 하지만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시간은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가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림과 시가 하나가 된 시집이라는 것.


  왼쪽에 나온 구절들의 출처를 찾아봐도 좋고. 그것들은 우리가 곱씹을 수 있는 말들이니까.


무엇보다도 한글을 여러모로 다양하게 쓰고 있다는 점이 좋다. 한글이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집이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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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비난하려는 의도로 쓰는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이 혐오 표현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쓴다. 그런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반대로 그 표현을 자신들이 먼저 쓴다. 그래, 이 말, 나는 이렇게 쓴다 하면서.


  그런 말 중에 '퀴어queer'란 말이 있다. 이상하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쓰던 말들을, 그것이 어때서? 우린 너희와 달라. 그 다른 점이 바로 우리 특징이야 라는 듯, 당당하게 쓰고 있는 말.


  요즘은 퀴어란 말을 혐오 표현이라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어의 사용을 뒤바꾼 것이다. 혐오 표현에서 당당한 표현으로. 그 표현 속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더 드러내는 쪽으로. 퀴어 축제가 있으니.


'이반'이라는 말도 있다. 혐오 표현이 아닌 말인데, 이 말은 '일반'이라는 말을 비틀어 쓰던 말이었다. 우리가 흔히 일반인, 일반인 하는데, 이 일반인에는 정상성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기준과 다른 사람들은 정상성이 결여된 사람들이고, 이들은 일반인의 범주에 들기 힘들었는데...


이 말을 뒤집는다. 그래? 너희가 일반이라고? 그럼 우린 이반이다. 하여 이반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퀴어와 비슷하게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들을 표현하는 말로 바꾸어 버린 것.


피하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맞서는 것이다. 언어의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이 그 의미를 재창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기존의 사고방식을 넘어서게 된다. 사고방식을 넘어서면 태도가 달라진다. 당당해진다. 그래,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홍어'라는 말이 그렇다. 바다에 사는 생물 이름으로만 쓰이지 않았다. 특정 지역을 비난할 때 쓰였다. 비하하는 말, 혐오 표현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있겠지만.


지금은 홍어가 특정한 지역만의 생물이 아니다. 홍어는 전국에서 요리에 쓰이는 생물이다. 생물? 아니 죽어서 발효되어 더 인기를 끈다. 회로도 먹지만 삭혀서 먹는 것이 더 잘 알려진 요리다.


독특한 냄새, 톡 쏘는 맛. 홍어를 어찌 비하할 수 있단 말인가. 그토록 즐기는 사람이 많은 음식을.


그러다 홍어를 '퀴어'나 '이반'처럼 쓴 시를 만났다. 시집 전체가 홍어 예찬이다. 당당하다. 우리 곁을 떠날 수 없다. 하긴 이름도 홍어(洪魚)다. 생김새가 넓적해서 홍어라고 하겠지만, 어느 곳에서나 삭혀서도 먹을 수 있어서 널리 쓰이는 물고기라고 홍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루두루 우리와 함께 하는 홍어. 그런 홍어를 문순태 시인시를 통해 우리 곁으로 가져온다. 언어의 의미 역시 긍정적으로... 홍어는 이제 당당한 우리의 음식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개성적인 존재가 된다.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 될. 


'홍어, 전라도의 힘이여'라는 시에서 전라도의 힘이라고 하지만, 이때 전라도는 특정 지역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화를 이루어낸,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우리들이 바로 홍어다.


홍어, 전라도의 힘이여


너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비린내 나는 물고기가 아니다

짓밟힌 민초들의 울부짖음이고

애원성(哀怨聲) 판소리 가락이자

동학농민군의 죽창이거나

임을 위한 행진곡이며

눈물 머금고 핏빛으로 피어난

오월의 무등산 철쭉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를

음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불꽃같은 맛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다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폭발하듯 툭 쏘는 저항과

숨막히는 최루탄 냄새

홍어를 먹는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자는 것

함께 홍어를 먹는다는 것은

더불어 홍어가 되자는 것

오래 삭힐수록 더 날카롭게

되살아나는 전라도 기질

아, 온몸 떨리게 하는

전라도의 힘이여


문순태, 홍어, 문학들. 2023년 초판 2쇄.  14쪽.


어디 전라도만이겠는가? 독재에 저항하는 우리 민중들은 전국 도처에 있었으니, 홍어가 전국의 모든 사람이 먹는 음식이 되었듯, 이렇게 홍어는 우리에게도 불의에 저항하는 힘의 상징이 된다.


이렇게 홍어는 이제 저항하는, 세상을 바꾸는 힘의 상징이 된다. 함께함,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을 대표하게 된다. 그렇게 홍어는 시인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홍어의 톡 쏘는 맛을 톡톡히 보여준 시간이다. 홍어가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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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 온다]에 출판사 직원인 은숙이 나온다. 광주를 겪은, 그러나 민주화가 되지 않은 시대, 출판 검열의 시대. 검열관에게 뺨을 맞은 은숙.


  엄혹한 시대다. 수많은 죽음을 겪고도 다시 죽음과 같은 검열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시대. 소설 속 이야기지만, 그런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시집을 설명하는 글에서 시인 김혜순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다.


  뭐 망설일 것 있나? 읽어봐야지. [소년이 온다]가 소설로 쓰였다면, 시는 그런 사건을 좀더 압축적으로, 감정적으로 전달해줄 테니.


  뺨 일곱 대를 맞았다고 한다. 한 대에 시 한 편. 시인은 그 분노를 시로 쏟아내었다. 하지만 밝힐 수는 없는 일.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일. 시 자체가 직설이 아니라 세계를 자신의 감정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니.


차마 일곱 번째 시는 발표하지 못했다고, 어디엔가 두었다가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하는데... 


'경찰서에 따라가서 뺨을 일곱 대 맞은 적도 있었다. 맞으면서 숫자를 세었다. 하숙집에 엎드려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 출판사를 결근하고 썼다. 그 시들을 몇 년 묵혔다가 이 시집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쓴 일곱번째 시는 걸릴 것 같아 애당초 넣지 않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집엔 여섯 편만 들어 있다.' (2017년 복간본, 시인의 말에서. 아마 1988년 초판본에는 이런 말도 싣지 못했으리라)


이런 사건을 '그곳'이란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세계 제일의 창작소' (그곳 1)이고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져 떨어지는'(그곳 1) 곳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 만들어진 사실은 진실처럼 유통이 된다. 그런 시대를 거쳐 지금은 최소한 그러한 거짓들이 사실로 둔갑하는 세상은 아닐 거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지는, 세계 제일의 창작소'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버젓이 사실을 왜곡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으니... 그곳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그곳에서 창작되는 많은 스토리들이 우리 삶을 옥죄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곳의 존재를 안다. 그곳이 실제했음을, 그곳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스토리와 테마들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곳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나 만나는 '그곳'이 되어야 한다. 


복간된 김혜순의 시집 [어느 별의 지옥] 맨 앞 부분에 실린 '그곳' 연작시 여섯 편. 그러한 그곳이 있는 곳이 지옥이다. 지옥은 꼭 죽어서만 가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시집 제목인 '어느 별의 지옥'을 찾아 없애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 본다. '그곳'과는 다른 의미겠지만.


  어느 별의 지옥


무덤은 여기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숨 들이켜고 있는 곳

바다에 달 뜨고 달 지듯

두 개의 무덤 아래

죽은 자들이 모여

망망대해를 펼치고 오므리는

달을 올리고 끌어당기는

여자의 깊은 몸 구중궁궐

또 한세상

몇 세기 전의 어둠이 아직도

피 흘리며 갇혀 있다가

초승달 떠오를 때

기지개 켜는 곳

뱀과 뱀이 입 맞추고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천 번

되살아나고 뒈지는 곳

어느 별의 지옥은 여기 


김혜순, 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사. 2025년. 초판 2쇄.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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