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탁 걸리는 것이 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도 마음에 걸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왜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을까'


  쉽게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면...


  '귤을 만지작거리면

  껍질의 두께를 알 수 있듯이'


하지만 알 것 같은데 결국은 모른다. 아니, 애초에 알 수가 없다.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말이다. 말은 기호이기 때문에, 이 기호를 둘러싼 많은 의미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말을 하는 입(혀)를 아무리 살펴도... 말이 밖으로 나와 다른 존재에게 가 닿을 때까지 그 의미, 그 위력을 알지 못한다.


'혀를 굴려보면

말의 두께도 알게 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같은 말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자리가 정해졌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앉는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자세를 지니고. 그러니 하나의 말에도 수많은 의미가 겹쳐 있다. 


'창틀엔 무수한 손

의자 모서리엔 많은 무릎이 겹쳐 있다'


이때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내려 한다면, 오히려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상대의 말을 내가 더 많은 의미를 덧붙여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것이 말의 역할인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지 않은가. 상대의 속, 두께를 가늠하지 않고 앞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


'숨어 있는 의미를 헤아리려

애쓰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내가 한 말들을 잘 살펴야 한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또는 상처를 입은 말들을 하지 않았던가. 잘못된 말이 있었다면 그 말들을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그 말이 지닌 위력을. 좋은 말은 상대와 나를 연결해주는 못과 같은 역할을 하니.


'못이 가득 쌓인 상자 안에서

휘어진 못을 골라내면서'


하지만 잘못된 말은 우리를 잘 연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낸다. 상대만이 아니라 말도 제대로 쓰이지 못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지점에서 부적절한 말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생각한다

빗나간 망치가 내려친 곳을'


자, 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듣는 귀가 중요하다는 말과 같다. 잘 듣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늘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으려 해야 한다. 그런데도 잘 들리지 않으면, 무언가 이상하면 멈출 수밖에 없다. 다시 뒤돌아봐야 한다.


'두 귀를 세우고 뛰어가던 토끼가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처럼'


이때 나를 멈춰 세우는 말은 남의 말이 아니다. 바로 내 말이다. 잘못 나온 말. 상황에 맞지 않는 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 그 말이 화살처럼 나에게 와 박힌다. 아, 말을 걸러내지 못했구나. 


'앞니가 툭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다'


후회가 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발화된 말.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주워담으려 해도 말은 이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말 자체가 혼자라 아님을, 내가 홀로 앉아 있다고 해도, 그 자리가 내 자리라 해도 이미 누군가가 앉았던 자리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앉을 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붉어진 두 눈엔 이유가 없고

나의 혼자는 자꾸 사람들과 있었다'


엄청난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그 많은 말들 중에 남에게 상처주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서로를 이어주는 말들이 아니라 서로를 떨어뜨리는 말들. 그런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 제 자리만 지키려고 하는, 그 자리는 내 자리야 하지만, 아니다. 세상에 지정석이라 해도 나만의 자리는 아니다. 지정석 역시 함께 앉는 자리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19현대문학상수상시집 수상작 '지정석'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말이 나만의 것이 아니듯, 자리 역시 나만의 자리가 아님을... 그래서 더더욱 조심해야 함을.


작은 따옴표(' ') 안의 문장은 수상작인 안미옥의 '지정석'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2019 현대문학상수상시집.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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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에 관한 시가 많다. 


  '슬픔'


  이는 자신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세상과 불화할 때, 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감정 아닌가.


  무언가가 틀어져 있다는 마음. 그런 슬픔이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이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슬픔을 느끼는 주체가 자신이고, 이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행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슬픔은 이기적인가? 아니다. 타인을 위한 슬픔이 있다. 연민이라고도 할까? 무릇 종교는 그러한 연민, 즉 남을 위한 슬픔에서 오지 않았던가. 나만이 아니라 남도 나와 같이 고뇌, 번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느끼는 마음, 슬픔.


시인은 '이기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남보다는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목과 비슷한, 접미사 '-들' 하나 차이인 시를 보자.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김경미,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95년. 16쪽. 


이 시를 보면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꽃은 생명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고, 물을 먹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조차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슬픔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자신만이 지니고 있으려 한다. '벽 위의 박수근'은 박수근 그림을 의미할 텐데, 가난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박수근의 그림.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고, 그 가난함이 슬픔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러한 가난함을 이겨낼 마음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기적인' 슬픔이 된다.


오로지 자신만의 슬픔을 간직하겠다는 것. 이는 사회적인 관계를 떠나 자신의 세계 속에만 머무르겠다는 선언이 될 텐데... 그러한 슬픔은 정호승의 '슬픔'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그 힘으로 다른 존재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것,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슬픔으로 치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김경미의 시에서 슬픔은 오로지 개인적인, 자신에게만 머무는, 그 슬픔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그러한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자신을 유폐시킬 수밖에 없다. '굴원의 불빛'이란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드러난다. 세상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결국 자신 속에 빠져버리는 것. 그래서 시인은 '그냥 가만히 귀양갈까 해요'('굴원의 불빛' 중에서. 49쪽)라고 하는데,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아마도 시인은 지독한 슬픔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나 보다. 그러한 슬픔을 이겨내는 시보다는 슬픔에 빠져 있는 그러한 시들이 많은 것을 보니. 하지만 우리는 시인의 슬픔에 빠져 함께 허우적 댈 수는 없다. 


시인과 더불어 슬픔에 푹 빠져버린 경험, 그 경험을 통해서 슬픔의 밖으로 나가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 그것이 이 시집을 읽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 아닐까? 어쩌면 시인은 자신의 이기적인 슬픔을 통하여 사람들이 슬픔에서 벗어나 홀로가 아닌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시인이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본다'고 한 것은 이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고. 따라서 이기적인 슬픔은 나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로 확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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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년째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분노라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가?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분노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김수영 시인의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에 보면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집에는 이상하게도 앞을 보지 못하는, 또는 눈을 빼버린이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눈이 없는,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들이 많이 나오는 시집이다.  


  '시력을 잃은 눈동자가 씹힌다'('훔친 사과' 중에서 - 18쪽), '맹인 여자를 만났다'('사라지는 마을' 중에서-35쪽),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기차' 중에서-44쪽), '고양이의 노란 눈알이 떽떼구르르 굴러나왔어요'('고양이는 고양이일 뿐' 중에서-58쪽), '금방 어디론가 사라질 눈' ('좌절' 중에서-59쪽), 등등.


보지 못하는 눈과 보지 않는 눈은 어떻게 다를까? 보지 않으려 들면 보이지 않으니, 결국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어쩌면 우리는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입만 열고 산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작은 일에는 분노하지만, 특히 자신에게 관계된 일에는, 정작 분노해야 할 일에는 눈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면 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반 년째, 눈 멀고 귀 닫고, 그러나 입은 열어 자기 소리만 내는 그런 존재들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태도가 통하고 있는지... 아무리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적어도 옳고 그름은 판단해야 하지 않나. 옳고 그름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하고, 하고 싶은 행동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런 사람이 눈에 띄지 않으면 좋으련만, 왜 이리 눈에 잘 띄는지...


하여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내 마음이 타 버린다. 분노는 불이다. 이 불을 마음의 평정이라는 물로 꺼야 하는데,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 분노를 잡아 멈추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마냥 분노에만 머무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를 위해서도, 또 분노에 차 있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가득 차 있는 분노들을 끌 수 있는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반대가 되어야 한다. 귀를 열고, 눈을 뜨고, 그러나 입은 좀 다물고. 


윤진화 시집을 읽다가 6개월... 분노로 들끓던 내 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분노를 잡아챌 수 있기를 바라고.


     분노


육중한 무게의 분노가 헐떡인다

조금만 더 가면 저 분노를 낚아챌 수 있다

분노가 운동화 끈을 더 단단히 동여맨다

출발선에서 나와 함께 출발했던 분노,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먼저

앞서간다

유유자적 신문을 꺼내 읽는다

  -저개발지역 철거민 참사, 연쇄살인범 강호순,

  주한미군 만취 상태 방화, 장애인 쇠사슬 감금

  ......

또박또박 큰 소리다

나이보다 커져가는 붙잡고 싶은 저 분노, 

뒤돌아서 웃는 아멸친 분노, 

비워둔 수신함에 쌓이는 스팸 메일만큼이나

지워버리고 싶은 분노가

다시 뛴다

속도를 낸다

분노가 내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가 놈의 목을 감싸 넘어뜨린다

허방에서 뒹굴다 진흙이 묻은 분노,

고개를 서서히 꺾는다

분노가 입가의 피를 쓰윽 훔치더니

내 목을 짓누른다, 속삭인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나도 저 뒤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다

분노의 눈물이 내 몸을 적신다


윤진화, 우리의 야생 소녀. 문학동네. 2011년. 70-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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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목표가 있다. 주소가 있으니,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는 셈. 하지만 그 주소는 낯설다. 처음 가보는 곳이다.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른다. 그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안내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이만큼 떠나왔는데, 주소지에는 도착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은 그 자리에 멈춰야 한다. 그리고 살펴야 한다. 내가 떠나온 곳을 뒤돌아보고, 내가 가야 할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주소로 어떻게 가야할지를 생각하고.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리면 된다.


  그 사람이 안 오면? 안 와도 나는 갈 수 있다. 시간이 더 걸리고, 좀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뿐. 왜냐하면 내게는 주소가 있기 때문이다. 주소는 목표다. 지향점이다. 


하여 지향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있다는 것은 안다. 있음을 알기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러니 이 주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꼭 쥐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주소를 모르는 일처럼 황망한 것은 없다. 아예 주소를 모르면 출발도 하지 않는다. 분명 주소를 알고 출발했는데, 도중에 주소를 잃어버렸다. 잊어버렸다가 아니라 잃어버렸다. 목표의 상실이다. 그러면 나는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한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누군가가 올 것이다. 나를 그 주소로 데려다 줄,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기다린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러한 기다림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가기는 하겠지만, 주소를 쥔 손을 펼쳐 주소를 버리지 않으면, 내게는 희망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이때 주소는 희망, 목표다. 그리고 나는 과거로부터 여기까지 와서, 내가 앞으로 갈 주소를 확인한다. 또 기다린다. 홀로 가지 않고 함께 가기 위해서.


윤은성 시집에 실린 '주소를 쥐고'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주소를 쥐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은 희망이 있다고. 그것이 우리를 버티게 해준다고. 지금까지 떠나왔던 곳에서 희망의 다른 곳으로 우리를 갈 수 있게 해준다고. 아니 힘든 이곳의 상황을 버티게 해준다고.


주소를 쥐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제는 기다리면 되니까. 하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사람들은 지나간다. 마주할 일이 있다고 하면 겁을 먹기도 하면서. 더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견주면서. 거대한 밤과 통로.


  폭죽을 떠뜨리고 싶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상관이 없다는 게 어떤 선을 그어대도 괜찮다는 뜻인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 안내견과 그의 주인이 지나가고 동행인의 옷깃을 쥔 노인이 천천히 지하도로 사라지고.


  멀다.


  나는 계속 기다린다. "왔구나"라는 말을 대신할 말을 찾으면서.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는지 건너편 플랫폼을 살피기도 하면서.


  겨울을 여기서 맞는다면 커다란 커튼을 살 것이다. 창을 다 덮고도 바닥까지 늘어뜨려지는. 닦거나 감싸거나 누군가 잠시 숨겨줄 수도 있는.


  왔구나

  왔구나


  손을 쥐었다 펼쳐본다. 한번 죽어본 사람처럼 여기도 새가 산다. 여기도 새가 살고. 밤이 되면 어둡다.


  가방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 조는 아이.

  아이와 인사를 주고받고 싶다.


윤은성,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4 초판 5쇄. 2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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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이다.


어려웠던 시기를 거쳐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탄핵.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왜 탄핵이 되었는지, 탄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 하나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동안 지체되었던 개혁을 해나가는 일이다.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법 조항들은 개정해야 하고,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들은 미래를 향해서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치 자신들은 아닌 양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국민을 대변하라고 있는 정당, 정당의 목적이 집권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정책은 바로 국민의 바람이다. 국민의 바람을 실현하지 못하는 정당은 정당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정당은 공당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좌지우지하는 정당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게 해야 한다. 큰 소리로, 더 강하게.


[삶이보이는창]은 그러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까지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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