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이 과거를 살피는 학문이라면 고현학은 현재를 보여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학문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은 일본 사람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문학비평을 하면서, 김윤식 교수가 박태원의 작품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든가 [천변풍경]은 그야말로 일제시대 조선의 모습을 잘 드러낸 소설이고, 이 소설들이 바로 현실을 재현해내고 있기 때문에 고현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평을 했다.


  일본인이 사용한 용어보다는 김윤식 교수가 사용한 용어로 내게 친숙해진 단어인데, 시집에 고현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반갑기도 하다.


  시인은 현실과 동떨어진, 언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인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현실을 자신만의 언어로 구현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시인은 고현학자라고 해도 좋겠다.


그렇다고 시가 그 당대에만 의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시의 고현학은 시대를 아울러 존재한다. 즉 시는 시를 읽는 현재에서 그 시대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그것이 시의 고현학이 아닌가 하는데...


이민호 시집을 읽으면서 고현학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우리나라 현실이 어느 정도는 형상화되어 있겠지 했다. 당연히 시에서 현실을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이 시집에서는 이 시를 읽고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우리 사회, 어쩌면 시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외발로 서 있는 詩(시)'라는 시다.


외발이라는 말에서 소외되었다는 의미를 발견하는데, 이 시대의 시는 이렇게 외발로 서 있지 않을까, 외발로 서서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한다. 단지 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삶들이 이렇게 외발로 서 있는 시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이 시를 읽으면 장면을 그려낼 수 있다. 그 장면 속에서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외발로 서 있는 詩


해저물녘 연립주택 공사판 여기 저기

삽들이 나뒹굴고 있다

파산했으리라

몇 놈은 드러누워 무딘 삽날을 뒤척이며 불꽃을 일으키고

또 몇 놈은 엎어져 맨 땅에 이마를 뭉개고

신음도 없이 피 흘리지 않으며

모두들 내팽개쳐져 있다

그런 나날 속에서


손목 부러진 삽자루를 가만히 일으켜

흙무덤에 꽂아 주었다


이민호, 피의 고현학, 애지. 2011년.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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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지들이 순할 수 있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먼지들은 순하다. 그냥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으면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먼지들은 움직임보다는 멈춤과 친하다. 변화보다는 안정과 친하다. 그냥 조용히 그 자리에 쌓이고 싶어한다. 쌓이면서 세월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먼지들은 이리저리 날리기 시작한다. 우리를 힘들게 한다. 순한 먼지가 아니라 독한 먼지가 된다. 이때 먼지는 우리가 피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때문에 먼지가 쌓였다는 말을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시인을 빼면. 


  시인은 먼지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 다르게 판단하고 우리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집 제목도 그렇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이라니.


순한 먼지라는 말에서 고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요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첫행을 읽으면서 정착했다는 느낌, 이리저리 떠밀리다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 이제 격동의 시기를 지나 안정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런 안정이 오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화자가 후배에게 먼지를 보낸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순한 먼지들이 쌓인 책방은 슴슴함과 비슷하다. 심심함. 이것은 안정이다. 이러한 안정된 상태에서는 야릇한 지루함도 느껴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이다.


슴슴한(심심한) 상태. 먼지가 쌓이는 상태. 우리의 삶에 이런 나날들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민주주의가 정착한 사회는 대체로 이런 슴슴한 상태, 먼지가 쌓일 정도로 안정되고 오래 지속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이 휙 불어오면 고요히 제 자리를 지키던 먼지들이 확 날리게 된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한다. 이런 고요, 이런 안정을 깨는 폭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일들, 말들이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며 두 시가 마음으로 들어온 이유가 그것이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과 '천하무적'


세상에 천하무적이라니... 이런 존재가 있을까? 없어야 한다. 천하에 적이 없는 존재라니, 없어야 하는데 시를 읽다보니 우리 사회에는 이런 천하무적의 존재가 있구나 하게 된다. 먼지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빅뱅에 준하는, 한 사람의 삶을, 사회를 뒤집어엎을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는 말.  


그 말이 얼마 전에 누구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는 먼지처럼 고요히 쌓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누구에게는 이 말이 천하무적의 말이었구나, 이 말로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놓으려고 했구나, 참... 그냥 순하게 쌓여 있어도 좋을 말이었을텐데... 아니, 이제는 그냥 순한 먼지처럼 쌓여 있는 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북한을 비롯한 외부의 주권 침탈 세력들과 우리 사회 내부의 반국가세력이 연계하여, 국가안보와 계속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우리 사회에 불러온 파장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우리에게 천하무적으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고, 이 말을 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냥 순한 먼지처럼 이제는 역사 속에 쌓여 있던 말이 된 줄 알았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 저 말이 슴슴한 내 삶을 휘저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인의 슴슴한 삶을 순식간에 소름끼치게 했듯이.


정우영의 시 두 편을 읽어보자. 그리고 다시 천하무적의 말이 순한 먼지가 되기를 지켜보자. 


  순한 먼지들의 책방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

  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

  먼지는 가서 거기 오래 묵을 거야.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 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 끌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


  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하잖아.

  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


(혹시라도 기역아 먼지라니, 곧 망하라는 뜻이냐고 언짢을 것도 같아 살짝 귀띔하는데. 우리가 먼지의 기세를 몰라서 그래.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


정우영, 순한 먼지들의 책방. 창비. 2024년. 22쪽





천하무적


  슴슴하다, 말하자

  너와 내 관계가 슴슴해졌다.


  음식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슴슴이 뭔지도 몰랐던 주변의 사물들이 돌연 슴슴함 속으로 잠겨들었다. 슴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라디오와 책이, 의자와 액자가 슴슴함 쪽으로 다가와서 쪼그라들었다.세상은 이제 슴슴함과 그렇지 않은 것의 이분법으로 정해졌다는 듯이.


  지금까지는 슴슴하지 않은 것들이 대세였으나

  내가 섣불리 슴슴하다 내뱉는 바람에

  다들 슴슴함을 뒤집어쓰게 생겼다.


  나는 곧 슴슴하지 않다고 말해야지 결심했는데, 어쩔끄나, 말릴 새도 없이 슴슴함이 순식간에 내 몸을 장악했다. 생강을 달여 마시면 달아날까, 이 슴슴함. 속으로 대증요법을 떠올리며 난감해하던 차, 남쪽에선 사라지고 북쪽에서만 살아남은 말, 사전이 내 귀에 속삭인다.


  소름이 온몸을 좌악 훑더니

  슴슴함이 홀라당 빠져나간다.

  슴슴함도 불온만큼은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정우영, 순한 먼지들의 책방. 창비. 2024년.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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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立春)이 지났다. 이제 봄이 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겨울이다. 입춘 즈음에 입춘 추위가 찾아왔다. 강추위다.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그러나 이 추위는 물러가리라.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테니.


  눈이 내렸다.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덮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한때나마 눈 속으로 사라졌다. 눈 덮인 서울의 모습이 표지 사진이다.


  더러움이라고는 없는 세상 같다. 하지만 눈은 곧 녹으리라. 눈이 녹으면 추한 것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추한 것들을 잠시 가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예 없애야 한다.


  눈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치워야 한다. 어떤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도록.


  비상계엄으로 인한 겨울이었다. 봄을 향해 가는 겨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봄을 시샘하듯이 그렇게 찾아온 겨울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으리라. 오래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삶창을 이번 호를 읽으면서 비상계엄으로 인해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음을. 그런 일은 엄벌에 처해 다시는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함을.


그런데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아직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는 추위. 하지만 버티려야 버틸 수 없을 텐데. 봄은 이미 오고 있으니. 입춘이 지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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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생각하지 말자. 그냥 제목만 생각하자. 우리는 지금 겨울을 나고 있다. 봄을 기다리면서. 그런데 우리에게 다가올 이다음 봄은 어떤 모습일까?


  만물이 생동하는 봄답게 우리들도 생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봄이 올까? 봄이 오도록 가로막고 있는 존재들에게, 이제 겨울은 갔다고, 봄의 시대라고, 자리를 비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폭력의 위협을 받지 않고. 겨울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고, 봄답게 만물이 하나둘 언 땅을 뚫고 나올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의문형으로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평서형으로 끝나는 문장을 쓰고 싶다. 우리는 봄다운 봄을 맞이한다 정도의 문장. 생기 넘치는 말들이 넘치는, 거기에 폭력은 끼어들 틈이 없는 그런 봄을.


유희경 시집을 읽다. 제목이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긴 한번에 쉽게 이해되면 시가 아니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렵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시집을 읽으면서 아직도 봄이 오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봄이 와야 하는데... 제목이 된 시를 보면 더더욱 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봄이 아니다. 이런 봄이 아니어야 하는데... 시집을 읽으면, 제목이 된 구절이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시로, 또 하나는 부록에서.


부록에서 시인은 '이다음 봄에 우리는, / 어떻게 되는 걸까요.'(139쪽)라고 하고 있다. 묻고 있다. 무언가 앞 구절을 보면 시인은 봄에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봄은 닫히지 않고 열린 존재다. 열려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남은 일은 문을 열고 나서는 것.'(139쪽)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봄은 이렇게 문을 열고 나서는 때가 되어야 한다. 그런 봄을 우리는 맞이해야 한다. 제목이 된 시의 끝부분에서는 '이다음 봄에 우리는 어느 무덤에서 울어야 할까요.'(65쪽)라고 하고 있지만... 해석을 할 수가 없다. 그냥 읽자.


이다음 봄에 우리는


  살해(殺害)의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새들이 날아오르고 그들의 검은 깃털이 폭설처럼 쏟아졌습니다 그중 하나를 주머니에 감추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야기를 버렸습니다 새들이 쪼아먹기를 아무도 쫓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쫓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어먹을, 당신이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버렸으니까요 당신이 나를 꼭 안아주거나 내가 당신을 밀쳐내거나 둘이 손을 잡고 도망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봄엔 당신이 나의 꿈을 꾸었지요 당신이 말해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계단 끝에는 버려진 집들이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숨바꼭질을 했었어요 당신이 나를 찾을 차례에 밤이 되었고 당신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것도 살해입니다 당신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때에도 새들이 날아오르고 한가득 날리던 검은 깃털들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당신은 이야기를 어디에 유기했던가요 차라리 분실했습니까 왜 말이 없나요 내가 버린 이야기 때문인가요


  깃털은 잠든 사람의 눈썹을 닮았습니다 하염없이 나는 그것을 만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는 세계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입니다. 날것의 생애가 음악이 될 때 그래요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이것은 나의 살해, 꿈이니까요


  이다음 봄에 우리는 어느 무덤에서 울어야 할까요


유희경, 이다음 봄에 우리는. 아침달. 2023년 1판 5쇄.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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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동규 시인의 시집을 읽다. 노년의 냄새가 풀풀 나는 시집이다. 이제는 죽음에 더 가까이 간 시인의 시들.


  그래서 이 시집에는 '맨땅'이라고 낮은 곳이 나오는가 하면 자신의 삶이 '조그만 포구'가 되었다고 읊조리는 시들이 있다.


  나이듦. 늙음.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 읽다가 이 시를 보면서 그래, 어쩌면 이것이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창 때를 지나 이젠 꺾인 때. 그럼에도 자신이 꺾이기 전의 모습대로 살아가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것이 아니라, 꺾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꺾인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태도. 그런 삶.


그것은 죽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늙음이 젊음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그러한 삶의 모습들. 젊음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하겠지만, 아니다. 늙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젊음이 젊음이다.


말이 필요없다.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허리 꺾이고도


장맛비 갠 오후 짧은 산책 나갔다가

길가의 풀꽃 하나에 마음 빼앗긴 적이 있었다.

안과에 계속 다녀도 눈이 편치 않아

마음이 어디에고 자리 잡기 힘들어할 때

마을버스 종점 지나 서달산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만난 씀바귀.

공사판에서 날라온 흙 조각에 맞았나

꽃대 가운데가 꺾이고도

땅으로 떨어지는 금빛 얼굴을 쳐들고 있었어.

흠집 하나가 얼굴 가운데 씨앗처럼 붙어 있었지.

자세히 보니 조그만 풍뎅이,

손 내밀어 날려버릴까 하다 그냥 놔뒀어.

그래, 벌 나비는 아니더라도

산 것에게 황금빛 쉴 자리 하나 마련해주는 게

허리 꺾이고도 얼굴 쳐든

한 꽃의 완성이 아니겠나.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년 초판 3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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