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셀 테러 -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
로라 베이츠 지음, 성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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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남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성장하는 남성이 지니게 되는 신념 체계가 내면화 되는 상태. 맨박스에 갇힌 남성들이 많이지면 그 사회는 성평등 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회가 된다.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다른 불평등도 심화된다. 즉 하나의 불평등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종, 경제, 학력, 지역, 국가, 연령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평등이 중첩된다. 여기서 여러 불평등이 겹친 사람도 나타나고, 하나의 불평등을 겪는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는 불평등을 옹호하는 일도 벌어진다.


맨박스라는 말도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맨박스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매노스피어Manosphere'라는 말은 처음 들어왔다. 더불어 '인셀Incel'이란 말도 처음이고.


'인셀 테러'라는 제목을 봤을 때 이게 무슨 뜻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백래시backlash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이러한 백래시 중의 하나인가 했더니, 백래시를 그냥 반발 정도로 생각했다면(물론 백래시는 반발 정도를 넘어선 상태이다, 거의 폭력 수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셀을 비롯한 매노스피어는 테러에 더 합당하다고 해야 한다.


이 책에는 이러한 '매노스피어'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읽으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그 차이를 무화시켜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려는 활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


'매노스피어'에 속하는 활동으로 저자는 '인셀, 픽업아티스르 ,믹타우, 남성권리 운동(두 운동 분야가 있는데, 저자가 언급하는 남성권리 운동은 여성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운동이다), 트롤(게이머게이트)' 등이 있다.

다른 활동들이지만 공통점은 여성을 적대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인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셀은 증오를 연료 삼아 타오르는 여성 혐오와 남성우월주의 교리를 의도적으로 확산하고, 무자비한 강간과 여성 살해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최소 수만 명에 달하는 강성 회원을 보유한 급진적이고 극단주의적인 운동이다'(76쪽)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것을 운동이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고,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운동을 찬성할 수 있을까? 이런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하지만, 아니다. 이 책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활동에 참여한다. 갈수록 더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그러니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상은 증오로 유지될 수 없으니까. 성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한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이 책에 든 많은 예시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오히려 그러한 활동을 알려주는 꼴이 될 테니까. 반대로 어떻게 하면 그런 활동들을 줄이고 없앨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그들의 행동이 테러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 또 젊은이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양성해야 하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매노스피어의 활동들은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또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이다. 그것도 혐오범죄, 테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을 지니고 대응을 해야 한다고 한다.


다양성이 확보되는 사회에서는 극단이 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다양성이 꽃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들지만, 이것이 어디 그 두 나라에 국한된 일이겠는가. 우리나라 역시 N번방 사건을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책에 나오는 일들이 남일만은 아니다. 우리 역시 대비해야 한다. 


한 성이 다른 성을 또는 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해서 억압하고 탄압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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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아웃사이더 딕테 시리즈 1
오드리 로드 지음, 주해연.박미선 옮김 / 후마니타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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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하다. 돌려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간결하다. 어려운 말을 하지 않는다. 똑바로 자신의 말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그렇다고 가볍지 않다. 무겁다. 말에 실린 낱말들 하나하나가 무겁다. 고통과 분노. 하지만 이 고통과 분노는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분노와 고통을 똑바로 본다. 


어쩌면 바닥까지 내려가본 사람이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이제는 올라가야만 할 때, 그럴 때 올라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그러한 모습이 그려진다. 나만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남겨둘 수 없다는. 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는.


함께하기. 이 함께하기에는 차이를 없앤다는 말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함께'라는 말에는 '같다'는 의미보다는 '다르다'는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한다. 함께하기 위해서 차이를 없앤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이런 말들이 쉽게 내뱉어진다. 그런데... 그럼 언제 말을 하지?


지금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의 적을 물리친 다음에는 차이를 말할 수 있나? 그때 차이를 말하면 이제는 '적'이 되지 않나? '차이'는 대의를 위해서 묻어두어야만 하는 그런 것인가? 오드리 로드는 이를 거부한다. 차이는 차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더 나아갈 수가 없다. 세상에 누군가의 다름을 묵살하고 이루어지는 진보를 진보라고 할 수 있나?


하여 '함께'라는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이 '함께' 속에는 반드시 '차이'가 있어야 한다.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동등한 존재로 남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함께 행동을 한다고 해서, 생각들까지도 똑같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공동의 행동을 하면서도 차이들을 드러내고, 그 차이들이 서로 부딪치고 부딪쳐 또다른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히 발전,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오드리 로드가 말한, 쓴 글들이 실려 있는 이 책은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차이'들이 모여 '함께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중요함을 생각한다.


오드리 로드는 '차이는 우리의 창의성이 불꽃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극성polarities과도 같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176쪽)'고 말하고 있으며, '차이는 우리가 각자의 힘을 벼려낼 수 있는 강력한 연결점이자 원료입니다(177쪽)'라고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에서 말하고 있다.


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까? '아웃사이더인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 지지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99쪽)'는 말에 그 답이 나와 있다.


경계 위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쪽 저쪽 확실한 영역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에 속하지 못한(현재로서는) 경계에 있기 때문에 경계는 이런저런 차이들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온전히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결코 어떤 이념이나 행동으로 뭉뚱그려져서는 안 된다.


다양함, 세상에 어떤 사람이 하나로 정의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다양함을 인정하고 거기서 함께할 수 있는 부분들, 함께해야만 하는 부분들을 찾아나가야 한다. 경계 위의 삶이란 고정된 삶이 아니라 늘 변하는 삶이다. 유동적인 삶은 자신의 것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것은 '차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받아들여 다양함이 풍부하게 발현되는 삶을 살아가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존재로부터 강요된 삶을 던져버려야 한다.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고통에서 분노가 발생한다. 이 분노가 자신을,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


왜냐하면 '정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 분노는 진보와 변화를 추진하는 강력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217쪽)'고, '분노를 우리의 발전과 미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표출하고 행동으로 전환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의 힘을 강화하는 정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 분노에는 정보와 에너지가 장전되어 있(218쪽)'고 '분노란 우리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슬퍼하는 감정이고,그 목적은 변화(221쪽)'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분노는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는 데서 온다.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보는 데서, 분노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들 가운데 누구 하나 배제되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헌신하는 것이며, 그런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독특한 정체성에서 나오는 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우리의 동일성은 인식하는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251쪽)'고 로드는 말하고 있다.


다시금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이다. 흑인이자, 여성이고, 성소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오드리 로드. 이런 그이기에 '차이'을 인정하고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깨달았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차이들이 있나, 그런데 우리는 그 차이들을 차별로 뒤바꾼 경우가 있지 않나? 기득권에 사로잡혀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어째서? 라고 말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나 하는 반성을 한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주는 오드리 로드의 글들이었다고, 이 책을 곁에 두고 계속 읽으면서 곱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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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국가의 탄생 - 검찰개혁은 왜 실패했는가?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이춘재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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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날짜를 통보했다. 4월 4일 11시. 윤석열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가? 검찰총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검찰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법이 잘 지켜진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검찰이 지나치게 커진 권력을 지녔다는 말이다. 검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수사권에 어느 정도 제한이 있지만, 그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대통령이 되어 검찰 출신들을 정부 요직에 임명하여 검찰이 더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했다고.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오래 전부터 검찰 개혁을 이야기했었는데, 검찰 권력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니, 그래서 검찰국가라는 말도 나오고, 육사 출신들이 이 나라 대통령을 하고, 정부 요직에 자리잡던 일들을 이젠 검찰 출신들이 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


그렇다면 그간 추진되어온 검찰 개혁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책은 '검찰개혁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검찰 개혁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핀다기보다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루어졌던 검찰 개혁과 그 실패를 주로 다루고 있다. 실패라고 한다. 실패했기에 그 정부에서 검찰총장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자신을 임명했던 정부를 적대시했다고.


검찰개혁이 무엇일까? 저자는 명료하게 이야기한다.


'검찰 개혁의 최종 목적지는 '검찰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9쪽)라고. 그렇다. 검찰을 신뢰하게 만드는 것.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부패한 권력이 되지 않게 검찰이 유지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검찰 개혁이다.


그럼 방법은? 간단하게 말하면 절대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라고 했으니, 절대 권력이 되지 않게 하면 된다. 절대 권력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다. 적절한 견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는 것.


그럼 검찰을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는가? 검찰의 상위조직으로 법무부가 있다. 법무부에서 어느 정도 검찰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법무부가 지나치게 간섭, 통제를 하다보면 검찰은 정권의 눈치를 보게 된다.


검찰이 신뢰를 잃은 것은 정권의 눈치를 보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수사를 하고 기소를 했기 때문 아닌가. 그럼 법무부를 통해 통제를 하는 방법 말고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기소권과 수사권의 분리를 이야기하고, 검찰과 같은 고위공직자를 수사할 수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일명 공수처)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검찰의 권력은 줄지 않았다. 왜일까? 그 원인을 찾아가는데, 저자는 문재인 정부에서 시기를 놓쳤고, 또 적절한 인물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지 못했으며, 정부 초기에 정책의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의 주장에서 시기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정권 말기에는 어떤 개혁도 힘들다. 이미 정권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때는 신중하게 여러가지를 검토하기보다는 빨리 끝내야 한다고 성급하게 추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검찰 개혁을 할 수 있는 인물을 장관으로 발탁해 뚝심있게 그러나 구체적이고 차분하고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것이 잘 안 되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또한 방향, 정부 초기에 검찰 개혁을 미루고, 적폐 청산에 몰두한 것이 오히려 검찰을 키웠다고 한다. 적폐 청산을 하려면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해야 한다. 검찰에 힘이 실려야 한다. 여기에 적폐라는 말과 청산이라는 말에서 이것을 추진하는 집단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조금 무리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면서 검찰의 권력은 더욱 강해진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적폐 청산으로 인기를 얻은 사람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그는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검찰총장에까지 이른다. 검찰 개혁을 할 수 있는,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직한 검사의 전형으로 인식된다. 그런 인식으로 검찰총장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검찰은 윤석열 사단이 장악한다.


어느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 한 조직을 장악하면 개혁은 물 건너 간다. 검찰 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또 정부 말기에 이루어기기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다. 이래서 검찰은 더욱 강한 권력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정치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정치의 영역을 사법의 영역으로 넘긴다. 정치의 영역과 사법의 영역은 다른데,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사법의 영역으로 넘어가니, 검찰은 더더욱 힘이 세진다. 


문제인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에서 벌어진 각종 소송들을 보라. 웬만하면 국회에서 해결이 되지 않고 사법부로 넘긴다. 사법적 판단에 맡긴다. 이것이 바로 검찰국가다. 결국 정치의 실종이 검찰국가를 만들어낸다.


'정치적 갈등 국면에서 개혁 대상이 검찰이 칼자루를 쥐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정치적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적 판단에 의존하는 순간부터 검찰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수록 검찰 권력은 비대해지고 검찰 개혁은 그만큼 힘들어진다.'(118쪽)


저자의 이 말을 명심해야 하는데, 이런 일은 윤석열 정부에서 더 빈번히 일어났으니 그야말로 검찰국가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검찰국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법가가 다스리는 나라를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는 나라. 그 나라, 난세에는 힘을 발휘하지만 평화로울 때는 법대로만으로는 나라를 유지하기 힘들다. 그래서 중국에서 받들고 있는 한나라는 유교를 정치의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정치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법은 대화와 타협이 안 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정치라는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 입법부의 일은 입법부에서 정치로 해결하려 해야 한다. 그것을 사법부로 가져가는 순간, 검찰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 사람으로 인해 검찰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검찰 개혁을 다루고 있다. 왜 실패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그 다음이 없다. 이야기하기 힘들다. 다만, 정치의 영역에서 검찰 개혁을 논의해야 하는 점, 이 정치의 영역을 국회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국회는 국민의 의사를 대의하는 기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의견을 나누고 모으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 방향으로 국회의원들이 움직이게 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적기인지도 모른다. 검찰 출신 대통령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에 빠졌는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4월 4일 11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국민들. 8명의 헌법재판관들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과연 그들이 국민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지.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중대한 일이 생길 때 과연 헌법재판소만으로 운영하는 것이 좋을지 등을 의논하고, 더 나은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를 의논할 가장 좋은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한다.


참고로 오드리 로드가 한 말이 있다. 그 역시 다른 곳에 나온 말을 인용했겠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개혁의 주체는 검찰도 국회의원도 아닌 바로 우리 국민이라는 것이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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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5년 봄호 - 통권 189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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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다. 정치가 바로 서지 않으면 생태도 바로 서지 않는다. 아니 생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정치는 생태 문제에서도 중요하다.

 

작년 말,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던, 지금까지도 혼란 상황이 수습이 안 되고 있는 그러한 일들 속에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고 있다.

 

정치에 관한 글들이 많이 실렸는데, 그 중에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번 개헌 논의에서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비유. 이는 정치인들에게만 개헌 과정을 맡기지 말고 시민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시민의회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함을 이번 호에서 지적하고 있는데, 자칫 개헌이 대통령의 임기를 조정하는 데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대해서도 지금 문제가 많다는 지적도 참고해야 한다. 지금 대통령 선거 역시 국민들 대다수를 대표하지 못하는 제도 (결선투표가 없어 실질적인 득표율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라는 점, 국회의원들도 소선거구제로 시민들을 실질적으로 대표하기 힘들다는 점. 그렇다면 어떻게 고쳐야 할까?

 

여러 안이 제시되고 있는데, 비례대표를 늘리는 방안이 한때 시도되었으나 그 유명한 꼼수 정당이 창당이 되는 바람에 비례대표제가 유명무실해진 경우가 바로 우리나라 선거제도였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호주에서 채택하고 있는 선호투표제, 의무투표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박소희, 잃어버린 정치를 찾아서-뉴질랜드와 호주의 선거제도'를 참고하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선호투표제, 이것이 실행이 되면 개표하고 당선이 확정되는데 좀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도래할 시대에 이는 기술적으로 충분히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선호투표제라니, 생소했는데, 후보자 모두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순으로 번호를 매긴다는 것. 과반을 넘는 후보가 없으면 맨 꼴찌 후보가 탈락하고, 그 후보를 1순위로 했던 사람들의 선호표를 나누어 갖는다는 것. 이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레 과반을 넘기는 후보가 당선이 될 수밖에 없고, 소선거구제에서 우려하는 사표(죽은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의무투표제라니...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은데... 호주 역시 자유민주주의국가 아닌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에게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호주는 투표에 불참하면 20 호주 달러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고 한다. 1호주 달러가 약 920원이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8,400원 정도다. 과한 금액은 아니다. 과한 금액이 아닌 벌금을 부과하는 이유는 투표에 꼭 참가해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라는 이야기리라. 그래야 자신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이런 제도에 대해서 우리도 생각해 보고,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국회에서는 이런 논의를 하지 않을 테니, 이미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거대 양당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칠 가능성이 많은 선거법으로 개정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니, 시민의회나 기타 다른 제도를 통해서 선거법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데, 그것을 고양이에게 직접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또 특정한 몇몇에게 나라의 큰 결정을 맡기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지금 통렬히 느끼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나라 정치를 결정하는 일을 몇몇 사람들의 결정을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 

 

어쩌면 혼란스러운 지금이 정치 개혁을 할 적기인지도 모른다. 정치 개혁을 하지 않으면 이번 사태와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음을 몸으로 겪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위기를 기회로, 정치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가 제대로 펼쳐져야 환경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하는 [녹색평론] 이번 호였다.


지금은 정치의 시대다. 정치는 우리 삶과 결코 떨어져 있지 않음을, 우리 모두가 정치에 참여해야 함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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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호명사회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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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를 읽고 많은 내용에 공감했다. 그렇다. 이제는 집단의 일원이 아닌 개인으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집단이나 공동체의 이름 속에 개인이 사라지는 시대는 아니다. 개인이 우뚝 선 시대, 핵개인의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핵개인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핵개인이라는 말이 그냥 너는 너대로만 살라는 말일까? 자립을 이야기하고, 독립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홀로라는 말과는 다르다. 자립이나 독립에는 연대, 함께함이 포함되어 있다. 고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개인은 또다른 핵개인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핵개인이 핵개인을 만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이름을 불러야 한다. 나의 이름을 알리고, 상대의 이름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불러야 한다. 그러면 서로 함께할 수 있다.


이런 사회가 '호명사회'다. 이름을 부르는 사회라는 말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함께한다는 의미다. 즉 독립된 개인들이 모여 연대를 하고 함께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함께하는 모임은 하나일 필요가 없다. 직장도 이제는 하나에서 여럿으로 바뀌는 시대가 되었으니, 호명사회에서 모임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여러 모임을 기웃거린다는 말은 아니다. 모임을 갖는다는 의미는 자신이 이미 그 모임을 할 정도로 숙련되었다는 말이다. 


즉 핵개인의 시대라고 해서 숙련된 기술, 또는 저만의 장점을 지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핵개인의 시대에는 적어도 이름을 알리고 불리기 위해서는 저만의 장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사회와 산업의 혁신 속도가 빨라질수록 개인의 커리어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핵심은 '축적의 시간'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 행위를 팔기보다 의미를 팔고, 자신의 진정성을 제공'(157쪽)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조예와 취향이 될 것이다.'(157쪽)고 하고 있다.


남다른 조예, 자기만의 취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함께한다. 대등하게. 그런 사회가 호명사회다.


이런 호명사회에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남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부르는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지닌 덕목이 '투명성과 동류를 모으고 선의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


자신이 어떻게 하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 이것을 상대에게 투영하면 상대 역시 투명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가 하는 일이 가감없이 내게 전달될 때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면, 그 관계는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핵개인의 시대는 당연히 호명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우리를 이루는데, 그 우리는 굳게 닫혀 있는 '우리'가 아니라 언제든지 축소하고 확장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즉 열려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호명사회라는 말, 듣기에도 좋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오는 말이다. 열린 사회라는 말이 될 테니까. 또한 호명사회라는 말에서 요즘 공유 주거공간을 생각하기도 한다. 따로 하지만 함께하는 공간. 


그런데 읽으면서 명쾌한 이야기에 동감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축적해야 하는 핵개인, 자신의 이름을 지녀야 하는 핵개인이 될 수 있는 사회 환경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에서 논의하는 것은 개인이 어떻게 해야한다가 주를 이루는데, 개인은 바뀐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지 않나. 오히려 이렇게 애쓰는 개인들이 나가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 환경, 제도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개인의 노력이 모여 사회를 바꿀 수도 있지만, 소수의 개인이 성공한다고 다수가 성공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니 다수가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의무이고,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해야할 의무 아닐까? 


개인에서 사회로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했으니, 그렇다면 다음 책에서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정치적 노력을 이야기하고, 함께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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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3-27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로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그곳에서 늘 바뀐다고 느껴요.
꽃이름 벌레이름 나무이름 새이름
이 이름 하나를 마음에 놓으며
서로 만날 수 있고요.

kinye91 2025-03-27 09:2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름을 부르면 서로의 만남이 이어진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