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제조공장 문학의 숲 27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김진언 옮김 / 현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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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는 '절대제조공장'이 무엇을 만들어내는 공장인지 알 수가 없다. '절대'라고 번역을 해서 그런가, 차라리 '완전'이라고 번역을 했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완전을 만들어내는 공장.


'절대'는 무엇인가? '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신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는 뜻인데, 과연 인간이 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는 범신론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신은, 즉 절대는 모든 존재에 깃들여 있다. 이렇게 존재에 깃들여 있는 신을 존재를 완전히 연소시키면 신만 남게 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들을 완전 연소시킨다면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도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간에나.


차페크는 이런 상황을 가정한다. 완전 연소시킬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발명자는 이 기계에서 나온 신의 존재를 알고 두려움에 차서 그것을 팔아버리려고 한다. 이것을 사는 사람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자,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사장은 이 기계를 만들어 세계 곳곳에 팔아넘긴다. 그 결과 세계에는 신들이 넘쳐나게 된다. 성령을 받았다고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 사랑이 넘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 사장은 공장을 노동자들과 공유하고 등등.


또한 이 기계는 자신의 힘만으로 생산을 해낸다. 노동력이 필요없다. 세상엔 물건들이 넘쳐나게 된다. 이 풍요로움. 이 신성함.


이것으로 그쳤다면 차페크의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물건은 넘치지만 그 물건이 사람들의 필요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물가는 엄청나게 오른다. 


필요를 생각하지 않는 생산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경제에만 국한된다면 사람들이 대책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종교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만들어진 '절대'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인식으로 '절대'를 인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절대'는 칸트가 말한 '물자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인식을 넘어서는, 인식의 한계 밖에 있는.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식한 '절대'를 '절대'라고 믿는다. 자신의 '절대'만이 '신'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절대'는 '절대'가 아니다. '절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다음에 올 일들은 전쟁이다. 자신의 '절대'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 강요와 강요가 말들과 말들의 다툼으로 끝날 수는 없다.


말들의 전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사를 건 전쟁이 벌어진다. 서로 죽고 죽이고... 또 죽고 죽이고... 이런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쟁은 끝난다. 이 기계들이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인간의 시대가 돌아온다. '절대'를 인식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긴다.


내 '절대'로 다 파악하지 못했기에 남의 '절대' 역시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이 '절대'가 사라진 자리에 인간이 와야 한다. 차페크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믿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이런 '절대'에 대한 인식을 본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확신하기 위해서 타인을 살해하는 걸세. 알겠는가? 자신이 신 전체, 진리의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일세.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신,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걸세. 만약 그것을 용납한다면 자신이 신의 진리 가운데 겨우 몇 미터, 몇 리터, 몇 주머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테니.'(285-286쪽)


다른 인물을 통해서 이러한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훌륭한 신은 믿지만, 다른 사람의 것은 믿지 않아. 그 사람도 역시 무엇인가 선한 것을 믿고 있는데도.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믿지 않으면 안 돼.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깨닫게 될 거야.' (313쪽)


'알겠는가? 누군가가 가진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만큼 더 격렬하게 경멸하게 돼. 하지만 가장 커다란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야.' (313-314쪽)


이렇게 '절대'를 제조하는 기계가 일으킨 일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믿는 신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신의 일부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자신이 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신의 뜻대로 행한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그렇기에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함께 지내고 있음을 차페크는 이 소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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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 카프카는 누구의 것인가
베냐민 발린트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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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유산은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 누구의 것이라는 말에는 '소유'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소유는 독점이라는 말과 통할 때가 많고, 독점은 이윤과 함께할 때가 많다. 즉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카프카의 유산을 통해 누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가 있다.


이런 질문을 위대한 작가의 유산에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한다면 그 작가는 누구의 것 또는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저작권이라는 이윤을 독점하는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저작권조차도 특정한 기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것은, 지적 재산을 보호해서 작가나 그 계승자의 생활을 보장할 필요는 있지만, 영원히 이득을 취할 권리를 주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프카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났으니,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발간 작품들은 어떤가? 그것들에 대한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후손들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보상은 필요하겠지만, 후손을 어느 범위까지 인정하느냐도 논쟁거리다. 특히 카프카처럼 자식이 없다고 알려진 사람에게는.


이 책은 이스라엘에서 벌어졌던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을 다루고 있다.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막스 브로트가 가지고 있던 카프카의 유산에 대한 소송이라고 보면 된다.


이 소송이 벌어질 당시 막스 브로트는 문학계 또는 예술계에서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한 국가들이 그의 유산을 둘러싸고 소송을 벌일 만큼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받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놓고 이스라엘, 독일과 그것을 소유하고 있던 에바 호페라는 사람의 소송이 대법원까지 가게 된 이유는 카프카의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카프카. 유언을 집행하지 않고 오히려 카프카의 모든 글들을 모아 보관한 막스 브로트. 우리는 막스 브로트 덕분에 카프카의 작품을 만난다. 그가 인류의 문학에 공헌한 점은 바로 카프카의 작품을 보존하고 출판했다는 점이다.


이런 카프카의 유산을 막스 브로트는 생전에 자신의 비서였던 에스테르 호페(에바의 어머니)에게 카프카의 유산을 증여한다는 문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막스 브로트가 죽은 뒤 그의 유산은 모두 에스테르에게 넘어갔다. 막스 브로트의 유산 처분권을 맡긴다는 증서와 함께.


1974년에 첫재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판사는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평생 재량껏 처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2010년대에 들어와 다시 소송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대대적인 소송이고, 이스라엘과 독일이 참여했다. 에스테르 호페가 살아 있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그녀의 죽음 이후에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그만큼 카프카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있었고, 카프카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려 개인의 금고 속에 영원히 잠들어 있을 거라는 우려도 있었다. 자, 카프카의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질문을 바꿔야 한다. 카프카의 작품은 누가 보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명하다. 카프카를 가장 잘 연구할 수 있고, 연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존재가 보관하면 된다.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간단명료하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송이 이루어지는 법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윤리보다도 명확한 것이 법이라고 하지만 법이 얼마나 애매모호한지는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 [소송]을 읽어봐도 알 수 있고, 짧은 단편인 [법 앞에서],[법에 대한 의문], [유형지에서] 등을 읽어봐도 알 수 있다.


기나 긴 소송 끝에 이스라엘 법정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렇지만 아직 스위스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카프카의 원고(취리히에 있는 호페 서류)는 반환 수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312쪽 주 참조)


소송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카프카의 작품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작품을 다 태워버리라고 했던 작가의 유언은 어디 갔는가? 물론 후세인들은 작가의 유언을 다 지킬 필요는 없다. 작가의 유언과 달리 보존되어 인류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든 작품들이 많으니까. 카프카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이런 소송을 통해서 문화 유산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우리 인류는 어떻게 문화유산을 보존ㅡ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 점을 생각나게 한다.


카프카 유산을 두고 벌어진 소송만이 아니라 막스 브로트의 생애, 그리고 그와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 카프카 작품이 어떤 경로를 거쳐 에바 호페에게 가게 되었는지의 과정 등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카프카 사후에 벌어진 일들을 잘 살펴보게 한다.


여기에 작품을 두고 작가의 민족, 국가 또는 성향 등을 따지는 일과 작품을 보존하는 일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하고. 문화유산에 이윤이 개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보여주고 있으니...


카프카의 유산을 두고 벌어진 소송, 흥미롭기도 하지만 인류가 문화유산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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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키스슈타인
지넷 윈터슨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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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괴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를 창조한 사람 이름임에도. 마찬가지로 그 소설을 쓴 사람이 메리 셸리라는 사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작품을 알아도 작가를 모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이 소설은 신의 능력에 도전하는 인간과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 또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등등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과연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하지만 인류는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하지 않았던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하지 않았던가. 그것에 따른 책임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이렇게 소설은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경우 일어나는 일들,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들이 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을까? 그것은 인공지능-로봇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지금 엄청나게 발전된 기술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있지 않은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밋빛 미래를 상상할 뿐이다.


[프랭키스슈타인]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소설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시체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려 했다면 이 소설에서는 현대 과학이 이미 실행 중인 냉동인간을 이용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려 한다.


즉 뇌를 스캔해, 그 뇌를 이식한다는 발상이다. 인간의 뇌를 이식할 수 있다면, 그 뇌를 이용해 다른 몸을 사용하는 것은 더 간단한 문제라고 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인간의 뇌를 이식한다면 그간 몸을 이용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사람은 존재하게 될까? 그는 더이상 인간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뇌로만 남은 인간이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는 계속 될 것인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그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발전을 이룰까? 아니면 특정한 집단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을 작가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이 소설은 그러한 질문을 넘어서 재미있다. 이미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여기에 [메리와 메리]를 읽은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소설에서는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는 과정이 나오고, 그 과정에서 어울리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메리, 메리의 남편인 셸리, 바이런, 클레어, 그리고 의사인 폴리도리)


여기에 현재로 돌아오면 그들의 환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생명체를 탄생하는 과정과 중첩이 되게 소설이 진행된다. 물론 처음에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로봇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남성의 욕망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즉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식된 뇌는 어떤 몸이든 옮겨갈 수가 있으므로 불멸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


아직은 진행형이지만 냉동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현실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는 일이기도 한데, 이러한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행위를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인물과 병치되는 이 소설 속 인물은 메리라고 할 수 있는 라이, 셸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메리가 사랑했던 사람이 셸리니, 이 소설에서 라이가 사랑하는 사람인 빅터를 셸리로 치자. 그리고 빅터는 메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박사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둘 다 메리의 사랑이라고 보면 되지만 빅터는 [프랑켄슈타인]의 빅터와 같다고 보는 편이 더 좋겠다. 메리의 사랑을 받는 셸리의 특성을 지닌 빅터라고 하자. 그는 소설 속 인물과 같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바이런이라 할 수 있는 론. 그가 섹스봇 판매자로 나오는 이유는 명확하다. 과거 바이런 역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하니... 클레어는 바이런의 정부이자 메리의 이복동생인데, 역시 론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폴리도리는 좀 다르게 나오지만 이름이 비슷한 폴리 D로 나오니,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을 중첩해서 읽는 재미도 좋은 소설이다.


결국 빅터는 성공했을까? 그 성공의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이 과연 인류를 위한 사랑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우선 재미있게 읽자. 읽으면서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보자.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이 소설에 나온 세상보다 더 많은 변화가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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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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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제목에서 보면 하나만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일은 오렌지말고도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소설의 각 장들은 성경에서 따왔는데, 창세기부터 룻기로 끝난다. 시작에서 방랑으로 끝난다고 봐야 하는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된 아이가 그 신앙으로 키워진다. 그런데 어디 부모의 뜻대로 성장하겠는가. 아이는 학교에서도 계속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만 해 교사들의 걱정을 받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다. 그것을 오히려 더 바람직해 한다.


성경대로 살아가는 아이를 바라는 부모. 그런데 아이는 성장하면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엄마에게는 재앙이다. 사탄이 아이의 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여긴다. 목사 역시 마찬가지고.


이것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집을 나오지만, 그렇다고 부모와 연결된 끈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작가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인데... 여기서 과연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부모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종교가 사람을 획일적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종교가 아니라 그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그들의 말이 과연 성경과 또는 신과 합치하는가. 그들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면 이단이라고, 사탄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종교인가?


하나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견뎌낼 수가 없다. 그것은 광신도들을 양산할 뿐이다. 그러한 광신도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름은 곧 잘못이고, 잘못은 신과 반대되는 사탄의 행위일 뿐이다. 그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 주장이 소설 속에서 이런 대사로 나타난다.


"오렌지야말로 유일한 과일이지."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56쪽)


그 많은 과일 중에 오렌지만이 과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신만이 유일하다는 주장. 그 신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것. 그러니 여기서 다른 행위를 하는 또는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자신들의 신념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나중에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앞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말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 (285쪽)


이 말에 다른 과일을 모두 인정한다는 마음이 들어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오렌지에서 다른 과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냥 자신들이 과일이라고 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획일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의 이야기다. 자신의 특성을 알게되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아이의 모습.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종교는, 부모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남들도 그대로 따르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나와 우리와 다른 생각, 다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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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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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고생이 두부 손상으로 죽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소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 명의 서술자가 등장한다. 죽은 여고생의 동생인 다언, 다언과 같은 동아리 소속이자 죽은 여고생과 같은 반이었던 상희, 그리고 역시 같은 반이었던 태림.


서술자는' 다언-상희-다언-태림-다언-태림-상희-다언' 순으로 나온다. 사건의 전모는 태림이 서술자로 나와 상담사에게 전하는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희가 서술자로 나오는 부분에서 다언의 모습은 달라져 있는데, 한번은 아직도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고, 한번은 어떤 식이든 상처에서 나온 모습이다. 그러니, 상희의 서술을 통해서 다언이 자기 나름대로의 해법을 실행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다언이 서술자로 나오는 부분은? 언니의 죽음을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수렁 속에서 헤매던 다언이 서서히 복수를 다짐한다. 언제까지 그냥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그때 다언은 계란 노른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노란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레몬,이라고 나는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복수의 주문처럼 레몬, 레몬, 레몬이라고.' (97쪽)


언니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은 노란색, 계란 노른자도 노란색, 그리고 레몬 역시 노란색. 노란색이라는 것이 서로를 연상시키고 있다. 언니가 입었던 노란색 옷은 죽음의 옷이고, 잊고 싶은 색깔이었다면, 달걀 노른자의 노란색은 그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이젠 행동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자신을 추스리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색깔이라면 레몬의 노란색은 무엇인가. 


레몬의 신맛, 인생의 신맛.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자, 나는 이제껏 인생의 힘듦을 겪었다. 이젠 너희 차례다.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니면 신맛으로 인해 긴장을 잃지 않고 자신을 행동으로 이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하여간 레몬이 주문처럼 등장하고...


이제 서술자들의 서술을 통해서 또다른 사건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다언의 복수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에 매개가 되는 인물이 한만우라는 인물이다. 한만우라는 이름 때문에 붙은 별명이 소설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민요의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안만우우'(11쪽)이라고 부른다는 서술이 그렇다.


평온한 세상이 아니라 한 많은 세상인데, 그런 세상살이를 하는 인물이 바로 한만우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이 바로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여 다언은 이런 생각을 한다.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198쪽)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199쪽)


결국 세상은 평온하지 않지만, 그것이 바로 인생이고 삶의 의미라는 생각. 자신에게 닥친 일을 직접 대면하겠다는 의지이지 않나 싶다.


명확하게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지는 않고, 또다른 사건도 묻힌 듯이 보이지만 두 사건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읽으면서 그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작가가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들 역시 우리 삶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좋은 면을 보여주지 않고 뜻하지 않게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들이닥친 문제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다언의 서술에 나타난 한만우 가족의 삶을 통해서 다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소설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삶의 의미일 수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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