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하롤드 영감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잔(도서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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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만 보면 무슨 범죄소설 같다.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다니. 읽어보니 내용을 알려주는 제목임은 확실한데, 원어로도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노르웨이어로 saganatt라고 했단다. '전설적인 밤 또는 신화적인 밤'이라고 해석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마, 원어의 뜻에 맞게 번역을 했다면 별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을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붙였으니, 이것이 번역의 묘미인가 싶기도 하다.


하롤드 영감은 어느 날 길을 나선다. 이케아 사장인 잉바르 캄프라드를 납치하기 위해서다. 이유는? 이케아가 시장을 잠식해 자신의 가구 가게가 망했기 때문이다. 공존을 하지 못하고, 소상공인들을 잠식해가는 거대자본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냥 그렇게 넘어갔으면 좋겠지만, 자신이 평생을 일궈온 가게가 망했으니,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으리라. 


노르웨이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가는 길, 엄청나게 내리는 눈. 여정에서 만난 젊은 소녀 엡바. 엡바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납치하지만, 엡바가 더 말려들길 바라지 않아 엡바는 보낸다. 즉 자신의 일을 젊은이에게 넘길 수는 없는 일.


이케아 사장 역시 나이든 사람. 납치범이나 납치된 사람이나 '가구'를 판매한다는 점과 자식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배경과 사업을 하는 방향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하롤드 영감이 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다음 그에게 하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게 바로 당신과 나의 차이점이오. 가구점을 하는 사람은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하오." (194쪽)

"나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름다움이 더욱 깊어지는 가구를 팔았고, 당신은 세월이 지나면 허물어지고 망가지는 쓰레기 같은 가구를 팔아 왔소." (194쪽)


하롤드 영감은 단지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열정도 함께 팔았다. 가구는 그냥 물건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 삶이 함께하는 존재였던 것. 이웃과 자신을 이어주는 존재가 가구였고, 자신의 삶의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의미를 이케아가 들어오면서 잃게 되었다. 단지 돈을 못 벌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생명과도 같이 여겼던 가구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된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회에서 낙오된 듯한 느낌. 그러한 느낌을 4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마르니가 기억을 잃어가는 것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아내는 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을 가게를 처분하고, 이제는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이때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기로 한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그렇게 무겁게 서술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다. 물론 하롤드 영감이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경찰들과 납치 후에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소설은 무겁게 진행되기보다는 경쾌하게 진행이 된다. 납치 후의 일은 범죄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전개가 된다. 


경쾌한 진행과 반대로 내용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하롤드 영감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납치가 성공하고 경찰들과 대치하면서도 병원에 있는 아내와 통화를 하는 모습. 잠시나마 기억이 돌아온 아내의 모습을 통해, 그 밤이 하롤드 영감에게는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밤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찌보면 이런 경쾌한 진행을 통해서 무거운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작가는, 우리들의 삶을 잠식하는 거대자본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끝부분에 '내일은 월요일'(205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오늘까지는 이랬을지 모르지만 내일은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하롤드 영감과 그의 아내 마르디를 통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그것은 희망이다. 비록 지금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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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정지아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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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소설, 무거운 내용인데도 가볍게 읽었다. 무거움을 웃음으로 덜어주고 있는 소설들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자본주의의 적], [나의 아름다운 날들], [빨치산의 딸]들.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하기엔 다루는 내용들이 무겁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소설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린 작품들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엄혹함 속에서도 웃음이, 낙관, 긍정이 나타나서 좋았다고나 할까.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고꾸라지지 않고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그런 사람을 소설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 삶에 도움이 된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분명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한 세상을 살아내고 이제는 스러질 일만 남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정지아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따스한 눈길을 보낸다. 그들의 모습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다가오지만, 흑백사진은 그 자체로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안쓰러움,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왔던 신산한 삶들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치매에 걸린 노인, 한 평생 자신의 마을을 떠나보지 못한 사람 등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지금은 늙고 병들어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왔음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봄빛... 그렇다. 봄빛은 겨울을 나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때 이미 지나온 것들을 따스하게 비춰준다. 그러한 봄빛 속에서, 봄볕 속에서 고단했던 삶을 위로받을 수 있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위로해주는 봄빛(봄볕)일 것이다.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어느 소설도 순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운명을 받아들이든 맞서 싸우든 자신의 삶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길보다는 과거를 돌아보는 길이 훨씬 길어진 사람들. 그 길을 되짚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가도 가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하여 많이 걸어온 길,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 그 쉼에 함께하는 빛, 봄빛, 봄볕. 과거의 신산함을 녹여주고 쉬게 해준다. 완전히 녹이지는 못하겠지만, 또한 봄볕에 피부가 타듯이 또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길에서 잠시 쉴 때, 그 쉼을 함께해주는 봄빛과 같은 사람들, 장소들이 있음을...


이 소설은 그렇게 우리 삶이라는 길을 함께해주는 봄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언뜻 쇠락한 삶들이 풍경으로 제시되는 것 같지만, 멈춤이 아니라 나아감을, 우리가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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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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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한 남자. 집을 나와 평생을 함께했던 자신의 배에 오른다. 배로 사람들을 실어날랐던 사람. 노르웨이, 피오르. 이곳에서 저곳으로 사람들을 이동시켜주었던 그. 이번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배에 오른다. 이젠 자신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게 하러.


그가 집을 나와 배(페리)를 몰고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어떤 사람들은 주마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죽기 전에 자신의 일생이 주욱 펼쳐진다고.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닐스 비크라는 사람이 죽음으로 가는 길에 배에서 만났던 사람, 자신의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 그가 페리로 이곳과 저곳으로 이어주었듯이, 죽음에 임박해서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는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잔잔하게 펼쳐진다. 잔잔하다? 과연 그럴까? 멀리서 보는 바다와 산은 보기에 좋다. 어떤 위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아니다. 바다는 천변만화하고 온갖 위험이 어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 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을 바다와 산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인생 역시 그렇게 굴곡이 많다. 멀리서 보면 평평하고 단조로워 보이겠지만, 직접 경험해 보면 너무도 복잡하고 울퉁불퉁하다.


피오르 해안의 아름다움을 '자연'으로 뭉뚱그리고, '이곳의 자연이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다며 찬사를 늘어놓(196쪽)'는 사람 앞에서 ,


'닐스는 이곳 사람들은 '자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가리킬 수 있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어우러져 살 수 있는 것은 숲과 바위와 산과 강과 피오르지, '자연'이 아니라고 했다.'(196-197쪽)


이것이 인생이다. 마냥 좋아보이는 것만이 인생은 아닌 것이다. 닐스 비크의 삶이 평탄하고 행복했을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죽음을 앞둔 닐스의 회상은 아름답다. 평화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평화가 뒷부분에 가면 그의 인생에 평화만이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동생의 죽음, 딸들의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 등등. 여기에 뇌졸중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 이것은 결코 평탄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의 삶이 결코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는다.


아내와는 평생 사랑하고,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중에 만날 것을 기약하는 모습. 자식들의 삶 또한 자신들의 삶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모습.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삶에는 그 나름의 특별함이 있다. 우리 모두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닐스 비크의 평범한 삶을 통해서 특별함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삶은 모두에게 특별함을, 특히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산 사람의 삶은 더더욱 특별함을, 그래서 그러한 삶이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페리를 운전하면서 만난 사람들, 죽어가면서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떠올리고, 또 이미 죽은 사람들을 배에 태우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가는 닐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바람과 바다와 땅, 미움과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던 데 감사하고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삶은 끝없는 초안과 스케치이며,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거와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일단 시작된 이야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며, 좋든 싫든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따라가야 한다.'(268쪽)


이런 통찰. 평범한 삶 속의 특별함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특별함이란 꼭 겉으로 드러내어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그리고 닐스가 아내 마르타를 사랑하는 모습. 둘이 사귀게 되는 장면과 다시 죽음에 이른 닐스가 기다리고 있던 마르타를 만나는 장면. 


피오르는 어떻게 건너왔나요? 그가 물었다.

자전거를 타고 왔어요. (82쪽)


어떻게 피오르를 건너왔나요? 그가 물었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왔죠. 그녀가 대답했다. (270쪽)


이 대화가 살짝 변주되면서 둘이 만나 함께 살게 되는 장면과 다시 죽음 이후에 함께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사랑.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좋지만 이렇게 마르타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은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노트북]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만큼 격정적인 사랑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솔직담백한 사랑. 그리고 마지막까지 같이 하는 모습이 이 소설의 닐스와 마르타를 영화 [노트북]의 두 사람과 연결짓게 하고 있어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2004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개봉이 되었을 때 보았는데, 재개봉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어 찾아보니, 2016년, 2020년, 2024년에 재개봉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 부부의 사랑 못지않게 닐스가 마르타를 사랑하는 모습이 잔잔하게 펼쳐지고 있어서 영화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랑에서도 굴곡이 있음을, 그 굴곡을 넘어 함께했을 때 더 큰 사랑과 감동이 있음을 영화와 소설이 모두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하게 만든 감동적인 소설이다. 물론 이 소설에는 이런 사랑 말고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닐스 비크의 모습이라든지,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든지, 닐스 비크에 연대해 결국 정의가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페리 동료들의 모습이라든지, 여러 사회문제도 닐스 비크의 삶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것들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닐스 비크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이 바로 특별함임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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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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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도 한다. 관계를 통해서 삶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말. 이 관계라는 말에는 상대를 생각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내 말과 행동에 늘 상대를 끌어와야 한다는 말이 들어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남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학교에 다니면 다녀야 하고, 일하면 일해야 하고, 결혼하면 결혼해야 하며,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그런 생활들.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들. 그런 일들을 하는 보통 사람들. 보통 사람이라고 하면 지녀야 하는 생활과 감정들.


이런 관계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다. 받아들이기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기를 쓰고 그런 사람을 밀어내려 한다.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범주에서 제외시킨다. 그런 존재를 배제하면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들이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의 삶을 어떨까? 과연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이 소설 [편의점 인간]은 그러한 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도무지 남의 감정을 읽을 줄 모르는 인물 후루쿠라(게이코)는 보통의 삶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어린시절부터 학창시절까지 자신의 행동이 왜 남들에게 문제가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남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남들 눈에 띠지 않으려 한다.


최대한 남에게 맞추려는 행동을 하고, 편의점이 생겼을 때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꽉 짜여진 매뉴얼대로 하는 편의점을 편하게 여긴다. 여기서는 개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간섭을 하려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규칙대로만 하면 되는 일.


다른 일을 찾지 않고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보낸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신경도 안 쓴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다른 삶에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균열이 생긴다. 그것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후루쿠라.


나중에 다시 편의점에 들렀을 때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편의점이 운영되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신은 편의점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는데...


편의점 인간. 어쩌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비판하는 듯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언가 같은 범주로 묶여야만 안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틀을 정해놓고, 그 틀에서 벗어난 사람은 잘못 살고 있는 것이라고, 남의 삶에 끊임없이 들어와 간섭하는 사람들. 그것이 옳은 일인 양, 당연한 일인 양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다른 삶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사는 삶에 특정한 틀만이 있지는 않다는 걸 생각하지 않는 현대 사회. 같은 방향으로만 달려가야 하는, 주위를 둘러보기도 또 아예 달리기를 포기하지도 못하게 하는 현대인의 삶.


편의점 인간은 그러한 삶에서 다른 인간을 배제하고 있다. 자신이 할 일을 그냥 할 뿐이고, 그런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한때 루저라고, 밑바닥 인생이라고, 패배자라고 하는 그러한 삶이 과연 패배자의 삶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정규직이 아니라고, 또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남들과 같이 사귀고 회식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잘못된 삶일까? 아니라는 것. 


남들 눈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똑같아 보이는 삶 속에서도 엄청난 변화가 있음을 소설은 주인공은 후루쿠라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삶이 있음을, 그 삶 역시 존중받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굳이 자신들의 삶의 범주 속에 집어넣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 경쾌한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우선 이 소설은 재밌다. 그냥 죽 읽힌다. 아주 빠른 시간에 읽을 수 있다. 어찌보면 패배자라 할 수 있는 후루쿠라의 삶을 안타까워 하면서 읽지 않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후루쿠라의 삶이 패배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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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4-18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갑네요
이 책 재밌게 읽었습니다.

kinye91 2025-04-19 08:35   좋아요 1 | URL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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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재미가 있다. 깊은 뜻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재미있다.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두 편 읽었지만, 비록 번역으로 읽었다고는 하지만 소설을 이끌어가는 글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결코 길지 않은 문장들. 그리고 어둠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어떤 빛이 비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내용들.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단편이지만 더 짧다고 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그런데도 내용은 무거운 소설이 많다. 특히 첫 작품인 '작별 선물'은 어떻게 보면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저런 인간을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인물도 등장한다.


자식들을 자기 노예처럼 부리는 아빠. 성적 희롱까지 하는 아빠. 그럼에도 한 소리도 하지 못하는 엄마. 집을 떠나는 자식을 끝까지 희롱하려는 아빠. 참, 현대의 도덕으로는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덤덤하게 그려낸다. 이 덤덤함이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딸은 집을 벗어나고 있으니,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두 소설에 비해서는 좀 어둡다. 두 소설은 어둠보다는 빛이 더 강했다고 한다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빛보다는 어둠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빛을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요소들이 있으니...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실은 결코 빛으로만 차 있지 않으니.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일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작가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남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은 남성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어긋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자꾸 어긋나는 관계를 소설은 보여준다. 사실, 어긋날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남을 중심에 놓고, 남과 나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놓고 남을 자신에게 끌어오려고만 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찌 어긋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이런 관계를 어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어둠도 있지만 빛이 더 강하다. 당연히 어긋남이 있지만 이 어긋남은 어둠 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빛 쪽으로 향하는 어긋남이다. 빛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둠과 어긋나야 한다. 그 어긋남을 인식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인물들. '작별 선물, 퀴큰 나무 숲의 밤'이 그렇다.


특히 '퀴큰 나무 숲의 밤'은 여성이 자신의 삶을 옭아매던 남자(신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일랜드 설화를 차용해서 소설을 이끌어가는데, 여성이 삶의 주체로 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과정에 남성은 보조자로서 등장한다. 첫번째 남성과 두번째 남성 모두 여성과 어긋나지만, 첫번째는 여성에게 어둠으로, 두번째는 빛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이 소설은 [맡겨진 소녀]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처럼 빛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완전한 빛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빛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짧은 소설들을 엮은 이 소설집에 주로 나타나는 관계가 '어긋남'이지만, 이러한 어긋남 속에서도 '빛'이 보이게 하고 있으니, 우리 삶에도 수많은 어긋남과 어둠이 있을 테지만, 그러한 삶에도 빛이 있음을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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