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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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197쪽) 

절충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양쪽을 다 편드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느 한쪽으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하면 작품을 완전히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에 대한 평가가 완벽하게 일치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작가에 대한 평가로 인해 작품도 평가가 달라진다면, 외적인 이유로 작품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여러 작가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답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의 독재자였던 밀로셰비치를 지지(?)했다고 알려진 페터 한트케를 저자는 비판하고 있지 않다.


한트케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끝까지, 아마 이 책에서 저자에게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작가는 페터 한트케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밀로셰비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면을 보면 작가에 대한 평가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작가를 평가하는 데는 수많은 자료들이 필요할 테고, 어떤 면에서는 시간(역사)도 필요할 테다. 그러니 동시대의 작가를 평가하면서 그의 작품을 그와 연결지어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작가의 잘못이 명백한 경우는 예외다. 범법자를 저자 역시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범법자들의 사고방식이 작품 속에 은연 중에 나타날 수도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작가의 사상이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 경우는 판단하기가 쉽다. 범죄를 옹호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인데... 그러한 작품이, 가령 나치의 학살을 옹호하는 작품이라든지, 반유대주의를 선전하는 작품, 아동 성착취를 지향하는 작품 등등은 그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허용이 되지 않을 것이고,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더더욱 허용되지 않을 테니까) 대부분의 작품은 표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니, 이런 경우는 공론을 통해서 작품을 검증해야 한다고 한다.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대입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니,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사상을 찾아내는 읽기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 많은 것들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수 있으니, 그러한 읽기를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때는 몰랐고 또 옳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고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역사로부터 관점이 달라지고,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날 수 있으니까. 작가와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행적도 역사를 통해서 새롭게 밝혀진 것들이 있고, 그러한 새로운 사실들로 인해 작품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다고 작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떻게든 작품 속에는 작가의 사상과 경험이 녹아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작품 속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자신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펼치면서 사람들을 호도하려 할 때, 아마도 그 작품은 작가를 옹호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호응을 받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외면받을 것이다.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작품들에는 무엇이 있다. 작가가 잘못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작품 속에는 사람들을 끄는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은 세월의 힘을 견뎌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으라는 메시지가 있기에 살아남는다. 그 무엇을 찾는 읽기, 토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잘못된 행위를 한 작가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작품은 작품 나름대로의 생명이 있으니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여러 사람의 (동시대인과 미래 세대들) 읽기와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대에 거스르는, 즉 시대에 맞지 않는 작품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공론장의 역할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도 적용이 된다. 한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작가가 잊혀지기도 하고,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던 작품이 새로운 사실들의 발견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어 비판받는 경우도 있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나 작가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작가란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작품은 그러한 작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다.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독자들도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사는 시대의 공론장 속에서 작가와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리기보다는 이 작품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논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지녀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인가 하는 점을 살펴야 할 테고. 그러한 작품은 역사의 심판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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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하롤드 영감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잔(도서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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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무슨 범죄소설 같다.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다니. 읽어보니 내용을 알려주는 제목임은 확실한데, 원어로도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노르웨이어로 saganatt라고 했단다. '전설적인 밤 또는 신화적인 밤'이라고 해석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마, 원어의 뜻에 맞게 번역을 했다면 별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을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붙였으니, 이것이 번역의 묘미인가 싶기도 하다.


하롤드 영감은 어느 날 길을 나선다. 이케아 사장인 잉바르 캄프라드를 납치하기 위해서다. 이유는? 이케아가 시장을 잠식해 자신의 가구 가게가 망했기 때문이다. 공존을 하지 못하고, 소상공인들을 잠식해가는 거대자본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냥 그렇게 넘어갔으면 좋겠지만, 자신이 평생을 일궈온 가게가 망했으니,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으리라. 


노르웨이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가는 길, 엄청나게 내리는 눈. 여정에서 만난 젊은 소녀 엡바. 엡바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납치하지만, 엡바가 더 말려들길 바라지 않아 엡바는 보낸다. 즉 자신의 일을 젊은이에게 넘길 수는 없는 일.


이케아 사장 역시 나이든 사람. 납치범이나 납치된 사람이나 '가구'를 판매한다는 점과 자식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배경과 사업을 하는 방향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하롤드 영감이 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다음 그에게 하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게 바로 당신과 나의 차이점이오. 가구점을 하는 사람은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하오." (194쪽)

"나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름다움이 더욱 깊어지는 가구를 팔았고, 당신은 세월이 지나면 허물어지고 망가지는 쓰레기 같은 가구를 팔아 왔소." (194쪽)


하롤드 영감은 단지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열정도 함께 팔았다. 가구는 그냥 물건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 삶이 함께하는 존재였던 것. 이웃과 자신을 이어주는 존재가 가구였고, 자신의 삶의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의미를 이케아가 들어오면서 잃게 되었다. 단지 돈을 못 벌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생명과도 같이 여겼던 가구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된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회에서 낙오된 듯한 느낌. 그러한 느낌을 4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마르니가 기억을 잃어가는 것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아내는 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을 가게를 처분하고, 이제는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이때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기로 한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그렇게 무겁게 서술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다. 물론 하롤드 영감이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경찰들과 납치 후에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소설은 무겁게 진행되기보다는 경쾌하게 진행이 된다. 납치 후의 일은 범죄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전개가 된다. 


경쾌한 진행과 반대로 내용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하롤드 영감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납치가 성공하고 경찰들과 대치하면서도 병원에 있는 아내와 통화를 하는 모습. 잠시나마 기억이 돌아온 아내의 모습을 통해, 그 밤이 하롤드 영감에게는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밤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찌보면 이런 경쾌한 진행을 통해서 무거운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작가는, 우리들의 삶을 잠식하는 거대자본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끝부분에 '내일은 월요일'(205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오늘까지는 이랬을지 모르지만 내일은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하롤드 영감과 그의 아내 마르디를 통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그것은 희망이다. 비록 지금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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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정지아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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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소설, 무거운 내용인데도 가볍게 읽었다. 무거움을 웃음으로 덜어주고 있는 소설들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자본주의의 적], [나의 아름다운 날들], [빨치산의 딸]들.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하기엔 다루는 내용들이 무겁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소설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린 작품들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엄혹함 속에서도 웃음이, 낙관, 긍정이 나타나서 좋았다고나 할까.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고꾸라지지 않고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그런 사람을 소설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 삶에 도움이 된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분명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한 세상을 살아내고 이제는 스러질 일만 남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정지아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따스한 눈길을 보낸다. 그들의 모습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다가오지만, 흑백사진은 그 자체로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안쓰러움,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왔던 신산한 삶들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치매에 걸린 노인, 한 평생 자신의 마을을 떠나보지 못한 사람 등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지금은 늙고 병들어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왔음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봄빛... 그렇다. 봄빛은 겨울을 나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때 이미 지나온 것들을 따스하게 비춰준다. 그러한 봄빛 속에서, 봄볕 속에서 고단했던 삶을 위로받을 수 있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위로해주는 봄빛(봄볕)일 것이다.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어느 소설도 순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운명을 받아들이든 맞서 싸우든 자신의 삶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길보다는 과거를 돌아보는 길이 훨씬 길어진 사람들. 그 길을 되짚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가도 가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하여 많이 걸어온 길,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 그 쉼에 함께하는 빛, 봄빛, 봄볕. 과거의 신산함을 녹여주고 쉬게 해준다. 완전히 녹이지는 못하겠지만, 또한 봄볕에 피부가 타듯이 또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길에서 잠시 쉴 때, 그 쉼을 함께해주는 봄빛과 같은 사람들, 장소들이 있음을...


이 소설은 그렇게 우리 삶이라는 길을 함께해주는 봄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언뜻 쇠락한 삶들이 풍경으로 제시되는 것 같지만, 멈춤이 아니라 나아감을, 우리가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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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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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이 있다. 긍정으로 쓰는 말이다. '개천에서 용난다'와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천'이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용'은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존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자수성가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사람을 말한다. 과거와는 단절된 현재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때 과거는 극복해야 할 무엇이지 자신을 이루고 있는 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지 않은 것, 떨쳐버려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이 지나온 과거다. 


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무시를 한다. 개천을 빠져나온 용이 다시는 개천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자수성가한 사람 역시 자신이 자란 환경에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곳은 지워버려야 할 곳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는 이곳의 사람들, 그리고 미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자수성가란 말과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능력주의'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곳을 벗어났다는, 그러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자신이 그곳을 벗어난 것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일까? 노력이나 능력도 있었겠지만 우연이나 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환경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신은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환상을 지니고 있으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된다. 자신과는 다른 무능력한 사람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경멸받아 마땅한 사람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노력을 한다. 능력을 발휘하려 한다. 한데 어떠한 조건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우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 속에 갇혀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디디에 에리봉이 쓴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이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노동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곳을 벗어난 그는 랭스에 살고 있는 부모님을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시대에 갇혀 지낸 존재라고, 교류도 하지 않는다. 형제들과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잘났으니까. 노력을 해서 벗어났으니까.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함께 본 사진들을 통해 다른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렇게 무시했던 그들의 삶이 무시당할 삶은 아니었음을. 그들 역시 그런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그것이 랭스로 되돌아간 그가 깨달은 것이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뒤돌아보는 경우가 드문데, 그는 뒤돌아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성소수자이자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성소수자에 대한 글을 쓰고, 성소수자에 차별에 맞선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이 편견과 모욕에 갇혀 살고 있음을,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제약을 받고 있음을 이해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는 되는데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그것도 가장 가까운 노동계급인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는 여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하나가 아님을. 노동계급 출신의 사람들이 계속 어렵게 살아가고,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것도, 그들이 어쩌다 극우세력에 투표를 하는 것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극우세력에 투표를 한다고 비판만 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단지 개인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랭스를 되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는 커다란 조건이 두 개 있었음을, 하나는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것과 또다른 하나는 성소수자라는 것을.


성소수자로서의 삶,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이해하면서 노동계급을 이해하려는 자세는 지니지 않았음을 깨달으면서, 이제 그는 과거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살피는 관점을 지니게 되는 것, 개천에서 난 용이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다시 개천에 가서 개천을 살피는 일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능력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성공한 디디에 에리봉을 통해서. 몇몇 성공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다수의 사람들을 비판하는 관점을 버려야 함을. 그들을 틀 지우고 있는 환경을 파악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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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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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한 남자. 집을 나와 평생을 함께했던 자신의 배에 오른다. 배로 사람들을 실어날랐던 사람. 노르웨이, 피오르. 이곳에서 저곳으로 사람들을 이동시켜주었던 그. 이번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배에 오른다. 이젠 자신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게 하러.


그가 집을 나와 배(페리)를 몰고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어떤 사람들은 주마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죽기 전에 자신의 일생이 주욱 펼쳐진다고.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닐스 비크라는 사람이 죽음으로 가는 길에 배에서 만났던 사람, 자신의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 그가 페리로 이곳과 저곳으로 이어주었듯이, 죽음에 임박해서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는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잔잔하게 펼쳐진다. 잔잔하다? 과연 그럴까? 멀리서 보는 바다와 산은 보기에 좋다. 어떤 위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아니다. 바다는 천변만화하고 온갖 위험이 어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 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을 바다와 산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인생 역시 그렇게 굴곡이 많다. 멀리서 보면 평평하고 단조로워 보이겠지만, 직접 경험해 보면 너무도 복잡하고 울퉁불퉁하다.


피오르 해안의 아름다움을 '자연'으로 뭉뚱그리고, '이곳의 자연이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다며 찬사를 늘어놓(196쪽)'는 사람 앞에서 ,


'닐스는 이곳 사람들은 '자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가리킬 수 있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어우러져 살 수 있는 것은 숲과 바위와 산과 강과 피오르지, '자연'이 아니라고 했다.'(196-197쪽)


이것이 인생이다. 마냥 좋아보이는 것만이 인생은 아닌 것이다. 닐스 비크의 삶이 평탄하고 행복했을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죽음을 앞둔 닐스의 회상은 아름답다. 평화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평화가 뒷부분에 가면 그의 인생에 평화만이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동생의 죽음, 딸들의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 등등. 여기에 뇌졸중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 이것은 결코 평탄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의 삶이 결코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는다.


아내와는 평생 사랑하고,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중에 만날 것을 기약하는 모습. 자식들의 삶 또한 자신들의 삶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모습.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삶에는 그 나름의 특별함이 있다. 우리 모두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닐스 비크의 평범한 삶을 통해서 특별함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삶은 모두에게 특별함을, 특히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산 사람의 삶은 더더욱 특별함을, 그래서 그러한 삶이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페리를 운전하면서 만난 사람들, 죽어가면서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떠올리고, 또 이미 죽은 사람들을 배에 태우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가는 닐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바람과 바다와 땅, 미움과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던 데 감사하고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삶은 끝없는 초안과 스케치이며,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거와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일단 시작된 이야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며, 좋든 싫든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따라가야 한다.'(268쪽)


이런 통찰. 평범한 삶 속의 특별함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특별함이란 꼭 겉으로 드러내어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그리고 닐스가 아내 마르타를 사랑하는 모습. 둘이 사귀게 되는 장면과 다시 죽음에 이른 닐스가 기다리고 있던 마르타를 만나는 장면. 


피오르는 어떻게 건너왔나요? 그가 물었다.

자전거를 타고 왔어요. (82쪽)


어떻게 피오르를 건너왔나요? 그가 물었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왔죠. 그녀가 대답했다. (270쪽)


이 대화가 살짝 변주되면서 둘이 만나 함께 살게 되는 장면과 다시 죽음 이후에 함께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사랑.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좋지만 이렇게 마르타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은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노트북]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만큼 격정적인 사랑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솔직담백한 사랑. 그리고 마지막까지 같이 하는 모습이 이 소설의 닐스와 마르타를 영화 [노트북]의 두 사람과 연결짓게 하고 있어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2004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개봉이 되었을 때 보았는데, 재개봉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어 찾아보니, 2016년, 2020년, 2024년에 재개봉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 부부의 사랑 못지않게 닐스가 마르타를 사랑하는 모습이 잔잔하게 펼쳐지고 있어서 영화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랑에서도 굴곡이 있음을, 그 굴곡을 넘어 함께했을 때 더 큰 사랑과 감동이 있음을 영화와 소설이 모두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하게 만든 감동적인 소설이다. 물론 이 소설에는 이런 사랑 말고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닐스 비크의 모습이라든지,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든지, 닐스 비크에 연대해 결국 정의가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페리 동료들의 모습이라든지, 여러 사회문제도 닐스 비크의 삶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것들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닐스 비크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이 바로 특별함임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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