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없는 세계에서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김주영 지음 / 우리학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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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후 위기가 기후 재앙으로 넘어가고 있다. 해마다 겪게 되는 기후 재앙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만, 여기에 대한 대응책은 서류에 그치고 말 뿐이다. 그나마 서로 합의된 사항도 정작 지켜야 할 나라들이 지키지 않고 있는 현실이고.


처음에는 발전이 덜 된 나라에서 피해가 더 심해지겠지. 그리고 이것이 점점 퍼져나가겠지. 그렇게 되면 지구에 인간을 위한 환경이 파괴되고,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되겠지. 하긴 누군가는 화성으로 이주하면 된다고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바다에 자신의 피난처를 만들면 된다고 하니...


같은 재앙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지금처럼 지속되는 성장 우선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사회는 극복할 수 없는 재난으로 다가올 것이다. 지구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럼에도 지구는 살아남겠지. 이 지구라는 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까. (아, 신이 인간을 위해서 지구를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자, 우리 인간을 지구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존재들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식물이다. 식물이 없으면 인간은 방독면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라. 방독면을 쓰고, 나무들이 독을 뿜어대는 그런 환경을.... 이것 역시 인간이 초래한 결과다. 그렇지만 이렇게 인간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려 하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이 소설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식물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죽였다고 자책하는 이언이라는 아이로부터.


환경이 파괴되고, 땅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온실 속에서 또는 수경 재배로 식물이 근근이 자랄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 식물을 자라게 하는 일은 사람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학교에서도 그런 교육을 하고 있고.


이런 재난 상황에서도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도 의견이 갈라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약탈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도 있다.


소설은 이런 환경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어떻게 해야 식물 없는 세계에서 식물 있는 세계로 갈 것인가? 다시 땅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립하던 것처럼 보이는 집단들이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있고, 그런 목표를 실천하는 방법을 꼭 하나로 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함께 협력하는 것으로 소설은 전개되고 있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던 주인공을 중심으로 식물을 잘 키우는 능력을 지닌 두 인물과 이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두 할머니가 등장한다.


각자가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식물을 자라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이, 약탈자들의 위협이 다가오고, 결국 약탈자들의 침입을 받은 그 공동체는 자신들의 수확물을 모두 빼앗기고 만다. 엄청난 재난 상황이다.


재난 상황에서 좌절하고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갈 것인가? 소설은 약탈자들의 침입에 대비한 두 집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방식이 다르지만 재난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는 둘 다 도움이 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협동하는 모습을 통해 재난 민주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의 잘못을 탓하고 네 탓이요, 네 탓이요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현명하게 해결할까를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재난 민주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희망의 싹이 돋아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고 있는데... 소설 속 재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면 소설 속 상황이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되겠지만.


앞이 예측될 때 준비를 해야 한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그 준비가 무엇일까? 우리 역시 식물을 심고 있지 않은가. 지구는 푸른 별이니 물의 푸름만이 아니라 식물의 푸름도 지구의 푸름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희망을 주는 소설. 특히 청소년이 주인공이 되어 그들이 살아갈 사회를 이끌어가려는 모습... 그렇게 이 소설은 희망을, 우리들에게 푸른 씨앗을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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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4년 겨울호 - 통권 188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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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우리가 시민하면 떠올리는 그 시민(市民)이 아니라, 백성을 섬긴다는, 백성을 사람으로 바꿀 수 있으니 사람을 섬긴다는 그 말. 동학에서 쓰는 시민(侍民). 


동학에서 쓰는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이 아니다) 천주를 모신다는 말. 그런데 천주가 꼭 하느님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하느님은 바로 곁에 있는 우리들이다. 사람들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다. 땅도 하늘도, 물도, 풀도, 동물도 모두 하느님이 된다.


그러니 시천주라는 말은 결국 시민이라는 말과 통하고 시민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섬긴다는 말과 통한다고 보면 된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는 말, 결국 사람이나 동물들 또는 다른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하늘이 하늘을 먹는 삶이 곧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또다른 하늘을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 언제가는 나도 그들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떤 생명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모두가 하늘이므로.


이런 정신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먹을거리가 남아돌아 어디서는 버리고, 어디서는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중한 생명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제로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남 역시 나일 테니까. 다른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경시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생명을 중시하는 삶, 그런 삶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일, 그것이 바로 시천주고, 시민(侍民)이다. 이런 시민(侍民)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면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도한 짓을 하는 존재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는 시민(侍民)과는 반대에 있는 존재이므로, 하늘을 해치는 자이므로, 그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민(侍民)을 하는 자세다. 의무다. 책임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무도한 자와 그를 비호하는 자들. 시민(侍民)이 뭔지 생각도 하지 않는 자들.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 도무지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 저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자들.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길은 시민(侍民)의 마음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다. 시민(侍民)의 마음이 깃들었다면 이제 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민(市民)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시민(市民)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바로 시민(侍民)이므로.


예전 동학 혁명에서 그러했듯이. 그런 행동이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다. 시민(侍民)은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에 평화로운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평화가 권위를 지녀 무도한 자들이 어쩔 수 없게, 어찌할 수 없어 따를 수밖에, 그렇게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회심의 순간이 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시위 현장이 돌이 날아다니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색색의 응원봉들이 펼쳐지고 있는 평화로운 현장. 이런 평화로운 시위야말로 시민(侍民)의 정신이다. 우리는 이미 시민(侍民)의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 평화로 무도함을 대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만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정착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런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侍民)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공론장을 형성하고, 그것이 안착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시민(侍民)의 정신은 지금 지구가 처해 있는 기후 위기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위기도 이겨내게 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를 읽으면서 이 시민(侍民)이라는 말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민(市民)과 겹쳐졌다. 그렇다. 시민(市民)은 결국 시민(侍民)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侍民)들이 우리 사회를

평화롭게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물'에 관한 글이나 '농업'에 관한 글, 그리고 영화 또는 영화 감독에 대한 이야기도 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자연을 거스리는 물 관리법은 시민(侍民)이 아니다. 성장을 위한, 자본을 위한 농업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단지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영화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우리 삶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문학, 예술이 시민(侍民)이고 자연의 흐름을 살리는 물 관리가 시민(侍民)이며, 성장이 아닌 모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농업이 바로 시민(侍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이름만 지방자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지역에 맞는 정책이 실행되어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또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을 고려하는 정책이 실시되어야 진정한 지방자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자치는 바로 시민(侍民)의 실현이 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에는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 많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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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동규 시인의 시집을 읽다. 노년의 냄새가 풀풀 나는 시집이다. 이제는 죽음에 더 가까이 간 시인의 시들.


  그래서 이 시집에는 '맨땅'이라고 낮은 곳이 나오는가 하면 자신의 삶이 '조그만 포구'가 되었다고 읊조리는 시들이 있다.


  나이듦. 늙음.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 읽다가 이 시를 보면서 그래, 어쩌면 이것이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창 때를 지나 이젠 꺾인 때. 그럼에도 자신이 꺾이기 전의 모습대로 살아가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것이 아니라, 꺾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꺾인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태도. 그런 삶.


그것은 죽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늙음이 젊음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그러한 삶의 모습들. 젊음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하겠지만, 아니다. 늙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젊음이 젊음이다.


말이 필요없다.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허리 꺾이고도


장맛비 갠 오후 짧은 산책 나갔다가

길가의 풀꽃 하나에 마음 빼앗긴 적이 있었다.

안과에 계속 다녀도 눈이 편치 않아

마음이 어디에고 자리 잡기 힘들어할 때

마을버스 종점 지나 서달산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만난 씀바귀.

공사판에서 날라온 흙 조각에 맞았나

꽃대 가운데가 꺾이고도

땅으로 떨어지는 금빛 얼굴을 쳐들고 있었어.

흠집 하나가 얼굴 가운데 씨앗처럼 붙어 있었지.

자세히 보니 조그만 풍뎅이,

손 내밀어 날려버릴까 하다 그냥 놔뒀어.

그래, 벌 나비는 아니더라도

산 것에게 황금빛 쉴 자리 하나 마련해주는 게

허리 꺾이고도 얼굴 쳐든

한 꽃의 완성이 아니겠나.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년 초판 3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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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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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암스테르담'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전개다. 도대체 암스테르담은 언제 나오는 거야? 그러다 끝부분에 가면 아, 이래서 제목이 암스테르담이구나 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장소가 암스테르담이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에 의해서.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파국을 향해 달리면서도 그것이 자신들이 파멸로 가는 길임을 알지 못한다.


그냥 자신들의 일에 취해 있을 뿐이다.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데, 자신들의 그러한 허상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제대로 보인다. 오로지 자신들이 보지 못할 뿐이다.


한 여인의 죽음으로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드러난다. 죽은 여인의 숨겨진 애인들 셋과 그 여인의 법적 남편.


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할까. 자신의 허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역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죽은 여인인 몰리의 애인이기도 한 정치인을(가머니) 파멸시키려는 편집국장 바먼과 위대한 음악가라고 착각하고 사는(사실은 어느 정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과연 그의 음악적 재능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발휘될까 하는 점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가 현실 세계와 부딪히는 장면에서 재능이 허상이고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클라이브, 그리고 외무장관까지 올라간 정치인 가머니가 그들이다.


가머니의 성적 취향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왜 가머니의 성적 취향이 문제가 될까? 그의 성적 취향과 정치적 활동은 별개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도 버넌은 그러한 관점을 취하지 못한다. 그는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훌륭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문을 통해 폭로하려 한다. 


물론 신문 발행부수를 올리려는 목적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몰리의 애인이라는 점에서 질투심도 작동하고... 그렇다면 그가 정치인은 공인이라고 생각하고,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생활에서도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면, 자신이 그러한 가십거리를 기사로 내보내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것이 그가 파멸하게 되는 이유다.


클라이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악상을 위해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것을 무시하려고 한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문제와 동떨어져 있다는 발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그의 그러한 점을 경찰서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버넌과 클라이브는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되면서 죽음을 이끌어내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머니 역시 사퇴하게 되고...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이것이 몰리의 남편인 조지의 음모가 작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부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의 허상이 현실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제공한 사진이 세 사람을 모두 파멸로 이끌게 되니, 결국 승자는 조지다. 이렇게 소설은 처음에 친구들의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그 관계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또 겉으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상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모습이 드러난다.


겉으로만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위기 상황이 되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된다. 이것이 바로 소설이 보여주는 점이다. 위선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결말까지 가야 작중 인물들의 모습과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기 힘든데,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의 윤곽이 잡히면서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러면서 과연 내가 추구하는 삶, 내가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지 생각해 보게 된다. 허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형식적인 관계로 남들과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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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 기후-생태 위기에 대한 비판과 전망
이송희일 지음 / 삼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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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더더욱 기후 위기를 몸으로 겪는다.


영화감독인 이송희일은 기후 위기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공부하고, 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많은 자리에서 기후 위기에 대한 강연을 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결과를 정리했다. 특히 기후 위기를 피상적으로 대하지 않고, 기존의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조목조목 따지면서 비판하고 있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을 세 단어로 정리하면 '저항, 대안,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현재 기후 위기를 불러낸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단지 개인의 방만한 삶이라고, 개인에게 책임을 지워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기후 위기를 불러온 것은 성장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또 무엇을 바탕으로 하고 있나? 바로 식민주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종종 우리는 기후위기를 자연적 재앙으로 이해하지만 명백히 정치적 재앙이다. 그것은 가부장제 재앙이고, 자본주의 재앙이며, 인종주의 재앙이다.'(23쪽)


'지구 경관을 파괴적으로 변경하고 자연과 인간을 노예화했던 식민주의가 바로 기후변화의 뿌리다.'(34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지금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는 우리들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삶이 불안정해지고 있는데,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 특히 여성, 또 성소수자 등은 더한 상황으로 내몰린다.


'전세계 빈곤층의 80%도 여성이고 기후 이주민의 80%도 여성이라는 유엔의 통계는 이 같은 잔인한 현실을 적확히 폭로한다. 여기에 더해, 기후재난이 증가하면 젠더 기반 폭력이 급증한다.'(20쪽)


이런 현실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저항은 대안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냥 반발이 아니라, 이런 세상도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 개인이 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함께 하는 것. 땅으로 말하면 공유지가 될 것이고, 삶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연대와 공유가 될 것이다. 그러한 조직을 만들어 함께 하면 기후 위기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지닌 문제가 무엇이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차분하게 이 책을 통해서 풀어가고 있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을 곱씹으면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찾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일지 찾고 실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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