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 체코 대표작가의 반려동물 에세이
카렐 차페크.요세프 차페크 지음, 신소희 옮김 / 유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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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맞다. 재미있다. 웃으면서 읽고, 맞다, 맞다 맞장구를 치고,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하기도 한다.


차페크 글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을 무척 재미 있게 읽어서 이번엔 반려동물 이야기야? 하면서 읽게 된 책.


개와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들과 함께한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펼쳐보이고 있다. 가끔은 개나 고양이가 말하듯이 표현하기도 하고...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내용도 있지만, 차페크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자. 지금 생명을 대하는 잣대로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으니. 다만 현재에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야함은 명심하고.


키우던 개가 강아지를 낳았을 때 차페크가 한 행동은 지금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물론 그가 직접 실행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게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강아지들을 죽이게 한 것.


지금이야 중성화 수술이다 뭐다 해서 개체수를 어느 정도 조절을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없었으니, 태어나는 많은 생명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 개에 관한 이야기에서 차페크 역시 많은 강아지들로 인해 자신이 한 행위를 서술하지만, 그런 행위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는 개를 반려동물로 여기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애견이라고 하기보다는 함께사는 생명체로 인식하고 있음은 뒷부분에 나오는 고양이 이야기로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가 행한 잘못은 잘못으로 인식하고 그가 반려동물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차페크가 만든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왜 개 꼬리가 짧아졌는지, 왜 개가 땅을 파는지, 어째서 풀밭을 세 바퀴 도는지, 개의 품종에 따른 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지어내 개에게 들려준다. 그것을 우리가 듣고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고양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많은 고양이 새끼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하던 고양이가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고양이 새끼들을 분양하기 위해 모임에 참여할까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모습이 분명 진지했을 텐데, 읽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렇게 반려동물들과 함께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개와 고양이 이야기를 하다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에게 돌아온다.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차페크가 살았던 시대는 인간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으니... 다행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차페크는 2차대전 전에 세상을 떠서 학살을 면했지만 형인 요제프는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하니...


그는 개와 고양이에 관한 글을 쓰다가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한다.


'야생동물이란 믿음을 모르는 짐승이며, 길들여짐이란 그저 서로를 믿는 상태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 인간도 서로를 믿는 만큼만 야생동물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6쪽) ... 신뢰가 없는 상태는 야만의 제1단계이며, 불신은 정글의 법칙이다. 불신을 부추기는 정치는 야만의 정치다. 사람을 믿지 않는 고양이는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 야생동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 또한 상대를 야생동물로 보는 것이다. 상호 신뢰는 인류 문명보다 오래된 체제이며 그로 인해 인류는 인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 상태를 깨뜨린다면 인류가 만든 세상은 야생동물의 세계가 되고 말리라. (207쪽)


익살스러운 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바로 반려동물과 지내는 생활에 믿음이 있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것이 동물과 동물,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는 차페크의 마음이 이렇게 글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계는 과연 차페크가 말하는 믿음이 있는 세계일까? 반려동물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인간끼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재미있게 낄낄거리면서 읽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 생명과 함께 사는 일은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도 살피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금 깨우쳐준 차페크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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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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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제목에서 보면 하나만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일은 오렌지말고도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소설의 각 장들은 성경에서 따왔는데, 창세기부터 룻기로 끝난다. 시작에서 방랑으로 끝난다고 봐야 하는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된 아이가 그 신앙으로 키워진다. 그런데 어디 부모의 뜻대로 성장하겠는가. 아이는 학교에서도 계속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만 해 교사들의 걱정을 받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다. 그것을 오히려 더 바람직해 한다.


성경대로 살아가는 아이를 바라는 부모. 그런데 아이는 성장하면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엄마에게는 재앙이다. 사탄이 아이의 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여긴다. 목사 역시 마찬가지고.


이것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집을 나오지만, 그렇다고 부모와 연결된 끈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작가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인데... 여기서 과연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부모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종교가 사람을 획일적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종교가 아니라 그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그들의 말이 과연 성경과 또는 신과 합치하는가. 그들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면 이단이라고, 사탄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종교인가?


하나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견뎌낼 수가 없다. 그것은 광신도들을 양산할 뿐이다. 그러한 광신도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름은 곧 잘못이고, 잘못은 신과 반대되는 사탄의 행위일 뿐이다. 그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 주장이 소설 속에서 이런 대사로 나타난다.


"오렌지야말로 유일한 과일이지."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56쪽)


그 많은 과일 중에 오렌지만이 과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신만이 유일하다는 주장. 그 신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것. 그러니 여기서 다른 행위를 하는 또는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자신들의 신념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나중에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앞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말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 (285쪽)


이 말에 다른 과일을 모두 인정한다는 마음이 들어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오렌지에서 다른 과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냥 자신들이 과일이라고 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획일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의 이야기다. 자신의 특성을 알게되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아이의 모습.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종교는, 부모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남들도 그대로 따르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나와 우리와 다른 생각, 다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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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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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하라고 한다. 낯선 곳으로 가서 낯익은 자신과 결별하는 경험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늘 가던 장소만 가지 말고 다른 장소에 가보는 일. 자신을 고정된 삶에서 변화 있는 삶으로 바꿔가는 일. 습관적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다. 여행은 그러한 경험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솔닛의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행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솔닛이 가보았던 낯선 장소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런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 잃기 안내서]는 '길 찾기 안내서'다. 우리는 길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가고 있던 길을 다르게 본다. 그때서야 의식한다. 의식을 하면 되돌아보게 되고, 앞을 살피고 좌우를 살피게 된다. 또한 빠르게에서 느리게로 바뀌게 된다. 살펴야 하니까.


길을 잃는 일은 길을 찾는 일의 시작이다. 그러니 길을 잃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솔닛의 말을 빌려 정의하고자 한다.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42쪽)


자, 여기서 잃는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다. 찾음이다. 그것도 이전에 있는 것에 무언가를 더 보태는 일. 그것이 바로 '길을 잃는다'가 지니는 의미다.


인생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실수와 실패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인생에서 실수와 실패가 없을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다음 인생이 달라진다.


길을 잃었다고 주저앉으면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그곳이 자신의 마지막 장소가 된다. 하지만 길을 잃었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면 그곳은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 시작하는 장소가 된다. 새로운 시작,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실수와 실패가 마지막 장소가 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면 누구나 실수나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이 이미 닦아놓은 길로 가려고 한다. 그냥 그렇게...


여기에서 솔닛의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154쪽)


이런 점에서 솔닛의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길을 잃으라고, 실수를 해보아야 한다고, 실패도 겪어보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실수와 실패가 용인이 되고 또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하여 솔닛의 이런 주장은 개인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야 한다고, 그런 일들은 이미 길을 잃어본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이런 주장을 솔닛은 글쓰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


'글쓰기는 즉각적인 대답이나 상응하는 대답이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도 있는 대화, 아니면 긴 시간이 흘러서 글쓴이가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다.' (186쪽)


이렇게 먼저 대화를 시작한 솔닛. 우리는 그 대화를 이어받아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길 잃기가 여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길 잃기가 나를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무언가를 더 보태어서 돌아오게 하는 여행. 그것이 바로 솔닛이 말한 길 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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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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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고생이 두부 손상으로 죽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소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 명의 서술자가 등장한다. 죽은 여고생의 동생인 다언, 다언과 같은 동아리 소속이자 죽은 여고생과 같은 반이었던 상희, 그리고 역시 같은 반이었던 태림.


서술자는' 다언-상희-다언-태림-다언-태림-상희-다언' 순으로 나온다. 사건의 전모는 태림이 서술자로 나와 상담사에게 전하는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희가 서술자로 나오는 부분에서 다언의 모습은 달라져 있는데, 한번은 아직도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고, 한번은 어떤 식이든 상처에서 나온 모습이다. 그러니, 상희의 서술을 통해서 다언이 자기 나름대로의 해법을 실행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다언이 서술자로 나오는 부분은? 언니의 죽음을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수렁 속에서 헤매던 다언이 서서히 복수를 다짐한다. 언제까지 그냥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그때 다언은 계란 노른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노란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레몬,이라고 나는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복수의 주문처럼 레몬, 레몬, 레몬이라고.' (97쪽)


언니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은 노란색, 계란 노른자도 노란색, 그리고 레몬 역시 노란색. 노란색이라는 것이 서로를 연상시키고 있다. 언니가 입었던 노란색 옷은 죽음의 옷이고, 잊고 싶은 색깔이었다면, 달걀 노른자의 노란색은 그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이젠 행동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자신을 추스리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색깔이라면 레몬의 노란색은 무엇인가. 


레몬의 신맛, 인생의 신맛.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자, 나는 이제껏 인생의 힘듦을 겪었다. 이젠 너희 차례다.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니면 신맛으로 인해 긴장을 잃지 않고 자신을 행동으로 이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하여간 레몬이 주문처럼 등장하고...


이제 서술자들의 서술을 통해서 또다른 사건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다언의 복수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에 매개가 되는 인물이 한만우라는 인물이다. 한만우라는 이름 때문에 붙은 별명이 소설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민요의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안만우우'(11쪽)이라고 부른다는 서술이 그렇다.


평온한 세상이 아니라 한 많은 세상인데, 그런 세상살이를 하는 인물이 바로 한만우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이 바로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여 다언은 이런 생각을 한다.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198쪽)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199쪽)


결국 세상은 평온하지 않지만, 그것이 바로 인생이고 삶의 의미라는 생각. 자신에게 닥친 일을 직접 대면하겠다는 의지이지 않나 싶다.


명확하게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지는 않고, 또다른 사건도 묻힌 듯이 보이지만 두 사건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읽으면서 그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작가가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들 역시 우리 삶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좋은 면을 보여주지 않고 뜻하지 않게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들이닥친 문제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다언의 서술에 나타난 한만우 가족의 삶을 통해서 다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소설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삶의 의미일 수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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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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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불현듯, 어라 이 소설집에 '안녕 주정뱅이'라는 소설은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제목은 '안녕 주정뱅이'지만 그러한 제목을 가진 소설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제목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야 한다. 


분명 공통점이 있으니 이런 제목을 붙였겠지. 주정뱅이라는 말부터 생각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주정쟁이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하긴 '-뱅이'라는 말에 높임의 뜻은 없을테니, 그렇다고 '-쟁이'라는 말에도 높임의 뜻은 없을텐데, 주정쟁이는 '주정을 부리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그냥 그러한 속성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제목에 '주정뱅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술과 관련된 일들을 겪은 사람들이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생각을 해보니, 인물들 모두 술을 마시고 그로 인해 어떠한 일들을 겪게 된다. 


우리 인생에서 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소설집에 실린 소설 모두가 술과 관련이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읽다보니, 술로 인해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들을 겪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어디 우리 인생에서 뜻하지 않는 일이 술로만 일어나는가. 인생 자체가 뜻하지 않은 일들의 연속 아니던가. 그러한 우연들이 겹쳐 인생을 이루고 있으니.


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소설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술과 비슷하게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안녕'이라는 제목이 들어갔나 보다.


'안녕' 우리가 인사할 때 주로 쓰는 말 아닌가. 이는 주정뱅이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에서 뜻하지 않게 겪게 되는 일들을 외면하고 회피하지 않고 그것들을 마주보겠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층'에서, 230쪽)


당연히 내 탓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게 다가온 일이다. 이미 내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 탓은 아니잖아요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마주해야 한다. '안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러한 받아들임, 소설집의 첫소설인 '봄밤'에서 아프게 다가온다. 지독하리만큼 힘든 상황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분자를 키워가려고 한다. 분모가 어려움, 안 좋음이라면 분자는 할 수 있음, 좋음이라고 한다.


분자와 분모가 같으면 1이 되겠지만, 우리 인생은 불확실한 분모 쪽이 클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분모 쪽은 우리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게 훅 치고 들어오는 불행들, 사건들... 불확실한 분모를 어찌할 수 없다면 인생에서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어디인가? 바로 분자 쪽 아니던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 상대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려고 하는 것. 그것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부분을 하는 일. '안녕 주정뱅이'하고 술을 맞이하는 일이다.


'봄밤'에서 영경이 하는 말.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봄밤'에서, 25쪽)


수환이 하는 말.


'분모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분자라도 늘려야지.' ('봄밤'에서, 32쪽)


이런 장면 아니겠는가. 이것을 꼭 상대방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안녕 주정뱅이'라고 하는 순간이, 내게 찾아오는 온갖 불행들, 내 책임이 아닌 것 같은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면서, 그것이 내 탓이 아니잖아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일로 바꾸는 때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분자를 늘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분자를 늘리는 인물들만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인생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만 작가는 분모에 들어갈 수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카메라, 층'은 이런 점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자,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고. 그것은 어찌할 수 없다고. 어찌할 수 없으니 그냥 포기할 것이냐고. 아니라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하여 '봄밤, 이모'에서는 어찌할 수 없음에도 분자를 늘리는 사람의 모습이 펼쳐진다. 나머지 소설들에서는 분모에 해당하는 일들과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하여 분모에 해당하는 삶이든, 분자에 해당하는 삶이든 모두 우리 삶의 일부임을, 그것들이 우리 삶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술을 마시는 경우가 기분이 좋아서, 또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등등 다양한데, 술이 외부에서 내게 들어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과 같다. 그 일들이 때로는 나를 좋게도, 나를 좋지 않게도 하지만 한번 마신 술이 다시 나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그러한 일들도 시간이 필요함을. 


그 시간 동안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대면할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함을.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에서 분모와 분자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모습임을 이 소설집은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 나도 내 삶에서 어찌할 수 없는 분모에 모든 힘을 쏟아붓기보다는 분자를 어떻게 키울지에 힘을 써야겠다. 이것이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문학을 만나는 일은 분자를 키우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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