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특집 기사가 '결심했다, 소비와 멀어지기로'다. 소비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소비가 있어야 생산이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자본주의는 반대다.


  생산이 소비를 촉발한다.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온갖 광고들을 보라. 수요를 창출해내는 생산.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니 좀 생경한 언어를 쓰면, 자본주의는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더 중요한 사회다.


  그러니 주식도 하고, 가상화폐(블록체인)도 나온다. 생산품을 받고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생산품이 된다. 돈이 돈을 낳는 세상이 된다.


이런 세상은 소비 진작이 기본이다. 소비가 축소되면 경제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소비를 권장한다. 교환가치가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필요한 소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에,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다. 그런 소비에 그치지 않고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하는 것은 아닌지, 내게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소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기회를 준 것이 이번 호 특집 기사다.


소비를 줄이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나타나는데, 이 중에는 주식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으니, 참조할 만하다. 단순히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줄인 소비를 다른 곳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투자를 해도 되고, 환경에 투자를 해도 되고, 방법은 다양하다. 그런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이제는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점을 [빅이슈]가 보여주고 있다.


이 특집 기사 말고 생각해 볼 글이 바로 '집'에 관한 기사다. '핀란드에서 홈리스가 줄어든 이유'라는 글이 읽을 만하다. 아니 읽어야 한다.


집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정책을 추진했다는 핀란드. 이들에게 홈리스(노숙인)들은 내쳐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마련해주는 정책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


전세 사기를 당해 오갈데가 없어진 사람들,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는 언감생심 홈리스에 대한 주거 정책을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내 돈으로 간신히 마련한 전세집조차도 사기를 당해 전세금을 날리고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도 구제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능력이 없다고, 집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집을 구해주는 정책을 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길일까? 아니다. 홈리스들도 자신들의 집에서 생활할 수 있을 때 사회는 더 풍요로워지고 사회적 비용도 감소한다. 즉 사회에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줄기 때문에 사회적 행복도는 높아질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우리나라 주택 정책에 시사점을 준다.


이밖에도 읽을 만한 많은 글들이 있다.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 (음악, 영화, 전시 등)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준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이번 327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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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자유의 브로맨스 - J.R.R. 톨킨과 C.S. 루이스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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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R. 톨킨, C.S. 루이스. 우리에게는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 둘이 우정으로 뭉친 사이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냥 소설가로만 알았지. 그것도 전혀 관계 없는.


이래서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 다양한 책들을 통해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책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문이자 길이됨을 이 책을 통해서 강화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톨킨이 나이가 조금 많지만 세상을 먼저 뜬 것은 루이스이고, 그 둘은 소설가이기 전에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하고, 함께 작품 읽기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환상소설을 쓴 작가라는 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점에서, 현대 산업사회보다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 자연과 함께하는 사회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드러내놓고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하지 않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둘을 무소유와 무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고, 이를 아나키즘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이 작품에 어떻게 나왔는가를 살펴보고 있는데, 우선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배경이 산업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고 한다. 또한 등장인물들 역시 공동체, 우정을 중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고.


두 사람이 쓴 많은 작품이 나오고 있지만, 대표작만 봐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둘이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분제를 거부하지 않았다.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반지의 제왕]에서도 신분제 사회는 유지되니까. 하지만 전제군주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군주가 등장하고, 신분제라고 하지만 거의 평등하게 지내는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함께 지내는, 무권력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서 행사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으니...


이 책은 톨킨과 루이스의 생애를 다루면서,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우정을 어떤 식으로 이어갔으며, 작품 활동은 어떠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의 작품을 '무소유와 무권력을 향한 것'이라고 정리를 하고 있는 저자는, 이 둘을 통하여, 또 이들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 역시 '자유와 평등, 자유와 자치와 자연에 입각한 우정의 사회, 우정의 공화국을 이 땅에도 세워야 한다'(276쪽)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우정을 통해 맺어진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해준, 그리고 그런 우정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했음을 알려준 책이다.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을 읽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쓴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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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김진주 지음 / 얼룩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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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나 범죄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지만, 한 번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난 예외라고 생각했다. ...... 범죄를 당한 사람들은 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내 일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진짜 몰랐다. 그게 내가 될 수 있단 걸." (12쪽)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간다. 자신에게 닥치기 전에는. 장애 역시 마찬가지다. 남 일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하지만 남 일이 아닐 때가 있다. 그때가 되면 생각과 행동이 달라진다.


내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 날 피해자가 된다. 이유 없다.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연이 겹칠 뿐이다. 이것을 이 책에서는 '묻지마 범죄'라고 하지 않고 '이상동기 범죄'라고 한다. 그렇다. 피해자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가해자의 이상동기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은 피해자다. 가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더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해자는 사건이 벌어지고 수사와 재판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정보를 차단당한다고 한다.


국가가 대신에서 가해자를 응징하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 재판 날짜도 모르고, 재판 관련 서류도 제대로 볼 수 없고, 더 이상한 것은 수사 과정에 대한 정보를 피해자가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피해자 구제에 관한 것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그런 점들을 몰랐다가 직접 경험하면서 알게 되고, 그런 제도를 고치려고 노력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사법제도가 피해자 구제를 기본으로 하고, 피해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고, 가해자가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교정하는 것이 뒤따라야 하는데...


가해자 교정을 중심으로 하고, 피해자는 거기서 소외되고 있는 모습을 이 책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공론화 한다. 왜? 재판으로 안 되니까. 사회적 압력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게 된다.


공론화가 되면 사법부에서도 관심을 가진다. 언론이 관심을 가지고 방송을 하기 시작하면 많은 것들이 그 전과 달라진다. 이런 모습을 보는 피해자의 심정은 어떨까? 과연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철저하게 피해자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피해자들이 사건이 벌어진 뒤 얼마나 힘든 일들을 겪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법(경찰, 검찰, 판사)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발견한다. 


이 엉성함이 피해자의 억울함을 가중시킬 수 있다. 그러면 피해자는 사건의 피해뿐만이 아니라 그 뒤의 과정에서 더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피해 구제를 받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마음의 상처가 더해지기도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 되기 때문에 저자가 나섰다고 한다. 피해의 공포 속에 위축된 삶을 떨치고, 더이상 그런 피해들이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또 그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더한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했다고 한다. 피해자를 돕기 위한 연대 활동에도 참여한다고 한다.


함께해야 고칠 수 있는 것들이 많으므로. 함께하면서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고, 불합리한 것들을 개선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본인도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를 껴안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세상이 좋아지는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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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있는 줄 알았다. 너무도 유명한 시집이었고, 제목이 된 시는 자주 읽었던 시였으니까.


  그런데 시집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시만 읽고 있었던 거다. 워낙 유명한 시라서 쉽게 만날 수 있던 시였으니까.


  그 한 시로도 충분하지만 시집을 구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집은 처음 간행된 시집과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시집이 다르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시인이 시집의 시들을 바꾸기도 하고, 제외하기도 했다고. 새로운 개정판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다.



 19권. 맑고 부드러운 언어로 전통 서정시의 순정한 세계를 펼쳐온 '우리 시대 최고의 감성 시인'으로서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93년 첫 개정판에 이은 두번째 개정판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부 가름을 다시 하고 연작시를 해체하여 작품마다 제목을 새롭게 달았으며, 초기 시 4편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1979년 초판이 출간된 지 3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냉철한 현실 인식과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슬픔을 수반한 아름다움'이 보석처럼 빛나는 정결한 시편들이 여전히 가슴을 적시는 뭉클한 감동을 일으키며 고요한 울림을 선사한다.


내가 읽은 시집은 2004년 개정판 16쇄니, 첫 개정판일 것이다. 표지 그림이 다르다. 그렇다면 수록된 시도 조금 다를테고. 


뭐, 그런 사정이야 그렇다치고, 시집에 나오는 주된 낱말은 '슬픔''이다. 다른 낱말들 중에 빈도수가 높은 말도 있지만 '슬픔'만 취급하자.


아직도 우리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시인이 그렇게 슬픔을 주겠다고 하고,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슬픔이 기쁨에게' 중에서 - 13쪽)고 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슬픔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의 기쁨에 취해서, 슬픔을 외면하는 생활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지금 시대에는 더더욱 슬픔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슬픔을 멀리하면서 기쁨만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게 기쁨만을 바라보려고 한다고 슬픔이 사라질까.


아니, 오히려 슬픔을 바라보고, 슬픔을 만나고, 슬픔과 함께해야 슬픔이 사라지지 않을까.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슬픔으로 가는 길'에서 - 8쪽)고 했다.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슬픔을 위하여'에서 - 9쪽)


이렇게 살다 보면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보아라. /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슬픔 많은 이 세상도'에서 - 14쪽)라는 시구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슬픔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정호승 시는 그렇다고 슬픔 속에 함몰되어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정호승 시는 움직임이 있다. 가고 있다. 끝에서 멈추지 않고, 그 끝에서 움직인다. 이는 그의 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정호승의 '봄길' 중에서)라는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결국 그가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쁨의 세계로 함께 가기 위해서다.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만들기 위해서다.


각자도생의 사회라고 한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라고도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다. 그런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니 슬픔을 생각하자. 나의 슬픔, 남의 슬픔, 우리의 슬픔을 생각하면 그런 슬픔 속에서 우리는 기쁨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정호승 시집을 읽으면 그런 슬픔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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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사피엔스 - 전혀 다른 세상의 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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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막을 방도는 없다. 막는다고 해서 개발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내가 쓰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쓰지 않는 나는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듯 이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휩쓸려갈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거부하고, 부정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적어도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또 시대에 뛰떨어져 허덕허덕거리며 살아가지 않으려면.


이 책은 그런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지금 AI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준다.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세상이 변해버렸다. 이제는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AI 기술이 속속 나오고 있다.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예술이라고 해서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미 사진과 그림 분야에서 또 영상 분야에서 AI는 사람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제작을 해내는 솜씨. 이제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그것에 맞춰 준비해야 한다고...


물론 젊은 세대는, 요즘은 Z세대와 알파세대를 합쳐 '잘파세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러한 AI 기술에 친숙하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더불어 지내왔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은 적이 거의 없는 세대다. 당연히 스마트폰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들이 더 편하다.


그리고 AI 시대는 스마트폰으로 많은 것들을, 앞으로는 모든 것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그런 세상이 온다.


아무리 그런 세상을 거부하고,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돌아갈 수 없다. 물론 여유 있는 사람은, 그런 AI 기술을 거부하고, AI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미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그냥 남이 자신을 위해 해줄 수 있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또 그렇게 여유 있는 사람일수록 반대로 첨단 기술에 앞서간다. 그들은 어쩌면 먼저 AI 기술에 접근하고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들은 몰라도 아는 사람을 고용해서 더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여유집단들을(사업을 해서 더 많은 이윤을 내겠다가 하는 사람은 제외하고) 빼면 다른 사람들은, 생존-생활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AI 기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무시했다가는 취업하기도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어야 앞으로 올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면, 배워야 한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앞서가기 위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분야에 이미 AI 기술이 도입되었음을 보여주고, 이런 추세는 거스를 수 없을 강변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AI 기술을 활용할 기반이 마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하고, 잘 활용하고 있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이미 우리는 AI 시대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AI 시대가 되었다고 인문학이 쓸모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저자 역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사람의 감성을 움직이지 않으면 실패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했다는 말, 심장이 노래하게 했다는 그 말을 저자는 많이 인용한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술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스한 기술이어야 한다는 것.


AI 시대에도 AI 기술은 그런 점을 목표로 지향해야 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왜 AI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가를 사람들이 납득하기 쉽게 경제 지표를 이용해서, 즉 자산의 규모를 인용해서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AI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그러한 기업들이 계속 잘나가고 있음을 수치를 통해서 보여주고,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우리가 준비를 안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다양한 AI 기술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활용 사례도 알려주고 있어서 막연히 AI 기술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AI 기술이라고 해서 모두 인간을 배제한 기술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고...


하지만 그럼에도 자산으로 AI 기술이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에 반감을 지닐 수도 있고, 또 차페크의 [R. U. R. - 로줌 유니버설 로봇]이나, 아시모프가 쓴 [파운데이션]에 나오는 '솔라리아'를 연상하면서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또는 인간과 인간이 교류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모든 기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AI 시대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흐름에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즉 어떤 기술도 중요하지만, 왜 그 기술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도 꼭 해야 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AI 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됐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만, 아직은 인간적인 온기, 또는 불편하고 조금 엉성하더라도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그런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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