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신장판 2 - 듄의 메시아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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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폴이 황제가 되었다. 그를 숭배하는 종교가 생겨났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어 다른 행성들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제국주의의 침략의 역사를 듄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절대 권력이 필요하다.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 


폴이 원한 세상이 이것이었을까? 프레멘들과 함께 하코넨과 황제를 물리칠 때 폴이 보았던 미래가 이것이었을까? 소설에서는 지하드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폴은 이런 지하드를 멈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주가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절대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종교라는 수레바퀴에 타고 더 빨리, 더 멀리 가려고 한다. 그렇게 지하드는 멈출 줄을 모른다.


반대로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난다. 그 권력은 너무도 달콤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차지하고 싶어진다. 따라서 2권은 절대 권력자가 된 폴과 그를 떠받치는 종교적 힘을 상징하는 누이 동생 알리야가 한 축에 있고, 그에게서 권력을 탈취하려는 세력이 한 축에 있다.


한 권력에서 다른 권력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또다른 전쟁을 유발할 뿐이다. 자신의 권력을 내놓을 수 있는 폴이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는 전쟁이라는 우주의 폭력이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폴은 안다.


그는 이러한 폭력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것을 행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폴은 미래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본다. 그 죽음을 통해 우주의 평화를 이끌기를 원하지만, 예지를 통해 본 미래가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미래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불확정성들이 존재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우주의 미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꿀 수 있는 미래를 현재가 선택할 수는 없다. 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죽음과 사랑하는 챠니의 죽음을 볼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는다. 또하 챠니를 되돌릴 수 있는 기술을 지닌 자들과 거래도 하지 않는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폴은 사랑하는 챠니와 함께 사라질 뿐이다. 직접적으로 폴의 죽음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견할 수는 있다. 눈 먼 자들은 사막으로 보내지는 프레멘들의 관습에 따라 폴도 사막으로 나아가니까.


하지만 사랑은, 현재에 충실한 사랑은 남는다. 그러한 사랑에 예지력은 필요없다. 그냥 사랑으로 존재하기만 된다. 폴과 챠니의 사랑이 바로 그렇다.


2권은 그래서 종교와 결합된 정치의 절대 권력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이 거부하려 해도 주위에서 그러한 권력을 만들어내고 이용하는 모습도. 


아주 많은 요소들이 나오고, 하코넨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또다른 억압을 낳는 현실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악마와 싸우는 자는 자신이 악마가 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절대 권력을 타도하는 사람이 절대 권력이 되는 현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임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60년대에 쓰인 소설임에도, 우주에 있는 아라키스라는 행성을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짐에도 지구에서 우리가 겪는 권력들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절대 권력에 취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힘든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폴의 최후가 마음 아프게 다가오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는 폴의 모습이 쓸쓸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 한 구절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이제 폴의 시대는 끝났다. 알리아의 시대가 올 것인지, 챠니가 나은 두 아이의 시대가 올 것인지, 또 그런 시대는 어떤 모습일지 3권으로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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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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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나왔지만, 영화는 보지 못한 상태.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던 상상의 재미가 줄어들까 하는 생각.


소설을 먼저 읽어야지 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 내 상상과 감독의 상상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테니.


그래서 듄 신장판을 읽기 시작. 1권. 시작하자마자 분량에 압도당한다. 900쪽이 가깝다. 신장판이 6권이던데, 1권이 거의 900쪽이라니...부록까지 하면 900쪽이 넘는다.


와, 완전 벽돌 책이네... 베개로 쓸 수 있겠다. 손에 들고 읽자니 너무 무겁다. 세상에 책을 읽다가 손목이 나가는 경험을 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신장판이 아니라면 아마 이 1권도 듄 1부라고 해서 3권으로 분책을 해도 되었으리라. 그렇게 1권만으로도 듄의 세계에 충분히 들어갔으리라.


듄은 바로 아라키스 행성을 가리킨다. 사람이 살기 힘든, 사막으로 이루어진 곳. 물이 거의 없는 곳. 프레멘이라는 정체를 알기 힘든 부족들이 살아가는 곳. 그러나 이 아라키스 행성에서도 암투는 벌어진다.


이 행성을 다스렸던 하코넨 남작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황제의 직속부대들도 개입하고. 결국 아버지를 잃은 폴. 


폴은 쫓겨서 사막 한 가운데 떨어지게 된다.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여기서 우여곡절 끝에 그는 프레멘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 지도자가 되어 복수를 하는 폴. 하지만 폴은 자신에게 주어진 예지력으로 지하드(성전)이 벌어질 것을 염려한다. 성전이 벌어지는 일을 막으려는 폴.


1권은 여기까지다. 황제가 되는 폴까지. 아라키스라는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방대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사막인 이곳을 식물들과 동물들, 인간들이 함께 사는 곳으로 만들려는 프레멘들의 모습이 밝혀지는 과정. 폴이 예지력을 지니고 그들을 지도하는 과정이 펼쳐지는데...


무엇보다도 권력을 쥔 자들의 허상과 진정한 권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소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네 가지. 현자의 지식, 위대한 자의 정의, 올바른 자의 기도, 용감한 자의  용맹' (56쪽)


하여 소설에서는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들과 함께하는 폴의 모습도. 그렇다면 지도자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소설에서 지도자란 이래야 한다고 알려주고있다.


'통치자는 강요하는 법이 아니라 설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58쪽)


그렇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다. 강요는 결코 오래갈 수가 없다. 충성을 이끌어낼 수도 없다. 그냥 힘에 눌려 따를 뿐이다. 그러나 설득은 내부로부터의 충성을 이끌어낸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가 할 일이다. 권력을 쥔 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다.


이렇게 아라키스 행성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을 되돌아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오래된 소설이지만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고민하게 하는 진정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아무리 예지력을 지녔다고 해도, 예지력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한 행동, 한 말들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그 점을 폴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으니, 정해진 미래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폴이 무앗딥이 되는 과정을 통해 종교의 모습도 보이지만, 바로 종교가 보여주는 천년 왕국을 소설은 추구하지만 그것이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들이 지금-여기에서 만들어가는 곳이어야 한다.


이게 이 소설의 장점이 아닐까 한다. 그 단적인 예로 폴이 전통을 바꾸어가는 모습이 있다. 전통은 그냥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맞게 변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전통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이 미래로 이어지고, 미래에 또 변용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이룰란 공주가 쓴 글을 앞에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이 그 장의 내용을 예측하게 해주는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 또 이 이룰란 공주는 형식적으로 폴과 결혼을 해서 폴이 황제가 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룰란 공주의 글 중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만한 몇 구절을 인용한다. 이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구절이다.


'자신이 배울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 그리고 배우는 것이 어렵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22쪽)


'그대가 경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를 통해 그대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425쪽)


이렇게 마음에 새겨둘 만한 구절들 이외에도 기록해두고 싶은 구절들이 많은데, 무엇보다도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지금-여기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좋은 소설이다.


다음 편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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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 사람은 사랑을 잃지 않는다. 미움보다 증오보다 사랑을 간직하고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미움과 증오가 넘치는 세상에서 '사랑'만큼 소중한 가치는 없다. 세상에 나온 성인들이 모두 '사랑'을 외치지 않았던가. 그 '사랑'이란 이름이 다르게 쓰이기는 했지만 모두가 '사랑'임은 분명하다.


  '사랑'을 좋음, 착함 등으로 바꿔도 좋다. '사랑'은 그런 가치들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이 시집에는 그대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또 자연도 나오고, 사람들의 삶도 나온다. 분노보다는, 미음보다는 사랑이 더 많이 나온다. 그렇게 사랑은 한 사람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넘치게 된다.


박두규 시인의 시집 [두텁나루 숲, 그대]를 읽으면서 그런 사랑을 생각했다. 물론 '사랑'이란 제목을 지니고 있는 아주 짧은 시도 있다.


             사랑


단 한 번의 기억으로 한 생(生)을 버티게 하는 것.


박두규, 두텁나루 숲, 그대, 문학들. 2013년 초판 2쇄. 28쪽.


이 '사랑'을 무슨 성인들이나 베풀 수 있는 행위로 인식하지는 말자. 우리는 모두 우리 삶에서 이런 '사랑'을 베풀고 또 받기도 하니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은 적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아니 그렇게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만 있더라도.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호모 엠파티쿠스'(84쪽)라는 시도 그렇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공감'이란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알고 함께 하려는 마음. 그것이 공감이고 사랑이다. 성인(聖人)들은 더 '큰사랑(솔직히 사랑에는 큰사랑, 작은사랑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모두에 대한 사랑일 수 있음을 생각하니까... 여기서 이기적인이라는 의미가 담긴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을 베풀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이렇게라도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척'하는 것은 어떨까? '척'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를 안다는 말 아닌가. 자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척'한다는 것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척'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척'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뻔뻔하게 너무도 뻔뻔하게 다른 사람들을 폄훼하고, 괴롭히면서도, 자신의 잘못이 뻔히 보이는 데도,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척'조차 하지 못하는, 않는 사람. 이들이 과연 '사랑'을 받은 적이, '사랑'을 한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감각이 없나 보다. 그냥 자신에게 좋은 것이면 다 '사랑'이라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나 보다.


그러니 '척'할 필요조차 없지. 그냥 그렇게 '사랑'이 뭔지 모르니 '척'할 수도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안쓰러워 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다.


박두규 시인의 시 중에 '척'이라는 시가 있다. 지금 우리 눈에 자주 띄는 유명한 사람들, 제발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무엇이 옳은지, 좋은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척

          

말죽거리 시장에서 골라, 골라 외치며

왼쪽 다리를 떠는 장사꾼인 척

자신의 등에 비수를 꽂은 원수의 손을 잡는 성자인 척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서 깨알 같은 사랑의 편지를 쓰는 지아비인 척

남북국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쓴 영웅인 척

건국 이후 멈추었던 민주주의를 재가동한 투사인 척

동인 서인의 당쟁에 쓸려 다니며 외줄을 타는 정치구단인 척

세상의 진실을 좇아 양심에 의해 행동하는 지성인인 척

그렇게 척하며 산다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죽은 척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죽은 척이 죽음을 흉내 내는 것처럼

행동하는 양심인 척하는 것은

그 양심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대통령 되면 이거 다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대통령 병 환자가 될 만도 하다

하지만 명환자가 있어서 명의사가 나오는 것처럼

그를 척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는 이미 척에 이른 사람이다

문제는 이르지 못한 자들의 이르지 못한 말들이다

하지 않으려는 자는 할 수 없는 자의 초상이고

척에 이른 자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행하는 자일 뿐이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울 뿐이다.


박두규, 두텁나루 숲, 그대, 문학들. 2013년 초판 2쇄.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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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시인이다. 하긴 우리나라에 시인이 적지 않으니, 그 많은 시인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부지런히 시들을 찾아 읽을밖에.


  읽다보면 좋은 시, 마음에 들어오는 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시인을 좋아하게 되고, 자연스레 시집을 사서 읽게 되겠지.

  

  시인을 몰랐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음을 이런 식으로 합리화한다. 


  제목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분단시 전집이라니... 1980년대 후반 통일의 열기가 뜨거웠을 때, 또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져 곧 통일이 될 것 같은 희망에 들떠있을 때, 또는 남북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단일팀을 만들어 국제경기에 참여했을 때, 그럴 때 이 시집을 만났으면 아마도 '분단시'라는 말 대신에 '통일시'라는 말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분단은 통일과 떼려야 뗄 수 없으니까.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 시집이 좀더 많은 사람에게 읽혔겠지. 


하긴 2003년에 출간된 시집이니, 어느 정도 남북이 긴장을 완화하고, 통일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고, 시인이 70이 넘은 나이였으니, (1933년 출생, 2010년 사망) 일관된 주제로 쓴 시집을 발간한 것은 시의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은 그동안 시인이 발표해온 시들 중에 분단을 주제로 한 시들을 모아놓았다. 그것도 가나다 순으로 묶여놓아서 시를 찾기가 쉽다.


어느 시를 보아도 분단에 대한 생각, 그것은 바로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이어지니, 이 시집 전체가 통일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 시나 골라도 되지만, 신작 시라고 해서, 그동안 출간된 시집에 없던 시 중에 '소망'이라는 시가 있다.


        소망


통일, 새로 시작하는 것 모두 버리는 것. 


이만주, 이만주 분단시 전집. 들녘. 2003년. 368쪽.


그렇다. 이미 분단이 된 지 80년이 되어 간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강산이 여덟 번 바뀌는 세월이 흘렀다. 분단이 고착화되고,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는 상태로 변해버렸으니, 남과 북의 평화가 위태위태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 시인의 이 '소망'이라는 시 생각해야 한다. 통일은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분단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만 새로 시작한다는 말은 바로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과 통한다.


지금까지 쥐고 있던 것을 계속 쥐고 새로 출발을 하려고 하면 제대로 된 출발이 될 수 없다. 출발을 할 때는, 특히 새로운 출발을 할 때는 과거와 결별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가 있다. 과연 우리는 버릴 수 있는가? 버리지 못하기에, 그것을 더욱 꽉 쥐려고 하기에 갈등과 긴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한때 성큼 앞으로 다가왔던 통일이 한참 뒤로 물러나버린 상황이 지금 상황이 아닌가 하는데... 이럴 때 이만주 시인의 이 시집을 읽어보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여기에 이 시집의 뒤에 실린 김규동 시인의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분단은 끊는 일, 절단하는 일이라는 이제는 고인이 된 시인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그 글을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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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편'


  좋은 쪽으로 변화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개편'이라는 말에는.


  이런 생각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많은 방송 개편들이 좋은 쪽이 아니라 특정한 세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편'은 그냥 바꾼다는 의미가 될 테다. 그냥 바꾼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이 지니는 어떤 방향성이 없이 '개편'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아니다. 좋은 쪽이든 특정한 집단을 옹호하는 쪽이든 개편에는 방향성이 있다. 이런 방향성을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다.


[빅이슈]도 개편을 했다. 한 달에 두 번 나오는 잡지에서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잡지로. 그대신 가격을 올렸다. 왜냐?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본다.


한 달에 두 번 나오면 빅이슈 판매원에게 돌아가는 수익금은 7,000원이다. 그런데 가격 인상을 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만 나오면 빅이슈 판매원에게 돌아가는 수익금은 3,500원에 불과하다. 수입이 절반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노숙인 자활을 돕는 잡지라는 이름이 무색해진다. 그렇다면 개편을 할 때 [빅이슈] 관련자들이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일 터이다.


고심 끝에 그들은 12,000원으로 가격을 올렸겠지. 그러면 수익이 6,000원이 되니까. 천 원을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더 올리기는 힘들었으리라.


직접 전철(지하철) 입구에서 오다가다 사는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가격은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선뜻 잡지를 구매하도록 이끌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또한 가격을 올린 만큼 내용도 더 많아졌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잡지에 내용이 늘어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다. 


고정된 연재만이 아니라 한 달 동안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의 글을 쓰는 사람을 찾아 섭외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빅이슈가 자신들의 방향성을 지키면서 '개편'을 한 것은 시대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치열한 고민과 노력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역시 다양한 기사들이 있다. 우리들이 생각할 글들이 많다. 환경부터 주거, 생활 등등. 더 긴 시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개편이라고 생각하련다.


'개편'이 된 첫호에 이어 나오는 다음 호에는 어떤 글들이 실릴지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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