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시에 뜨는 달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26
데보라 엘리스 지음, 김미선 옮김 / 내인생의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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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이유로 억압을 받거나 죽어야 할까? 단지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면, 그런 사회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일까?


성소수자가 박해를 받는 경우는 많다. 유대인 학살로 유명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서도 성소수자들 역시 학살당했다. 그리고 여전히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도 많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고.


그럼에도 현대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그들을 죽여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니, 사랑을 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커밍아웃이라는 말과 아웃팅이라는 말이 있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드러내는 방법이 커밍아웃이라면, 자신의 성정체성을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웃팅이다. 이 아웃팅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데 일조한다.


이 소설은 이란을 배경으로 한다. 혁명이 일어난 뒤의 이란. 이란은 신정국가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보다도 최고 종교지도자가 더 중요한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살아남기 힘들다.


여기에 여성이라는 점이 더해지면 더더욱 약자의 처지에 몰리게 된다. 여성이자 어린이, 그리고 성소수자. 이는 이란에서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서 있게 된다는 말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하위에, 어린이는 어른보다 하위에, 성소수자는 용인되지 않는 자리에 있으므로, 경제적 지위를 떠나서 이들은 살아가기가 힘들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왕정 복고를 지지하는 엄마와 돈벌기에 혈안이 된 아빠를 둔 파린. 이런 파린은 여학교에 간다. 그곳에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날 악기를 연주하는 사디라를 만나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것이 문제다. 둘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안 된다. 부유한 가정이 아닌 사디라의 집에서도, 부유한 가정인 파린의 집에서도 둘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 성소수자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 한다. 종속적인 삶. 주체적인 사랑은 인정받지 못한다.


견디지 못하는 두 사람. 그러나 둘은 곧 체포되어 감옥에 간다. 파린은 부유한 부모 덕으로 탈출을 하지만 그것이 다다. 부모는 파린의 사랑을 인정할 수 없다. 사디라가 먼저 탈출했다고 거짓으로 파린의 탈출을 도운 사람은 파린의 집에서 일하던 아마드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아마드.


관계는 얽힌다. 아마드는 파린의 집에서는 파린을 존중했지만, 탈출해서는 파린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여느 아프가니스탄 남자들처럼 여성 위에 군림하려 한다. 그러니 사디라의 죽음을 전해들은 파린이 아마드의 집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여학교의 교장도 마찬가지다. 혁명 정부에서 여학생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교장이지만, 동성애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런 아이들이 처벌 받는 것도 감수한다. 그에게 학교란 정부를 지지하는 여성을 키워내는 일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니라.


아홉 시에 뜨는 달을 보며 이야기를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자신들의 사랑이 전해진다고 하는 파린과 사디라. 


이 둘이 겪는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사랑한다는 죄로 죽어가야 하는 사디라와 파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작가는 담담하게 그런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혁명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 이 대목에서 엠마 골드만이 했다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는 말이 생각났다.


자신들의 생각을, 삶을 스스로 정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혁명 아니겠는가. 그런데 과연 현실의 혁명은 그러했는지...


이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혁명과 개인의 삶이 어떻게 비틀어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파린과 사디라의 사랑을. 그러나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다.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하지만 계속 전진할 것이다. 달을 따라 갈 것이다.'(240쪽)라고 하면서 파린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음을, 파린은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인 악마 사냥꾼처럼 계속 나아갈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사디라를 마음 속에 품으면서. 


이렇게 사디라와 파린이 춤출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혁명 아닐까. 우리가 꿈꾸는 혁명은 바로 그러한 혁명이어야 한다. 누군가를 억압하는 혁명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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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책들의 도서관 - 희귀 서적 수집가가 안내하는 역사상 가장 기이하고 저속하며 발칙한 책들의 세계
에드워드 브룩-히칭 지음, 최세희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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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참 이상한 책들이 많다. 이런 책들이 만들어지고 읽히기도 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지만, 사람이 사는 세상에 별별일이 다 있을테니.


이 책은 이상한 책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책이 아닌 책이야, 인류의 문명이 시작할 때 지금의 책이 아닌 다른 형태로 지닌 책이라고 이해하면 되니, 책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데...


그런데 다음부터는 특이한 책들이 소개된다. 제목만 봐도 그 이상함을 알 수가 있는데...


살과 피로 만든 책, 암호로 쓴 책, 출판 사기, 괴상한 사전들, 초현실세계를 다룬 책, 종교계 괴서들, 이상한 과학책, 기상천외한 크기의 책, 제목이 이상한 책


이런 책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지고 있으니, 다양한 책들에 대해 관심이 있으면 이 책을 보면 좋다.


사람의 피부로 만들어진 책이 있고, 암호로 써서 지금도 해독을 할 수 없는 책도 있으며, 사기를 목적으로 출판한 책들이 있으니, 이 중에 히틀러의 일기라고 책을 만들어 낸 경우도 있다고 하니, 참..


괴상한 사전들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모아놓은 사전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초현실세계를 다룬 책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인류의 역사와 거의 함께 했던 종교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상한 과학적 지식을 모아놓은 책들도 있다. 이 중에 논쟁이 될 만한 사항이 있기는 하지만.


기상천외한 크기는 아주 작거나 아주 크거나 한 책들을 소개하는데, 이를 읽는데 더한 힘이 들테니, 이런 책을 만든 인간들의 다양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제목이 이상한 책이야 뭐... 이상한 제목들을 통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이렇게 아주 다양한 책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데, 그 중에는 별별 책들이 다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다양하고 이상한 책들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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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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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읽으면서 이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성소수자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지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따라서 질문을 하지 못하고 그냥 따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이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이 되니 말이다. (굳이 리베카 솔닛을 빌려올 필요도 없다.) 소설 속 인물인 한주와 유키노가 그러한 인물들이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영원히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들에게도 자신의 말을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무대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김추의 논문에서 클럽 줄리아나 도쿄와 대학생 운동조직이었던 전공투의 무대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중에 전공투의 무대는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이는 그동안 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더 큰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무대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부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이 함께 찾거나 또는 그러한 무대들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줄리아나 도쿄가 바로 그런 곳이다. 힘들게 일하는 여자 노동자들이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자신들을 무대 위로 올릴 수 있는 곳. 무대 위에서 그들은 남의 시선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즉, 줄리아나 도쿄는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다. 그런데 이런 무대 역시 힘 있는 자들, 기존에 목소리를 쉽고도 크게 내던 존재들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약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의 무대는 쉽게 침해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의 삶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대에 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러한 것을 삶의 힘으로 이어나간다.


이 소설 속 유키노의 엄마가 그렇고, 김추의 어머니 역시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순간을 그들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 그것이 삶 속에 남는다. (유키노의 어머니에게는 사진으로, 김추의 어머니에게는 기억으로 또는 칼로)


김추의 어머니가 자신은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장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경험은 이렇게 표현된다.


"처음으로 제 마음대로 한 거라서 그런 걸까요? 행복하네요. 자금."

그러므로 내가 본 미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붉어진 얼굴의 너는 쑥스러운 건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저도 그럼 행복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잊지도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함께한 전부라고 해도. (286-287쪽)


이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주에게도 유키노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무대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주가 "나, 이제 할말이 있어."(257쪽)라고 하는 장면. "한주, 너는 나의 의지야."(253쪽)라고 유키노가 말하는 장면에서 이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게 됨을 알 수 있다.


한주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사람이지만 사귀는 남자에게서 데이트 폭력을 당한다. 남자는 한주를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말대로만 해야 하는 사람으로 대한다. 가스라이팅과 폭력이 합쳐진 상태.


그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를 나오지 않는다. 아니 소설에서 그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인 한주가 한국어를 잃고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게 된다. 가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고, 피해자는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한주가 한국어를 잃게 만든 설정은 이래서 섬뜩하도록 현실적이고 슬프다. 그럼에도 연구자로서의 한주가 일본어를 잊지 않은 것. 하나의 소리(언어)를 잃고 다른 소리(언어)를 기억하는 일. 이것은 한주가 자신의 소리(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키노 역시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인 유키노는 연인에게 폭행을 당한다. 연인은 툭하면 유키노가 자신을 오해했다고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오해했다는 말,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바로잡을 때 쓰면 별 문제가 없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쓸 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즉, 너는 네 언어로 말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공통점이 한주와 유키노를 엮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서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서로 의지하게 된 이들이, 우여곡절을 거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매개하는 인물이 '정추'라는 음악가다. 유키노의 엄마, 그리고 학자인 김추의 엄마가 듣는 음악을 만든 사람. 정추.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간 사람. 그런 정추가 소설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이는 한주나 유키노 역시 정추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소설에서 김추의 어머니를 등장시켜 정리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그 장면.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함을.


읽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나는 목소리를 내는 축에 들었을텐데, 그 목소리로 남의 목소리를 누르지 않았는가, 또 누구든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도록 노력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유키노가 한주가 김밥 끄트러미를 놓고 이야기했듯이. 


한주는 김밥을 썰었고, 맨 끄트머리를 하나 집어서 유키노의 앞접시 위애 올려주었다.

"이게 한국에서는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고. 그러니 유키노 네 거." (142쪽)


"한주 너는 나의," .... "내 끄트머리야." (142-143쪽)


슬프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울리는 소설이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명단에 한정현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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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삶과 죽음의 이야기 - 모든 존재의 유의미함, 무해함 그리고 삶에 관하여
데이비드 스즈키.웨인 그레이디 지음, 이한중 옮김 / 더와이즈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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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무로부터 시작한다. 아니 모두 불에 타버린 공간에서 시작한다. 대화재가 난다. 숲이 모두 타버린다. 이제 잿더미가 된 그곳은 폐허다. 그렇게 말해야 하지만 폐허가 아니라 생명이 시작하는 곳이라고 해야 한다.


무에서 유가 나온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불타버린 폐허는 무가 아니다.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마치 빅뱅 이전처럼 불타버린 숲은 존재한다. 이제 빅뱅이 시작된다. 빅뱅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강력하게 일어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일어난다.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게.


이런 폐허에서 '더글러스퍼' 나무의 씨앗이 자라난다. 불에 탄 자리. 아무런 생명도 없을 것 같은 그 자리에 더글러스퍼 씨앗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자신 주변의 모든 것들과 함께하기 시작한다. 땅에서 공기에서 또다른 생명체와 함께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제 탄생이 된 더글러스퍼는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뿌리가 내린 다음에는 위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성장하여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온갖 생명체들과 함께 하기 시작한다. 한 개체가 아니라 군락의 일부가 된다. 전체의 일부로 살아간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나무는 나무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들끼리도 함꼐하지만, 숲 속에는 온갖 생명체들이 깃들어 있다. 그들이 모두 숲을 이루는 요소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결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이렇게 더글러스퍼의 성장, 성숙으로 이룬 숲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있는지를 이 책에서 저자는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그러나 생명은 한계가 있다. 모든 생명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는 존재할 수가 없다.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야 한다. 별들도 그러하지 않은가.


거대하게 자란 더글러스퍼는 이제 수백 년이 지나서 더이상 자랄 수가 없다. 더이상 다른 생명체를 받아들일 힘이 없다. 면역체계가 붕괴된다. 내부에서부터 비어간다. 고사목이 된다.


고사목이 되어서도 몇 년 혹은 몇 십년은 꼿꼿하게 서 있다. 우리가 주목이라는 나무를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고 하듯이, 더글러스퍼 역시 죽어서도 다른 생명체가 깃들어 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자신은 죽었지만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바로 생태계다. 그러다 고사목이 모진 바람에 쓰러진다. 쓰러짐,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다. 쓰러져서도 다시 새로운 생명들을 받는다. 그들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또한 더글러스퍼가 있던 숲은 다른 숲으로 대체가 된다.


다시 대화재가 나고 더글러스퍼가 생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이 되면, 그곳에서 더글러스퍼는 뿌리내기고, 성장, 성숙, 죽음의 과정을 거치리라. 


이렇게 한 나무의 삶을 통해서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는 책이 이 책이다. 한 나무에 국한되지 않고, 나무와 관련하여 다양한 생명체들과 무생물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코 홀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그래서 어느 하나를 제거하면 생태계 자체가 무너짐을 한 나무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길고 긴 역사였지만, 이것이 바로 자연 아니던가. 100년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좀더 긴 시간을 두고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나무라는 생각. 그런 나무를 통해서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벌목해서 없앤 많은 삼림들을 인공조림을 통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또한 그렇게 하면 안 됨을 말하고 있다.


'자연적인 극상림은 나무 묘목에서 고사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의 나무들을 다 포용하며 숲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무와 낙엽을 포함에 연어의 개체군과 그들의 모든 포식자를 다 먹여살린다. 인공적인 재조림(reforestation)은 단일경작을 하는 농경과도 같다. 생명다양성과는 정반대의 방법인 것이다.'(277쪽)


이 주장을 하기 위해 더글러스퍼 나무의 생애를 책 한 권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문제로 갈등 중인 많은 열대우림, 또 삼림지역에서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도 고려해야 할 점이다.


인간 역시 자연과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 역시 자연의 순환고리 중 하나이기 때문에. 고리 중 어느 하나가 끊어진다면, 그 영향은 인간에도 크게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더글러스퍼 나무의 일생으로 자연 순환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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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베들레헴의 길고양이 모퉁이책방 (곰곰어린이) 38
데보라 엘리스 지음, 김배경 옮김 / 책속물고기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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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전쟁. 여전히 전쟁 중이다. 전쟁이라는 말보다는 일방적인 공격이라고 해야 하는 편이 맞겠지만.


팔레스타인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들에게는 변변한 무기가 없고, 비록 무장투쟁을 한다고 하지만, 국가 대 국가로 전쟁을 할 여건은 안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지역까지도 공격한다고 하니, 팔레스타인에서 평화는 요원하다.


이 소설은 그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다루고 있다. 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살고 있던 아이가 죽어서 고양이가 되어 이름이 같은 베들레헴에서 지내게 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지내던 초등학생이 겪는 일들과 고양이가 되어 베들레헴에서 겪는 일들이 교차하고 있다. 고양이로서 겪는 일들을 통해서 자신이 초등학교 때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클레어는 초등학교에서 집안 좋고, 공부도 잘하는, 그러나 교사들의 눈에 띠지 않게 말썽을 부리는, 요즘 말로 하면 상당히 영악한, 문제적인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눈감아 주는 선생이 떠나고, 깐깐한 선생을 맞이하여 그 선생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른다.


죽음, 끝이 아니라 고양이로 태어난다. 그것도 베들레헴에서. 갈등 상황에 처해 있는 그곳에서 클레어 고양이는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 아이를 만난다. 이스라엘 군인이 정찰 목적으로 들어간 집에 부모를 잃고 홀로 있던 아이 오마르. 이들과 지내면서 클레어는 한 면만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팔레스타인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들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도 모두가 같지는 않다는 사실. 


적대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딱 두 편으로 나눌 수가 없으며, 그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편차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클레어라는 고양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이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어떻게든 이스라엘 군인들을 죽이고 싶어하는 팔레스타인 사람, 그리고 이스라엘 군인에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있고.


클레어는 인간이었을 때 선생님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행동이 결코 잘한 짓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고양이 몸으로 겪으면서. 


이렇게 소설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는 양비론 또는 양시론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갈등이 있지만, 그것을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음을.


전쟁에서도 인간이 있음을, 그 인간성을 지키는 사람들도 인해 세상이 조금씩 평화로운 쪽으로 가고 있음을.


개인이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개인이라도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모습을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에서 고양이 클레어가 춤을 추어 양쪽이 더 심한 갈등으로 번지지 않게 한다. 이렇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음을, 아니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여전히 대치 중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이 소설이 나온 지 꽤 됐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음에 암담한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고양이 눈으로 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결코 단순화할 수 없는 그 갈등 상황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평화로 가는 길이 쉽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됨을, 평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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