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예보: 호명사회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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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를 읽고 많은 내용에 공감했다. 그렇다. 이제는 집단의 일원이 아닌 개인으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집단이나 공동체의 이름 속에 개인이 사라지는 시대는 아니다. 개인이 우뚝 선 시대, 핵개인의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핵개인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핵개인이라는 말이 그냥 너는 너대로만 살라는 말일까? 자립을 이야기하고, 독립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홀로라는 말과는 다르다. 자립이나 독립에는 연대, 함께함이 포함되어 있다. 고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개인은 또다른 핵개인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핵개인이 핵개인을 만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이름을 불러야 한다. 나의 이름을 알리고, 상대의 이름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불러야 한다. 그러면 서로 함께할 수 있다.


이런 사회가 '호명사회'다. 이름을 부르는 사회라는 말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함께한다는 의미다. 즉 독립된 개인들이 모여 연대를 하고 함께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함께하는 모임은 하나일 필요가 없다. 직장도 이제는 하나에서 여럿으로 바뀌는 시대가 되었으니, 호명사회에서 모임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여러 모임을 기웃거린다는 말은 아니다. 모임을 갖는다는 의미는 자신이 이미 그 모임을 할 정도로 숙련되었다는 말이다. 


즉 핵개인의 시대라고 해서 숙련된 기술, 또는 저만의 장점을 지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핵개인의 시대에는 적어도 이름을 알리고 불리기 위해서는 저만의 장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사회와 산업의 혁신 속도가 빨라질수록 개인의 커리어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핵심은 '축적의 시간'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 행위를 팔기보다 의미를 팔고, 자신의 진정성을 제공'(157쪽)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조예와 취향이 될 것이다.'(157쪽)고 하고 있다.


남다른 조예, 자기만의 취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함께한다. 대등하게. 그런 사회가 호명사회다.


이런 호명사회에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남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부르는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지닌 덕목이 '투명성과 동류를 모으고 선의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


자신이 어떻게 하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 이것을 상대에게 투영하면 상대 역시 투명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가 하는 일이 가감없이 내게 전달될 때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면, 그 관계는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핵개인의 시대는 당연히 호명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우리를 이루는데, 그 우리는 굳게 닫혀 있는 '우리'가 아니라 언제든지 축소하고 확장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즉 열려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호명사회라는 말, 듣기에도 좋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오는 말이다. 열린 사회라는 말이 될 테니까. 또한 호명사회라는 말에서 요즘 공유 주거공간을 생각하기도 한다. 따로 하지만 함께하는 공간. 


그런데 읽으면서 명쾌한 이야기에 동감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축적해야 하는 핵개인, 자신의 이름을 지녀야 하는 핵개인이 될 수 있는 사회 환경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에서 논의하는 것은 개인이 어떻게 해야한다가 주를 이루는데, 개인은 바뀐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지 않나. 오히려 이렇게 애쓰는 개인들이 나가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 환경, 제도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개인의 노력이 모여 사회를 바꿀 수도 있지만, 소수의 개인이 성공한다고 다수가 성공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니 다수가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의무이고,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해야할 의무 아닐까? 


개인에서 사회로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했으니, 그렇다면 다음 책에서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정치적 노력을 이야기하고, 함께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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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3-27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로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그곳에서 늘 바뀐다고 느껴요.
꽃이름 벌레이름 나무이름 새이름
이 이름 하나를 마음에 놓으며
서로 만날 수 있고요.

kinye91 2025-03-27 09:2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름을 부르면 서로의 만남이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 - 사로잡힌 영혼들의 이야기
비비언 고닉 지음, 성원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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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미국에 공산당이 있었다고?"


매카시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미국에도 공산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카시즘이 바로 미국 사회에 속해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미국 사회에서 축출하고자 벌인 사상투쟁이었으니.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미국에 공산당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 필요도 없다. 사실 공산당은 존재한다고 해도 미미한 영향력만 행사할 뿐이기 때문에... 사회당조차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미국에서 공산당이라니...


그럼에도 미국에 공산당이 있었고, 그들이 힘을 발휘하던 때도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공산당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사건은 매카시즘이 아니라 흐루쇼프가 폭록한 스탈린 시대의 참상들이라고 한다. (12쪽)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미국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던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지금 그들은 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제목이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다.  작은 제목으로는 '사로잡힌 영혼들의 이야기'라고 되어 있고. 즉 한때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활동을 열심히 했던, 그것도 미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물론 과거형이다. 이 책은 1970년대에 쓰여졌다고 한다. 최근에 다시 발간되기는 했지만...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공산주의는 사라졌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공산주의 활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반공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고, 자본가의 삶을 사는 사람도, 여전히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다양한 분포를 보이지만 확실한 것은 미국에서 공산주의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사상이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그때 활동했던 기억들을 모두 다르게 기억하고, 그런 기억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이 책은 현재에 유용하기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과거 회상에 도움이 된다고? 단지, 그것때문에 책을 쓸까? 아니다. 과거 회상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즉 한때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사람들, 당이라는 조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작은 차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차이로 알고 서로를 배척하던 사람들. 그런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들을 읽으면 지금-여기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페미니즘 활동을 하던 때에,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서 벌어진 차이들을 마치 적으로 여기는 듯한 모습들을 발견하면서 저자는 1930-196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걸어온 길에서 지금 걸어갈 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마치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 책이 먼저 나왔지만 읽는 순서는 상관이 없다.


소련이 붕괴된 다음에 소련에 속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책. 이 책에는 수많은 소련 사람들(물론 지금은 독립한 나라들 사람도 속한다. 한때는 소련인이었지만, 이제는 각자 자기 나라의 국민이 된 사람들. 이 사람들이 소련 때를 회상하고, 또 소련이 붕괴된 직후의 사회를 회상하고 있는데, 비비안 고닉이 쓴 이 책은 1970년대에 미국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미국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다른 것은 몰라도 이들은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것. 여기에 개인과 조직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과연 개인을 누르는 조직이 존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조직이 우선이고, 조직에 개인이 종속되면, 언젠가는 조직이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이 책에 나오는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공산주의'하면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으로 취급한다. 공산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종북좌파라는 말로 뭉뚱그려 하나로 취급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편협한 사고인지 알 수 있게 되겠지만... 한 조직에 속한 개인들도 각자의 개성이 있음을, 자신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어떤 한 흐름 속에 개인들을 집어넣으려고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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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나는 한글 우리말글문화 총서 1
김슬옹 지음 / 마리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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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자랑스레 내놓을 수 있는 우리 문자. 한글. 


세계에서 만든 사람과 방법이 알려져 있는 문자, 한글.


하지만 한글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질문을 바꾸자. 우리는 한글을 얼마나 자랑스레 여기며 잘쓰고 있는가?


말로는 과학적이고 창의적이며 편리한 문자라고 하면서도 지금 우리나라 곳곳을 둘러보면 과연 우리가 한글을 잘쓰고 있는지 살펴보면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길거리에 보이는 간판들은 외국어가 많으며 (외래어가 아니다. 외래어는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지만 우리말이 된 말이니) 하다못해 공공기관 이름들까지도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공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곳 몇군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통신은 KT가 되었으며 담배인삼공사는 KT&G가 되었고, 국민은행은 KB라고 하고, 한국방송공사는 KBS, 문화방송은 MBC라고 하는 형편이니, 무슨 한글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이런 현실에서 한글의 소중함을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 나라에서조차 한글을 외국어로 바꾸고 있는 형편이니 말이다. 국경일에서 제외됐다가 다시 국경일이 된 지도 몇 해 되지 않았고... 


하지만 그럼에도 한글은 우리 문자다. 우리들의 생각을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자다. 사라져서는 안될 문자이기도 하고.


이 책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한글 관련 유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글길부터 시작해서 한글박물관, 한글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유적 등등을 소개하고 있다.


참 많은 곳에 한글을 기념하는 유적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이토록 많은 한글 유산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으니, 어디서든 한글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한다.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한글 유적들을 자세히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 저자인 김슬옹이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훈민정음을 제대로 읽고 배우는 과정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보편 교양을 가르친다는 중등교육에서 훈민정음 해례 언해본을 강독하는 과정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래야 한글이 왜 좋은 문자인가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훈민정음만이 아니라 한글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한글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을 테니까.


한글, 다시 한번 우리가 쓰고 있는 문자를 생각하고, 한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준 책이다.   


덧글


한글에 대한 역사와 정보를 알려주는 책인데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오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144쪽에 '신숙주는 훈민정음 관련 모든 저술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라고 되어 있는데...

145쪽에 (성삼문은) '신숙주와 마찬가지로 <<운회>> 번역을 제외하고는 훈민정음 관련 저술에  모두 참여했다'라고 나온다. 

이 문장이 모호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신숙주도 <<운회>> 번역에 참여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성삼문만 빠진 것인지... 

차라리 문장 순서를 '<<운회>> 번역을 제외하고는 신숙주와 마찬가지로 훈민정음 저술에 모두 관여했다'라고 했으면 명확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더해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관련된 작업을 요약하면서 147쪽에 성삼문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한 실수다. 빼야 한다. 분명 성삼문은 <<운회>> 번역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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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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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작가가 있지? 거의 백 년 전에 쓴 작품인데, 지금 시대에도 맞는 이야기 같지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한 작가다.


희곡인데, 연극으로 보아도 재미있겠지만, 책으로 읽어도 재미있는 그런 작품들. 차페크 작품이 지닌 풍자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지금 읽으면서 우리 사회나 또는 지구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과 비교할 수도 있으니... 그저 감탄할 수밖에.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다.


세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곤충 극장,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하얀 역병'


다른 주제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에 대한 부정이 공통적으로 드러나 있다. 


'곤충 극장'은 곤충들을 등장시켜서 인간이 지닌 욕망과 허위들, 그렇지만 삶에 대한 의지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곤충(나비)은 자유로운 성과 문학에 대한 조소를, 어떤 곤충(쇠똥구리)은 물질적 부에 대한 욕구를, 또 어떤 곤충들(귀뚜라미와 맵시벌)은 약육강식의 세상을, 어떤 곤충(개미)은 전쟁에 대한 욕구와 그로 인한 파괴를, 어떤 곤충(하루살이)은 삶에 대한 욕구와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곤충을 통해서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물질만의 풍요로움이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단 하루를 산다고 하루살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다른 욕망들로 인해 삶의 환희, 삶의 목적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민달팽이들이 '삶은 달콤하다'(100쪽)와 '중요한 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거지'(101쪽)라는 장면에서 누구나의 삶이 소중함을, 그런 소중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차페크가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생명을 무한으로 늘리면 좋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에서 말하고 있다. 삼백 년을 넘게 산 에밀리아라는 인물을 통해서, 비록 겉보기에는 무척 매력적이지만 가까이 만나면 너무도 차가운 존재인 그녀를 통해 과연 우리의 삶을 어디까지 연장하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연금술과 비교할 수 있는 인간 생명의 연장은 과연 축복일까? 지금도 죽음을 인간에게서 떨쳐내려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 작품의 끝에 삼백 년을 살아갈 수 있는 비법을 적은 종이(양피지)를 태우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차페크는 유한한 생명 속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유한한 생명. 그래서 누구에게나 소중한 생명. 이 생명을 다른 사람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선동에 의해서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또는 버리라는 명령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태. 전쟁뿐만 아니라 각종 테러 등 폭력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고, 드러나지 않은 폭력들도 얼마나 많은 시대인지.


그래서 평화는 전쟁 중에 잠시 오는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하는데, '하얀 역병'에서는 전염병과 전쟁, 그리고 평화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차페크가 1930년대에 죽었는데, 전세계를 휩쓰는 역병을 생각해내고, 그 역병과 전쟁을 같은 위치에 놓고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물론 역병에는 지역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은 최근에 금지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했을 때 별 생각도 없이 또는 공격과 더불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특정 지역 이름을 붙여 '00 바이러스'라고 붙인 경우를 생각하면, 이 희곡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이것이 꼭 현재만의 문제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대국들이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음을, 그래서 전염병은 병 자체로도 위험하지만 병이 지닌 이름으로도 또다른 편견을 조장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지역 이름을 붙이는 일을 금지한 것이 마땅함을 깨닫게 된다.


이 희곡에서는 역병의 백신을 발견한 의사가 나온다. 이 의사의 조건은 단 하나다. 나라끼리 평화협정을 맺어라. 그러면 백신을 제공하겠다. 하지만 독재자는 그런 평화 요구를 거절한다. 전쟁만이 살 길이라고... 사람들을 전쟁의 광기에 쓸려가게 한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 이들은 역병에 걸린 것과 같다. 역병에 걸려도 수많은 사람이 죽는데, 전쟁 역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이 희곡에 나온 총사령관과 의사는 같은 전장에 있었지만 다른 곳을 본다. 총사령관은 자신과 더불어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온 사람들을, 그래서 전쟁의 영광을 보는 반면에 의사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전쟁의 참상을 본다.


같은 전쟁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쟁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의사는 백신을 개발하고, 이를 이용해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 전쟁을 막으려고 한다. 그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없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무료로. 왜냐하면 그에게 백신은 인간을 살리는 도구이고, 평화를 이루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총사령관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전쟁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평화를 이끌어올 백신을 거부한다. 그들은 전쟁을 해야 한다. 사람들을 전쟁으로 몰아가려 한다. 그런 세상, 그런 모습이 적나라하게 이 희곡에 나와 있으니...


집단 광기... 폭력에 도취된 사람들은 어느 것도 보지 못하고, 전쟁을, 폭력을 선동하는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을 차페크는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 위협을 느낀 차페크가 작품을 통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 경고는 유효하다.


전세계를 팬데믹으로 이끈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평화보다는 전쟁으로 치달았기 때문이고,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이 희곡집을 읽으면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 유한한 삶을 평화롭게 유지하게 하는 사회 속에 있는가, 아니면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하얀 역병'의 마지막 장면... 사람을 살리는,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의사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슬프면서도 섬뜩한 결말. 그러나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하고 있으니, 이 희곡을 읽으면서 머리가 쭈뼛해지는 것은 나만일까? 


한번 읽어보라. 이 희곡을... 어쩌면 우리는 총사령관의 선동에 끌려다니는 군중에 불과한 것 아닐까,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을 발 아래 깔아뭉개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그가 이 희곡집에서 표현했던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차페크, 읽을 수록 매력이 더해지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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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봄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분들도 조금은 지내기 편해질 수 있겠지.


  계절로 인해 편해지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이 분들이 자신의 생활을 꾸려갈 수 있도록 제반 환경을 제공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이 더 좋겠지만, 아직은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그래도 이번 호에는 연예인 엄태구 씨가 나와 빅이슈 판매 도우미로 활동했다는 기사, 특히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 않고 추운 날씨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더욱 훈훈해졌고.


읽다가 2024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가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이란 단어를 선정했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63쪽)


좀 무서운 단어지만, 뇌가 썩는다는 말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 이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편협함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알고리즘이라는 말과 '뇌 썩음'이라는 말을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알고리즘이 무엇인가? 자신의 성향, 취향에 맞는 것들을 연이어 제시해서 그것들을 계속 보게 만들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질 틈을 주지 않는 것 아닌가.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만 그것도 콘텐츠(내용이라고 해야 하나)만 달리해서 계속 본다면, 편향적 사고를 지닐 수밖에 없다. 편향적 사고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니 그것이야말로 '뇌 썩음'에 해당하리라.


그런 점에서 이번 호에 실린 젊은 정치인이 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누구는... (96-101쪽 참조)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 정치라 생각한다. 폭력적으로 싸우는 방식은 옳지 않지만, 싸움이 정치의 본질인 것이다.'(100쪽)


정책들의 싸움, 그것이 정치다. 고로 정치는 언어로 하는 싸움이다.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싸움이 바로 정치다. 언어가 아닌 폭력의 수단이 동원되는 순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 된다.


그러니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주장이 없다면 정치는 없다. 다른 주장들이 언어를 통해 오고가고, 그러면서 자신의 주변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과정, 언어들의 싸움... 아니 주장들의 싸움, 이것이 정치다. 그러니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 말을 잘못 해석해서 고도화된 정치 행위로 폭력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건 고도화된 정치 행위가 아니라, 국민을 어려움으로 빠뜨리는 헌법을 지키지 않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고도화된 다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치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하면 '뇌 썩음'으로 나아간다. 알고리즘에 빠진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주변을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진다.


오로지 자신에게 좋은 것들로만 주변을 채운다. 이런 존재에게 공동체란 존재하기 힘들다. 공동체에 온갖 존재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뇌 썩음'과 가장 거리가 먼 잡지가 바로 [빅이슈]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빅이슈]는 다양한 글들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동체를 이루는 소수자를 외면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글들도 좋았지만 '뇌 썩음'이란 단어로 '알고리즘'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정말 정치인들은 이런 '뇌 썩음'을 경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젊은 정치인의 말을 다시 새기자. 뇌 썩음을 방지하는 길은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 정치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다른 무엇보다 다양한 책을 읽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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