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교육의 열쇠, 창의적 문화교육 - 협력적.다중지능적.창의적 발달을 위한 새로운 교육학
심광현.노명우.강정석 지음 / 살림터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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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얘기만 나오면 누구나 전문가가 되는데... 누구나 전문가란 얘기는 결국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저마다 자신의 답이 옳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해법이 나오기도 한다.

 

그 예가 서울에서 추진하고 있던 혁신학교다. 진보적 교육감이 중도 하차하고, 보수를 표방하는 교육감이 취임을 했는데, 혁신학교에 대한 더 이상의 추진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혁신학교가 전부는 아니다. 혁신학교는 지금의 공교육을 개선해 나가는 하나의 시범으로서 운영되었으며, 이런 혁신학교는 장기적으로는 모든 학교에서 실시해야 하는, 그래서 혁신학교라는 말이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하는 학교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런 혁신학교가 서울에서 시행된 지 이 년만에 더이상 추진력을 얻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해야 하니...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말로는 떠들어대지만 어떤 정권이 들어섰느냐에 따라 교육정책이 조변석개하고 있으며(하다못해 교육을 주관하는 부처의 이름을 보라. 문교부에서 교육부로 다시 교과부로, 이번엔 또다시 개편을 한다고 얘기가 되는 모양인데...), 교육감이 누구냐에 따라서 지방교육은 변하고, 교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학교 교육이 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와 무관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교사들의 정치적 중립성 운운하면서 교사들의 정치 참여를 막고, 처벌까지 하는 나라에서 정권에 따라 교육이 바뀌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그러면서 무슨 교육의 정치중립성 운운하는지...

 

이런 정책들이 교육의 불모성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인데, 우리나라 교육은 창의성을 말살하는 교육이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의 교육이 경쟁, 입시, 지식 위주의 교육이었는데, 앞으로 다가올 사회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입시라는 걸림돌은 없애야 할 것으로, 지식 위주에서 지식을 활용하는 창의성을 강조하는 사회가 될 거라고 한다.

 

지금까지 사회를 유지시켜왔던 교육의 모습이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기에,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교육을 실천해나가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래서 미래교육은 협력적, 다중지능적, 창의적 발달을 도모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교육을 하기 위해서 초중등 교육을 개혁하는 것은 물론, 대학의 교육도 개혁해야 하고, 우리 사회의 모습도 개혁을 해야 한다고 한다.

 

구체적인 방안들이 제시되고,, 이를 교육학 이론으로 정립하고 있기도 한데, 문제는 이를 실현시키는 방법이다.

 

어느 한 곳에서만 실현되어서는 안되고, 국가 차원에서, 지방 차원에서, 그리고 학교 차원에서, 또한 학생과 교사 차원에서 따로 또 같이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교육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교육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 교육 운동 진영에서 내놓은 안들을 종합해서 좀더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정부가 교육개혁을 해줄 것을 기대만 하고 있으면 안되겠지. 교육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우선 하면서, 거시적인 차원에서 서로 협력해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창의적 문화교육 운운하면서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창의적이지 않다면 그 또한 모순일테니 말이다.

 

이제 새정부가 출범할테고, 새로운 교육정책이 나올테다. 정권에 따라서 바뀌는 교육정책이 아닌 정말로 백 년, 아니 천 년 앞을 내다보면 교육정책, 이는 교육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두 눈 똑바로 뜨고 교육정책을 입안할 수 있도록 지켜볼 때 나오지 않을까 한다.

 

교사는 당연히 이런 책들을 읽어야겠지만, 교사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그래서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하다못대 교육학을 가르치는 교수들까지 포함하여, 교육 관계자들, 이런 책을 읽어볼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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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같은 삶의 기록 - 잠언과 미완성 작품집 카프카 전집 2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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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카프카를 읽느냐고?

그를 전공할 것도 아니고, 논문을 쓸 것도 아닌데, 그냥 알려진 유명한 작품만 읽으면 되지 왜 비싼 돈을 주고 그가 발표도 안한 작품을 읽느냐고? 그것도 완성되지 않은 작품집을...

 

별 이유는 없다. 카프카란 사람이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보다는 그의 삶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삶과 작품의 관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학문적인 관심이라기보다는 카프카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이 그의 작품에 이르게 했다고나 할까.

 

잠언과 미완성 작품집답게 참 두껍다. 이렇게 두껍게 책을 내면 누가 읽나 싶을 정도로 1000쪽에 달하는 분량은 우선 눈을 질리게 한다.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읽기에는 무게도 제법 나간다. 또 읽어도 읽어도 많이 남아 있는 뒷부분이 질리게도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글이 잘 읽힌다. 잘 읽힌다기보다는 글들이 전체적으로 죽 연결이 되지 않고, 토막나 있기 때문에 중간 중간 쉴 틈이 있기에 그렇게 지루하다는 느낌없이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잠언은, 그 특성상 짧은 글들의 연속이 아니던가. 하여 그 짧음 속에서 긴 어떤 삶의 진실들을 담고 있기에 더욱 읽기에 편하다.

 

이 작품집에서는 이러한 잠언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예전에 단행본으로 나온 잠언집과 비교해보지는 않았지만 카프카의 삶과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 대해 생각할 것들이 많다.

 

잠언과 더불어 이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다. 결국 아버지에게 전달은 되지 않았지만, 카프카를 이해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작품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카프카는 이 편지를 중심으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으리라. 그런데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의 잠언 중에서 이 구절이 생각났다.

 

그는 자유로우면서도 안정된 지상의 시민이다. 그는 모든 지상 공간을 자유로이 활보하기에 충분한 길이의 쇠사슬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의 경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길이일 뿐이다. 동시에 그는 자유로우면서도 안정된 천상의 시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상에서와 유사한 길이의 천상의 쇠사슬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지상으로 가려고 하면 천상의 사슬이 그의 목을 죌 것이고, 천상으로 가려고 하면 지상의 사슬이 목을 조여올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맨 처음 속박당할 때 일어난 한 가지 실책 탓으로 돌리기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 책. 511쪽에서

 

아버지로 대표되는 현실 세계에서만 지내려고 한다면 그는 자유롭게 무엇이든지 하면서 지낼 수가 있다. 반대로 문학으로 대표되는 이상 세계에서 지내려고 해도 그는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두 세계를 동시에 아우르려고 하면 그는 쇠사슬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한 세계만을 알고 사는 사람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쇠사슬이 없다. 그런 쇠사슬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고자 할 때 이런 쇠사슬을 의식하게 되고, 이 쇠사슬을 벗어나려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그 노력은 너무도 힘든 삶을 수반한다. 이 곳에서도 저 곳에서도 고통받는 경계인의 삶. 그래서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삶. 

 

바로 카프카의 모습 아니던가. 그래서 그는 결혼에서도 그렇게 망설이지 않았던가. 두 세계가 공존할 수 없다는 느낌. 그러한 절망감. 그래서 그는 경계에서 여기 저기서 쇠사슬에 목이 조여지면서 생활하지 않았던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부단히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을 카프카의 모습이 이 잠언에서, 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이와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카프카의 작가로서의 자세다. 이 작품집에는 비슷한 글들이 많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다고 하지만 거의 똑같다. 그가 작품의 완성을 위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그래서 맞춤법, 단어 등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게 된다. 부단한 연습, 고치기, 작품에 대한 결벽증이 이 작품집에서 느낄 수 있는 카프카의 자세다.

 

두껍지만, 한 작가의 생(生)이 이 정도도 안 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의 정말 꿈같은 삶의 기록이 이 책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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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 살어리랏다 - 아름답게 되살린 한옥 이야기
새로운 한옥을 위한 건축인 모임 지음 / 돌베개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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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네모 네모로 이루어진 현대 아파트식의 건축물에 질려서일지도 모른다.

 

또 어디 가나 비슷한 구조를 지닌 공공건물들, 학교들의 모습에 싫증이 나서일지도 모른다. 한옥도 역시 한옥끼리는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겉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높이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니, 오히려 옆으로 포근하게 사람을 감싸는 느낌을 주고 있으니, 한옥 일색도 조금은 그렇지만, 한옥이 거의 사라져 가는 지금의 모습은 고쳐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한옥에서 살지는 못한다. 아니 살 수가 없다. 한옥에 살려면 기존에 있던 한옥을 구입하던지, 아니면 땅을 매입해서 한옥을 지어야 하는데, 이거 원, 자본주의 사회답게 돈이라는 놈이 나를 구속하고 있다.

 

결국 돈에 제한당하고 있다. 우리의 주거 공간 역시.

 

아마 한옥이 좀더 대중화된다면 한옥을 짓는 방법도 발전을 할테고, 한옥의 재료들도 진화하여 지금보다는 싼 가격에 지을 수 있게 될테지만, 지금은 다른 건축에 비해 비싸다는 사실이 한옥의 대중화를 가로막고 있다. 또한 늘어나는 인구수도.(아니지 이제는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나라인데, 그렇다면 지금처럼 무작정 대단위 주택을 짓는 일은 시대착오적인 건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전통적으로 존재해온 한옥을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고택(古宅)들을 소개하고 있지는 않다.

 

반대로 현대적 의미의 한옥을 소개하고 있다. 기존 한옥을 매입하여 현대에 맞게 개량하고, 증축하고, 또는 신축한 집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지었는가를, 특징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주거공간, 상업공간, 문화공간, 업무공간이라는 네 분야로 나누어서 소개하고 있는데, 주거공간이야 본래 한옥의 쓰임새이니 사는 사람의 취향이 잘 드러나게 고쳐서 살고 있는 집들이 소개되고 있고, 다른 책들과는 다른 점은 상업공간이나 문화공간, 업무공간에 대한 소개다.

 

한옥을 상업 공간으로 쓰고 있는 집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문화적인 공간으로(이는 한옥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관공서로서는 혜화동사무소가 한옥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개까지 있다.

 

그만큼 한옥이 오래된 옛건물로써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실생활에서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리라.

 

아파트가 밖으로는 철저하게 단절되고 감추어진 공간임에도 안에서는 열려 있는 공간이라면, 한옥은 밖으로도 어느 정도 열려 있지만, 밖과는 담으로 분리되어 있고, 안에서는 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열려 있지만, 또한 마당을 중심으로 닫혀 있는 공간으로, 열리되 닫힌, 닫히되 열린 이중의 장소로써 존재한다는 차이를 발견한다면...

 

그래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아파트와 같은 현대식 건물보다는 한옥이 훨씬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 획일적인 것은 좋지 않다. 건물로 대표되는 우리 삶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현대식 건물도 필요하지만, 한옥과 같은 전통건물도 필요하고, 또한 한옥을 현대에 맞게 발전시킨 건물들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옥은 비움의 미학을 간직하고 있는 집이라고 한다. 그 비움으로 인하여 채움이 일어나는 공간. 바로 우리들의 삶을 한옥이 응축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비움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 충만하게 채워갈 수 있으니 말이다.

 

한옥에 살어리랏다. 좋다. 언젠간 나도 한옥에 살어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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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단편전집) 카프카 전집 1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 솔출판사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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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작품을 다시 읽다.

 

지금껏 읽은 작품이라고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책을 찾아보니 세계 도서전을 서울에서 했을 때 그 때 할인된 가격으로 산 잠언집과 변신만이 있었을 뿐.

 

한데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많은 작품들이 유명해질 수 있겠단 생각을 했고, 아니 많은 작품이 유명한데, 그것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이 들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기억에 남는 작품만 하더라도, 유형지에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을 선생, 이 있다. 나머지 작품들은 소품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작품은 몇 쪽씩 사라져 있으며, 미완성의 작품들도 많이 있는데, 그래도 전체적으로 카프카란 사람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세 가지 정도가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는데, 우선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읽으면서는 그 작품의 의미라든가, 여기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하는 것보다는, 먼저 추송웅이라는 사람이 떠올랐으니. 그가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일인극을 열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워낙 언론에서 많이 다뤄줘서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두 작품을 연결짓지 못했는데,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 원숭이의 이름이 바로 빨간 피터라는 사실을 알고는 어라, 이런, 하는 생각이 들어 검색을 해보니 두 작품이 같은 거였다. 그만큼 카프카가 우리게에 깊숙히 다가와 있었다는 얘기다. 이 문화적인 결핍. 부끄러움.

 

두 번째는 에셔의 그림이 생각이 났다는 것. 아마도 '법 앞에서'와 '황제의 칙명'을 읽을 때였을텐데, 에셔의 그림 중에서 분명 밑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따라가보면 다시 위로 올라와, 그 길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인 그림이 생각났다. 그는 작품에서 우리 인간의 운명을,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도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는지...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 안으로 돌고 있었는데 돌다보니 어느덧 밖에 있게 되고, 밖으로 돌고 있었는데 어느덧 안에 있게 되는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

 

우리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 무자르듯이 안팎을 나눌 수 없음을, 세상에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음을 이 작품들이 말해주고 있단 생각.

 

"굴"이란 작품에서 이거 혹시 카프카 자신의 문학에 대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 아냐란 생각을 했다는 것이 세 번째 든 생각이다.

 

자신이 열정을 다해 굴을 파고, 그 굴 속에 광장까지 마련해 놓고 안심을 하고 즐거워하지만, 곧 불만족함을 느끼고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지만, 또한 만족하지 못하고, 이 굴에 다가오는 다른 소리들에도 민감함을 느끼는 자신, 이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문학에 걸었지만, 늘 만족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 카프카의 삶을 자신이 "굴"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그의 작품들이고, 많은 해석이 이루어졌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의 작품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게 되었는가, 내 삶에 무엇인가를 더 덧붙였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최소한 우리네 인생은 단순하지 않으니, 그의 작품을 통해서 삶의 복잡성, 환상성을 생각하고, 그러한 삶을 영위해가는 나를 조금은 떨어져서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카프카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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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제학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영욱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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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17대 대통령의 시대가 가고 18대 대통령의 시대가 온다. 그런 시대가 오는 해의 첫날이다.

 

지난 대선에서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정치적 능력이나, 인간적인 품성,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가장 큰 논점은 바로 경제였다. 이 경제가 17대 때도 가장 큰 문제였는데, 또다시 5년이 지난 뒤 18대 때도 경제다.

 

아니 어쩌면 IMF를 겪은 이후부터 우리에게는 경제가 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치인을 그의 과거와 상관없이, 그의 정치 능력과 상관없이 지지했는지도 모른다.

 

한 번 16대 때 경제를 잠시 뒤로 미뤄두고 지지를 하기도 했지만, 이런, 그 때 정권도 경제에 관해서는 우리를 더 힘들게 해서, 정치보다는 경제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엠에프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광풍에 중산층들이 속절없이 나가떨어지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이 되고, 청년들은 88만원 세대라는 소리를 들으며, 이태백이라는 신조어(이십대 태반이 백수)까지 등장하였으니...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보다는 당장 눈 앞에 닥친 생존이 더 급한 문제로 다가온 때였다.

 

그러니 '747'이라는 화려한 공약(空約)을 내건 사람이 당선이 되었지. 747점보 비행기가 멋지게 이륙한 것이 아니라, 이륙도 못하고 두 동강 나 버렸지만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대기업에, 다국적기업에 종속된 언론들이 신자유주의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어서 신자유주의의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오호라, 개인의 책임이라니...세계경제의 시스템이 신자유주의로 굴러가고 있는데... 그런 5년을 겪었다. 그래서 이번엔 '경제민주화'라는 걸 들고 나왔다. 함께 살자는. 말은 좋은데, 과연 신자유주의를 그냥 내버려두고 이게 가능할까.

 

아니다. 라고 답해야 솔직한 답변이 된다. 아니라고 얘기하는 정치인이 솔직한 정치인이고, 아니라고 얘기하는 경제학자가 공부를 제대로 한 경제학자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니, 많다. 다만 우리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을 뿐이다. 언론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언론이 침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이제 새 시대가 시작된다. 새 시대는 '성장'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지속적인 성장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우리는 새 시대를 저성장, 어쩌면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는 기간으로, 새로운 실험을 해야 하는 시대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는 그래야 한다고 한다.

 

'마이너스 성장 사회에 대한 대비는 지역 식량 생산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농촌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장하며, 단순한 생활 양식을 가진 지속 가능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기본적인 필수품도 지역에서 생산하며, 지방으로 분산된 에너지 자원의 성장을 지원하는 것이다. (97쪽)

 

이것은 '지역화'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정치를 확립하자는 주장으로 나아가고, 이는 지금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IMF(국제통화기금)와 WTO(세계무역기구)를 대신할 수 있는 세계환경기구(WEO)를 만들자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자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대신에 주권도 보호하고, 약자도 보호하며, 더불어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약한 나라들부터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이 책을 통해서 낱낱이 까발리고 있으며,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주장에 대안이 있음을, 이미 대안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시작, 우리나라는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적어도 새 정치를 시작할 사람이라면 이 정도 책은 읽고 고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다시 747처럼 이륙도 못해보고 땅에서 두 동강이 나지 않도록, 그 많은 환경파괴 에너지가 드는 이륙을 하지 않고도 이 땅에서 서로가 서로에 의존해, 인간이 자연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정책을 펼쳐야 하지 않겠는가.

 

말로만 하는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그 경제민주화가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지역화임을, 공동체 만들기임을 정책으로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도록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펴야 하고, 우리의 주장을, 삶에 대한 주장을 그들의 귀에 들어갈 수 있게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성장의 경제학이 아니라, 행복의 경제학.

 

새 해, 시작하는 날. 경제, 사람도 살리고 자연도 살리는, 서로 함께 살아가는 그러한 경제가 되도록 했으면, 그런 시작의 해였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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