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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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재난. 그렇기 때문에 재난은 일상적인 생활을 전복시킨다. 일상적인 사고도 전복시킨다. 그래서 새로운 상황,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낸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약탈, 방화, 상대에 대한 억압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런 인식이 만연되어 있지만,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이렇게 힘들 때는 사람들이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한다.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위험보다는 상대방의 위험을 걱정하는 공감의 태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와도 관련이 되고, 프랭클의 의미찾기와도 관련이 되고, 또한 이타적인 유전자와도 관련이 되는 그런 행위, 조건 없이 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인간들이 왜 사회적 동물인가를 증명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재난으로 인해 인간적 질서가 무너졌다고 호들갑 떠는 집단은 이미 권력을(경제적, 정치적) 쥐고 있는 일부 엘리트들 이라고 한다. 이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재난을 바라보고, 재난을 통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이용한다고 한다.

 

다른 힘없는 사람들은? 잃을 것이 없기에, 또 극한적 상황에 처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할 수도 없기에 그들은 그들이 처한 현재에서 최선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극한 상태에서 최선이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순간, 홉스의 말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들어서게 되고, 이는 자신들이 있는 공간이 지옥으로 변하고 마는 현실을 만들게 된다.

 

반대로 옆에 있는 사람을 함께 해야할 이웃으로 생각하게 되면 재난은 함께 극복해야 할 무엇이 디며, 옆에 있는 사람은 나와 함께 하는 연대의 대상이 되고, 그곳은 유토피아로서 기능하게 된다.

 

유토피아가 꼭 물질적인 만족을 주는 곳은 아니니 말이다. 하여 재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던 두 가지를 끌어낸다고 한다.

 

첫째, 재난은 가능한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잠재되어 있던 것을 입증해 준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가진 회복력과 관용, 다른 종류의 사회를 즉석에서 꾸려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재난은 우리들 대부분이 연대와 참여와 이타주의와 목적의식을 얼마나 간저히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재난 속에 경이로운 기쁨이 있는 것이다.

- 이 책 454쪽

 

이것은 재난을 보고 자원봉사하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접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른 세상, 지금껏 묻어두고 있었던 다른 모습을 발견하기에 재난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 이 기쁨은 지금과는 다른 생활을 하는데서 올텐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태풍이 우리나라를 휩쓸었을 때, 재난 당한 사람들의 모습이 단지 고통에만 차 있는 모습은 아니었고, 이들은 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음을 보아왔고, 또 그들을 돕기 위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려고 하는 모습을 통해서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재난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한없는 재앙, 실의에 빠진 사람들, 이 틈을 이요해 약탈하는 무법자들을 부각시키는)와 근본적인 대책은 미흡한 정부의 모습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고...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미국산 소고기 수입 파동 때 촛불 시위대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 때 촛불 시위는 시위가 아니라 문화제라고 했으며, 이는 카니발과 비슷하게 국민들은 거대한 위협 앞에서도 일종의 난장 축제를 만들어내었다.  심각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하는 모습, 그리고 위로부터가 아닌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모습.

 

반대로 이런 시민들의 축제를 두려워하는 엘리트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명박산성과 물대포. 마치 이 책에 나온 뉴올리언스 사태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참... 아니 거꾸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뉴올리언스 사태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이 촛불시위의 모습이 떠올랐으니, 정말 씁쓸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뉴올리언스 사태에서도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긍정적인 모습도 많았고, 이 긍정적인 모습이 다른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시민들의 의식과 행동에 변화를 주었다고 했으니, 우리 역시 촛불 시위를 통해서 많은 의식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가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해야겠다.

 

여기에 조금 더 멀리가면 광주민주화 운동. 포위된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만들어 갔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엘리트 패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도.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이 우리에게서도 이미 보여졌던 모습들이니, 우리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어떻게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만들 것인가? 시민사회가 정치사회와 공존할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이런 질문을 던져 준다. 극한 상황인 재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과 더불어.

 

 

덧글

 

258쪽의 세귀르 후작은 1970년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벌써 그 사실을 깨달았다.

-> 전후 맥락으로 살펴보건대, 1970년이 아니라 1790년의 오타일듯.

 

그리고 하나 더. 이 책에서는 크로폿킨이라고 나오는데, 우리나라에 알려지기론 크로포트킨 아니던가. 대부분의 책에서 크로포트킨이라고 하는데, 그걸 고려해서 크로폿킨보다는 크로포트킨이라고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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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교육 존 듀이에게 묻다 - 듀이 실험학교와 우리 혁신학교의 이론적 연결 뿌리
서용선 지음 / 살림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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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교육이론은 우리에게는 참고서와 같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우리 실정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

 

듀이라는 교육학자, 아니 철학자라고 해야 하는 사람은 20세기 초반에 자신의 사상을 정립했다. 그의 사상은 크게 민주주의, 경험을 교육에 접목시켰다. 이는 지금 교육에도 필요한 덕목인데, 이것이 과연 잘 실현되고 있는가는 의문이 든다.

 

경험을 통해서 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어떠한 경험이냐가 중요하다. 이것을 듀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라고 얘기하는 듯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을 개인의 경험만으로 그치지 않고 집단 경험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은 어떤가? 우리는 사회과라는 과목이 있지만, 과연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하고 있는가 질문을 해보면 답은 아니오라고 나오게 된다.

 

사회과를 비롯하여 다른 과목들도 경험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지식을 암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기에 노동교육, 인권교육, 생명교육, 환경교육 등은 교육과정에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교육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듀이도 자신의 이론이 실제 학교에서 적용이 되지 않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실험학교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자신이 이론을 실천한 것을 보면.

 

듀이의 이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긴 한데, 도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어떤 민주주의의, 어떤 경험을 학생들로 하여금 하여야 할까?

 

최소한 민주시민으로서 시민성이라고 갖추도록 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교사들이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명목하에 정치적 행동은 물론이고 발언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무슨 시민성 교육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시민성을 가르칠 수 있는 조건이 안되는 현실부터 고쳐야 한다. 입시로만 매진하는 교육 현실을 고치기 위해서는 조금 덜한 수업량, 더 많은 시간, 그리고 다양한 평가들, 교사 개개인에게 평가권과 교육과정 편성권을 주어야 한다.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야만 경험을 통한 민주시민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듀이의 교육철학은 한물간 교육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도 실현하고 있지 못한 교육철학이다.

 

이런 듀이의 교육철학을 혁신학교에서 하려고 한다. 일률적이지 않은 각 학교의 특성을 살려 교육을 이뤄내려고 한다. 여기에 듀이의 교육철학이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듀이의 교육철학을 정리해서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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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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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작가 하면 토지가 먼저 떠오른다.

 

60년대에 시작하여 90년대에 완성된 소설. 처음에 장장 16권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여지는 소설. 우리나라 소설계에 우뚝 선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는 박경리 작가에게 '여류'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여자 작가가 많지 않던 시절, 사람들은 여자 작가들에게 어떤 특수성을 부여하는지 '여류'라는 말을 붙였는데... 어느 순간 박경리 작가에게는 이 '여류'라는 말이 붙지 않았다.

 

작가면 작가지 작가를 남녀의 성으로 구분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박경리 작가에게 '여류'라는 딱지(?)를 붙이기 힘들어서이기도 했으리라.

 

요즘은 '여류'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바람직한 일이다.

 

박경리 작가가 시를 썼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냥 소설만 쓴 줄 알고 있었는데... 시집도 세 권 이상 내었다니...

 

시를 썼다는 사실을 박완서의 글을 읽고 알게 되었는데... 궁금증이 생겼다. 소설로 유명해진 작가가 어떤 시를 썼을까? 어떤 시집을 읽어야 하나?

 

맨 마지막 시집을 읽기로 하다. 박경리 유고 시집. 이 시집에는 박경리의 개인사가 잘 드러나고 있기도 하니... 인간 박경리를 알 겸 시도 읽을 겸.

 

시가 일사천리로 읽힌다. 노대가답게 억지로 꾸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말들을 그냥 쏟아내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읽는데 전혀 무리가 없고, 또한 그 말들이 수수하게, 순수하게, 직설적으로 마음에 꽂힌다.

 

아, 이런 삶을 사셨구나!

 

아, 이런 아픔이 있었구나!

 

아,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구나!

 

박경리 개인의 가족사, 삶을 쓴 시들도 마음에 와닿고, 또 삶에 대한 통찰이 마음에 와닿는다.

 

지금 세태와 관련지어 이 시를 보자.

 

시인의 통찰이 마음에 와닿으리라.

 

사람의 됨됨이

 

가난하다고 /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 부자라고 /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 그것은 /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 / 삶이 풍성해지고 / 인색함으로 하여 /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 생명들은 어쨌거나 /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 심성이 후하여 / 넉넉하고 생기에 찬 /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 인색한 사람은 /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 후한 사람은 /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 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초판 9쇄 88쪽,

'사람 됨됨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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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조무래기별들 -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박일환 지음, 박해솔 그림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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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삭막해질수록 가정의 소중함이 몸으로 다가온다.

 

뉴스를 보면 연일 안 좋은 소식들이 들려오고, 이들이 내 몸의 파장을 흩뜨려놓는다.

 

마음이 안 좋다. 따뜻한 이야기,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진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소녀가 어느날 할머니가 되어 온갖 존재들과 함께 어울려 살게 되는 이야기. 하울이 생활하는 공간은 전쟁으로 점철된 살벌한 세계인데, 반대로 소피가 생활하는 공간은 온갖 존재들이 함께 어울리는 장소의 기능을 하니...

 

세상이 삭막할수록 가정이 할 수 있는 일, 또한 가정이 해야만 할 일이 있단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여성성'을 발견했는데, 이 여성성이 결국 가정을 구원하는 요소이고, 가정의 구원이 세상의 평화와도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하울로 대표되는 밖으로만 나도는 남성의 존재. 자신의 약함을 강함으로 포장하지만 한없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이고, 소피로 대표되는 여성은 할머니처럼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도, 게다가 사람이 아닌 존재까지도 받아들이는 그런 존재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남자들이라고 다 밖으로만 돌지는 않는다. 남자들 중에서도 '여성성'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한 쪽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 나오는 아버지도 밖으로 밖으로 바쁘게 살아가지만, '여성성'을 잃지 않고 있다. 바쁘게 살면서도 가족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시에 담긴 가족들의 모습, 그리고 그 시를 조금 더 길게 산문으로 풀어쓰고, 시와 산문에 어울리는 그림이 딸이 그리고 있으니...

 

살아가면서 가족에만 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밖으로만 나돌 수도 없는 일. 밖으로 밖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시선은 늘 가족에게 가 있다는 느낌이 드는 시와 글들. 또한 따스함이 묻어나는 그림들.

 

또 아버지와 딸이 함께 작업을 하면서 어쩌면 공통된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여성성'이 발현되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딸들을, 그리고 아내를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또한 가족에게만 머물지 않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잔잔히 퍼져가는 모습이 느껴지는 글이다.

 

여기에 크기 또한 겉옷의 큰주머니에 들어가기에도 적당하니, 언제 어디서든 지니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한 편 한 편이 따스하게 마음에 다가오니, 전철에서든, 버스 안에서든 자신만의 시간이 있을 때 최첨단 기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지 말고, 가끔은 이런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책을 읽어볼 일이다.

 

읽으면서 가족간의, 아니 사람들간의, 사람과 자연과의 교감을 느껴볼 일이다.

 

그러면 자신의 마음도 따스하게 물들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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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패러독스 - 극단적인 남자들, 재능 있는 여자들, 그리고 진정한 성 차이
수전 핀커 지음, 하정희 옮김 / 숲속여우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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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들이 있다.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 평균 임금보다 한참 적다는, 또 회사의 중역이나 정치인, 그리고 고소득 직업에 여성보다 남성이 적다는.

 

그런데 문제는 학창시절의 능력만을 놓고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우수하다는데 있다. 성적도 좋고 적응도 잘하고 진학도 잘하는데, 나중에 보면 고위직에서 남성의 수가 여성의 수보다 많은 현상이 생기고 있으니...

 

이를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남녀 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위로 올라갈수로 알게모르게 남녀차별이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통념으로 사회에 퍼지고, 남녀평등지수가 낮은 원인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 책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왜 재능 있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다른 삶을 선택할까?"

그리고 왜 여성들은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삶의 만족도가 떨어질까?

 

오히려 남성의 위치에 올라서면 더 만족하고 행복해 해야 하는데, 많은 수의 여성들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는 데서 출발을 한다.

 

여성들은 남성의 거울이 아니다. 즉 남성들이 하고 있는 일에 동등하게 참여하고자 한다는 전제를 의심해봐야 한다는데 핵심이 있다.

 

이런 논의를 이끌어가기 위해 유전학, 심리학, 뇌과학, 그리고 사람들의 사례를 들고 있다.

 

발달한 사회일수록 여성이 자신의 의지로 고위직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 살기 힘든 나라일수록 남녀의 일자리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반면에, 생활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사회에서는 남녀가 선호하는 일에 차이가 있다는 것.

 

이 책의 논점은 성차로 인해 차별이 없는 사회에서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에 있다. 즉, 남녀차별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에서는 차별을 없애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성차에 따라 차별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겠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리 천장을 지니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유리 천장이 없는 사회라면 여기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가 잘 발현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으리라.  

 

지금은 여성성이 강조되는 세상인데, 이는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성들이 여성보다는 더 경쟁에 이끌리고, 더 모험을 하며 불확실성에 자신을 맡기고, 남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적당한 일이 있고, 이와는 반대 성향을 지닌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남성과는 다른 쪽에서 발휘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다.

 

결국 성 차이를 인정하면 삶의 질을 월급의 액수로 가늠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알게 된다. 차이가 차별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일. 이것이 진정한 양성평등으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차이를 없애려는 모습이 남녀차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생각하게 해준다. 다양한 자료들로 주장의 신빙성을 높이고 있으니, 무엇이 진정한 양성평등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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