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대에 대한 논쟁, 그리고 NLL에 대한 논쟁,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논쟁,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논쟁...

 

정말 이번 대선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네 과거는 이랬다... 어쩔래? 하는 모양.

 

물론 과거를 묻어버릴 수는 없지만, 과거에 매달려서도 안된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미래를 제대로 기획하기 위해서이다. 과거로 끄집어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재는 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배태하고 있다고 한다면, 과거에 대한 철저한 공부는 필수적이다. 과거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을 뿐더러, 과거는 과거일뿐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과거를 과거로 내버려두자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과거에 넌 이랬으니까 앞으로도 이럴 거야, 네 과거는 이랬어, 너는 그런 사람이야 하고 규정짓고 새로움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문제다.

 

우리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지금 이 자리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과거는 과거로, 즉, 역사는 역사로서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 검증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공과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냥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런데.. 도대체 역사가 뭐지?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단재의 말도 있고,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란 E.H.카의 말도 있는데...

 

과거가 어떤 실체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이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과거를 알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사실(이게 참 어렵다)에 대해서는 공통의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온 유력한 세 명의 후보들... 기본적인 사실들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을까? 만약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과거에 대한 공통된 인식과 누가 가장 가까울까 그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기본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거의 기사식으로 정리해놓은 책.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난 4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읽었는데... 이 시대에 대한 공통인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선은 가장 문제가 되는 60-70년대에 대해서 기본적인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공통인식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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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화사 3 - 혁명 1860~1920 유럽 문화사 3
도널드 서순 지음, 오숙은 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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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화사 3권의 제목은 혁명이다. 이 책이 문화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이 혁명을 정치적인 혁명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시대를 무 자르듯이 싹둑 자르지는 않지만 책에 있는 시대구분은 1880년에서 1920년까지다. 정치적으로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긴 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혁명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물론 정치와 문화의 관계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통신혁명으로 시작한다. 통신이 혁명적으로 발전함으로써 세계는 하나가 되어 간다. 며칠, 몇달씩 걸리더 일이 이제는 몇 시간만에 서로 연락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혁명이다. 여기에 라디오까지 발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통신 혁명은 세계를 좁게 만들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고 교류를 쉽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유럽대륙과 미국이 함께 묶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할까.

 

하여 이 시대에는 소설도 국제화가 되고, 이러한 문학들이 세계를 막론하고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프랑스의 에밀 졸라가 양심적인 작가의 대표로 나오고, 또 세계적인 작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소설에서도 범죄, 아니 추리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추리 소설이 자리를 잡으며, 과학소설이 등장하여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며, 이제는 대중소설들이 등장하여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진다. 

 

언론 또한 이제는 특정 집단을 벗어나서 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는 매체로 자리를 잡으며, 이와 더불어 음악 분야에서도 축음기의 발명으로 인한 녹음기술의 발달로 가수들이 유명해지고, 이들의 노래를 녹음하는 일이 유행하게 되는 모습, 그리고 그러한 노래의 녹음이 오히려 공연을 더 활발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 여기에 드디어 영화가 나온다.

 

지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화는 1890년대에 등장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는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주 오래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영화는 이제 겨우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기술의 발달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영화라고 할 수 있으니...

 

영화의 중심국이었던 프랑스가 미국에게 주도권을 내주게 되는 모습도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문화의 중심이 한 곳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문화의 수입국에서 문화의 수출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기울어져가는 국운, 그리고 곧 닥칠 국권의 상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 때는 우리의 문화에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때가 아니었던가. 비록 우리는 국권상실이라는 비극을 겪어 정상적인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봐야 하지만 말이다.

 

읽으면서 자꾸 우리나라의 그 때와 겹쳐진다. 이들이 이렇게 문화를 만들어갈 때와 우리가 제대로 된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일본에 종속되던 때...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문화의 중심은 항상 변한다는 사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깨닫게 해준다.

 

방대한 내용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갈수록 우리와 친숙한 내용들이 나온다. 이제는 어느 정도 우리와 동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해야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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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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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글자가 참 예쁘다. 한 글자 한 글자 놓고 보면 잘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웬지 아이들 글자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글자들이 모여 하나의 제목을 이루고 있으니,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산문집의 제목을 이루는 아이의 작은 발과 같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는 작은 생명력, 그 생명력이 발하는 예쁨, 그것은 마음 속에서부터 아이고, 예쁜 것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되리라.

 

작은 제목이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다. 이런 제목과 어울리게 표지의 글자가 박완서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무언가 예쁨을 연상하게 하는. 

 

몇 년 사이로 내가 젊은 시절 읽었던 작가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가고 있는데, 이 산문집에는 그들과의 교류도 나와 있다.

 

박경리 선생, 화가 김점선,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장영희 교수 등등.

이들과의 추억, 그리고 이들을 기리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글들. 읽기에 편하기도 하고, 박완서선생과 그들을 함께 생각하게도 하고.

 

이 산문집의 1부에 박완서 선생의 개인적인 삶이 드러나 있다. 개성에서 지내다 서울와서 지내게 된 일, 그리고 자신이 소설가가 되게 된 이유 등.

 

그래서 박완서 선생의 소설 중에서 "엄마의 말뚝"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래 그래 하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이 박완서 선생의 소설과 어느 정도 겹치고 있다면, 다른 글들은 박완서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갈하다. 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느낌.

 

글들이 이 산문집에 나와 있는 말처럼 글자들이 사막의 모래처럼 따로따로 놀지 않고, 글들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다. 마치 온갖 나무와 풀들이 모여 동산을 이루듯이 박완서 선생의 글들이 하나하나 따로따로 놀지 않고 이들이 바로 박완서 선생을 이루고 있다.

 

이 산문집에서 박완서 선생은 박경리 선생을 대가라고 부르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글을 썼지만, 이제는 박완서 선생도 박경리 선생 못지 않은 대가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읽기에 힘들지도 않고, 마치 박완서 선생이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이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듯이 읽을 수가 있다.

 

읽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따뜻해진다.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을 줄줄 알았던 박완서 선생의 모습이 이 산문집에서 절절하게 느껴지니.. 자연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질밖에.

 

삭막한 시대, 따뜻한 글이 그리워질 때 가끔 펼쳐보고 싶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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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군인이 휴전선을 넘어 우리네 초소에까지 와서 노크를 하면서 귀순을 했다고 한다.

 

아직은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북한 군인이 우리네 초소까지 오는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게다가 우리네 군인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이 북한 군인이 초소에와서 노크를 할 때까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했다는 것, 이것은 국방에 심각한 위험이 있다는 신호로 보면 정말 무섭다.

 

확실히 우리는 평화의 시대에 살지 못하고,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북한군과 총부리를 마주 대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인들이 그렇게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전방에서 지내는 군인들이 별다른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얘기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그냥 그렇게 마음 놓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넘어가는데 후방에 있는 우리는 국방이 뚫렸다, 안보태세에 구멍이 생겼다고 호들갑을 떠니, 우리 안에 어떤 공포가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직접 겪고 있는 사람들은 만성이 되어 있고,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공포를 내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그 뉴스를 보고 갑자기 한 편의 영화와 소설이 생각이 났으니, 이건 무슨 오지랖이냐.

 

심각한 문제에 그러한 작품들을 떠올리다니... 사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우리네 마음 깊숙한 곳에는 어떤 "공포"가 자리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지금 평화롭게 지내고 있지만, 이 평화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그것도 바로 저 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 생각이 바로 "공포"이고, 이 "공포"가 어느 순간 튀어나오면 우리는 집단적으로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는 생각.

 

평시에는 가만히 숨어 있다가 한 번 나오면 나도 모르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현재 웃으며 함께 지내지만 언젠가는 나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그럴 땐 나도 나를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영화 한 편,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이 영화의 원작인 박상연이 쓴 "DMZ"

 

소설에서는 바로 이 "공포"가 어떻게 발현이 되는지, 그리고 그 공포를 우리가 마음 깊숙한 곳에 지니고 있기에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런 "공포"의 문제가 빠져 있지만.

 

함께 보고 읽으면 좋은 작품들이다. 지금 이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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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수잔 손택 지음, 이병용.안재연 옮김 / 현대미학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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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문학에 관한 글이고, 2부는 영화, 연극에 관한 글, 3부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글이다.

 

아마도 읽기에 가장 편한 글은 3부일터이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3부는 비록 1960년대의 상황에서 쓰여졌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근현대사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그 당시 미국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와 베트남에 대해서 손택이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가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베트남, 즉 하노이에서라는 글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으니, 읽으며서 여러 상황이 겹쳐서 떠오른다. 그 때 손택은 베트남에 대해 어떤 거리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거리를 없애면서 베트남을 이해하는 모습을 글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벌써 50년도 더 지난 일이고, 이후는 베트남이 미국에 승리를 하고 끝났지만,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에 베트남 역시 휩쓸리고 있으니, 지금에서 그 때의 베트남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시선을 파악하면서 읽으면 나름 재이 있다.

 

2부는 상당히 어렵다. 사실, 영화와 연극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논한 첫번째 글도 그리 쉽지는 않지만, 베르히만과 고다르를 다룬 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은 1960년대까지(즉 이 글이 쓰인 시대) 활약한 영화감독이고, 지금 우리에게 이들은 너무도 멀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어서 이들의 작품은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볼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들의 작품이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손택이 그러한 작품들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면서 읽어야 했다. 손택이 이들의 영화를 보는 눈, 어쩌면 그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 김기덕이나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눈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김기덕과 홍상수의 작품이 대중성에서는 멀어졌으나 작품성에서는 인정받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우리나라에서보다는 외국에서. 그래서 이들의 영화를 읽는 방법, 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손택이 베르히만이나 고다르의 영화를 분석하는 방법에서 힌트를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뭐니뭐니 해도 다방면에 걸친 손택의 지적 능력이 부럽기만 하다.

 

1부가 문학과 관련된 내용이다. 아니 꼭 문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예술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해야겠다. 여기의 첫글은 침묵에 관해서인데, 문학 작품이 수다스럽기보다는 침묵할 때 더 많은 울림을 준다는 사실. 그렇지 않은가. 문학이 직설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해준다면 그 감동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문학이 무언가에 침묵하고 있는데, 그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감동은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다. 하여 문학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고, 두번째 글 포르노그래피 문학에 대해서는 읽으면서 자꾸 우리나라 마광수 교수를 생각하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60년대에 이미 이런 글이 나왔는데 우리나라 검열관들(?)은 이 손택의 글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마광수 교수의 작품을(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즐거운 사라'만이 기억에 남았다) 외설이라고 출판금지 시키지는 않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단지 작품의 출판금지만이 아니라 작가도 고통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것이 포르노그래피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 관여를 하는가, 또 어떤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살핀다면 단지 성적인 묘사가 많다고 하여 외설이라고 규정짓지는 못하겠단 생각이 든다.

 

지금도 영화나 문학 또는 음악 분야에서 검열관으로 활약하는 분들, 손택의 이 50년쯤 된 글을 읽어보라. 어떻게 작품을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될테니...

 

손택과 같은 비평가가 우리나라에도 많다. 그들의 글도 많다. 그럼에도 손택의 글을 읽는 이유는 거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의 글을 읽을 때는 이 거리가 잘 유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손택의 글은 거리를 유지하고, 나를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더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 점이 좋다. 그래서 자꾸 손택의 글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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