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토론학교 : 교육과 청소년 - 학교와 배움에 대한 일곱 가지 물음 중학생 토론학교
한국철학교육연구원 지음 / 우리학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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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을 대상으로 '토론'에 관한 책을 연속해서 내고 있다. 첫번째 책이 "문학"이었는데, 문학작품 속에 나온 상황이나 인물에 관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게 하는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교육과 청소년"은 좀더 청소년들의 처지에 다가간다. 청소년들이 알게 모르게 인식하고 있던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말해보라고 한다.

 

즉, 토론을 해보라고 한다. 아니 토론을 하자고 한다. 왜냐하면 토론이란 나를 정립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남을 인정하고 그 인정의 바탕 위에서 나를 다시 생각해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토론이다.

 

하여 토론이 활발하단 얘기는 편견에 빠져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자신의 의견을 정립할 줄 알고, 남 앞에서 이야기할 줄 알며, 그와 같은 비중으로 남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태도를 갖추게 된단 얘기다.

 

그래서 토론은 교육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학생 수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아니면 입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간 우리 교육에서 등한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사회가 토론을 경원시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침묵의 제국, 윤휴"란 책을 읽다가 윤휴가 나중에 했다는 말, '생각이 다르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 까지야 없지 않은가'란 말,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당쟁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당쟁, 즉 다른 당파와의 논쟁에서 지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할 정도였던 적도 있었으니, 토론보다는 두루뭉수리로 그냥 묻어가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퍼지기도 했으리라.

 

여기에 전란을 겪으면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고, 지금까지 사상으로 인해 고초를 겪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우리나라 교육에서 토론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자기 머리 속에만 있다면 쓸모가 없다는 말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게 또 바르게 정립해나가는데는 반드시 남의 생각을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

 

남의 생각을 듣고, 내 생각을 펼치는 과정, 이것이 바로 토론이며, 그래서 토론은 대등한 두 사람이(혹은 여러 사람이) 대등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하여 토론이 잘 된다는 얘기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없이 가장 좋은 방법을 말을 통해, 토론을 통해 찾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이런 토론의 습관을 길러주는 역할을 교육이 해야 하고, 이는 시간이 없다, 학생수가 많다, 입시에 도움이 안된다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오히려 사람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토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토론을 할 수 있을까? 우선 학생들 자신이 겪는 문제부터 생각하게 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이것을 시도하고 있다.

 

토론거리로 주어진 주제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학교를 꼭 다녀야 할까?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면 안될까?

시험을 꼭 봐야 할까?

우리에겐 어떤 선생님이 필요할까?

남녀 합반이 좋을까 남녀 분반이 좋을까?

학생은 생활 지도를 받아야만 할까?

폭력 학생을 힘으로 막는 동아리가 생긴다면?

 

학생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들 아닌가? 학생들 스스로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아닌가? 이 문제들을 안으로 안으로 감추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내서 우리 공개적으로 토론해 보자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도입부분과 찬반에 관한 글들과 정리글들이 잘 배열되어 있지만, 정리글을 읽다보면 어느 한 쪽 편에 강조점을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글들도 있다.

 

그리고  한 쪽 정도 여백을 두고 자신의 생각을 쓰게 했으면 더 좋겠는데, 단편적인 생각거리를 제기하고, 종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는 점이 아쉽다. 물론 이 책이 토론글을 적은 연습책이 아니기에 그러하겠지만, 이 책의 목적이 토론을 하게 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이런 주제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에 있는지 조금은 헷갈린다. 그 점이 명확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학년말에 이런 주제로 토론을 학교에서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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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문을 보니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홉스봄이 아직 살아 있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그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책을 썼고, 번역도 많이 되어 있는데, 나는 읽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책은 두껍고 값도 비싸서 선뜻 사기가 좀 그랬던 책이기도 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정확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려고 했던 학자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연휴가 끝나고 온 신문에 그의 타계 소식이 실려 있다니... 내 젊은날, 영향을 준 학자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단 생각에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으니...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 그의 책은 무슨무슨 시대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대표적인 책들보다는 작은 책이었던 "의적의 사회사"다. 그런데 이 책을 구할 수가 없다. 이제는 출판이 되지 않는지.. 여러가지로 생각할거리가 많은 책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작품이었던 "홍길동전"의 홍길동이나 "임꺽정"의 임꺽정을 어디에 놓아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단지 체제에 반항하는 부류에서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부류까지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이들이 단지 사회반항세력이 아니라 이들이 있음으로해서 사회가 조금씩 변해왔다는 것을 인식했었는데...

 

그러다 한 번 더 읽은 책이 "극단의 시대"다. 90년이 넘어서 나온 책. 우리는 극단의 시대를 거쳐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 시대에 대한 고찰은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제 그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 영면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가 이룬 업적들은 이 세상에 남아있을테니, 그가 편안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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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화사 2 - 부르주아 문화 1830~1860 유럽 문화사 2
도널드 서순 지음, 오숙은 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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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 1830년부터 1880년대이고, 부제는 부르조아 문화이다. 이 시기가 산업혁명이 완수되고, 급속도로 자본주의가 세계로 확장이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주의도 함께.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중간계층을 많이 양산해내었는데... 새로운 중간계층을 부르조아라고 한다. 요즘은 부르조아 하며 잘사는 상류계층을 의미하지만, 이 시대에는 상류계층은 귀족과 왕을 의미하고, 부르조아는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중간계층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빠르게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그들이 가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문화를 선도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문화를 선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가지, 시간과 돈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기에 그들에게 맞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고, 돈이 뒷받침되기에 망설이지 않고 그들에게 맞는 문화에 투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부르조아 문화가 중심으로 떠오르는 시기를 서순은 1830년에서 1880년대로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간 설정에 동의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문학, 음악 분야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들이 활약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압도적인 분량을 문학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문학이 인쇄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더 빠르게 더 멀리 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음악이나 연극과 같은 다른 문화들과는 달리 기록으로 남아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디킨스, 위고, 발자크, 뒤마 등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소설가들이 이 때 등장해서 자리를 잡았으며, 탐정소설, 어린이 책과 같은 장르가 확립되었고, 또 여성이 작가로서 등장하여 인정을 받았고, 학교교육이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아 교과서 산업으로 인한 출판업이 돈을 벌게 되는 시기.. 그리고 작가들이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확립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음악에서도 베토벤을 비롯해, 리스트, 베르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으며 오페라가 이 때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물론 이때나 지금이나 고급예술과 대중예술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있었고,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고급예술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산업화된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문화를 추구하는 경향도 나타나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이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는 현상을 보이는 시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대한 저술인데, 이 2권도 500쪽이 넘는데,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아마도 학창시절에 머리 속에 들어와 있던 인물들이 이 책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단편적으로만 기억되던 인물들이 유럽문화사라는 흐름 속에서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그 때 사회적, 경제적 환경 속에서 어떤 예술들이 중심을 잡아가고, 또 어떤 예술들이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이제는 현대에 다가간다. 3권에서는 드디어 20세기에 접어든다.

 

덧글

 

그런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다.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209쪽 '선량한 매춘부 코제트, 그녀의 딸이자 순수한 절세미인 팡틴'이라고 되어 있는데, 내 기억 속에는 엄마가 팡틴이고, 딸이 코제트인데... 번역의 잘못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에 번역될 때 등장인물을 바꾸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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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롤롤 2012-10-1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뿌리와이파리 편집부입니다. 아주 창피한 실수죠... 작가가 혼동했는지 원서에 엄마와 딸이 거꾸로 나와 있더군요.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저희 출판사 편집부의 잘못입니다. 2쇄를 찍으면서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진영에서 김지하 시인을 영입한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단지 김지하 시인을 모셔 도움을 얻겠다는 목적일까? 아니면 김지하 시인의 지명도를 업고 지지율을 더 올리겠다는 얘기인가?

 

인혁당에 대한 말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후보가, 그 때 대척점에 서 있던 시인을 영입하려 한다니...

 

하지만 적어도 김지하 시인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면 과거에 대한 철저한 사과와 단절이 있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했는데... 설마, 김지하 시인이?

 

다시 얼마 뒤 김지하 시인은 박 후보 진영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았는데... 공중파에서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내가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방송을 하지 않은 건지...

 

이 뉴스를 듣는 순간 김지하 시인의 "중심의 괴로움"이란 시집이 생각이 났다. 도대체 이 양반은 이제 정치와는 손을 놓고 지내는데도 이렇게 주변에서 괴롭히는구나. 김지하 시인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중심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나 해야 할까. 

 

김지하 시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는 민주화 운동의 투사였고, 80년대가 넘어서서는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참여를 했으며, 그 다음에는 율려라는 이름의 영적 운동에 참여를 했었다. 그 다음에는 잘 모르는데... 94년에 낸 시집의 제목이 "중심의 괴로움"이고, 그 시집의 제목은 주로 "봄"과 관련이 있다.

 

시인이 돌고 돌아 다시 시작하는 봄으로, 즉 자신의 만년에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인의 새봄이라는 연작시 중에서 마지막 시인 새봄9를 보자.

 

새봄 9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솔, 1997 10쇄. 새봄9 전문

 

이 시에서 말하는 새봄은 대동세상이다. 모두가 하나되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세상. 이것이 시인이 도달한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서 시인은 이 시집에서 모든 생명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반면에 모든 생명에서 인간은 제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어, 외로움이 짙게 배어나고 있다.

 

인간에게서 느낀 고독, 외로움이 다른 생명과의 교감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시인은 중심을 지키고자 하나, 중심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 흔들리기에 중심이라는 생각.

 

중심의 괴로움

 

봄에 / 가만 보니 /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 중심의 힘

 

꽃피어 / 퍼지려 /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 가 / 비우리라 피우리라.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솔, 1997 10쇄. 중심의 괴로움 전문

 

아래로부터 위로부터, 좌로부터, 우로부터 중심은 늘 당김을 당한다. 그 당김을 묵묵히 견디며 싹을, 꽃을 피워내는 일, 그것이 중심이 할 일이다. 그러한 중심은 흔들리고, 흔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꽃을 피울 수 없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 이제는 우주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아니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지천명에 다다른 시인이 깨달은 점일테다.

 

이러한 우주의 중심에서는 좌니 우니, 나니 너니 하는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오히려 넌 나고, 난 너고, 좌는 우고, 우는 좌일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다 중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심에 속한 것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미묘한 틈. 그 틈이 바로 다른 것이 생겨나는 힘이 된다.

 

 

아파트 사이사이 / 빈틈으로 / 꽃 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 사람 몸 속에 /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 봄이 오는 것은 / 빈 틈 때문

 

사람은 / 틈

 

새일은 늘 /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솔, 1997 10쇄. 틈 전문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곧 '새봄'을 맞이할텐데...'틈'에서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중심의 괴로움'을 새생명의 탄생으로, 새세상의 탄생으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시인의 이 시집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질 '새봄'을 만들 '틈'을 우리가 '중심'을 잡고 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중심을 잡기가 참 힘들다는 것, 중심은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을 통해 새로움을 탄생시킨다는 것. 그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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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춤추게 하라 - 당신과 내가 함께 바꿔야 할 교육 이야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민들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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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교육론"이 원래 제목이다. 참 잘 지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리"라면 닫혀 있는 공간이 아니고 열려 있는 공간이 아니던가. 또한 거리는 이곳과 저곳을 잇는 곳이자, 한 곳에 멈춰 서 있는 공간이 아니라 어디론가 가야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거리는 이곳과 저곳을 잇는 공간이자, 지금과 그때, 또 앞으로를  잇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거리에서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바로 교육은 거리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즉 교육 역시 이곳과 저곳, 지금과 그 때, 그리고 미래를 잇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 그것이 바로 교육이고, 이러한 다른 세상을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볼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치다는 "나는 이렇게 들었다"를 강조하고 있다. 교육은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가 아니라, 이런 것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이렇게 전달한다는 조술자, 또는 전달자로서의 교육자를 설정하고 있다.  

 

공자도 주나라 주공을, 부처의 제자들도, 예수의 제자들도 '이렇게 들었다'는 말로 자신들의 생각을 펼쳐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교육이란 없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다시 한 번 얘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하늘에서 똑 떨어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그래서 우리도 다시 그러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말, 그것이 바로 교육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우치다는 이러한 교육의 개혁을 이야기할 때 교육에서 지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한다.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는데, 교육에서 불필요한 존재들을 하나하나 지워가고 있다. 이렇게 지워가다 보니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남는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교사와 학생이다.

 

이 점을 인정하면 결국 교육개혁은 교사와 학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두 존재에서 교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우리는 교사를 개혁의 대상으로 취급했지 개혁의 주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일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우치다가 제시하고 있는 교사상은 학생들을 갈등하게 하는 교사다. 갈등한다는 이야기는 나와 다른 존재를 인식한다는 얘기다. 이는 지금 이곳에서 다른 곳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곳과 그곳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든다는 얘기다. 이렇게 학생으로 하여금 갈등하게 하는 교사는 그의 지식여부와는 상관없이 좋은 교사라고 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는 세계화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화의 결과로 인간은 통합적인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파편화,분절화(이를 그는 모듈화라고 한다)되어 있고, 이것이 이지메를 비롯하여 직장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다고 한다.

 

학교는 이러한 세계화, 국제화의 광풍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할 온실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이러한 학교의 모습으로 그는 '거리'를 제시한다. 함께 만나고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제대로 된 교육이 된다는 얘기다. 이것은 사이버교육이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주고, 그것에 대해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거리의 교육론이라는 일본어 제목을 "교사를 춤추게 하라"는 우리말로 바꾼 것도 어쩌면 이 책을 능동적으로 읽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교사를, 또는 교사가 중심이 되어 교육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교육부, 교육청에서 나오는 교육개혁이 아니라,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즐기면서 바꿔나가는 교육, 그것이 바로 교육개혁의 출발점이라는 사실,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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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2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