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열정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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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목이 "토성의 영향 아래"란다. 토성의 영향이란 우울, 느림 등을 의미한다고 하고. 벤야민에 대한 글의 제목인데, 이렇듯 손택은 벤야민을 좋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벤야민은 우리에게도 잘알려진 사람이기도 하고.

 

손택의 읽기를 빌려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 읽는다. 어떨 때는 쉽고 재미있게, 어떨 때는 너무도 어렵고 지루하게...

 

폴 굿맨, 리펜슈탈, 지버베르크, 카네티, 아르토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서양문학과는 거리가 먼 나는 이들을 수전 손택을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손택의 눈을 통해서 이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중의 굴절.

 

손택이 한 번 굴절 시킨 작가들을 내가 또 한 번 굴절시키고 있다. 이것이 작가들이 하고자 하는 본질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아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반드시 진실이고, 또 작품의 본질일까?

 

아니리라. 작품의 본질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작가에 따라서, 또 독자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고정된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유동적인 가소성이 있는 존재로 작품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손택이 읽은 작품을 손택의 눈을 통해 읽어도 나는 손택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비록 그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하여도 손택의 주장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립한 다음, 손택의 글과 비교를 해보면 더 좋겠지만 그럴만한 능력은 되지 않으니, 손택의 읽기를 따라가되,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손택의 읽기 방법이다. 그리고 그 읽기 방법을 통해 내 읽기 방법을 정립해가는 것.

 

다행히도 벤야민과 바르트 정도는 어느 정도 읽어서, 이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 역시 배경지식이 있어야 읽기가 쉽다. 그러니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그런데도 난해하다고 손택도 인정하고 있는, 게다가 이 책에서는 분량도 가장 많은 아르토에 대해서는 도무지 뭔 소린지 하면서 읽었고... 초현실주의와 비슷하나 초현실주의도 아닌 사람이 아르토라고 하니...

 

아르토에 대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극도로 지루하거나 도덕적으로 끔찍하거나 읽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작품에 대해, 그 작품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지 않는 (때로는 심지어 감추기까지 하는) 재미난 사실들을 논함으로써 그 작가를 고전으로 만든다. 어떤 작가들은 읽히지 않기 때문에, 본래 읽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적, 지적 고전이 된다.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이후 2009. 237쪽)

 

아르토를 통독하는 사람에게, 아르토는 지독하게 멀리 있는, 도무지 흡수할 수 없는 목소리고 존재이다.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이후, 2009. 238쪽)

 

결국 이 논의를 보면서 나는 아르토란 사람의 작품에 흥미를 지니는 일을 포기했다. 흥미를 지녀봤자 머리만 아플 따름이라고 먹지 못하는 포도를 신포도라고 한 여우를 따라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손택의 아르토 읽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 번쯤은 정독하면서 조용히 이상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는 도전의식은 생긴다.

 

손택의 글들, 참 다채롭다. 읽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천천히,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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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당분간 읽었던 시집을 손에서 놓으련다.

긴 휴가기간이 끝나가고, 나 역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 우습기는 하다. 시 역시 일상에서 언제든지 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는 시를 손에 잡기가 쉽지 않다. 아니 이건 핑계다. 더 많은 시를 읽을 수 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생각하기 힘들다는 핑계로, 또는 삶과 관계 있는 글들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로 시집을 잘 잡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로 구입한 시집은 읽는다. 이게 무슨 일? 새로운 시집들은 읽어가면서, 기존에 읽었던 시집들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다시 내게 다가올 때를 기다린다고 하면 되나?

 

마치 오래된 된장이 맛있듯이, 김치 중에도 묵은지가 있듯이, 시집들은 내 책꽂이에서 잘 익어가고 있으리라. 그동안에 새로운 시집들이 또 익기를 기다리며 자기 자리를 차지하겠고.

 

긴 휴가의 끝. 대미를 장식할 시집은 선택하겠단 고민도 없이 눈에 들어왔다. 이선관의 시집.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환경생태시집이라고도 하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고, 자유 민주에 대한, 평등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더위로 고생한 이번 여름, 녹조가 심해져서 물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고, 온갖 콘크리트 덩어리들로 인해 우리가 이래도 되나 하기도 했고,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오히려 더위를 더 가중시키는 사람들의 모습도 겪었고,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과 연기와 그 소리로 고생도 했고...

 

더 이 시집이 눈에 띠는 이유는 재생지로 만들어졌다는 점. 1997년과 2000년에 나온 시집이라, 시집의 종이 끝들이 벌써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아마도 몇 해가 더 지나면 바삭거리면서 잘못 넘기면 부서지고 말리라.

 

요즘 종이가 온갖 약품으로 무겁고 빛나고 매끄러운데 비해서 이 시집 둘 다 종이는 예전에 우리들이 어릴 적 쓰던 종이와 같다. 그래서 더 친근하고, 환경 생태시집이라는 이름에 걸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선관 시인의 시가 바로 이러한 재생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할까. 겉으로 화사하게 꾸미려 하지 않고 시인의 본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서 그 고민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글은 투박한 뚝배기에 담아논 텁텁한 막걸리에 비유하면 적당하리라. 기교도 부릴 줄 모르고 서양냄새도 풍길 줄 모른다. 그냥 살아왔기게 살아왔음의 흔적, 바람이 불면 사그라질 것 같은 ...... 살아있다는 증명이라도 하듯.

 

이선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실천문학사, 2000년. 후기에서

 

이미 시인은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던 1970년대에 독수대(毒水帶)란 시를 써서 환경오염을 경고했었다고 한다. 이 시들이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에 실려 있다. 다행이다. 환경시의 처음을 볼 수 있어서 말이다. 이 독수대 말고도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환경과 생태에 관한 시들이다. 시인이 얼마나 환경오염에 민감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경고를 한다. 쉬지 않고. 우리는 이 경고를 얼마나 들었던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치 앞에서 읽었던 김영무의 '오늘의 예언자는'과 같다.

 

환경시의 원조격인 독수대1을 보자

 

독수대 (毒水帶)1

 

바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 이따이 이따이

 

설익은 과일은 /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 이따이 이따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 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 / 이따이 이따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 /  이따이 이따이

 

아아 / 바다의 유언 /  이따이 이따이

 

이선관, 지구촌엔 주인이 없다, 살림터. 1997. 독수대1 전문

 

그래서 이러한 환경오염을 없애기 위해서는 시인은 '생명을 가진 지구가/ 망가져 죽어가기 전에/ 한 사람의 의인이 필요로 하기보담/ 열 사람의 넝마주의가 /절실히 필요로 할 때라고/생각합니다'(열 명의 넝마주의가'에서)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시를 읽을수록 환경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사무치게 된다. 시인의 절규가 투박한 직설적인 말투로 인해 직접 우리에게 다가온다. 안다는 것, 실천한다는 것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시인이 통일에 대해서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분단 자체가 이미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이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도처에 깔려 있는 지뢰들과, 그리고 대치상황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수입되고 있는 무기들... 여기에 에너지 문제라는 핑계로 원자력 발전소까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에서는 원자력 문제와 분단 문제, 그리고 민주주의 문제가 시집에 고루 실려 있다. 아마도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2011년에 일어난 후쿠시마 사태를 보고 더 경악을 했으리라. 시인은 이미 체르노빌 사태에 대해서 여섯 편의 시를 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시들도 생각해볼 만하지만, 여기서는 통일에 관한, 오늘이 8.15광복절이니 말이다. 그런 시를 한 번 보자. 정말로 통일은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광복은 해방인 동시에 분단이었으니, 광복절에 분단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통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도 좋겠단 생각이 드니 말이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여보야

이불 같이 덮자

춥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따뜻한 솜이불처럼

왔으면 좋겠다

 

 이선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실천문학사, 2000년.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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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살림지식총서 52
편영수 지음 / 살림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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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이다. 문고판이라고 해야 한다.

카프카, 우리나라에는 "변신"이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사실, 학생 때 벌레로 변해버린 게오르그 잠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을 안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논술이든, 토론이든 벌레로 변해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알려진 작가인데... 어렵다고, 환상적이라고.

 

이 책은 카프카에 대한 입문서다. 그의 문학이 왜 그렇게 표현이 되는지, 그의 삶과 연결지어 이야기를 한다.

문학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카프카의 인생에 영향을 끼쳤던 사람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카프카의 작품애 대해서 개관해주고 있다.

 

우리가 쉽게 읽는 작품은 카프카가 죽은 뒤 그의 친구가 사람들에게 쉽게 읽히게 하기 위해서 많이 고쳤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고, 카프카의 육필원고를 중심으로 편찬하려는 비평판이 있다는 얘기도 해주고 있다.

 

문고판의 분량에 카프카에 대해서 알려줘야 하고, 독자의 관심도 끌어야 하기 때문에 정말로 카프카에 대해서 많이 공부하지 않으면 쓰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분야에 대해 정통하면 쉽게 풀어쓸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카프카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입문서 격으로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렌트도 그의 책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카프카를 언급하고 있듯이 카프카는 평범한 삶을 산 사람은 아니다. 그는 과거와 미래, 이곳과 저곳, 유대인과 독일인, 문학과 생활 등의 경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애쓴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카프카를 이거다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그의 다양한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시간을 두고, 카프카의 작품들을 정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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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참 넓다는 생각을 한다. 비가 올 때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파란 하늘에 간간히 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아직 날은 더웠는데, 남부지방에는 집중 호우가 쏟아졌다고 하니...

 

작은 나라라고 생각해왔는데, 비로 인해 우리나라의 넓음을 새삼 느끼게 되고... 하긴 어딜 가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시내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은데, 고속도로에 가면 또 차도 많고, 이름난 곳이 아니더라도 어디 좀 쉴만한 곳을 찾아가면 또 왜이리 사람이 많은지, 여기에 외국에 나가보아도 한국 사람은 도처에 있다. 이러니 우리를 누가 작은 나라라고 하겠는가.

 

2주가 넘게 모든 매체에서 올림픽, 올림픽했는데, 이제는 외국의 견제를 받을 만큼 큰 나라가 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스포츠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물론 매체에서 이야기하는 선진국형 운동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선진국형 운동이란 내 생각에는 모든 국민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운동이든 큰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하고, 아직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선진국형 운동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나라가 많이 컸다는 의미로 쓰면 될 것이고...

 

이렇게 커버린 나라에서 이제는 문화 쪽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물질문명 또는 돈되는 문화만이 아니라,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문화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을 풍부하게 하는 문화,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환으로 시 쪽에도 관심을 가지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들이 돈되는 과학 쪽에는, 법학, 의학, 공학 쪽에는 투자를 많이 하면서도 인문학은 경시하고, 과학 중에서도 순수과학 쪽은 등한시하고 있다는데, 진짜 큰나라가 되려면 순수과학, 순수학문, 인문학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천민자본주의, 졸부 이런소리를 듣지 않겠지.

 

이제는 아침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무더위에 시집을 읽기 시작한 지도 좀 되었는데...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를 죽 훑어보다 김영무의 시집을 골라 들었다. "가상현실"

 

일명 '시물라시옹'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시집은 사이버세계를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보지 못하고 있었던 세계를 암이라는 요소로 인해 보게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에서도 나오지만, 암은 진단이 아니라 선고라고, 이는 사람의 삶을 과거와 단절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만드는 선고다.

그래서 암은 우리를 가상현실로 인도한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었지만, 나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세계가 내 눈에 펼쳐지고, 암으로 인해 이제와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과거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도 다르게 다가오고, 미래의 세계도 다르게 다가온다. 그러나 시인은 암에 굴복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상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이 시집의 장점은 그것이다. 암을 회피하지 않는다. 암 선고를 처녀수태 고지를 받은 마리아와 동일시한다.(시 마니피카트 1-3 참조) 그리고 받아들인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이 시집에서는 귀향이라는 표현으로 난 이해했다. 사람은 죽음에서 태어나 삶을 살다가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 즉 사람에게 귀향이란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귀향이란 늘 새로운 아픔'(시 '수술'에서)이고, '어이없게도 우리들 이불 속으로 / 파고 들어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 갓난 죽음'(시 '난처한 늦둥이'에서)라고 한다.

 

그의 시 귀향은 이러한 인식을 잘 드러낸 시라는 생각이 든다.

 

귀향

 

귀향을 종용하는 다정한 바람

구름들의 손짓

이제 배를 돌려야 하리

 

고물에 가슴 기대고

지나온 물길 되돌아본다

 

뱃머리 돌리지 마라

그냥 가자.

고향은 떠나기 위해 있는 곳

내친 김에 하늘 끝에 걸려 있는

물금 넘어가자

 

김영무, 가상현실, 문학동네, 2001. 귀향 전문

 

여기서 고향은 우리가 삶을 유지해왔던 곳이다. 그리고 고향을 돌아보는 지나온 물길은 우리가 살아온 나날들, 모습들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뱃머리를 돌리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떠나기 위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물금 넘어가자고 한다. 이것이 또다른 귀향이다. 자신의 원초적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시인이 이렇게까지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의지를 지니고 있는데, 이 시집의 2부인 울루루도 죽음과 연관이 된다. 아니, 삶의 의지와 연관이 된다. 시인은 귀향을 꿈꾸고 있지만, 이는 무력한 순응이 아니다. 가기까지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사막 한가운데 커다랗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는 호주의 바위산 울루루는 시인의 모습이 투영된 존재이다.

 

시인은 이런 울루루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예언자를 보자. 예언자가 항상 인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이런 예언자들을 우리는 너무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마치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오늘의 예언자는

 

오늘날의 예언자는 누구인가

 

물이 썩었다고

쌀에 독이 들었다고 짜장면에도 라면에도 국화빵에도

유전자조작 밀가루가 스며들어 있다고

공기에 독극물이 숨어 있다고

내장재 바닥재에 환경호르몬이 잠복해 있다고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정체불명 화학물질

3만7천 종에 2억3천만 톤에 이른다고

이 가운데 유독물 유통량 해마다 100만 톤씩 늘어난다고

살충제 농약 배기가스 제초제로

우리들의 살림터 속고갱이까지 썩었다고

전자파가 어린 뇌세포 서서히 죽이고 있다고

 

광야에서 외치는 오늘의 선지자는

유방함, 폐암, 대장암, 혈액암, 간암 선고받은

모든 암환자들이다

일급수 아니면 살지 못하는

산천어 열목어 같은 암환자들이야말로

오늘의 이사야, 예레미아이다.

 

김영무, 가상현실, 문학동네, 2001. 오늘의 예언자는 전문

 

이런 시들과 더불어 마지막 4부는 세계화 시대를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김지하의 담시를 읽는 것처럼 굿의 형식을 빌어 세계화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주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은 단지 세계화를 넘어서 FTA로 대변되는 자유무역협정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시는 장시다. 그래서 읽을수록 내용이 정리가 된다. 장편 굿시라고 하는 "세계화 블루스" 읽을 만하다. 너무 길어서 인용은 못하겠다. 

 

어쩌면 이 "세계화 블루스"도 오늘의 예언자 취급을 받지는 않았는지...

아직은 늦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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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비가 내렸다. 모처럼 강화도에 쉬러 갔는데... 계곡에 발을 담그고, 말 그대로 탁족을 하려 했는데... 비라니... 탁족은 고사하고, 우산도 변변히 챙겨가지 못해 비를 피하기에 바빴다. 덕분에 어제는 더위를 잊을 수 있었지. 비가 오는 날임에도 사람들은 어디든지 많았고... 이제는 그 비로 인해 많이 시원해지겠지 했는데.. 오늘은 해가 쨍하다. 다시 덥다. 더위도 결코 호락호락 물러가지 않겠다는 자세다.

 

오래 된 시집을 읽었다. 민영의 "엉겅퀴꽃"

오래 된 이라는 말이 들어맞는지는 모르지만 벌써 25년 전의 시집이니, 오래 된 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강산이 두 번하고도 반이 바뀐 세월이고, 우리의 생활 모습은 너무도 많이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언제 샀을까? 예전에는 책을 사면 책의 밑에다 날짜를 써두던 습관이 있었는데... 내가 갖고 있는 책 중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책들은 2000년이 넘어서 산 책들이고, 2000년이 넘어서부터는 책에다 날짜를 써두지 않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어서.

적어도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내 곁에 남아 있는 책들도 있겠지만, 그 사이에 내 곁을 떠나가야 하는 책들도 있기에, 그 책들에 내 흔적을 문신 새기듯, 낙인 찍듯 남겨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날짜를 적지 않았다.

 

이 책은 날짜가 적혀 있다. 1997년 2월 27일.

 

무더위에 다시 꺼내 읽었는데, 내가 이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는 추위가 어느 정도 가시고, 이제 곧 봄이 올 때였단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위도 차츰 사라질 때... 이 시집은 추위가 사라질 때, 그리고 더위가 사라지려 할 때 다시 나에게 다가온 시집이구나. 이런 데서 새삼스러움을 느낀다.

 

아마도 나는 이 시집을 두 편의 시 때문에 샀으리라. 하나는 '수유리 하나'라는 시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해마다 봄이 되면 4.19가 되면 민영의 '수유리 하나'가 생각이 났고, 힘없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보면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가 생각이 났으니 좋은 시란 그시를 읽는 독자가 많다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콕 박혀 언제든지 다시 불려나오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영의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로 사회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다. 오히려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짧은 시편에 담아 다시 세상에 내보낸다. 시인이 시로써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더하려 하는 순간이다.

 

그는 이 시집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이들이 다 거리로 나가 막강한 힘을 지닌 압제의 무리와 몸으로 부딪칠 수도 없는 것이라면, 힘겨운 겨룸터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보태주고, 그들을 위해 기쁨과 슬픔의 노래라도 불러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자위해보기도 한다.

민영, 엉겅퀴꽃, 창작과비평사, 1987. 후기에서

 

그렇다. 시인이 천상의 고고함만을 노래할 수는 없다. 지상의 비루함도 시인에게는 노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이 노래하는 지상의 비루함으로 인해, 우리는 천상의 고고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직접 돌을 들지 않아도, 세상의 비루함을 파괴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분단의 슬픔, 가난의 슬픔, 무언가 이루지 못한 슬픔, 사회 모순의 슬픔 등등이 이 시집 속에, 짧은 시행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아마도 이 시집은 몇 년 뒤, 몇십 년 뒤에 읽으면 그 땐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의 과거가 잘 들어있다. 민주화되기 이전의 우리나라 모습이.

 

지금도 내 마음에 있는 시 두 편. '수유리 하나' 그리고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이 시들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우리는 아직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벗어나야 한다.

 

수유리 하나

 

한 늙은이의

더러운 욕망이

저토록 많은 꽃봉오리를

짓밟은 줄은 몰랐다.

 

 민영, 엉겅퀴꽃, 창작과비평사, 1987. 수유리 하나 전문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아들에게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 늘 약골이라 놀림받았다. / 큰 아이한테는 떼밀려 쓰러지고 / 힘센 아이한테는 얻어맞았다.

 

어떤 아이는 나에게 / 아버지 담배를 가져오라 시키고, / 어떤 아이는 나에게 / 엄마 돈을 훔쳐오라고 시켰다.

 

그럴 때마다 약골인 나는 /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갖다 주었다. / 떼밀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 얻어맞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 떼밀리고 얻어맞으며 지내야 하나? / 그래서 나는 약골들을 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 우리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다. / 얻어맞고 떼밀리며 살 수는 없다. / 어깨를 겨누고 힘을 모으자.

 

처음에 친구들은 주춤거렸다. / 비실대며 꽁무니빼는 아이도 있었다. / 일곱이 가고 셋이 남았다. /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약골이다. / 떼밀리고 얻어맞는 약골들이다. / 그러나, 약골도 뭉치면 힘이 커진다. / 가랑잎도 모이면 산이 된다.

 

한 마리의 개미는 짓밟히지만, / 열 마리가 모이면 지렁이도 움직이고 / 십만 마리가 덤벼들면쥐도 잡는다. / 백만 마리가 달려들면 어떻게 될까?

 

코끼리도 그 앞에서는 뼈만 남는다. / 떼밀리면 다시 일어나자! / 맞더라도 울지 말자! / 약골의 송곳 같은 가시를 보여주자!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 우리 나라도 약골이라 불렸다. / 왜놈들은 우리 겨레를 채찍질하고 / 나라 없는 노예라고 업신여겼다.

 

민영, 엉겅퀴꽃, 창작과비평사, 1987.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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