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실시했다. 일명 일제고사. 전국의 학생들을 똑같은 문제로 똑같은 시간에 풀도록한다고 하여 일제고사라고 하고, 이 시험이 과연 교육적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많은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교과부는 요지부동, 또다시 강행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 시험의 결과를 가지고 학교를 평가하기도 한다니... 이런 몰상식한 행위를 교과부에서 하니, 이 나라 교육이 파행으로 흐르는 일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 농어촌에 있는 작은 학교들을 또 통폐합한다고 하니... 슈마허의 말을 빌리지 않더러도 '작은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교육은 대규모로 대량생산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육을 책임진다는 교과부의 관료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정책들로 학생들의 심신을 피곤하게 하더니, 자살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또 일제히 정서행동발달검사란 것을 해서, 위험군, 주의군, 관심군 등등으로 학생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정서행동이 이런 교육현실에서 정상적일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미 교육에 대해서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은 외계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게 해야 하나?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면 안되고,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만들어갈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실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하지 않나?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청소년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교육이 더 잘 이루어지게 하는데 뇌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뇌에 대한 지식을 교육과 접목시켰을 때, 우리는 좀더 효율적인 교육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효율적이란 말은 성적을 올린다거나, 학생들을 더 잘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학생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그에 따라 학생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함께 어울림은 배려와 공생의 토대가 될테니... 이러한 일들이 바로 교육의 목표 아니던가.

 

아직도 뇌에 대해서는 완전히 밝혀진 것이 없지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만 놓고 보아도 학생들, 또는 청소년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오히려 교육학에서 이러한 뇌과학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로, 뇌에 대한 이해는 교육에 도움이 많이 된다.

 

그런 단초를 이번 민들레 81호가 해주고 있다.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서,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그 때까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들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문제의식에서 이번 호는 뇌와 교육이라는 제목을 달았다고 본다. 아마도 교육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을 읽는다면 일제고사와 같은 짓은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폭력이나 왕따에 대한 문제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을 잡을 수 있을텐데... 공부는 학생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육에 관계된 어른들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른인 우리들이 잊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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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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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다. 왜 처음 만나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궁금했는데,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우리에게 처음 만나는 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면, 어떤 민주주의든 우리는 모두 처음 만난다고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는 이렇다고 정리할 어떤 특정한 매뉴얼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각 나라의 상황에 맞게, 각 사회의 특성에 맞게 그 때 그 때 정립이 된 정치 형태라는 생각을 이 책이 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민주주의는 우리들이 모두 처음 만날 수밖에 없고, 모든 민주주의는 그 때 그 때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를 보면 "인민의, 인민에 의한"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링컨의 말 중에서 인민을 위한이 빠져 있는 제목인데...

 

이 책의 제목처럼 이 책 전편을 통해 인민의, 인민에 의한 정치를 실현했던 사회를 고찰하고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또 잘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부터 시작하여 흔히 암흑시대로 알고 있는 중세시대에도 이러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던 도시들이 있었다는 얘기,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 미국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또 영국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고찰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어떤 연계성을 가지고, 이 단계에서 저 단계로 순차적으로 발전해가는 정치가 아니라, 각 나라의 상황과 그 시대의 상황에 맞춰서 나타나고 정립되고 있다는 점을 이런 나라들의 민주주의 발전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게다가 2차세계대전 이후의 민주주의와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진 민주주의, 아시아에서 이루어진 민주주의, 공산권의 붕괴로 일어난 민주주의까지 한 마디로 말하며 이 책은 전세계에서 이루어졌던 민주주의의 모습들을 망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의 한계까지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우리네 삶에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남아시아와 중국은 다루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와 일본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다. 동아시아의 끝에 있는 우리나라와 일본도 민주주의 역사를 다루는데 유용할 거라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우리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전체주의를 경험했고, 해방 후 잠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가 형식적인 민주주의 나라로 몇 십년을 지내게 된다. 여기에 4.19혁명으로 잠시 다시 민주주의를 경험했으나 곧 긴 독재정치로 빠져들고, 이를 87년 민주화투쟁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가 싶더니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루소의 말처럼 "의원들을 뽑는 선거 기간에만 자유롭"지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이 되어야 하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그러한가 생각해보게 해주는 책이다.

 

정당 정치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의 정당들은 저마다의 정강을 가지고 토론을 하고 합의를 보는 과정을 거치는지, 국민들은 선거 기간이 아니더라도 이들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에서 말한대로 소수 엘리트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대선인데, 이 때도 우리는 선거 기간에만 주인 행세를 할 것인지,아니면 앞으로도 계속 주인으로서 존재할 것인지, 그건 정치인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역사적으로 이루어져 온 민주주의를 다룸으로써 이 책은 앞으로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보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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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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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비록 불완전하기는 해도 인간 삶의 커다란 딜레마, 즉 어떻게 해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개인적으로도 번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22쪽

복잡한 아테네 민주제도의 중추적인 요소는 개방성이었다.-28쪽

아테네 민주주의는 ... 사회의 내부 갈등을 평의회와 민회에서 토론하며 만천하에 공개하고 또 그런 토론의 장에 묶어두는 정치였다.-47쪽

그리스 사상가들이 가장 고민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유와 질서를 동시에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48쪽

투키티데스 ...정치가 인간의 갈등을 인식하고 해소해주지 못할 때, 그로 말미암아 전쟁과 압제가 펼쳐진다고 보았다.-52쪽

문제를 공론화해 저마다 이견을 표출하고 해소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본바탕-129쪽

행정부는 책임을 져야 하고, 핍박을 두려워 하지 않고 건강한 토론이 펼쳐져야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정부에 대한 반대 역시 국가 정치 과정의 충심어린 일부분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97쪽

루소의 말 재인용
영국인민이 자유인이라 여긴다면 자기기만일 뿐이다. 의원들을 뽑는 선거 기간에만 자유롭다. 선거가 끝나면 인민은 노예로 돌아간다. 아무런 가치도 없어지는 것이다.-234쪽

권력에 대한 접근성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영원한 숙제였다.-320쪽

역동적인 인간사회는 늘 누군가 권력을 거머쥘 기회를 제공하고, 일단 집권하면 그 권한을 놓지 않기 위해 애를 쓰기 마련이다. ... 민주주의는 사회의 권력 집단이 민주주의가 유리하다고 판단할 때만 살아남을 수 있다.-349쪽

민주주의 체제는 권력 접근성과 지도자들을 몰아낼 능력을 제공해야 할 뿐 아니라, 권력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372쪽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사법부, 입법부, 자유 언론 등의 제도와 강력한 시민사회가 정부의 권력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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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지음, 이동진 옮김 / 그린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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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곳. 그곳에는 신성이 넘치고 평화가 넘쳐야 한다. 인간의 뜻으로 건설되는 도시가 아니라, 신의 뜻에 의해 건설되는 도시이어야 한다.

 

그런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오히려 인간의 피로 점철된 도시, 그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성지로 받들고 있는 곳이지만, 그 때문에 서로가 싸울 수밖에 없었던 도시.

 

예루살렘에 관한 책을 읽으면 세계사를 읽는 기분이 든다. 세계의 역사가 이 도시에 축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 유대인들의 조상, 다윗이 이 도시를 신성한 곳으로 만들고, 정착한 이래로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신이 물려준 도시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도시가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유대국가가 멸망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을 잃어야 했다.

 

다음에 물려받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이들에게 예루살렘은 예수로 통하는 도시가 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기독교도들에게도 신성한 도시가 되고, 성령이 넘치는 도시가 된다. 이러한 도시를 다시 이슬람이 장악을 하게 된다.

 

이슬람에게는 예루살렘은 무함마드와 관련이 있는, 그가 하늘로 올라갈 때 들렀던 도시로 역시 신성한 도시가 된다. 다만, 그들에게는 이미 메카와 메디나가 있어, 예루살렘은 제3의 성지가 되지만, 이도 역사를 통해서 더욱 신성한 곳으로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잃은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은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어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하지 않고, 처음과 비슷해졌다면, 처음에는 겪지 않았던 일들을 겪은 다음에 돌아왔으므로, 더욱 현명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수천년 동안 반복되어 왔던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신성한 성지임에도 인간의 피가 자욱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한 편의 역사서를 읽는 듯한 기분, 그리고 한 도시를 둘러싼 세 종교의 각축전을 긴박하게 엮어내어 예루살렘의 역사가 어느 정도는 정리가 되는 책이다. 다만 2002년에 나온 책이라 그 후 십년의 이야기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의 역사를 아는데는 그 후 10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왜 지금도 그렇게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이 책은 도움이 된다.

 

인간에게 안식과 평화를 주는 종교... 그러한 종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곳, 예루살렘.... 그 곳이 하루라도 빨리 평화로 물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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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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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이 있을까? 정약용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실학자가 있을까? 아마도 박지원 정도... 서로 다른 길을 간 사람임에 틀림없는데... 왜 이들은 만나지 않았을까 했더니... 이 책을 읽고 만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의 길은 엄연히 달랐으므로...

 

박지원은 에둘러서 시대를 비껴갔다고 할 수 있다면, 정약용은 정면으로 시대를 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명문거족 출신으로 과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연암과, 과거 공부에 폐단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뜻을 펼치지 위해서는 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과거시험에 임하는 다산.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에 쓴소리를 하던 연암과 세상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던 다산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다른 세상에 살던 사람이었으리라. 다산의 집안이 어려웠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오해였다는 사실. 8대 옥당에 오른 집안, 이도 역시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이들은 당시 세를 잃은 남인 계열이었다는 사실이 정약용의 집안을 몰락한 집안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 싶었다. 몰락한 집안이 아니라, 정약용 아버지도 벼슬살이를 한 나름 명문 집안인데 말이다.

 

어쩌면 정약용의 삶을 정리하는데는 3부작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3부작이 아니라 2부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의 삶은 2부작이고, 나머지 생은 에필로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는 그가 벼슬살이를 하던 때, 이 때를 1부작이라고 한다면 두번째는 유배생활을 하던 때, 이 때가 2부작이다. 그리고 해배가 되어 자신의 고향에서 말년을 보낼 때 이는 인생의 3막이 아니라, 그냥 2막에 이어서 펼쳐지는 뒷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분량을 보아도 그렇고.

 

그렇다면 다산의 삶은 벼슬살이를 하던 젊은시절과 유배생활을 하던 중년의 나이에 절정을 맞이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삶도 이 시기에 걸쳐 있고...

 

그의 벼슬살이는 정조라는 임금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정조가 없었다면 다산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조의 후원하에 승승장구하던 다산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고 한다. 이를 아렌트의 용어로 하면 행위에 나아간 것이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정치에 참여하는 행위. 공적인 장에 나아가는 모습.

 

하지만 우리에게 다산이 다산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행위자로서의 다산이 아니라, 판단자로서의 다산이다. 행위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사유,의지의 단계를 지나 판단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자신의 정치 행위를 사유하고, 판단하게 되고, 세상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시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유배자로서의 다산이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실학자로서의 다산이다.

 

한 걸음 물러나 있을 때, 무언가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눈이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르익은 사상을 책으로 펴내는 일이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해내는 일이다. 이러한 정리는 유배생활 18년이란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유배생활을 통해 농익은 그의 사상이, 그의 책으로 엮어지고, 이 책들이 우리를 다산에게 이끌고 있다. 운명이란 때론 엉뚱한 방향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게 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다산의 경우가, 그의 형인 손암 정약전의 경우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정조가 더 오래 살아서 이들이 정치의 영역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과 같은 그들의 저서를 만나보지 못했으리라. 이렇게 우연한 방향에서 이루어진 그의 유배생활이 지금껏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자양분으로 남아있으니, 이는 그를 행위에서 판단으로 이끈 운명의 바람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다산의 생애를 이토록 자세하게 치열하게 따라가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 부분에서 김남주의 시가 나오는데, 이 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고, 곳곳에 나오는 다산의 글과 시들이 우리를 다산에게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산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다산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학문이라는 사실. 현실로 돌아와야만 다산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맑스가 했다는 말. 세상을 해석하기만 해서는 안되고,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다산이 행위에서 판단으로 나아갔다고 했지만, 이는 순차적인 개념이 아니고, 판단을 통한 행위로 다시 되돌아와야지만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혼돈의 시대. 솔직히 지금, 다산과 같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다산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불러내어야 하지 않나?

아니, 다산을 그리워만 하지 말고, 우리가 다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우리에게 우리 모두가 다산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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