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는가 -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 이야기
게세코 폰 뤼프케 & 페터 에를렌바인 엮음, 김시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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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루쉰이 생각났다. 그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품고 살았던 사람.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 묵묵히 밀고 나갔던 사람. 그의 말이라고 하는 이 말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 길이 처음부터 길이 아니듯이, 희망도 처음부터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절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때 나타나게 된다. 그것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쉬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제목이 "희망을 찾는가"다. 물음표가 찍혀 있지 않다. 그래서 "너 희망을 찾고 있니? 그렇다면 우릴를 봐."라고 하는 듯하다. 너는 지금 이 시대에 절망하여 좌절에 빠져 있지 않고, 이 시대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그것은 희망을 찾는 것이다. 희망을 찾는다면, 이미 그 희망을 찾아 떠난 사람들의 길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가라. 그렇다면 그 길은 이제 갓 난 작은 길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는 큰길이 될 것이라고 하는 듯하다.

 

대안 노벨상, 바른생활상이라고 한다. 처음, 이 책에서 바른생활상이 본래는 노벨상으로 주어지길 바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윅스퀼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에게 노벨상 중에서 생태학상이라는 하나의 상을 더 만들어 주면, 자신이 그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벨상 위원회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더이상 망설이면 안된다고 생각한 윅스퀼은 대안 노벨상인 바른생활상을 만들어 수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벌써 몇 십년이 지난 얘기다. 이 상 덕택에 바른생활상을 탄 사람들의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해 희망의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는 노벨상을 탄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만큼 주류 세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들의 활동이 그냥 묻혀지지는 않았다. 이것이 윅스퀼이 상을 만들어 수여한 이유이기도 하다. 상을 받은 사람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의 활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연스레 끌게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길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만든 길들이 서로 연결이 되면 우리는 더 많은 희망의 길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희망의 길들을 연결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해주고 있어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세상을 한 번에 바꿀 수 없다면 천천히 바꾸면 된다. 우공이산이라는 어려운 말을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속담 중에서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 여리고 여린 물방울들이 한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계속 바위에 떨어진다면 결코 뚫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바위에도 어느 순간 구멍이 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역할이다.

 

루쉰이 말한 길도 이와 같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시작을 하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희망이 현실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할 수 있다는, 아니 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사례들을 많이 접해야 한다. 긍정적인 사례들을 자꾸 접하다보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사상가인 그람시는 전면전인 기동전보다는 국지전인 진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의 참호를 파고, 그 참호를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넓혀가는 진지전. 진지전은 빠른 시간 내에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길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 진지들이 서로 연결이 될 때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고,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순간, 희망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지금 세상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말자. 희망은 있다. 그것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 그래서 제목이 "희망을 찾는가"다. 희망을 찾는다면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시작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희망을 찾는다면, 희망을 찾아 이미 길을 내기 시작한 사람들의 뒤를 따르면 된다. 이들의 뒤를 무작정 따르기만 하란 얘기가 아니다. 이들처럼 길을 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들의 뒤를 좇기만 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 맞게 길을 내는 일, 그것이 바로 뒤를 좇는 일이다. 그것이 희망을 찾는 일이다.

 

희망을 찾는가. 보라. 이미 희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을 보면 희망은 늘 우리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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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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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전 손택의 유고작품집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그가 세상을 뜬 뒤, 그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기에 주제가 일관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역자 후기에 나오듯이 오히려 손택의 모든 것을 하나의 책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학에 대한 비평이 1부에, 사회에 대한 발언이 2부에, 그리고 각종 연설이 3부에 실려 있다. 손택의 다양한 삶만큼이나 다양한 글들이 한 책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다양성이 저마다 문을 닫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양성이 어떤 일관성으로 묶여 있다.

 

사람이 다양한 삶을 살지만 그를 누구라고 지칭할 수 있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 책들은 문학비평이든, 사회비평이든, 연설이든 손택의 삶을 지탱해주는 요소, 즉 진실을 추구하는 그의 삶의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1부에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인식하는 것보다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더 큰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편이 쉬운 것이다. 특히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제공하는 집단의 가치와 충돌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113쪽)는 말처럼, 우리도 지금 진실을 가려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런 가치를 삶의 가치로 삼은 손택은 어떤 분야에서든 이러한 진실을 추구한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는 당장의 성공을 거둘 수는 없을지라도, 이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한 행동은 "연대의 몸짓으로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원칙 있는 사람들,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이곳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251쪽)라고 하여 인간의 공동체에서 그 옳음은 사라지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말해 줄 수 있고", "언어, 서사를 가지고 형상화된 기준을 제공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전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아닌, 우리의 것이 아닌 사람들을 우해 슬퍼할 능력을 길러 준다"(269쪽)고 한다. 결국 손택에게 아니, 우리에게도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주는 여권"(274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손택의 이 책은 단지 문학이 어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문학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세상을 깊이 있게 보고,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삶, 그러한 삶이 진정 옳은 삶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손택의 모습이 이 책에서 절절히 묻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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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볼테르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떤 곳에서는 볼테르가 한 말이 아니라, 볼테르에 관한 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어느 것이든, 사상으로 인해 탄압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음에는 확실하다.

 

사상은 찬반의 문제를 떠나서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하고, 또한 보장받아야 한다. 사상이 없는 사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자신의 생각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고, 또한 사상을 견지하지 않고 시류에 따라가기만 할테니 말이다. 그런 정치인을 둔 나라, 참 우습지 않겠는가?

 

정치란 사상과 사상이, 정책과 정책이 맞부딪치고, 이를 국민들에게 알리며, 국민들은 이러한 부딪침 속에서 자신들을 대변한다고 하는 정치인, 또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종북이 뭐니 하면서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국회의원들이 나서는 꼴은 참...

 

종북이라면, 사상으로 이겨내면 되지 않나, 그렇게 자신이 없나. 사상의 자유가 보장이 되어 있는 나라에서... 좋다. 그들이 종북이라고 하면 그들을 지지한 국민들을 종북이라고 몰아부치는 셈이 아닌가?

 

모든 것이 개방되어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시대에, 국민을 아직도 미개한 깨우쳐야 할 대상으로 알고 있는지...

 

갑자기 독일의 어느 목사의 말이라는 글이 생각났다.

 

독일의 어느 목사의 글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갈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므로.

그들이 동성애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므로.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잡아갈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땐, 나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 우리들이 이러한 사상검증을 묵과했을 때, 그 칼은 우리를 향할 수도 있단 사실. 이걸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사상검증 운운한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우리 앞에 당당히 나서는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음으로.

 

이런 일로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있었단 사실...사상이 다르단 이유로 목숨을 잃어야 했던 사람. 그들에 대한 이야기. 소설. 김원일의 "푸른 혼"

 

독재자, 정치인, 법조인, 그리고 그를 묵인했던 국민들이 모두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칼을 국민들이 받았고. 지금은 다시 사법부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십자가 밟게 해 천주교도 골라냈듯

종북 의원, 30여명 검증 가려내야" - 한겨레 2012년 6월 9일 자 1면

 

이 제목을 보는 순간, 햐, 참... 참... 참.... 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최근에 읽었던 "궁녀"란 책에서 궁녀를 궁에 들일 때 하는 처녀감별법이 생각났다. 희극이다. 희극.

궁녀들이 처녀인지 아닌지를 앵무새의 피를 손목에 묻혀 손목에 묻으면 처녀, 묻지 않고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했다던데... 이거야 원... 이보다 더한 사상검증일 수 있으니...

 

우리가 바라는 정치인들은 이러한 사상검증에 몰두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국민을 위할까를 고민하는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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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림의 비교
윤호병 지음 / EJONG(이종문화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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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림의 비교라는 제목의 책이지만, 문학 중에서도 시와 그림의 비교이다. 단순한 비교라기보다는, 먼저 존재한 그림에 대해서 시인 자신이 시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비교문학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그림과 시는 예로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고, 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미 존재한 미술 작품들을 통해서 시인이 어떻게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대표적인 화가로 고흐, 샤갈, 뭉크, 피카소 그리고 우리나라의 김정희가 있다. 김정희를 제외하고는 다들 그림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고, 이들의 그림은 강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그림들에서 영감을 얻는 사람이 많을텐데, 그 중에서도 더욱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들은 일반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으리라.

 

고흐의 삶과 그림을 통해 자신을 보고, 샤갈의 초현실주의를 통해서 세상을 파악하며, 뭉크의 그림을 통해서 인간의 절망을 이해하고자 하고, 피카소를 통해서 개인의 삶에서 사회적 삶으로의 전이를 파악할 수 있다. 이들 그림을 통해 표현되는 내용을 시라는 다른 예술 장르를 통해 다른 표현기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미술과 시의 비교라기보다는 그림의 시적 변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더욱 친숙할 수도 있다. 물론 앞의 화가들도 우리에게 친숙하고, 여기에 이 책에서는 그림들도 실어주고 있어 더욱 이해하기 쉽고, 친숙하게 다가오지만, 김정희의 세한도는 우리네의 정서에 어울리는 너무도 유명한 작품 아니던가.

 

그리고 우리는 인간 삶의 자세를 이 세한도에서 느끼지 않았던가. 그런 세한도를 시적 대상으로 삼은 시인이 30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세한도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세한도를 통해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또한 그 시인들이 쓴 시를 통해서 우리들도 나와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보게 되고.

 

이 책을 읽으면서 굳이 그림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아도 그림과 시가 영향을 주고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처럼 명확하게 화가의 작품이나 화가를 언급하지 않은 작품과 그림을 비교하는 일도 의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지용의 장수산을 읽으면, 자연스레 어떤 산수화가 떠오르지 않는가. 문학과 그림의 비교연구는 이러한 데까지 나아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림을 보는 재미, 그 그림에 대한, 그 그림을 통한 시를 읽는 재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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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중학교 혁신학교 도전기 - 우리는 대화한다. 고로 우리는 점프한다. 맘에드림 혁신학교 이야기 4
김삼진 외 지음 / 맘에드림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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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이 말이 와닿는다. 혁신학교가 한두 개도 아니고, 또한 성공한 학교도 있고 실패한 학교도 있을텐데, 자꾸 혁신학교에 관한 책을 읽는 이유는 앞의 말과 같은 이유다. 무언가 자꾸 성공한 사례에 대해서 읽고 알고 있다면, 교육의 변화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기 때문이다. 경기를 할 때도 자꾸 이겨 버릇해야 한다고 한다. 져 버릇하면 지는 일이 습관이 돼 이기도 있다가도 불안에 떤다고 한다. 이러다가도 우리 또 지지 않나 하는. 그러나 이겨 버릇한 팀은 지고 있어도 자신감이 있다. 지금은 우리가 뒤져 있지만 조만간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 그 자신감이 실제로 경기에서 이기게도 한다.

 

혁신학교도 마찬가지다. 실패한 사례를 두고 왜 실패했는가를 찾기보다는 성공한 사례를 두고 어떻게 해서 성공했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런 성공 사례 하나하나에서 좋은 점들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비교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하다보면 어느새 자신감이 붙고, 그 자신감이 성공으로 다가가게 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덕양중학교도 마찬가지다. 이들도 한 번에 서두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갔다. 그래서 한 번에 배움의 공동체로 가지 않고, 이 학교의 실정에 맞게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도달한 수업의 형태가 배움의 공동체 수업이다. 그렇다고 이런 형식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각 수업의 내용에 맞게 그 때 그 때 교사와 학생의 관계 속에서 수업의 형태를 바꿔가게 된다. 이런 점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무언가 하나를 정해놓고 우리 모두 이렇게만 하자고 하지 않는 자세. 서로가 합의를 볼 때까지 끝까지 설득을 하며 시간을 두고 합의해 가는 과정.

 

배려

 

덕양중학교를 비롯한 혁신학교에서 중심을 이루는 낱말이 배려다. 남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면 나를 받쳐주고 있는 'ㅁ'이 있다. 이 'ㅁ'이 나를 받쳐주고 있는데, 나만 홀로 커지면 'ㅁ'이 나를 받쳐주지 못한다. 내가 크기 위해서는 'ㅁ'역시 커야 한다. 이게 덕양중학교에서 바라고 있는 학교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남은 또다른 나라는 인식을 할 수 있게 학교가 돌아가는 모습, 그것이 혁신학교다.

 

성찰

 

이러한 배려가 몸에 체화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없다. 나를 바라볼 수 있는 힘, 지금 학생들에게 가장 부족한 힘이다. 사실 자기를 바라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 여유를 찾아주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과정, 그것이 혁신학교다.

 

여기에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바로 이 덕양중학교에 딱 맞는 말이다. 사실 혁신학교들이 추구하는 교육의 목표이기도 하고. 그래서 잘하는 아이가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나머지 아이들은 배우는 관계가 아닌, 서로 배우는 관계. 그것도 학생은 배우고 교사는 가르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교사도 학생들을 통하여 배우는 관계, 이것이 바로 혁신학교의 모습이다. 이것은 바로 배려와 성찰이 이루어진 모습이다.

 

리더의 힘

 

교장은 학교의 리더다. 그냥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사들을 이끌고 학부모의 협력을 이끌어내며, 또한 지역사회와도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한 교장을 통해 교사들도 학부모들도 그리고 지역사회가 변하게 된다. 이 변화는 학생들의 변화를 자연스레 이끌어내게 된다. 덕양중학교의 성공은 교장의 변화에서 시작한다. 군림하는 사람이 아닌 함께 하는 리더로서의 교장으로부터 혁신학교는 시작한다.

 

이렇게 덕양중학교와 같은 성공사례들이 자꾸 알려져야 한다. 알려져야 할 수 있단 생각을 하고, 우리 교육이 변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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