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 답이다 -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
리처드 윌킨슨 & 케이트 피킷 지음, 전재웅 옮김 / 이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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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평등이 우선이냐 자유가 우선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술을 하게 한 적이 있었다. 자유를 우선시 하다보면 평등이 뒤로 처지고, 평등을 전면에 내세우면 자유가 뒤로 처지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이 동일한 선상에서 논의가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듯이, 자유와 평등도 동일한 선상에서 논의될 사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평등하다고 해서 자유를 침해받지 않고, 자유롭다고 해서 평등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는 평등을 추구하면 무슨 공산주의냐? 하는 핀잔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평등을 우선 주장하면 무언가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대. 그래서 평등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고, 이 개인의 자유가 돈을 벌 자유, 돈을 쓸 자유라는 이상한 개인주의로, 이기주의로 흘러버리고 말기도 했다.

 

그런데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봐도, 다른 학자가 쓴 "이타적 유전자"를 읽어봐도, 이기적이라는 말과 이타적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이기적이기 위해서는 남에게 잘해줄 수밖에 없다는 얘기, 내가 남에게 잘못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좋지 않음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이타주의, 진정한 이기주의는 평등이라는 말하고도 통한다. 평등은 우리가 똑같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느 정도 평준화를 이룬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좀더 평등한 사회로 가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을 보면 평등으로 가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더 많은 갈등과 더 많은 질병과 더 많은 폭력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통계자료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평등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면 사회 구성원들간에 신뢰 관계가 형성이 되며, 이러한 신뢰 관계는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는 모습으로, 조금더 평등한 사회로 가게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는 개인의 자유가 극대화되는 사회가 아니라, 평등이 이루어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사회이다. 그러한 평등 사회는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헌법을 보면 평등에 관한 조항이 자유에 관한 조항보다 앞에 나온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평등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실천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평등,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행복하게 살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다. 이것은 바로 이타적 인간의 모습이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홉스의 말보다는 상호 협동으로 연대를 이루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크로포트킨의 말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이 책에서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부록으로 우리나라의 불평등지수를 좀 실어줬으면 하는데, 도대체 불평등 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사회문제가 심각하다는 유의미한 통계자료를 제시했는데, 우리나라의 평등지수가 어느 정도 알 수 없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답을 고민하는데 좀 부족하든 생각이 든다. 외국의 자료를 잘 제시했기에 여기에 우리나라의 자료를 제시했다면 그 자료를 가지고 우리가 우리나라의 모습을 유추하고, 또한 좀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는데 어떤 청사진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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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사람들은 어린이날 하면 소파 방정환을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완전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어린이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인식하게끔 한 사람이 방정환이니 말이다. 거기다 어린이날이 있게 한 사람 아니던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듯이, 어린이는 우리나라의 미래다. 아니 우리들의 미래다. 그런 어린이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소파 방정환 이후로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어린이가 정말 참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한 분이 이오덕 선생이다.

 

남에게 보이는 글쓰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글쓰기가 진정 좋은 글쓰기라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부단히 알리려고 했던 분.

 

그리고 본인도 역시 어린이들이 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현장에서도 노력을 다했던 분. 방정환과 이오덕 같은 분들이 있어서 어린이도 온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 화창한 오월, 아이들의 싱그러운 웃음을, 단지 어린이날만이 아니라, 계속, 그들의 삶을 통해 유지해 나갈 수 있게 어른인 우리들은 우리들의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방정환의 글이나 이오덕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아이들을 지금처럼 학원으로 학원으로 내몰지는 않을터다. 그래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원이 아니라, 바로 함께 있는 부모며, 동네 어른이며, 친구들이며, 그리고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다.

 

오월 이 아이들의 웃음이, 멈추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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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수잔 손택 지음, 배정희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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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이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는 사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손택이 나름대로 앨리스를 분석한 책이구나 했는데... 아니다. 이건 희곡이다. 연극으로 보면 더 좋을. 그러나 희곡도 읽을 수 있는 문학 작품 중 하나 아니겠는가? 그리고 앨리스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희곡이라니. 윌리엄 제임스, 헨리 제임스는 들어봤어도 앨리스 제임스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긴 에밀리 디킨슨도 당대 보다는 나중에 더 유명해진 시인이 아니던가. 마찬가지로 앨리스 제임스도 무언가를 이루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사람이겠지란 생각을 했다.

 

영어 제목이 침대의 앨리스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만큼 이 작품의 배경은 침대에 누워있는 앨리스이다. 앨리스는 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침대에 매여 있다는 사실, 자신의 삶이 영혼은 깨어있으나 몸은 매여 있는 상태라는 의미 아니겠는가. 즉, 깨어나지 않는 영혼이라는 제목보다는 영혼은 깨어났으나 몸이 움직일 수 없는, 현실적인 제약을 받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여성이라는 한계가 얼마나 심한 굴레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이 희곡에서는 앨리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의식의 왜곡 상태에 빠진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여성이 어떤 일을 할 때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 취급을 받았음을 의미하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외쳤는데, 이 작품 속의 앨리스는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밖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침대에 매여 있는 상태, 결코 자신을 이해받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앨리스의 구속 상태도 빈곤층이라고 할 수 있는 도둑에 비하면 사치라는 생각이 들게 작품의 후반부에 도둑이 나와 작품에 살을 보태고 있지만, 여성으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서 이 작품이 이야기하려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여성들이 많이 해방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붙던 '여류'라는 말이 사라졌고, 또한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발언권을 얻었고, 21세기는 여성주의의 세기라고 할 정도로, 우리 인류는 여성성으로 회귀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러한 여성에 대한 역사적인 흐름을 인식하고 이 희곡을 읽는다면 조금은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이런 희곡은 이해하기 힘들다. 도대체 작가가 무엇을 의미하려고 했는지, 우리는 작가의 말이나 해설을 통해 조금 맛볼 뿐이다. 아직은 문화적 소양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더라도, 참 어렵다. 읽기엔 수월하지만, 이를 마음이 받아들이기엔 힘들다. 그런 작품이다.  이상한 나라로 간 앨리스는 현실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이상한 나라에서 겪은 일들이 이 작품 앨리스의 생각과 어느 지점에서 맞닿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지만, 어렵다. 제대로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그래도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일은 남에게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 앨리스는 침대를 박차고 나와 현실에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 그런 사실은 우리가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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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스이카 놀 청소년문학 4
하야시 미키 지음, 김은희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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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 왕따돌림이라고 해야 하나. 종류가 여러가지라고 하는데, 왕따라는 말에는 그냥 자기들 집단에 끼워주지 않는다는 의미보다는, 집단괴롭힘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들어있다고 봐야 한다. 단지 무시가 아니라, 언어로, 행동으로 괴롭히는 행위, 그것이 왕따이다.

 

몇 년 전에 왕따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이지메란 이름으로 먼저 시작된 그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왕따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사회가 불안정해졌을 때 더욱 기승을 부렸다고 할 수 있다.

 

집단 생활을 하다보면 적응을 못하는 사람도 있고, 또 자신과 다른 사람도 있지만, 이 왕따는 이러한 다름을 모자람으로, 모자람을 괴롭힘으로 바꾸는데서 문제가 생긴다. 그냥 그 사람은 저래하고 말면 될 일을, 저 것이 왜 저래하면서 사사건건 그 사람 일에 간섭을 하고, 또 괴롭히기 시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왕따이다. 예전에 집단에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의 차원하고는 비교가 되지 못하는 폭력, 그 자체가 바로 왕따이다.

 

그 때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라는 왕따를 겪다가 야쿠자의 부인으로 살다가 변호사로 다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와 많이 읽혔고, 왕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그 책의 지은이는 우리나라에 와서 강연도 하고 그랬었다.

 

그렇다고 왕따 문제가 해결이 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최근에 다시 학교 폭력 문제가 불거지고,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학생들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우리나라 소설가인 김려령 씨가 "우아한 거짓말"이라는 소설을 써서 다시 한 먼 왕따 문제를 거론하였다. 왕따가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나는 아냐라고 하는 사람들, 그들 자신도 얼마나 왕따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 소설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이후에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우리가 하는 말들이, 행동이 우아한 거짓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그럼에도 왕따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폭력 멈춰!"라는 책까지 나오고 학교에서도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왕따가 단지 학교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직장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학창시절에 왕따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묻혀있는 상태에 불과하다고 해야 한다.

 

일본을 배경으로, 그것도 열네 살의 나이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지은이의 말을 보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보면 된다. 왕따 당하는 친구를 도와주다 거꾸로 자신이 왕따가 되고,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 주인공이, 자신의 영혼이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증오로 가득찬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러한 극단적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는 얘기,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는 얘기, 그리고 자신의 그런 행동이 과연 남이 자신에게 했을 때 자신이 좋아할 만한 행동인지 생각해 보라는 그런 얘기들을 이 소설에서 얻을 수가 있다. 아마도 왕따 가해자나 피해자나 읽으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왕따, 해결은 간단하다. 너무도 간단해서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 단순함, 간담함에 사람살이의 진리가 있는데, 그러한 능력,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교육을 하는데, 교육 현장에서 왕따가 만들어지는 역설이라니...

 

역지사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닐 수만 있다면 왕따는 생겨나지 않을텐데... 이런 마음가짐을 지니려면, 어떠한 교육이 필요할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끝없는 질문을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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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버린 나라 -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
아다치 리키야 지음, 설배환 옮김 / 검둥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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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군대를 버린 나라라는 제목보다는 군대를 잊은 나라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이 책의 후기에 나와 있다. 군대를 단지 버린 것에서 끝나지 않고, 군대 자체를 잊은 나라라고 하는 편이 좋다는 얘기다. 군대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고, 또한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었으며, 아직도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군대를 없앤 나라라니 하고 말이다.

 

그러나 군대가 과연 나라를 지켜줄까.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라는 질문을 하기도 해야 한다. 이제는. 오히려 군대로 인해 군비경쟁이 더 일어나고, 군대로 인해 갈등이 더 심해지며, 상존하는 전쟁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꽃다운 청춘에 군대라는 곳에서 2년여를 보내고, 자신의 젊음을 불태우는데, 그 군대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또한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군대를 이 작은 땅덩어리에 보유하고 있음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력을 낭비하고 있는가.

 

최근에는 북한의 핵실험이 이슈가 되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북한 전역을 사정거리에 두는 미사일을 개발해야 한다고 하는 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군대를 없애고도 오히려 평화를 더 잘 유지하고 있는 코스타리카는 우리가 공부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단지 군대만을 없애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권과 환경과 생태, 민주주의가 하나로 어우러져야지만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물론 코스타리카란 나라도 이를 완전하게 실현하고 있지는 못하며, 이들도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그 문제를 회피하려고 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기에 평화선진국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군대는 단지,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만 생각할 대상이 아니다. 군대보다도 국가의 안보를 더 잘 유지시켜주는 제도나 방법이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각 나라에서 군대가 없어졌을 경우, 우리는 전쟁 위험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군대가 없으면 그게 나라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에게 이 코스타리카의 이야기는 대답이 되어 줄 수 있다.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를 이룰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지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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