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창비시선 341
이시영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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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제목을 보고 골랐다. 그렇게 말해도 된다. 제목,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는 용산 참사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시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내가 알던 이시영이란 시인은 짧은 시들을 쓰려고 노력했던 시인이었는데, 이 시를 어디에선가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는, 짧은 시가 아니라 쉬임없이 길게 주욱 써내려간 산문시였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앞에서 시인이 어떻게 감정을 절제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정제된 언어로, 짧게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오로지 마음 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만이 있을 뿐이고, 그 탄식이 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탄식으로 모든 감정을 대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그 고통스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내야 하나? 시인은 그 감정을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마치 짧은 영화를 보여주듯이 그 날의 일들을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감정을 울리기보다는 먼저, 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상을 통해 감정을 울린다. 잊을 수 없는,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일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수단으로만 보고만 현실. 여기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시로 많이 나오고 있다. '조사받다가 남산 수사관들에게서 우연히 들은 말'에서는 고 문익환 목사가 등장하고 있으며, '금강에서'라는 시에서는 4대강 이야기를 하고 있고, '아수라'라는 시에서는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가축들을 생매장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시론'에서는 서정주와 이용악, 오장환이 등장하고 있다. 그밖에도 많은 사건들이 시에 등장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 촛불시위 때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 데레사 수녀, 권정생 선생, 어린이 노동 등등.

 

이런 시들은 시가지니고 있는 함축성이나 상징성보다는 그냥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들을 시라는 형식을 통하여 전달을 해주고 있다. 그래서 읽기에 편하다. 읽으면서 그 때 그 일들을 떠올리고, 우리들의 삶의 자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하나의 사건이 단지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우리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주게 만드는 일, 그 일을 바로 이 시집에서 하고 있다.

 

여기에 이시영 특유의 짧은 시들이 있다. 이들이 서로 비슷한 시들끼리 하나의 장으로 묶이지 않고, 각 장에서 서로 섞여 있다. 짧은 시를 읽으면서 시의 함축성, 상징성 등을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기도 하고, 곧이어 나오는 이야기가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시와 사회를 생각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난해하지 않아서 좋다. 너무도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한 편의 시를 이해하는데, 절망에 빠져들게 하는 시들이 적어도 이 시집에는 없다. 짧다고 하는 시들도 무슨 선문답처럼 먼 나라 이야기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 짧은 구절에 감정이 오롯이 실려 있다.

 

내 마음에 드는 짧은 시. 이렇다. 아침이 오다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는 시다.

 

아침이 오다

 

방금 참새가 앉았다 날아간 목련나무 가지가 바르르 떨린다

잠시 후 닿아본 적 없는 우주의 따스한 빛이 거기에 머문다

아침 풍경이다. 따스하다. 또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이렇게 짧은 시들은 마음을 울리게, 긴 시들은 사건을 생각하며 내 삶을 생각하게 다가온다.

 

시를 읽자. 시를 읽자!고 많이 하는데, 막상 어떤 시를 읽어야 할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럴 때 먼저 이런 시집을 읽자.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그 친숙함 속에서 삶의 방향성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시들.

 

결코 마음이 편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시집의 122쪽에 있는 '직진'이란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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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5호를 읽다.

 

특집이 "법원의 권위를 기각합니다"다.

 

법원이 과연 인권을 보호하는 곳으로 존재하는가,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사실, 법원이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법원은 되도록이면 가지 말아야 할 곳, 어떻게든 피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지금 법원과 관련된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법원에 대한 불신도 높아진 상태.

 

그렇다고 법원을 없앨 수도 없는 일이고.

 

통제를 받지 않는, 견제를 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으니, 법원 역시 국민에게 통제되어야 함을 인지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대법원 앞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서 있다고 한다. 사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기에 정말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있다고 하니,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믿을란다.

 

그 정의의 여신상이 서양에서는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고 하는데ㅡ 우리나라에서는 칼이 너무 살벌하다고 생각했는지,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고, 눈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째 이상하다. 눈을 가렸다는 얘기는 보기보다는 듣기에 집중하겠단 얘기일텐데, 본다는 행위가 이미 선입견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면, 눈을 질끈 감는 행위는 선입견에 빠지지 않겠다는 얘기가 되는데, 눈 가리개를 벗겨 버렸다. 지엄한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감으면 안되는가 보다.

 

게다가 칼이 아니라, 이 칼은 냉철한 판단을 의미할텐데, 칼 대신 법전이다. 자고로 법전이란 글로 이루어져 있고, 글이란 배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었으니, 우리나라 법정에서 공판중심주의에 입각하여 말로 재판을 이끌어가고 있는 모습과도 맞지 않는다.

 

글을 모르면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인데, 어째서 정의의 여신은 법전을 끼고, 두 눈을 뜨고 있단 말인지. 아는 자들, 이들은 주로 힘센 자들이기 마련이다. 물론 아는 자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층위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모습을 이미 정의의 여신상에서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지.

 

이번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5호 중에 특집 글들을 읽고, 이 정의의 여신상이 생각이 났다. 이미 정의의 여신상에서 법의 편파성이 드러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잡스러운 생각이 말이다.

 

 

다른 글들도 역시 인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문제들을 인권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으니,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데 이 책만큼 좋은 책은 없을 거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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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난 지 일년이 지났다.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하기도 했는데...

 

단지 추모행사로 끝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인류가 초래한 재앙을 인류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원자력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에 들어가야 한다.

 

옳다고 생각한다면 실행하라는 말. 결과를 생각하기보다는 옳음을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절인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이 때가 기회라고 한다. 원자력을 확장할 수 있다. 원자력 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세상에 남이 힘들어할 때 남을 위로해주고, 남이 안되었을 때 왜 안 되었을까를 생각하는 타산지석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이 때가 기회라니, 위기가 기회라는 말을 이렇 때 쓰다니.

 

게다가 얼마전엔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에서 전원장치가 멈추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하지 않는가. 그 사고가 무려 20분이나 지속이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감추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우리는 일본이 그렇게 원자력 사고로 고생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단 말인가.

 

이렇게 배울 수 있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단 말인가. 답답한 노릇이다.

 

벌써 몇 호째 녹색평론에서 원자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꾸준히 거의 일년간, 아니 그 전부터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으니, 벌써 십년이 넘는 기간 동안 원자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데, 도대체 귀들이 있는지 없는지 듣지를 않는다. 그 답답함. 녹색평론의 글들이 꼭 민들레 씨앗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도 무시하고, 오히려 귀찮아 한다. 그러나 이 민들레 씨앗들은 어느 새 자리를 잡아 노란 민들레를 피운다.

 

그 때 세상은 조금 환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민들레에 주목한다. 녹색평론도 그렇다.

 

말3


땅에 뿌릴 두고

우리 이 자리에 있기만 해선

꽃을 피우지 못 해

산들바람에도

우린 날아가야 해

 

민들에 씨앗들이

작은 바람에도

제 존재를 허공에 날려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제가 뿌리 내릴 곳을 향해

 

다른 풀들이 있는 곳

다른 꽃들이 있는 곳

팍팍한 땅

전혀 꽃피울 수 없을 것 같은

보도블록 사이에도

씨앗들은 제 자릴 잡아

꽃을 피운다

 

꽃을 피워야 민들레 씨앗인 것을

꽃을 피워 세상을 바꾸는 씨앗인 것을

남들이 귀찮아 해도 

꽃을 피우기 위해 

씨앗은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뒤덮는다. 

노란 꽃이 필 때까지 

 

꽃이 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녹색평론의 글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곧 다가올 봄처럼 하얗게 하얗게 세상을 덮고, 또 노랗게 노랗게 세상을 비출 것이라고.

 

원자력이 단순히 방사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을 울렸다. 이번 호에 실린 송전선 문제에 관한 글. 왜 그리 슬프던지.

 

원자력과 전혀 상관없고, 전력과도 그다지 상관없이 살던 마을에 대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송전탑이 건설되어야 하고, 그 송전탑으로 인해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방사능은 사회적은 문제라도 일으키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런 송전탑 문제, 원자력 발전소로 인해 생기는 또다른 피해를 나는 알고나 있었던가 반성이 되고.

 

원자력이라는 거대 산업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반생태적이며, 반인간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슬프다. 이런 사실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도대체 귀 없는 정치가들은, 과학자들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으니.

 

그래도 민들레 씨앗처럼, 언젠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녹색평론을 읽는다. 읽는 행위 자체가 내 삶을 조금이라도 되돌아보게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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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공중부양 - 이외수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실전적 문장비법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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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도 나은 글과 못한 글이 있다. 어떤 글을 읽을 때는 머릿속에 쏙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을 울리기도 한다. 또 어떤 글은 머릿속에서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야 하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마음에서는 이런 글은 내가 왜 읽지 하며 순간순간 그 글을 덮어버리는 충동을 느끼게 한다.

 

나은 글, 좋은 글이라고 하는 글들은 어떻게 해야 쓸 수 있는지, 오랜 시간 작가로 생활해온 지은이가 그 비법을 알려주고 있다.

 

글쓰기 비법, 우리는 글쓰기 비법을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비급 수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무협지에서는 무공 비급을 손에 넣으면 당대 최고 고수가 되기에 그 비급을 손에 넣으려고 온갖 싸움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당대 고수는 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대결에서 지면 그 무공 비급을 넘어설 수 있는 무공 비급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거나, 우연히 고수를 만나 무공을 전수받게 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도대체 공존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계, 그것이 무협지의 세계다.

 

반면에 글쓰기의 세계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각 분야의 고수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같은 분야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어울린다. 또한 절대적인 비급이라는 것은 없다. 다들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잘 쓰는 사람일 뿐, 굳이 남과 비교를 하거나, 남과 대결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절대 무공비급이 하나이어야 한다면 글쓰기에 관한 비급은 여러 개, 아니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도 있다. 이 말은 누구나 글쓰기의 비급을 얻을 수 있단 말이다. 이 책은 그러한 글쓰기의 비급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많이 친숙한 이외수라는 작가가 쓴.

 

그래서 이 책에서 지은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글은 정신의 쌀이다"

 

쌀로 밥을 해먹든, 죽을 해먹든, 떡을 해먹든 그것은 쌀을 가진 사람의 자유다. 그에게 뭐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글도 자신이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할 것이 못된다. 다만 정신의 쌀이기에 정신을 축내는 글은 비난을 받아야 하고, 그런 글들은 없어지게 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글들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글쓰기의 비법은 단순하다. 우리의 정신,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해라. 이게 글쓰기의 비법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순차적으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살아있는 말(생어)을 써라로 시작을 한다. 물론 이 전에 단어들을 수집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숨을 쉬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고 보고, 숨을 쉰 다음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 자신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듯이 그 단어들을 활용할 때 살아 숨쉬는 말을 먼저 쓰는 연습을 하라고 한다. 살아 있는 말, 이는 바로 우리가 지닌 다섯 가지 감각을 자극하는 말을 쓰라는 얘기다. 한자어와 같은 관념적인 말보다는 우리의 눈, 코, 귀, 입, 촉감 등을 상기시키는 말을 쓰면 글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어에서 시작하여, 문장으로 나아가고, 문장에서 다시 창작으로,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명상의 장이라고 하여 정리를 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좋은 글은 무엇보다도 진실한 마음으로 쓴 글이다. 예전에 이오덕 선생이 살아있는 글쓰기를 주장했듯이, 이건 특별한 어떤 사람만의 주장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도 글쓰기를 잘하려면 가식, 욕심, 허영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결국 글은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쓰란 얘기다. 무언가를 화려하게 꾸밀 생각을 하지 말고,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을 쓰라는 얘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한다.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글쓰기는 장님이 외부의 사물을 온몸으로 감지하면서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행위와 흡사하다. (139쪽)"

 

많은 예시들을 제공해주고 있어, 단지 이론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글쓰기를 연습해 볼 수 있는 책이고, 또 글이 읽기에도 편해서 부담없이 읽을 수도 있다. 굳이 전문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글쓰기를 하고 살고 있으니, 이 책은 어느 특정한 집단에게만 유용한 책이 아니다.

 

글쓰기 하면 머리부터 내두르는 사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길게 쓸 수 있어 하면서 무언가를 쓰라고 하면 세 줄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 늘 쓰던 말만 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이 책을 반드시읽어야 한다.

 

정보화 시대에는 글을 쓰는 일이 없어져 이런 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보화 시대라도 자신의 생각을 말로도 표현하지만, 글로도 표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잘 표현할 수 있다면, 그건 어느 시대건 사람에게 유용한 재산이지 않을까.

 

덧말

 

표현법 중에 182-183쪽에 제유법과 대유법이 나왔는데, 보통 학교에서는 대유법이라고 통칭을 하고 이 책에서 이야기한 제유법은 그냥 대유법의 한 종류인 제유법, 그리고 이 책에서 이야기한 대유법을 대유법의 한 종류인 환유법이라고 한다.

즉 학교에서는 대유법이 큰 개념이고, 이 대유법에 제유법(사물의 일부로 전체를 대신)과 환유법(사물의 속성으로 전체를 대신)이 있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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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문학에 취하다 - 문학작품으로 본 옛 그림 감상법
고연희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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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문학이 함께 어우러진 책이다.

 

많은 그림들이 나오고, 또 그에 걸맞게 많은 시와 글들이 나온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어도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작품들임에 틀림이 없는데, 함께 있으니 더욱 빛이 난다.

 

그림과 문학이라?

 

그림이 문학에 취하는지, 문학이 그림에 취하는지, 둘이 이렇게 통할 수 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글을 읽기에도 수월하고, 굳이 우리가 한시를 읽어낼 힘이 없어도 한글로 번역이 잘 되어 있으며, 시의 의미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 오래 전 우리 그림들에 대한 설명도 잘 되어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도 보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다.

 

풍속화가로만 알았던 김홍도의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여태까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 글과 함께 그림을 보니 김정희의 모습이 느껴져서 감흥을 받았다고나 할까.

 

총 7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한 부분 한 부분이 다 읽을 만하고, 다 볼 만하다. 이렇게 그림을 선별하고, 글을 골라낸 저자의 노력이 고맙기도 한 책이다.

 

문학과 그림, 문학과 음악 모든 것이 함께 통할 수 있음을 다른 책에서 느꼈지만, 이 책만큼 그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은이의 이력에서도 보이듯이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이 함께 모여 더 큰 의미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친절한 설명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문학작품으로 본 옛그림 감상법이라는 글이 겉표지에 적혀 있다. 그림을 그림만으로 이해하지 말고, 시로도 또다른 글로도 이해할 수 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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