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니체 - 삶으로만 생을 타전하다 피닉스문예 6
오철수 지음 / 갈무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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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니체를 읽다. 오랜 시간이 걸리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 몰랐는데, 한 편 한 편의 시를 읽고, 또 니체의 글을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핑계일 뿐인데...

 

니체, 온몸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신을 거부하고, 신의 자리에 인간을 세웠을 때부터 그 자신은 자신의 삶을 온몸으로 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

 

그의 전집이 나온 상태에서, 또 니체를 공부하는 사람도 많은 상태에서, 그의 책을 다 읽는다는 부담을 지닌 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이렇게 시와 연결지어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면 된다.

 

작은 제목이 "삶으로만 생을 타전하다"인 이 책은 삶을 온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절망에 빠져서 허우적대기보다는 절망을 딛고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가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삶에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시들을 뽑고, 그에 걸맞는 니체의 글들을 싣고, 우리가 삶을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

 

절망에 빠져 있는 순간, 그 순간에도 삶에의 의지를 구가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이 책.

 

시인인 오철수 자신의 시들도 많이 실려 있지만-하긴 니체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시들을 찾아내려면 엄청난 독서와 시에 대한 사랑이 필요했으리라. 그럼에도 많은 시들을 지은이 자신의 시로 채우게 된 이유는 그러한 시를 찾기가 너무도 힘들었음을 이야기해주고 있으리라- 우리가 삶에 대한 자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시들이 많이 실려 있다.

 

이런 시들을 읽으면서 삶에 대해, 내가 살아온 자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주는 책이다.

 

결코 과거를 탓하거나, 미래만을 꿈꾸거나 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출발할 것. 삶은 바로 이 순간 시작되고 유지된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니체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방대한 니체 전집에 기죽을 필요없이 니체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책, 니체와 함께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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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여기저기서 입학식이 열리고, 개학식이 열렸다.

 

우리나라 학교가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날이다.

 

많은 아이들이 설렘을 안고 학교에 들어서기도 하는 날이고.

 

그런데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왜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고민하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의무교육이라서,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 남들이 다 가니까...

 

이렇게 학교에 왜 가야 하는지 고민도 해보지 않고, 학교라는 장소에 자신의 몸을 그냥 담그지 않나.

 

어린 시절, 무려 12년을, 아니 의무교육만으로 하면 9년을 학교라는 공간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치는데도 학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니, 학교가 재미없다. 어떤 의의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의미를 찾지 못한 공간에서 십여 년을 보낸다는 사실. 여기에 비극이 있다.

 

그래서 고민할 시간을 줘야 한다. 아니 고민해야 한다. 십 년이 넘는다. 그 기간을 자신의 온 삶을 바치는 공간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이다. 비극이다.

 

그런 비극을 십 년을 넘게 반복한다는 일, 끔찍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생들은 고민해야 한다.

도대체 왜 학교에 다녀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찾으면 학교는 자신에게 의무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된다.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학교 생활에서 의미를 찾게 되니, 학교가 좋아진다. 재미있어 진다. 그리고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하게 된다.

 

학교에 다니는 객체에서, 드디어 주체가 된다. 한 번쯤 왜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성찰이 필요한 시기, 입학, 개학의 시즌이다.

 

노벨 문학상을 탄 오에 겐자부로의 글 모음집인데... 이 책에 왜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자신이 고민한 내용의 글이 있다. 그는 치열한 고민을 통해 학교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의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학교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알차게 채워갈 수 있었다. 그의 글은 우리에게도 많은 성찰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동화, 왜 학교에 가야 하나요?도 읽어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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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 문학의 비밀을 푸는 18개의 놀라운 열쇠
정여울 지음 / 이순(웅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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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어렸을 적, 소설이나 동화, 또는 옛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을까?

 

하다못해 이솝우화나 안데르센 동화 정도는 이야기책으로, 또는 이야기로 듣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학교에 들어와 문학을 하나의 교과로 배우면서 문학과는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지 않았는지... 그 재미있던 문학이, 시험문제로 내 눈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을 때의 당혹감이라니.

 

게다가 문학은 정답이 없다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얘기했으면서도 시험지에서는 내 생각은 없고, 오직 누군가가 정해놓은 정답만을 찾아야 한다고 했으니, 문학은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멀어진 문학은 좀처럼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학창시절의 즐거움으로, 당혹감으로 문학은 우리의 삶에서 자리를 잃어가고 마는데...

 

과연 문학이 한 때의 즐거움만을 줄까? 한 때의 즐거움만을 준다면 문학이라는 갈래가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문학을 생각한다면 문학은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효용성 면에서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멀어진 문학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할 방법은 무엇일까?

 

문학의 즐거움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 작업을 정여울이 하고 있다. 제목이 문학 멘토링이다. 문학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고,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학에 다시 친숙해지게 하겠다는 의도다. 거기다 작은 제목이 문학의 비밀을 푸는 18개의 놀라운 열쇠 아닌가?

 

문학의 잠겨진 문을 여는 열쇠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이론서와 참고서의 중간 역할을 하게 썼다고 한다.

 

18개의 열쇠...패러디, 시점, 의인화, 은유, 상징, 아이러니, 알레고리, 트릭스터, 안타고니스트, 시간, 공간, 음식, 판타지, 트라우마, 통과의례, 정체성, 대재앙, 사랑이다. 앞의 몇 가지는 문학에서 다루는 기법 내지 용어라면, 뒤에 나오는 몇 가지는 문학 속에서 다루는 주제라든지, 배경 등을 말한다. 이들은 다들 우리 삶에서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문학은 결국 우리 삶이라는 얘기가 된다. 왜 문학이 우리 삶인지, 이 18개의 열쇠을 가지고 비밀의 문을 하나씩 열어젖히고 있다.

 

읽는 재미도 알아가는 재미도 동시에 있는 책이기에, 문학을 시험지 속에서 접하고 실망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실망을 희망으로 만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책이고,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문학은 여전히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주는 책이고, 문학, 뭔지 모르게 어려운 존재, 나와는 관계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에게는 문학은 나와 관계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해주는 책이다.

 

학생에게는 문학의 즐거움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일테고, 문학을 가르치는 일에 곤혹감을 느끼고 있던 문학교사(국어교사)들에게는 문학을 쉽게 가르쳐주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책이리라.

 

물론 이 책은 자기 나름대로 소화시켜 자신의 말로 다시 말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인용된 작품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고, 문학이 바로 우리네 삶이라는 사실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느끼는 재미도 있는 책이다.

 

문학을 즐기는 국민, 그것이 바로 문화국민일테고, 그러한 국민들은 삶의 여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리라. 마치 신동엽의 산문시에 나오는 스칸디나비아의 어느 나라 국민들처럼. 이 책은 그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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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교육콘텐츠 창작론 - 시와 사진의 융합형
김영도 지음 / 경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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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진이 대세다. 어디서나, 누구나 찍을 수 있으며, 복잡한 인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프린터만 있으면 컴퓨터에 연결해 인화까지도 가능하다.

 

카메라도 딱히 전문가용이 아니더라도, 디지털 카메라도 성능이 좋고, 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니고 다니는 휴대전화에도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어, 어디서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이 너무도 쉽게 우리 곁에 다가온 반면, 시는 우리 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시는 고리타분한 것, 학생 때 어쩔 수 없이 배웠던 것, 어른이 되면, 우리의 생활에서 멀어지는 것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시를 향유하는 계층이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서점에서 시집을 진열하는 칸이 점점 줄어들게 된 현실이다.

 

그렇다고 시를 멀리하기엔, 시와  함께 해온 인류의 역사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시가 우리에게 아직도 필요한 존재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시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떻게 시가 변해야 할까?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즐기는 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즐기는 시로 변하기 위해선 우선 다수의 사람들이 친숙한 매체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친숙한 매체, 그것이 요즘에는 사진이다. 그래서 사진과 시를 융합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진과 시의 융합, 낯설다는 생각이 들지만, 전혀 낯설지 않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 시와 그림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림 대신에 사진을 집어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림과 사진은 매체로서의 특성이 다르기에 이들을 일방적으로 그냥 대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진과 시에 대한 작품은 예전에 브레히트의 시집(?) '사진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에서 봤고, 이승하 시인의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이를 이론으로 접해보지는 못했다.

 

사진과 시, 시와 사진의 융합을 고민하고, 이론화한 책으로 이 책이 가지는 의의는 이런 면에서 크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냥 시도로 끝나지 않고, 이제는 하나의 갈래도 자리를 잡으려면 이를 체계화하고 정리하는 이론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이론의 정리로 끝나지 않고, 교육으로까지 나아가면 이런 갈래는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갈래를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와 사진, 함께 할 수 있는 갈래. 우리들이 멀어지고 있는 시를, 우리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방법. 이런 방법을 우리도 시도해 보자.

 

덧말

 

약간의 오탈자야 뭐... 34쪽 세종 2년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때는 세종 24년일 거다. 1442년이면 세종 24년이 맞다. 4자가 떨어져 나갔다.

 

52,53쪽 春夜宴桃李園序을 춘야원도리원서라고 음을 달았는데... 잘 이해가 안간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춘야원도리원서라고 하는 글도 꽤 있던데... 宴자는 잔치 연인데, 왜 원으로 읽는지... 이 제목을 제대로 읽으면 '춘야연도리원서'일텐데 말이다. 아무리 찾아도 宴자에 원으로 읽는다는 말이 없던데.. 이것 이유를 모르겠다.

 

99쪽 조형이라고 나오는데, 시인 이름은 조향이 아닐런지.

 

229쪽 폭축초라는 말이 나오는데, 228쪽에는 폭죽초라고 나온다. 아마도 폭죽초라고 하는 것이 많으리라.

 

그 밖에는 소소한 오탈자니, 읽으면서 충분히 내용을 메울 수 있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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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 배움이 있는 수업만들기, 개정판
사토 마나부 지음, 손우정 옮김 / 에듀니티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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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學校)를 토박이말로 바꾸면?

 

예전에 한자말을, 그리고 외래어,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자는 운동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글이 창제된지 600년 가까이 가지만 한글보다는 한자말이, 그리고 최근에는 외국어, 외래어들이 많아지고, 거리에는 정체모를 말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니, 그 때의 운동이 실패했다고 봐도 될텐데...

 

이 책 얘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왠 토막이말 할지도 모르지만, 말에는 우리의 사상이 담겨있으므로, 말에 대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교육에 관한 책에서는.

 

학교를 토박이말로 바꾸면? 쉽게 답하면 '배움터'다. '배움터' 얼마나 좋은 말인가. 배우는 곳. 이 말이 학교라는 말이라면, 우리는 학교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배우는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한다.

 

학교, 배우는 곳, 배움터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교육은 있되, 배움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배움은 실종되었고, 배움이 실종되었기에, 교육도 실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혁신학교'라는 이름을 걸고 배움을 살리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런 배움을 살리는 길로 유럽의 교육에서, 일본의 교육에서, 아니면 기존 우리나라에서 실천되고 있던 대안교육에서 여러 방법을 배워오고 있다.

 

혁신학교가 실시된 지도 이미 몇 년. 어떤 곳에서는 성공을 했고, 어떤 곳에서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어떤 곳에서는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혁신을 어느 방향으로 잡느냐에 따라 각 학교의 교육이념과 실천이 달라지는데... 이 책은 수업을 바꿈으로써 학교를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입장에 있다.

 

학교 폭력, 부등교, 이지메 등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인권 교육, 인성 교육, 봉사활동, 체육 활동, 예술 활동 등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학교라는 이름에 충실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책이다.

 

학교는 배움터이기에, 배움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학교라면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 있고, 아니, 부차적인 문제라는 문제의식하에 이 책은 출발한다.

 

배움이 있는 곳에 폭력이, 부등교가, 이지메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왜냐하면 배움은 단순히 지식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깨닫는 과정이기 때문이고, 이러한 배움에는 자기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에는 사물도, 사람도, 전통도, 사회도 다 함께 참여하기에 진정한 배움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배움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때 일어나고, 이렇게 함께 하기 위해서는 우선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잘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며, 듣기를 잘할 때 우리는 상대에 대해서 진심으로 자신을 열고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어찌 부정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런 것에 동의한다면 지금까지 학교가 배움터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는 '일반 중학교에서 교사는 교과의 전문가이며 특별 활동이나 생활지도나 진로지도의 전문가이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배움의 전체성에 책임을 지는 교육의 전문가로서는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 교사의 일은 분산되고 단편화되어 전문직으로서의 성격을 희박하게 만들고 있다.(220쪽)'고 이 책의 지은이는 주장한다.

 

이걸 인정한다면 교사부터 바뀌어야 한다. 학생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교사 자신부터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하고, 이 책에는 많은 학교들에서는 이렇게 바뀐 교사들이 결국 학교를 바꾸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교사가 바뀐다? 이는 당연한 말이다. 우리네도 예전부터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을 써오지 않았는가? 교사가 학생들 개개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때 학생들은 인정받는다는, 소외되지 않았다는, 그럼으로 그들은 배움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수업에 잘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학생들이 수업에 잘 참여하게 되면, 그를 경험하는 교사도 역시 변하게 되어 있다.

 

교육이 가르치고 기른다는 의미의 교사 중심이지만, 교사는 전문가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열어두고, 항상 완결된 존재로서의 교사가 아니라, 완결되어가고 있는, 영원히 진행하고 있는 교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명심하면 교사들은 자신들의 수업을 적극적으로 동료교사나 학부모들에게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는 가르치는 일을 보여주는 일(수업 공개, 또는 수업 연구)에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설렘을 느껴야 한다. 자신이 완성된 존재라는 생각을 지니면 자신의 수업에 무엇이 잘못되었을까라는, 또는 비판을 받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을 지니게 되는데, 그러면 교사는 변하지 않고, 자신만의 교과에 갇혀버리게 된다. 

 

반면에 자신이 계속 만들어져 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교사라면 이번 수업에서는 또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설렘을 지니게 되기에 자신의 수업을 적극적으로 공개하게 되고, 매번 그 수업 속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교사들끼리는 동료성을 형성하게 되고, 이런 동료성이 좋은 수업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건강한 학교 문화를 형성하게 한다.

 

이런 교사들이 존재하면 학생들도 변하게 된다. 물론 한 번에 변하지는 않는다. 그건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점인데, 학생들의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다. 그러니 조급해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배움을 중심으로,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중심으로, 학생의 변화보다는 교사의 변화를 중심으로 두면 '배움의 공동체'는 만들어진다.

 

이 책에서는 배움의 공동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배움의 공동체'로의 개혁이란 학교를 아이들이 서로 배우면서 성장하는 장소로 할 뿐만 아니라 교사들이 전문가로서 서로 배우면서 성장하는 장소로 하여 학부모와 시민이 학교교육에 참가하여 서로 배우고 함께 성장하는 장소로 만들어가는 개혁을 의미한다.

  이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실에 활동적이고 협동적이고 반성적인 배움을 조직하고 교사들 간에 교실을 서로 열고 수업을 서로 창조하는 동료성을 구축하고 교장의 지도성을 확립하여 직장의 민주화를 도모하여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립적인 존재로서 협동으로 운영할 수 있는 조직으로 학교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서는 보호자나 시민과의 연대를 기초로 학교의 자율성을 구축하고 교육행정과의 관계도 민주화할 필요가 있다. (234-235쪽)

 

꿈같은 얘기인가?

 

아니다. 바로 우리 학교 이야기다.

 

우리 학교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꼭 남의 학교 얘기만은 아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 우리 동네에 있는 학교, 그리고 내가 다니는 학교 이야기. 그것이 바로 배움의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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