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 개정판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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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책은 읽기가 망설여진다. 무언가 통찰력이 있는 듯한데, 막상 손에 잡고 읽기 시작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아니다.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가 아니라, 고민을 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잘 안 올 때가 많다. 그래서 몇 장을 못 읽고, 책을 덮고, 쉬게 된다.

 

쉬다가 또 읽어야지 하고 책을 편다. 정말로 아렌트의 책은 자세를 경건하게 만든다. 그냥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로 읽어서는 금세 졸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깊은 철학적 지식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우리에게 그의 책을 읽기 힘들게 하고 있다.

 

어쩌면 철학적 사유에 대한 연습이 부족한 나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철학적 사유에 대해서 연습할 시간이 과연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면 이러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근대 초기에 태어나서, 근대를 온몸으로 살아간 사람들 이야기라서, 전기문이겠거니 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단순한 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전기를 통한 철학적 사유, 정치적 사유라고 해야 할 듯한 책이다.

 

더군다나 처음 들어본 사람은, 그 사람의 전기를 간략하게 소개해도 잘 읽힐까 말까 한데, 이거는 그 사람을 그 사회에 집어넣고, 그 의미를 추적하고 있으니 더더욱 읽기에 힘들다.

 

여기에 나온 사람들 이름을 나열해 보면, 레싱, 로자 룩셈부르크,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 칼 야스퍼스, 이자크 디네센,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벤야민, 베어톨트 브레히트, 발데마르 구리안, 랜달 자렐이다.

 

이 중에 적어도 내가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레싱, 룩셈부르크, 야스퍼스, 벤야민, 브레히트가 다니 이 책 읽기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지식의 얕음이 이런 데서 장애로 작용을 하고, 도전 욕구를 부추기고 있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어둠의 시대는 이 때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어둠의 시대라는 사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전기를 읽는 이유는, 이 책처럼 전기를 빙자한 철학적, 정치적 책을 읽는 이유는 내 삶을 가다듬기 위해서이다. 이들의 삶, 즉 이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응전하며 살았는가를 참조하여, 이 시대에 나는 사회에 어떻게 응전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찾는 목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적어도 이들은 어둠의 시대에 그 시대에서도 빛을 발하는 등불 역할을 했으므로, 이 등불들이 있었으므로, 어둠의 시대는 단지 어둠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지금 이 새로운 어둠의 시대에서 어떤 삶, 어떤 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적어도 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속으로 고립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 우정 또는 인간애라고 하는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이런 무기를 지니기 위해서는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통찰력을 갖출 수 있는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은 명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 책이 준 긍정적인 힘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어둠 속에 묻힌 삶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는 철학자는 철학으로, 문학자는 문학으로,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간애에 바탕을 둔 우정으로 돌파해나가야 한다는 사실.

 

브레히트 부분에서 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결국 시로써 물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렇담 어둠의 시대를 살아간 우리 시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를 적용시키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란 천상으로 날아오르려는 존재이기에 현실의 중력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적용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그들의 시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잣대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가 현실에 어떻게 대응을 해서 현실을 넘어선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느냐 하는 잣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면, 결국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을 때 사회의 변혁을 이끌 수 있으면, 이럴 때 어둠의 시대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고 본다.

 

이 책.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다 읽을 필요도 없다. 사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인물을 가지고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선, 뒷부분에 있는 헤제논문을 읽어라. 그러면 조금 틀이 잡힐 수 있다. 그 다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을 읽어라. 그 인물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과 중첩시키며 된다. 

 

어둠의 시대, 해제논문에서 우리나라도 이러한 책을 쓰는 이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이에 못지 않은 어둠의 시대를 겪었다. 많은 인물들이 그러한 시대 등불이 되어주기도 했다. 한 번 시도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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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우리 -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뤼스 이리가라이 지음, 박정오 옮김 / 동문선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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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 장면들은 차이를 인정하는 모습일까, 아니면 차별이 교묘하게 나타나는 모습일까?

 

장면 1

학교 출석번호. 분명히 한 반에 남녀가 모여 있는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출석번호를 정할 때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남자가 1번부터 시작하도록 하고, 여자는 남자 아이들 뒤를 이어서 번호를 매긴다. 모든 일이 컴퓨터로 처리되어 굳이 남녀를 분리해도 되지 않는데... 관행이 습관으로 굳어지고, 이게 당연한 문화가 되어 이제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스레 행해지고 있다

 

장면 2

연말 이러저러한 대상 시상식. 어느 방송이나 대부분은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여자 두 명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주요 진행은 가운데 남자가 하고 양 쪽의 여자들은 보조 진행자란 인상을 준다. 21세기 이제는 뉴스에서도 남녀가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연예 활동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남성 중심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장면 3

예전 어느 대선 때 이야기. 예전이라고 해봤자 그리 오래 전 얘기도 아니다. 한 10년 됐나? 모 여성후보가 대권후보로 나오자 여성계가 양분되었다. 이념을 떠나서 여자 후보가 나왔으니 이 후보를 지지하자는 측과 어떻게 이념을 떠나서 지지하냐는 측으로. 결과는? 뭐... 지금은 단지 여성 후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동안에 대선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울시장 후보로는 여성 후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아니라, 어떠한 정책을 지니고 있는냐로 쟁점이 모아지고 있다.

 

장면 4

미스코리아, 기타 무슨무슨 아가씨 선발대회. 아직도 하고 있는 대회가 많은데... 텔레비전에서는 중계를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것. 그런데 아직도 무슨 아가씨 대회를 만들자는 사람이 있나 보다. 무슨 아가씨보다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대회가 의미가 있나? 지역 홍보를 위한 수단일텐데...

 

장면 5

시에서 가끔 말하는이를 찾을 때 너무도 단순하게 둘로 나눈다. 기다림의 정조가 강하고,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화자가 나오면 여성적 화자, 당당하고 적극적인 화자가 나오면 남성적 화자. 그래서 김소월, 한용운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여성적 화자라고 하고, 이육사, 유치환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남성적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여성의 특징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애상적인가? 꼭 여성만 그러한가?

 

장면 6

다시 학교. 평가를 하는데, 음악과 미술은 남녀 구분없이 평가를 한다. 절대평가인 셈. 그런데 체육에서는 남자의 기준과 여자의 기준이 다르고, 그 기준에 따라 평가를 한다. 가끔 남학생들이 볼멘 소리를 한다. 우리는 여자에 비해 미술, 음악 실력이 모자라는데, 왜 이 두 과목은 똑같이 평가를 하고, 체육은 우리가 잘하는데, 기준이 다르냐? 다 다르게 하든지, 다 같이 해야 하지 않냐고.

 

여기서 이리가라이의 책이 빛을 발한다.

 

1987년부터, 평1989년까지 발표되었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각 편의 끝부분에 년도가 적혀 있다.

짧막한 글들이지만 여러가지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뭉뚱그려서 말하면 평등이란 같음을 추구하지 않고, 다름을 추구한다는.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이다. 여성이 여성해방운동을 하는데, 이는 자칫하면 남성의 자리에 자신을 놓는 운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이리가라이는 주장한다.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되, 이는 사람다움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그래서 남녀의 차이를 부정하지 말고,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되, 그 지점에서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상대는 극복되어져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무시하는 운동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여성성, 남성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람다움을 찾아가야 한다니. 그래서 이 차이가 차별이 아니라, 공생이 되어야 한다니 말이다. 이런 논점을 지니면 장면6이 이리가라이의 주장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하되, 엄연한 차이가 나는 일은 다르게 해야 한다는.

 

이러한 생활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다면 차이는 차별로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남녀는 서로가 배타적인 집합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하는 교집합을 많이 지니고 있는 두 집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여기에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리가라이 책,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논조를 받아들이면 단순히 남녀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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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읽는 옛집 -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
함성호 지음,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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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요즘 머리 속에 맴도는 말이다. 그래서 건축가들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철학이 없다면 그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그냥 건설업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김진애의 "이 집은 누구인가"라는 책도 있듯이 집은 바로 자신을 알려주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요즘에도... 아니지, 요즘은 건축이랄 것도 없이 그냥 건설만 있지 않나? 비하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 토건이라는 말로 쓰이고 있지 않나? 어딜 가도 똑같은 아파트, 자신들은 내부가 다르다, 외양이 다르다 하지만 사실 그 나물에 그 밥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 책에서 작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집들은 다른 점이 없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특별히 다른 건축양식이 없다고. 외국에서 말하는 바로크니 로코코니 하는 양식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건축들이 이런 우리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나?

 

답은 아니다다.

 

우리는 특별히 다른 건축양식이 없지만, 집들은 거의 비슷한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의 건축 특징은 집 건축의 특징을 찾는 데 있지 않고, 이 집이 주변과 어떻게 어울리고 있나 하는 점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게 바로 우리 건축의 특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집을 짓기 위해서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집에는 이러한 자신만의 철학이, 삶의 태도가 나타나야 한다. 지금 우리들의 건축은 이런 면이 사상되어 있다. 그냥 짓는다. 돈이 되는 곳에... 주변의 환경을 고려할 생각도 없이, 밀어붙이고, 깎아내리고, 아니면 메워버리고...

 

그래서 삶도 집을 닮아가서 자신만의 색깔이 없다. 자신만의 색깔이 없기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듯, 남들이 하는 대로 하고 산다.

 

나만의 집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이 책에서는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산 옛사람들이 나온다. 집 얘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 얘기이기도 한다. 그만큼 그 집에는 그들의 삶이 스며들어 있다는 얘기다.

 

이언적, 조식,이황, 윤선도, 정약용, 김장생, 송시열, 윤증의 집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 한 번은 이름을 들어봤을 학자들이다. 그들의 사상이 집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들의 삶과 연관지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주장한다기보다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 하는 공간에서, 사람의 삶의 철학이 어떻게 집에, 그리고 자연에 묻어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함께 나오는 사진들도 경탄을 자아낸다.

 

꾸미되, 꾸미지 않은, 자연을 이용하되, 결국 자연이 되는, 인위적인 삶을 살 자연적인 삶이 되는 그러한 집들이 나와 있다.

 

집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찾는 면에서도 이 책이 의미가 있지만, 당시 유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삶이 집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점에서도 이 책은 읽을 만하고, 또 그동안 모르고 지나갔던 집의 구조, 형태들과 삶의 철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알려주고 있어서 좋다.

 

내 사는 공간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만나고,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한다면, 그 집은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사실.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집은 바로 자신의 확장형으로서의 집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책.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도 재미있게 읽힌 책.

 

 

덧말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에 읽었던 민들레 78호의 학교공간이 생각났다. 결국 학교 공간도 학생들과 학생들이 만나는, 또 학생들과 교사들이 만나는, 또 학생들과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만나는, 그리고 교육에 관계된 사람들과 지역사람들이, 사람들과 자연이 만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린 얼마나 학교 공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가. 이황이나 그밖의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공간 하나하나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옥의 티. 가끔 년도가 나오면 숫자가 뒤집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의 252쪽이 그러하다. 송시열의 집 얘기를 하면서 1951년에 파직을 당하고, 1953년에 집을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9자는 6자가 뒤집힌 경우일 터. 1651년에 파직 당하고, 1653년에 집을 지어가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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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속의 신체지도
샌드라 블레이크슬리 & 매슈 블레이크슬리 지음, 정병선 옮김 / 이다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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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랐다. 뇌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하긴 몇 권으로 뇌에 대해 안다고 말을 하면 안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뇌가 참 신비한 일을 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 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고 있다.

 

인간을 뇌로만 파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최신과학 성과를 무시하지도 않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영성이라는 문제를 피하지도 않고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뇌는 우리의 신체에만 관련되어 있지 않고, 신체와 정신의 종합이라는 사실... 그래서 뇌만으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

 

가령 우리는 뇌과학에 힘입어 많은 부분들의 뇌의 작용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소설이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란 책에 실린 '완전한 은둔자'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은 바로 뇌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영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뇌만 남기고 해체하여 이 뇌를 영원히 보존하기로 한다. 그러면 자신은 영원히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결말 부분이 참 허망하지만 말이다. 주인공이 들인 노력에 비하면.

 

과연 그럴까?

 

우리의 신체를 모두 절개해내고 뇌만 남긴다면 그 뇌는 바로 우리일까?

 

이 책을 읽으면 아니다가 정답이다. 베르베르는 이러한 뇌가 인간의 전부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소설로는 과학이 반박되지는 않으니, 이 책이 뇌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뇌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뇌 속의 신체지도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뇌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요소, 즉 뇌는 인간이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만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지 않고, 우리들의 신체활동이나 도구활동 역시 뇌를 구성해낸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예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즉 뇌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는 얘기다.

 

뇌 속에 호문쿨루스라는 난쟁이 인간이 있어, 그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호문쿨루스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호문쿨루스들이 존재하면, 이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감정까지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하니... 인간은 신체와 감정이 어우러져야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뇌과학을 통해, 특히 뇌신경학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다.

 

운동경기에 이야기되는 마인드컨트롤도 뇌신경과학을 이해하면, 뇌에 있는 우리의 신체지도를 알면 당연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영적인 체험을 하는 상황도, 뇌의 신체지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외적 원인이 없는 극심한 통증도 역시 뇌의 신체지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느냐에 따라 통증도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지금까지의 과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뇌신경과학 책이라 상당히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다. 쉽게 읽힌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들을 들고 있어 이해하기도 쉽다.

 

학교 교육에서 기초적인 과학지식도 교육되어야겠지만, 이러한 최신 뇌과학을 학생들에게 교육을 하면 공부하거나, 해동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어른들이 먼저 읽으면 좋은 책이지만 말이다.

 

나는 단지 뇌로만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뇌과학책 몇 권을 읽으면서 뇌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나라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뇌와 그밖의 다른 여러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만나 관계라면서 만들어진 복잡하고, 자율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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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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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다보면 한 두 편의 시가 마음을 움직인다. 와, 이 시다.

 

그런데, 어떤 시집은 읽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 현실을 이토록 잔인하게 표현하고 있다니 하면서.

 

시가 세계의 자아화라는 조동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는 나와 나 외부의 일들을 철저히 나로 받아들이는 존재인데... 내가 받아들인 외부의 세계가 시에 나타나므로, 시를 통해서 내 감정을, 나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쩌면 10년도 더 된 옛일이 이 시 속의 현실일텐데... 왜 지금 현실 같을까?

 

10년 동안 세상이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안 좋은 쪽으로 퇴보했단 말인가?

 

이 시집을 관통하는 말들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라니... 사전이 세상의 말들을 담고 있는 대상이라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이 세상을 이 일곱 단어로 파악할 수도 있단 얘기가 된다.

 

시인이 제시한 일곱 단어는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의 독백, 혁명, 시"이다.

 

그런데 "봄"은 기쁨이 아니다. "놀라서 뒷걸음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젊음을 봄이라고 하는데, 젊은 생기가 있고,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넘실대야 하는데, 아니다. 뒷걸음치다로 표현하고 있다. 젊음에서 앞보다는 뒤를 느끼는 세대, 불행한 세대다.

 

그러니 자연스레 "슬픔"으로 갈밖에.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고 되어 있다. 세상에 이 젊음에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라니... 무거운 절망이 느껴진다. 이 절망은 "자본주의"에서 유래한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젊음이 선택한 길.

 

"문학" 역시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대상, 누구나 다 힘들게 서 있어야 할 때 잠시 앉아서 쉬라고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대/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뜻하게 우리를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문학을 하는 사람 중에 시인이 된다. 그러나 시인이란 밖으로 향하기보다는 자신을 향하는 사람. 자신을 향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

 

"시인의 독백"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이라고... 이 소리들. 합쳐서 나타나면 혁명이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한꺼번에뒤집히는 혁명이 과연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을까?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이라고 한다. 혁명은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 쉽게 현실이 되지 않는다. 현실은 아직도 어둡다. 이 어두운 현실에서 혁명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니는 마지막 무기.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누구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 속하지도 않는다. 시는 어느 순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읽힌다. 그러나 "너"는 시 속에 없다. 시 속에서 너를 찾아선 안된다. 너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이 시집의 지독한 우울함과 암담한 현실에 대한 시들을 이 시가 한 줄로 꿰고 있다고.

 

다만, 이 시들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시에 나타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들이 나아갈 바를 찾으면 되니까.

 

그게 이 시집의 긍정적인 면일테니까.

 

덧말

 

이 시집에서 지독한 우울함, 암울함이 느껴지는 시들은, 가족, 서른 살, 줄리엣, 봄이 왔다,연무도시, 벌레가 되었습니다, 달팽이 대장, 바깥 풍경 등이다.

 

앞에서 인용한 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전문이 아니다. 몇 개의 문장이 빠졌다.  전문은 이렇다.

 

 

봄, 놀라서 뒷걸음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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