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리로 서 있는 새 리토피아시인선 22
임강빈 지음 / 리토피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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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늘 어지럽다. 

그래서 세상을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던가. 얼마나 많은 답들을 내놓았던가. 그런데도 세상은 아직도 어지럽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조그마한 돌멩이를 던지는 일. 그게 시를 쓰는 일이다. 그 조그만 돌멩이가 일으키는 파장에 마음을 맡기는 일, 그게 시를 읽는 일이다. 

이런 상황을 임강빈 시인은 이렇게 파악하고 있다. 마음이 간다. 그래 수긍이 인다. 

조용한 수면에/돌을 던진다/풍덩 하는 소리가 크다/파문이 인다/돌 하나로 시작되는/TV동화 <행복한 세상>/짤막한 이야기/밖으로 밖으로 원을 그린다/이 잔잔한 울림          -TV동화 전문 

시는 이처럼 잔잔한 울림을 준다. 이 울림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너가 사람들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이런 따스함 이는 바로 임강빈 시인이 말하는 이러한 사랑이다. 

오랜 사랑은/빙점(氷點) 언저리에서 머물다가/손을 잡아주는 일이다/따스하게 감싸주는 일이다-사랑 3연 

시는 우리를 채근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 곁에 있다가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이 우울할 때, 우리의 손을 잡아준다. 그 따스함이 어지러운 세상을 견디게 해준다. 

그래서 시는 가난을 극복하게 해준다. 물질적인 가난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그 물질적 가난을 우리가 해결해야 하겠지만,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우리의 행복은 찾을 수 없다. 물질적 가난을 해결하고, 정신적 가난까지 해결한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운, 살만한 곳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 어찌 넉넉함에 비하랴 /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간다 / 시린 나무 등에 업히는 찬 바람 

가난은 춥다 / 불을 지펴도 / 여전 썰렁하다 

이 가난에서 벗는 날은 / 파릇파릇 새싹이 / 시가 되는 날이다 / 시가 부자 되는 날이다. 

 - 가난 전문

이 시집에는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부터 나이들어감이 여유로움으로 변하는 내용까지 다양하게 시들이 펼쳐져 있다. 머리 속으로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하는 난감함은 없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젊은 사람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아무나 아무 때나 손에 들고 읽으면, 이 시는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처럼 우리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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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광장], 몇 번이나 개작을 했던가? 

처음에 읽었던 책은 세로로 조판된 책이었는데, 나중에 다시 가로로 조판된 책을 읽었고, 이번에 다시 읽었다. 

나이 20대에 읽고, 30대에 읽고, 40대에 읽고, 각자 다른 책으로 읽었는데, 20대에 느낀 감동이 40대에는 조금 이성적이 되었지만, 그래도 [광장]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읽히는 좋은 책임은 틀림없다. 

뭐... [광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으니, [광장]에 대한 평이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고, 이번에 [광장]을 읽으면서는 이명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며 읽었다. 

그가 남한에 있을 때는 철학도였고, 돈에는 초탈했으며, 북한에 있을 때에는 언론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끌었다고나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의 효용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명준은 생활인이 되지 못한 관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에서 돈과 관계가 없는 일은 없는데, 그는 돈에 대해서 아예 모르쇠로 일관한다. 세상에 부모가 없는 아버지 친구 집에서 기식하는 사람이 돈에 대한 관념을 지니지 못하고 지내다니... 

이 점에서 그는 생활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생활을 멀리서 관찰하기만 한다. 즉 그는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객체로 만들고 있다. 결국 그가 존경하는 정선생 집에서 본 미라는 결국 이명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그는 이념의 화신이 되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의 눈에 생활이 보인다. 그러나 생활은 보이되 생활을 바꿀 주체는 되지 못한다. 그가 언론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생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생활을 밖에서 관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자세는 철저한 이념을 우선시 하는 북한 사회 속에서도 그의 자리는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담, 남과 북 모두에서 실패한 삶을 산 이명준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제3국으로 도피하는 길밖에 없다. 자신의 분열된 모습을 모두 버리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곳, 이 곳에선 삶을 관조하지 않는 생활인이 되길 꿈꾼다. 이것이 그가 머리를 쓰는 직업을 이야기 하지 않고, 오직 몸을 움직이는 직업을 갖고자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생활인이 되지 못한다. 그를 끝까지 따라오는 갈매기, 이 갈매기는 다른 세상을 그에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생활인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연 그는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나? 

구원이 아니라, 이러한 관념인은 우리나라처럼 비극을 겪은 현대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야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여기에 비극이 있다. 문제는 알되, 해결할 의지는 없다. 그는 문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문제를 온몸으로 맞이할 마음이 없다. 그가 몸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기껏해야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몸을 느낄 뿐이다. 그에게 생활인으로서의 몸은 없다. 그에게는 오직 '체'만 있을 뿐이다. 남에서는 부르조아적인 삶에 어울리는 '체', 북에서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체'. 

이 '체'는 생활과 정신이 하나가 되지 않은, 분열된, 늘, 사회로부터 미끌어지는 사람의 자세일 뿐이다. 이런 '체'가 내면화된 이명준은 어디에서도 '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제3국행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 소설이 나온 지 50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읽힌다. 바로 우리 현실 때문이다. 우리나라, 남북의 관계는 이명준이 생활과 정신 사이에서 분열을 느끼고, 계속 미끄러지듯이 우리 현실도 이러한 분리, 미끌어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이, 자주, 지속적으로 우리는 미끄러지고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이명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현실을 직시하되, 현실을 밖에서 보지 않고, 현실 안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미끌어짐을 방지할 수 있다. 관념인 이명준이 아니라, 생활인 이명준으로 우리는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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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장>..
    from 말의 양심 2011-11-10 11:05 
    최인훈의 <광장>이 100쇄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구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도 98년 쯔음인가 생각이 된다.조세희의 <난소공>과 더불어 100쇄를 넘었다는 건 당시 내게는 상징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왜냐하면, 두 책은 일반 소설책이라기보다는 이념서나 사회비판서에 가까웠기 때문에 100쇄 돌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사실, 최인훈의 <광장>을 처음 접했던 건 고등학교 교과서 작품 해설집에서였다. 입시용 텍스트로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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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양장본)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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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잡스에 대한 길고 긴 여정을 끝냈다. 그의 일생이 900쪽에 가깝게 정리되어 있는 이 책.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그의 삶을 이 정도로 정리할 순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잡스가 의뢰한 전기라는 점에서, 잡스 생전에 수많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전기라는 점에서 잡스에 대한 가장 정리가 잘 된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껏 전기는 그 사람이 죽고난 직후에 바로 읽지 않았다. 그만큼 그 사람과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나고 그 때서도 그 사람이 생각이 나면 그 때서야 전기를 구입해서 읽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 잡스 전기는 곧장 읽고 싶어졌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고, 그의 스탠퍼드 대학 연설문이 너무도 좋았고, 또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다 하는 물건들이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기에, 제품 설명회를 하는 모습이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 보여서, 잡스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면 우리나라 삼성과 특허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대상의 최고경영자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가 이룬 성과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그의 카리스마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 아니던가. 하여 성과보다는 그에 대해 든 느낌으로만 이야기하자면. 

처음 부분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어떻게 이렇게 오만방자하지? 입양이 되었으면 입양한 부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최소한 그들을 힘들게는 하지 않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자신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모든 일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나 하는 생각. 

애플을 창립하고 그가 경영 일선에 나선 모습도 역시 마음이 불편했다. 그를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모습, 아무리 어렸을 때 버려졌다는 트라우마가 있다고 하더라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그가 창의적인 인물임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감싸기는 커녕 쓰레기라고 하는 모습은 영 다가오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을 저렇게 이분법으로 딱 자를 수가 있는가 싶기도 한데, 그는 오로지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에게만은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밑에서 일하는 평범한 보통사람은 어떻게 되지? 그런 사람은 아예 애플 같은 회사에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고? 그건 아니다. 보통 사람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회사가 되어야 하지 않나? 천재들만, 창의적인 사람들만 모인 회사가 과연 좋은 회사일까? 

여기에 잡스 특유의 "현실왜곡장"이 있다는데, 이는 사실을 호도하여 다른 결과를 낳게 하는 잡스만의 리더십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왜곡장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 현실 왜곡장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동 착취를 당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잡스의 말 한 마디로 직장을 잃었는지, 이 책에는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지은이는 이를 잡스의 성격으로 여기고 여기에 대한 옳다 그르다의 판단은 유보하고 있지만 말이다. 

잡스가 채식을 하고, 선불교에 심취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스는 자신의 사상과 직장에서의 모습이 너무도 다른 분열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의 모습 속에서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를 연상했다면.. 이건 나만 그런 걸까? 잡스 자신이 애플의 광고에서 빅 브라더에 대항하는 모습을 비췄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잡스 자신이 빅 브라더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인문학적, 예술적 제품으로 사회를 혁신하고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가길 바랐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겠지만, 여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과연 스마트 폰 시대가 우리가 바라는 혁신적인 미래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 인간을 기계에 종속되게 만들고 있지 않나? 지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라. 자신의 생각을 포기한채 오직 이런 기계에 매달려 지내고 있지는 않나? 이게 어떻게 인문학적 제품이고, 이런 모습이 어떻게 혁신적인 새로운 세상의 모습일까? 

이런 기계들이 잡스가 믿었다는 선불교에 통할까? 채식하고 통할까? 채식이나 선(禪)은 나와 다른 남을 포용하고, 나보다 못한 남과 함께 함으로써 잘남 못남을 떠나 같은 인간으로 함께 어울림을 추구하지 않나. 그러나 잡스는 사람을 그렇게 포용하지는 못했다는게 이 책에 나와 있는 사실이니...  

하지만 그는 기계에 종속당하지 않았다. 그가 디자인을 우선시하고, 이 디자인에 기술을 맞추라고 한데서 보듯이 그는 미적 생활을 상당히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실용, 실용하는데, 이를 잡스가 들으면 "쓰레기들!"이라고 비웃지 않을까 싶다. 

그가 빌게이츠를 비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도 잡스처럼 그러한 일탈문화를 경험해 봐야 하지 않아 했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이라 말해줄 수 있을까? 그래 그래야만 창의적인 인물이 돼 라고 하나? 아니면, 그건 범죄야 하나? 둘 다 옳지 않은 답임에는 분명한데... 

환각제나 히피문화가 꽉 짜여진, 또는 주어진 세계에서 탈출을 꿈꾸는 일종의 반항일 수 있지만, 제대로 된 반항이란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억압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맞서 대응을 할 때 반항, 저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환각제나 히피문화들은 저항이 아니라, 회피에 불과하지 않을까? 즉 자유란 이름을 띤 방종이지 않을까. 물론 잡스는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그 때의 경험이 창의성을 살리는 쪽으로 작동을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적당한 경험이란 도대체 어느 선까지일까? 이런 선 긋기가 이미 창의성을 억압하는 걸까? 잡스에 대한 책을 읽으며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다. 

그의 제품 설명회는 부흥회와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는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관객들을 매료시킨다는 의미다. 자신이 이미 제품에 매료된 상태에서 홍보하는 제품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보하는 제품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잡스는 그래서 제품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홍보를 하지 않고, 그가 홍보를 할 때에는 이미 제품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통제를 할 때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관객들도 통제하게 된다. 

결국 제품의 질만이 아니라, 제품을 홍보하는 과정도 역시 제품의 질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잡스이고, 이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잡스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우리나라 어떤 경영자가 자신의 제품을 이토록 잘 알고, 이토록 열정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저런 점을 떠나 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꿔놓은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걸 인정한 상태에서 이제 우리는 그가 바꿔놓은 세상에서 우리가 좀더 인간적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잡스의 유산을 계승하는 방법일 것이다.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우리도 서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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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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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인문학적 비빔밥이라고 하자. 

각자 자신의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가 되어서는 또다른 개성을 빚어내는 존재. 

비빔밥을 생각하면 된다. 

비빔밥의 재료들은 따로 존재해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빛을 발한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역시 또다른 음식을 만들어낸다. 각자 다른 것들이 하나로 뭉쳐 입안에서 내는 그 맛이라니... 

강신주의 책은 인문학적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시와 철학과 인생이 멋지게 어우려져 아주 맛있는, 멋있는 책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이 14명의 시인과 철학자들을 묶어놓고 있다는 점,  

책의 뒷면에 소개되어 있는 "시인과 철학자가 오른 인문학 봉우리 14좌" 

이 말에서 히말라야 최고봉 14좌를 연상했다면 그건 나만의 착각일까?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 저 높은 봉우리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듯이 우리 자신을 관조할 수 있지 않을까? 

정상까지 오르는 그 괴로움이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지 않는가. 

결국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이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이라고, 강신주가 먼저 낸 책과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시 한 편에 그 시에서 연상되는 철학자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 철학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고, 결국 시와 철학과 인생이 하나로 엮여, 다름이 다름으로써 더 빛을 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시는 물론이고, 철학적 지식 또는 사유를 얻게 되고 그에 더하여 우리의 인생에 대한 성찰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비빔밥을 먹는 것과 같은 맛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 

우리도 한 번 이런 인문학적 비빔밥을 먹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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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시대 대중예술과 예술무정부주의 - 대중예술, 그 만만함의 미학을 풀다
박성봉 지음 / 일빛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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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예술이 된다. 

예술이라고 어떤 고정된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예술이 존재할 뿐이다.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줄이면 이렇게 된다. 

그래서 지은이는 대중미술부터 시작하여, 대중만화와 애니메이션, 대중음악, 대중문학, 대중 TV, 광고, 대중영화, 대중적 퍼포먼스, 마지막으로 전자오락게임까지 다루고 있다. 이들을 모두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은이 스스로 예술무정부주의자 또는 예술무제한주의자라고 자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대중예술이라고 하면 천박한, 가벼운, 시간을 죽이는, 진지하지 않은 등등의 부정적인 낱말들을 먼저 떠올리는데, 지은이는 대중예술이란, 문화 권력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예술 동네의 변두리로 밀려난 예술(17쪽)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정통예술이다, 대중예술이다 할 필요없이 그냥 예술 이러면 되는 것이다. 

이 예술에 게임까지 등장시키는데, 낯설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낯설지 않다. 스포츠를 예술이라고 하면 게임은 당연히 예술이다. 요즘 게임은 e-스포츠라고 하여 스포츠 대접을 받지 않던가. 그리고 바둑도 스포츠가 되어 있지 않던가. 

우리의 행위 중 멋지고 우리를 몰입하게 만드는 그 무엇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재미와 몰입을 다 지닌 게임이 예술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더 던진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읽으면 흥미진진한 예들이 많이 나온다. 물론 지은이가 읽은 그 많은 만화책들과, 지은이가 본 그 많은 영화들을, 연극들을 우리는 따라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읽지 않았다고, 보지 않았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작품들을 보고, 읽으면 그 뿐이고, 그 작품들을 가지고 이야기에 참여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술들이 소통하는 공간, 그 곳이 바로 예술이 꽃피는 공간이고, 그런 공간이 학교 교육에서부터 이루어진다면 사회가 예술사회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 책이다. 

우리는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예술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지니는데, 이 책은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 예술을 한다고, 예술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 때에야만이 예술이 활짝 꽃필 수 있다고... 

결국 멀티미디어 시대의 예술이란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또다른 잣대를 지닌 남들과 소통하는 예술이다. 그 소통의 과정이, 소통의 공간이 바로 멋진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말들로 예술을 설명하는 책들에 기죽지 말자.  

우리도 이미 예술을 하고 있고, 예술을 알고 있지 않은가.  

자, 너만의 언어로 예술을 이야기하라. 그리고 또다른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남들의 말들에도 귀를 기울여라. 

이 책은 이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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