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첨 민주주의 - 선거를 넘어 추첨으로 일구는 직접 정치
어니스트 칼렌바크 & 마이클 필립스 지음, 손우정.이지문 옮김 / 이매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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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 

지금은 너무도 거대한 사회가 되어서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대의제 민주주의가 최선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추첨으로 대표를 뽑을 수 있다고, 대통령도 추첨으로, 즉 제비뽑기로 뽑을 수 있다고, 아니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선거비용과 상호비방과 그리고 여기에 따르는 국민적 낭비, 이것들을 한 번에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제비뽑기라는 주장이다. 

제비뽑기가 마치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느껴진다면 추첨이라고 바꾸자. 

한 때 대안학교에서도 학생들이 탈락하는 아픔이 좌절로 가지 않도록 추첨으로 신입생을 뽑기도 했다고 하지 않나. 

대통령을 제비뽑기로 뽑으면 장난 같은가? 이것이 장난이 아님을 여러 학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최소한 1차 투표를 하되, 어느 정도 지지율을 얻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자고. 그렇다면 그 이후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들이 절감이 될 것이고, 여기에 로비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현저히 줄게 되리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요원한 일. 

대통령이나 시장 등을 제비뽑기로 뽑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이 책과는 반대로) 국회의원을 추첨으로 뽑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이는 너무도 먼 생각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망상이라고 할만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정말로 국회의원들이 우리 국민들을 대변하고 있는가? 이들의 결정이 국민의 의사와 일치하는가? 이들은 참여율이 높고, 책임감있게 입법활동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쉽게 하지 못한다. 국회 본회의에 거의 참석 안한 국회의원들부터, 국민적 관심사보다는 자신의 지역구를 더 챙기는 국회의원들, 그리고 연이어 터지는 비리들... 이런데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국회 아니던가? 

하여 이 책은 국회를 추첨으로 뽑자고 한다. 

국민들을 각 집단으로 나누어 그 집단에서 무작위로 추첨하여 뽑고, 이들이 국회에서, 또는 지방의회에서 입법활동을 하게 하자는 주장이다. 

뭐야? 무슨 헛소리야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이것이 현실성이 있는 이유를 여론조사에 비견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론조사는 겨우 몇 천 명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정확도는 오차가 2%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렇담 이렇게 다양한 계층이 모여서 입법활동을 하면 국민적 의사에서 벗어날 확률이 지금처럼 선거로 뽑힌 국회에서 하는 활동보다 더 적다는 얘기가 된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런 추첨민주주의의 장점은 또 모든 사람들의 책임있는 정치의식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데 있다. 누구나 의원이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신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국회에 정치 대학 비슷한 교육기관을 만들어 뽑힌 사람들을 일정기간 교육을 한다면 지금의 선거제도보다 훨씬 더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국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장은, 말 그대로 따라가면 타당성이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실현가능성이 있느냐를 따져야 한다. 물론 보통선거도 처음에는 꿈같은 소리였고, 이게 과연 가능한가 했다지만, 지금 보편적으로 확립이 되었듯이 추첨민주주의도 지금은 꿈같지만 앞으로는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에 나왔다는 책을 다시 번역했다는데, 아직도 우리에게는 요원한 일이니... 

이 책의 본문도 좋지만, 보론이 더 읽을 만하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가능한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추첨민주주의가 처음에는 기발한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존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단점을 알아가고 고치려고 한다면 추첨민주주의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목표가 되고, 또 우리가 누리는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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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는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회에서도 제명이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의 이론은 성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성을 정치와 연관시키는데 있다. 

즉 성의 억압이 파시즘을 유발한다고 주장하는데, 가만히 읽어보면 나름 타당성도 있다. 그래서 그는 성의 해방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을 양성해야 한다고 한다. 

그의 책들을 꼼꼼하게 읽어보자. 

우리나라처럼 성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억압적인 나라에서 과연 그의 이론은 타당한가? 

아니면 그의 이론처럼 우리는 성에 관해서 너무도 보수적인 관점에 서 있기에, 특히 청소년의 성을 억압하기에 순종하기만 하는 국민을 양산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쪽에서도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그는 너무도 위험한 학자여서 결국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마는데...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의 책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살해, 전남대학교 출판부 

문화적 투쟁으로서의 성, 솔 

오르가즘의 기능, 그린비 

성혁명, 새길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그리고 마이런 섀라프의 빌헬름 라이히, 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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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행복교과서와 같은 책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파랑새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지만, 결국 파랑새는 자신들 곁에 있었다는 얘기와 비슷하게 행복은 저 멀리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 행복을 우리가 어떻게 찾을까? 

정말 다양한 책들이 있지만, 학생 때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 "행복교과서"이다. 

그리고 조금 깊은 내용을 읽고 싶은 사람은 "해피어"라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왜 미국의 명문대학인 하버드대학에서 행복학을 강의하는지, 이제는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 두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에 행복 수업을 실제로 진행한 경험을 담은 책이 있다. 이 책은 아마도 어른들이 읽어야 좋으리라. "행복부터 가르쳐라" 

도발적인 제목이지만, 정말 그렇다. 수학지식, 과학지식, 언어 지식, 문학 지식 이전에 우리는 행복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행복을 먼저 배워야 한다. 

행복은 충분히 연습을 통하여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행복하지 안하고 불평만 하지 말고, 행복을 찾아 적극적으로 나서보자. 

그러면 행복은 바로 우리 곁에,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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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교과서- 청소년들의 행복 수업을 위한 첫걸음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 (문용린.최인철 외) 지음, 문다미 그림 / 월드김영사 / 2011년 8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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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부터 가르쳐라- 강하게 키워 행복하게 만드는 독일 학교의 행복수업
에언스트 프리츠-슈베어트 지음, 김태희 옮김 / 베가북스 / 2011년 8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11년 09월 2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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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어-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탈 벤 샤하르 지음, 노혜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12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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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부터 가르쳐라 - 강하게 키워 행복하게 만드는 독일 학교의 행복수업
에언스트 프리츠-슈베어트 지음, 김태희 옮김 / 베가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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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앞부분 추천하는 글에 이런 말이 나온다. 

"행복하기 위해 교육을 받지만, 교육 때문에 아이들은 오히려 불행하다." (18쪽)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인가. 교육의 목표가 행복인데, 오히려 그 목표를 없애는 방향으로 교육이 작동하고 있다니... 

학생들에게 학교가 좋냐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교를 싫다고 한다. 다시 질문을 바꾸어 학교에 다니는 것이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하리라. 

행복한 학교라면 학생들의 표정이 살아 있어야 하고, 활기찬 생동감이 느껴져야 하는데, 우리나라 학교 같은 경우는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모습의 교실에, 똑같은 모습의 책상과 의자에, 그리고 거의 같은 모습의 교사들에 둘러싸여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 지내기, 생동감은 커녕, 학생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힘든 상황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행복을 찾을 수 있는가? 

그런데도 행복을 찾을 수 있고, 또 행복은 가르칠 수 있으며, 행복은 연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얼마전에 읽은 행복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독일에서 행복수업을 한 사람의 경험담이다. 그래서 현실성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충분히적용이 가능하단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수업 시간에 국영수과 중심의 교육을 해야만 하는가? 미래형 교육과정에서는 창의적체험활동이라는 과목이 있던데, 이 과목의 비중이 커지면 독일처럼 행복수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교과서가 없다고? 앞에 언급했던 행복교과서도 있고, 교과서의 문제라기보다는 행복을 위해 함께 무엇인가를 해나가야겠다는 의지의 부족 아니던가? 

대학에 진학하면 행복이 시작된다는 착각 속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대학에 가면 대학생 나름대로 학비 문제부터 취업 문제로 온갖 고민에 빠져 있어, 행복을 추구할 여유가 없으며, 취업을 하면 또 실직되지 않기 위해 여유를 잃고 살아가지 않나? 

그런 삶을 평생 살아가게 해야 하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정말로 우리의 후배들이, 후손들이 이런 삶을 살기를 바라나? 

학생때부터 4-50대, 아니 노년이 되어서는 삶의 질을 유지하는 문제로 평생 고민만 하게 해야 하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나? 

행복은 저 멀리 있는 무엇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야 하지 않나?  

이런 면에서 행복 수업은 정말로 시급한 문제이고, 이 책이 그러한 행복 수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본다. 

앞부분 읽다보면 독일 청소년들도 우리나라 청소년들과 같은 고민, 같은 방황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이 청소년들의 문제가 단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 선진국이라는 독일도 이러한데, 그래서 이렇게 행복수업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행복을 찾아가게 해주고 있는데, 독일보다는 교육여건이 열악하고, 청소년들의 행복지수도 떨어지는 우리나라에서는 행복 수업은 뒤로 미룰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냥 오냐오냐 해주는 것은 아니고, 또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명확하게 나누되, 주로 해야 할 일을 중심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교육을 하고, 또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강인함을 키워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행복은 회피에서 오지 않고, 어려움과 맞부닥쳐 그것을 넘어섰을 때 온다고 하니, 하나하나 마음에 새겨둘 내용들이다.   

정말, 이제는 행복을 가르치자. 

행복을 배우게 하자.  

그래서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교육이 꼭 지식교과나 예체능 교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니... 

행복 수업도 하고,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수업도 하고 하면 학교는 학생들을 불행에 빠뜨리는 공간이 아니라, 행복하게 만드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덧글 

1. 이 책의 20쪽 칸트와 헤르만 헤세 같은 대문호라고 했는데... 아마도 칸트가 아니고, 괴테일 듯. 

2. 이 책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같은 그의 책과 함께 읽으면 더 좋다. 행복은 삶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치료를 주장한 프랭클의 책들은 강인한 의지를 키우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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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시대 지성 10인이 전하는 살아 있는 인+문학 강의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엮음 / 동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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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무엇을 못하고 있나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문학,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문학이 무엇을 못하고 있단 이야기니,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문학은 무엇을 못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작가회의에서 이런 문제점을 지니고 나름대로 강연을 한 내용을 모은 작품집이 이 책이다. 

우리는 문학에서 너무 멀리 나와있지 않는가. 

삶 자체가 파란만장한데, 앉아서 문학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는가? 아니 문학이 우리 삶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이유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하기도 한다. 

결국 문학은 우리에게 우리의 지금 삶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 문학은 사람들을 이끄는 선도자였다. 문학인은 백성의 지도자였다.  

지금은? 아니다. 

문학인은 지도자여서는 안된다. 다만 지금 민중들의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면 문학은 자신이 하여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학의 종말 

한 때 문학은 죽었다고, 일본의 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을 했고, 이 시대에는 문학자는 없다고 말을 했다.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에, 문학인들이 문학인들의 소명을 잊고, 잃고 있다고 말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정한 문학인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이들이 살아온 삶이 바로 문학이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시는 죽은 지 오래고, 희곡은 읽히기 위해 쓰이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하고, 수필은 유명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그것도 참 좋은 말들이 있는 글들을 제외하면 우리 삶에 충격을 주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 별로 없다고 봐야 한다. 

소설, 이도 마찬가지다. 현실이 너무도 급박하게 변해가므로, 도저히 소설의 서사구조가 현실의 사건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따라가기에도 급급해 현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우리 삶에 우리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총체적으로 문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아니 종말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담 비평가의 역할은 

문학, 죽었다고, 문학은 이래야 한다고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훈계를 하는 듯한 모습을 경계해야 한다. 문학이 죽으면 비평도 죽는다. 비평할 대상이 없는데, 어찌 비평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비평가는 문학가와 함께 가야 한다.  

문학가에게 명령하지 않고 함께 이렇게 해보자고 권유해야 한다.  

말은 쉽다. 그러나 행동은 어렵다. 사실, 비평보다는 창작이 더 힘들다. 남의 글을 재단하기는 쉬우나 자신이 글을 통해 세상을, 삶을 형상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작가회의에서 강의한 이 책을 보면 창작을 하는 사람은 몇이 안되고, 비평가들이 많다. 

이들이 하는 말은 옳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모습은 옳은 말들의 나열이 아니다. 다시 살아난, 우리들 곁에 다가온 문학이다.  

그 문학을 통해 우리 삶이 좀더 풍요로와 지는 모습이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김진숙의 글은 그 자체가 문학이다. 가슴을 울리는 문학.  

이 글은 그래서 비평가들의 글과는 다른 울림을 준다.

 

문학은 결국 소수자의 운동이다 

문학은 전체를 지향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의 길을 갈 뿐이다. 다른 이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가야한다고 하지 않는다.  

각자 다른 길들이 모여서 큰길을 이루고, 이 큰길로 독자들이 편하게 다니게 된다. 

자신만의 색깔을 내야 한다. 리얼리즘을 표방하든, 모더니즘을 표방하든, 아니면 포스트 모더니즘을 표방하든, 작가는 자신의 색깔을 내야 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삶의 총체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각자 다른 색깔들을 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문학은 철저하게 소수자다. 문학이 다수가 되는 순간, 다양성을 잃는 순간, 문학은 죽는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의 글이 바로 이런 소수자 운동을 다루고 있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운동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운동으로서의 소수자 운동. 

문학는 바로 이러한 소수자 운동이다.

 

문학이 살기 위해서는 

작가는 우선 현실의 삶에서 도피하면 안된다. 작가가 현실과 대결해서 그 대결의 힘듦이 작품 속에 나타나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조망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문학이 문학 역할을 할 수 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도가니"를 보라.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들춰내고 있다. 아니, 들춰내고 있으나 끊임없이 가려지고 있는 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 소설로 먼저 나왔다. 소설로 읽히고 많은 이들에게 생각을 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사형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듯 훌륭한 문학작품은 변주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이런 작품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작품을 통해서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만 문학이 산다. 

여기에 더하여 비평가들은 이런 작품들이 살 수 있는 구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책임을 문학인에게만 씌우지 말고, 도대체 문학을 할 수 없는 여건에 처한 사람들에게 문학을 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장시간 노동, 쉴새없이 돌아가는 교육, 이런 것들에 턱없이 부족한 도서관 등등의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  

그것이 문학인의 자세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함께 문학 내부의 고민이 함께 갈 때 문학은 살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점을 말하려 하고 있다. 

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특히 문학 작품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문학은 반드시 살아나야 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이 책 속에 있는 사진들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한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들. 그것을 각 발표자의 글이 끝날 때마다 한 장씩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삶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함을, 이 사진들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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