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충좌돌 - 중도의 재발견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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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적 포퓰리즘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적 발상이다, 현실성이 없다, 이상적이다, 너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등등.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 

아니, 사상들이 난무하는 시대. 가히 백가쟁명의 시대라 할 만하다. 

여기에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자신들의 선명성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 

좌파에 대한 규정도, 우파에 대한 규정도 제대로 하지 않은채, 상대방을 좌파다, 우파다, 다른 말로 하면 빨갱이다, 수구꼴통이다 하고 비난을 일삼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이럴 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자. 

도대체 좌파는 우파는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은 어디에 있는지. 

제목이 특이하다. 우리말에 있는 좌충우돌을 뒤집었다. 우충좌돌이다. 말 그대로 오른쪽에 부딪치고, 다음에 왼쪽에 부딪친단 말이다. 

오른쪽에 먼저 부딪친다는 말은 작가가 왼쪽의 입장에 더 많이 서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즉 비판받을 사항은 우파 쪽에 더 많이 있다는 말인데, 우파에 대한 비판은 많이 있으니, 우파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좌파 쪽에 쓴소리를 하겠다는 말이다. 

쓴소리를 무서워하면 발전이 없으니...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내게 도움이 되는 말은 듣기에 괴롭다고. 

우리는 비판을 비난으로 치환하고, 감정에서부터 거부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는지 반성부터 하고 본다. 

처음 시작이 좋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만 날지 않고, 몸통도 있어야 난다고.. 몸통이 있어야 중심이 잡힌다고. 

즉 잘 나는 새는 좌우 날개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 균형을 바로 몸통이 잡아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몸통. 사상적 경향으로 글쓴이는 중도를 이야기한다. 이 중도라는 개념은 명확하지 않다. 아니 고정되어 있지 않다. 중도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변화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중도라는 개념에는 생명력과 역동성, 불확정성이 있다. 

이 중도의 개념을 좀더 세분하면 중도우파, 중도, 중도좌파로 나눌 수 있다. 우파에 가깝게 가는 사람들을 중도우파라고 하면, 좌파 쪽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을 중도좌파라 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입장을 지닌 사람을 중도라 하겠지만, 이 중도는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고 중도 좌,우파가 명확히 갈리냐면 그도 아니다. 이들 역시 생성, 변화하는 집단이다. 딱히 이거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실체가 있다. 즉 명확한 경계를 이야기 하기 힘들지만, 이들도 하나의 집단으로 실체를 형성하고 있으면, 나름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구름을 생각하면 구름은 분명히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또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며 갈수록 구름의 경계를 확인할 수 없다. 내가 읽은 바로는 중도는 바로 이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집단이다. 

따라서 좌파나 우파는 선명성을 내세워서 자신들의 정체를 잘 드러내지만 중도는 이렇다할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지 않지만 자신들의 힘을 발휘한다. 그게 바로 우리나라 선거에서 투표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중도의 힘을 인식하고, 또 중도를 자신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좌파는 집권을 할 수 있다고 글쓴이는 주장한다. 사실, 중도의 지지를 받지 않는 좌파는 결코 집권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글쓴이는 좌파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정책들을 제시하고,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좌파의 여러 정책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며, 이런 문제점들이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좌파 쪽에서는 감정은 상할지 모르겠으나, 분명 비난이 아닌 비판에는 애정이 담겨 있기에 그 비판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우파 역시 이 책이 좌파를 비판한다고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이 책은 우파는 좌파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기에 더 얘기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비판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파 쪽에서 오히려 이 책을 자신들이 참조해서 정책방향을 정하면 진정한 보수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문제는 여러가지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들이기도 하다.  

등록금 인하 문제, 대졸자 대량 양산 사회 문제, 무상급식으로 사회 이슈가 된 복지 문제, 비정규직 문제, 부동산 문제, 신자유주의 문제, 그리고 경쟁에 관한 문제 

좌파와 우파가 명확히 갈리는 지점이기도 하고, 서로 선명성 경쟁을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들은 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들에서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서로 가능하다고만 하지,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고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면 안된다는 얘기다. 좋은 게 좋은 게 되려면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당연히 실천가능한, 지금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하고 말이다. 

글쓴이는 이 책에서 좌파는 그러한 세부적인, 구체적인 정책들을 제시하는데 실패하고 있지 않나 하는 비판을 하고 있다. 한 번에 세상을 바꾸면 좋지만, 과연 가능하냐를 생각해야 하고, 가능하지 않다면 점진적으로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글쓴이는 그 방법은 좌파만으로 되지 않고, 좌파와 중도, 중도좌파가 연합해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실천방안도 이야기하고 있어 좋은 참고거리가 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우파와 좌파의 주장이 모두 우리의 현실에서 멀어질 수도 있단 생각에 동의한다. 구체적인 방법,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중도를 끌어들일 때 좌파는 좌파의 이념을 잊으면 안된다. 좌파가 중도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좌파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이념을 견지하되, 현실에 맞게 이념을 조정해야 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만이 아니라, 몸통으로도 난다고 할 수 있지만, 몸통이 너무 비대해지면 날지 못한다. 몸통에 있는 살들을 날개를 움직이는 근육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좌파가 좌파의 이념에 갇혀서는 안되지만, 또 좌파의 이념을 잃어서도 안된다. 참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상이 등장하고, 이 사상들이 서로 부딪치며 현실성을 획득해나가는 것이리라. 

자신의 틀에 갇히면 안된다.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날고 싶다면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날 수 있다. 글쓴이가 하는 말이 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났다. 글쓴이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고 주장하니, 읽기에 불편하다. 정말로 어떤 방법이 최선일까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리라. 

또 이 책을 쓴 글쓴이를 바둑이나 장기의 훈수꾼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바둑이나 장기는 자신이 둘 때는 수가 잘 안 보인다. 그러나 옆에서 보는 사람은 직접 두는 사람보다 수가 잘 보인다. 판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에게 수를 가르쳐주는 순간, 그는 훈수꾼 소리를 듣고, 곱지 않은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이 좌파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런 기우도 참... 

오히려 이 책을 바둑이나 장기에서 해설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훈수꾼은 곱지 않은 시선을 맞닥뜨리지만, 해설자는 더 좋은 바둑, 장기를 위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해설자의 해설을 잘 들으면 그 때보다는 더 좋은 수를 둘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 좌파는 이 책을 해설자의 말로 읽어야 한다. 물론 우파도 마찬가지다. 그래야만 발전이 있다. 그렇다고 해설자의 말이 모두 옳다고만 해서는 안된다. 해설자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의 상황에 맞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 

건강한 새는 글쓴이의 말처럼, 좌우의 날개, 그리고 몸통이 조화를 이룬다.  

우리가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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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5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nye91 2011-10-06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괜찮습니다.

우마왕 2011-10-07 10:18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책 읽기 정말 좋은 날씨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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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말이 막히면 사회는 죽는다. 

말이 살아야 사회도 산다.  

이렇듯 말은 사회의 건강 척도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우린 얼마나 말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가? 

혹, 말에 대한 자기 검열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검열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말에 대한 자기 검열,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상태, 즉, 내 말이 아닌 남의 말로 살아가는 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논쟁이란 없고, 오직 사활만이 있을 뿐이다. 말로 인해 더 좋은 방안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말에서 지면 자신과 자신의 집단이 몰락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발전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 

말들과 말들이 서로 부딪히고, 서로를 다듬고, 보듬어 더 좋은 말들을 생산해내도록 해야 하는데... 

윤휴... 

난, 이 사람 이름을 박세당과 같이 사문난적(斯文亂敵)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사문... 유학자들이 자신들을 일컫는 말.. 그러면 사문난적이란 유학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유학을 어지럽힌다는 말이, 결국은 주자의 해석을 반대하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려는 사람이라니... 

공자도 아니고, 맹자도 아닌, 주자를 절대적인 자리에 올려놓고, 주자의 해석만이 바른 공자,맹자 해석인양 하고, 다른 해석을 내놓는 사람들을 사문난적이라 하여 배척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으니... 

윤휴가 중용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했다고 송시열이 그렇게 미워했다니... 원...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하나의 해석에만 매달리는 사회는 경직된 사회,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사회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실감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냥 성리학에 대한 다른 학설을 주장한 사람만으로 알고 있던 내게 이 책은 윤휴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오히려 이 책은 윤휴의 사문난적의 모습보다는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휴가 뼛속까지 북벌을 주장하고, 북벌을 하기 위해서 여러 사회 개혁, 국방 개혁을 시도했다는 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윤휴는 정적에게 미움을 사고, 결국은 이런 일들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한몫하는 것이 바로 당쟁이니... 서인이면 서인, 남인이면 남인, 그리고 서인에서도 노론과 소론으로,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갈리고 있고, 이들은 자기 당의 일이라면 왜곡도 서슴지 않았으니... 당론이면 개인은 따라야 한다는 지금의 모습과 별다른 점이 없다. 

윤휴의 개혁방안은 놀라운 것이다. 이런 정책이 시행이 되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일제시대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호패대신 지패를 쓰게 해서 사람들은 평등하다고 인식한 그, 그리고 서얼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 또 그가 제시한 '호포제는 양반 사대부가도 모두 군포를 납부하자는 방안인 반면, 구산제는 양반 개개인의 숫자를 조사해 모두 군포를 내게 하자는 법(222쪽)'이라고 이 법이 시행이 되면 우리나라 세금이 늘고, 그러면 재정이 풍족해지고, 이는 백성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을텐데... 백성에게는 좋았겠지만, 권력자들에게는 좋지 않았을테니... 

양반들이 들고 일어난 일은 당연한 일. 결국 양반들, 아니 권력가들의 반발에 이 정책은 제대로 시행도 되지 않고 폐지되고 만다. 

지금도 말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외치지만, 이것이 말뿐임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이런 말로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 때부터 유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이 권리는 가지되, 의무는 가지지 않는 역사적인 연원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윤휴는 아마도 제거대상 1호였을 것이다. 그는 정치를 당략에 따라 하지 않고, 옳음에 따라 했으며, 정치의 기본을 백성에게 두었지, 권력자들에게 두지 않았기에...그 시대에 용납이 되지 않았으리라. 

다만 나는 윤휴의 북벌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이유든 저런 이유든 전쟁이 일어나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일진대, 어떻게 백성을 위한다면서, 수비형이 아닌 공격형 무장을 주장했을까. 

청나라에 치욕을 당했다치더라도, 이미 그 치욕은 전의 일이고,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전쟁이라는, 북벌을 추진하기보다는 내실을 기하는 정책을 펼치도록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 시대적 한계이긴 하겠지만...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힌다. 글쓴이의 글솜씨가 어렵게 될 수 있는 역사책을 쉽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숙종이 윤휴를 그리도 중용하다가, 죽일 정도로 미워했는지에 대해서 이 책은 깊게 추적하지 않는다. 다만 숙종이 서인의 쿠테타를 두려워해 그러했으리라고 추측을 하고 있다. 또 이 책에서는 윤휴의 사상이, 도대체 어떤 면에서 다른 성리학자들과 다른지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다만 주자의 해석만이 옳으냐 하는 말과, 중요의 장구를 바꾸어 놓은 것 정도만 나오는데... 어떤 점에서 다른지가 더 구체적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이 책 내용과 제목인 침묵의 제국이라는 말이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윤휴가 죽게 되는 이유가 몇몇 단어 때문이라, 말로 인한 화이기에, 윤휴가 처형됨으로써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얼마나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다른 생각들이 어떻게 탄압을 받았는지를 중심으로 썼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제목하고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고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윤휴에 대해 이렇게 쉽게 읽히게 쓴 책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한다. 

침묵의 세계... 어쩌면 지금 우리도 침묵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닫힌 말의 세계에 살면 안된다. 말은 해방되어야 한다. 그 점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덧말 

식년은 자(子), 묘(卯), 오(吾), 유(酉)자가 들어가는 해라고 했는데... 한자어들은 서로 통한다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십이간지는 오(吾)가 오(午)이어야 하지 않나... 오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대중들이 읽는 책이라면 대중들이 많이 쓰는 한자어로 써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207쪽의 병오(丙吾)는 병오(丙午)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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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참 듣기 민망한 말이다. 

가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에 서야 하는 상황.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일이 바로 성희롱이다.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상대방이 희롱으로 느끼면 그건 바로 성희롱이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더 요구되는 행동이 바로 성과 관련된 행동들이다. 

그간 가부장적인 습성에 젖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던 일들이 이제는 성희롱이라는 잣대에 걸리기 시작했다. 

너무 지나친 거 아냐 하기보다는 이제는 나보다는 남의 처지에서 생각할 줄 아는, 그리고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행동할 줄 아는 사회가 되었구나 하고 자신의 행동을 들여다 보고, 조심해야 한다. 

이게 정상적인 사회로 가는 길이다. 

국회의원의 성희롱 발언이 있었고, 이를 제명하자는 동의안이 제청되었는데, 입법기관인 우리나라 국회에서 성희롱했다고 알려진 의원들이 제명당한 경우는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제명동의안은 부결되었다. 근소한 차이도 아니고, 압도적인 차이로. 

이거 입법기관이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면 그정도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고대 의대생 성추문사건도 마찬가지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피해자가 나와서 하소연할 정도로,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또다른 피해를 보고 있으니... 

명확히 밝혀진 일은 일벌백계해야 한다. 특히 사회지도층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그래야 시대의 변화가 사람의 변화로 바뀌게 된다. 

사람이 변해야 또 시대가 변하니... 이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고... 

국회의원들, 그리고 고대 관계자들, 아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 한 번 이 만화를 보라. 

만화,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송희,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새만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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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갇힌 사람들 - 불안과 강박을 치유하는 몸의 심리학
수지 오바크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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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몸이 지금 우리 시대의 화두다. 

얼짱을 지나 몸짱이라는 말이 유행한 지도 오래되었고, S라인이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에 성형미인이라는 말은 이제 자연스러운 말이 되었고, 오히려 자신이 성형한 사실을, 성형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몸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몸에 갇힌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생활이나 생각을 몸에 조정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에 조정당한다는 의미는, 우리 자신이 우리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서 규정된 몸을 올바른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몸을 고쳐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글쓴이는 어리 시절 부모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이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몸에 대한 태도가 결정된다는 여러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이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태도는 은연중에 부모가 자신의 몸을, 또는 자식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읽으며 우리나라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성형 열풍에 휩싸인 까닭은 결국 우리 윗세대들이 자신들의 몸에 많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부끄럽고 고쳐야 할 대상으로 여긴 태도가 우리에게 알게모르게 감염이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 몸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우리 윗세대들의 몸에 대한 태도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테고, 그렇다면 우리의 몸에 대한 태도가 우리 아래 세대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텐데...  

지금대로 나간다면 우리 아래 세대들은 자연스러운 한국인의 몸을 지닌 사람들이 거의 희귀할 정도로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또한 어린 시절 다른 사람들의 몸에 대한 태도 말고도, 지금 우리가 몸에 대해 이렇듯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기준을 지니고, 그것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몸을 고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여기게 된 데에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도 한다. 

이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우리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광고들을 보라. 다들 너무도 좋은 몸을 지닌 사람들의 모습만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온갖 다이어트 식품, 건강 관련 기구들의 광고가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 이 책에서는 셀레브리티 문화라고 하는데, 그들을 보면 그들의 몸을 따라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던가. 하다못해 개그프로그램에서도 살빼기, 아니면 몸짱 만들기 꼭지를 만들어 방송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면을 이 책의 글쓴이는 '몸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제 우리가 제조하고 창조해야 할 상품이 되었다'(255쪽)고 한다.

이렇듯 이 책은 앞부분에서는 어린시절 어른들의 아이의 행동에 대한, 또는 몸에 대한 태도에서 뒷부분에서는 사회,문화적인 문제로 내용을 더 확대 심화하고 있다. 

그런데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문제점은 정말 잘 분석해 놓았는데... 이게 문제다. 이런 문제는 이렇게 해서 발생했다까지는 이해하겠는데... 해결방법이 추상적이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임산부와 초보 엄마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몸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고, 허위 광고를 일삼는 기업들을 고발해야 하며, 몸을 당연한 것이자 즐거운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누구나 다 아는 말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이미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몸은 고쳐야 할 어떤 표준이 있으며, 그렇게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은 이 책을 읽은 우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채워가고 실천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은 유일무이한 자신의 몸이라는 생각을 우선 나부터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마지막에 글쓴이가 한 말처럼 내 몸을 당연한 것이자 즐거운 것으로 여겨야겠다. 내 몸은 기계의 한 부분이 아닌, 전체적인 몸, 그 자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겠다. 

성형천국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한 번에 성형열풍, 몸짱 열풍이 줄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몸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씩은 늘어날테니... 조금씩이라도 변해가지 않겠는가.

 

덧말 

1. 이 책의 앞 부분을 읽으며 "가족 세우기를 통한 교실 혁명"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도 아이들의 어떤 행동들은 가족들 중 누구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가족의 문제를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다. 내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은 나만이 아니다. 어릴 때 나와 관계 있는 사람들이 우선 큰 영향을 주었을테고, 지금은 함께 만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이 영향을 준다. 가족세우기를 통한 교실 혁명은  몸에 갇힌 사람들의 앞부분과 연결된다. 

2. 또 이 책의 뒷부분은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라는 책과 연결된다.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가 미국의 표준화된 기준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포착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각 나라의 특성에 맞는 치료방법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책에서 의료의 문제가 미국으로 통일되어 가는 과정이 "몸에 갇힌 사람들"에서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같은 광고로 사람들 몸을 통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3. 제목이 "몸에 갇힌 사람들"인데... 오히려 "몸을 가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우리가 외부에서 주어진 몸에 대한 생각(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으로 몸에 갇혀 다른 몸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오히려 의식,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틀에 몸을 가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몸을 가둔 사람들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단 생각을 해봤다. '몸을 가둔'이라고 하면 '몸에 갇힌'보다는 우리 자신이 몸을 가두지 않을 수도 있는, 우리가 주체가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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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 누스바움 교수가 전하는 교육의 미래
마사 누스바움 지음, 우석영 옮김 / 궁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교육의 위기 

지금 교육은 위기에 처해 있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몇몇 나라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그 중에서 교육이 경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한다고, 이게 문제라고 하는 말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우리나라도 어떻게 하면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는 교육을 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고 있고, 대학에서도 사회에서(사실 말은 사회라고 하지만, 이 사회는 바로 회사를 의미하고, 이는 경제성장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관점이 깔려 있다) 필요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학부를 개편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진학하는 모습을 보면 최상위권의 학생들은 의대로, 법대(이제는 로스쿨이라고 해야 하나?)로 빠져나가고 순수과학을 하는 학생들이나 인문학을 하는 학생들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교육은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교육을 관장하는 기관의 이름을 보라. 교육과학기술부이다. 이 말에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 기관의 이름 어디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강조는 찾을 수가 없다.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은 학문으로서 존립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교육의 위기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위기의 교육을 살리는 법 

누스바움의 책은 이러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지금 교육은 전부 시장중심주의로 흘러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익을 위한 교육일 뿐이다. 이익을 위한 교육에서 인간은 주체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고, 수동적인, 시키는대로 하는 인간으로 길러질 뿐이라고 한다. 이 때 필요한 교육이 무엇일까?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라고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토론교육이다. 토론 교육, 이는 바로 시민이 되게 하는 교육이기도 하다.  

그러면 토론의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식의 논쟁법을 익히는 일이라고 누스바움은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명료하게 펼치되, 남의 주장을 경청할 줄 아는 인간, 주장의 맹점을 살필 줄 아는 사람으로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검토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고 한다. 자기검토를 하지 못하는 인간, 즉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는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간은 목표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고, 서로를 공경심 없이 대하기 십상이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우리 교육에 비춰보자. 우리는 과연 자기검토,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는가? 오직 주어진 것만을 달달 외우도록, 생각이 거세된, 주어진 것만을 학습하도록 하지 않는가? 수많은 자기주도학습법이 난무하고 있지만, 말만 자기주도학습법이지 사실, 이마저도 주어진 학습방법을 밥을 받아먹듯 그냥 받아들이게끔 하지 않는가? 

그래서 소크라테스식 논쟁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사색은 그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중요하다'(104쪽)고 누스바움은 주장한다. 

이런 논쟁 방식에 이어 누스바움은 '세계 시민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세계 시민 교육은 자기 것을 잊고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것을 익히되, 남의 것도 익히는, 남의 것은 남의 것대로 나름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이는 어릴수록 좋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말 그대로 다름은 다름일 뿐이고, 이 다름들이 바로 다양성을 이루고, 우리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름을 몸으로 익히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가 바로 상상력을 기르는 일이다. 이 상상력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습득이 될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또 우리나라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홀대하며, 기술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래를 보고 교육을 한다면, 그리고 온전한 인간으로 홀로 설 수 있으며, 남과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은 이런 인문학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누스바움은 주장하는 것이다. 

단지 문학과 예술만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서도 형성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놀 시간이 없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놀 시간을 줘야한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이대로 가면 

교육은 희망이 없다. 무언가 방향을 바꿔야 한다. 방향은 명확하게 나와 있다. 단지 우리가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교육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전면적인 개편을 해야 한다.  

놀 시간이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리고 평가방식을 바꿔야 한다. 지금과 같은 일제식, 선다식 평가로는 학생들의 토론 능력, 자기성찰 능력, 남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다들, 위기다, 위기다 한다. 그럼에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고쳐야 하는데...  

따라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읽고, 우리 교육을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가자고 압력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단 한 번에 교육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우연히 잡혔던 토끼를 나무아래서 기다리는 어리석은 나무꾼의 모습과 같다.  

우리들 스스로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토의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교육분야에서 영향력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그들이 읽고, 이 책에 나온 내용과 우리나라 교육현실과 비교를 하고, 바람직한 교육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하자가 아니라,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야 한다. 

국민들이 단일한 집단인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지니고 있는 개개인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되게 교육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 살 길이다. 나라가 살 길이다. 지금처럼 가면... 앞날은 어둡다. 

 

덧말 

이 책의 옮긴이의 말. 참 읽을 만하다. 여러모로 생각할거리가 많다. 누스바움의 논의를 읽고, 이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용하려고 한,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 글이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두면 좋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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