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리, 용산, 두리반, 한진중공업, 포이동, 그리고 강정 마을... 

쫓겨가는 사람들이라고 제목을 붙여야 하나. 

자신의 고향, 삶터를 잃고, 어디론가 가야 하는 사람들. 

이들은 노마드의 삶을 선택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노마드가 되고 만다. 

호모 노마드. 세상을 발전시키는 주역이어야 할 이들이, 세상에서 내던져지고 버려지게 된다. 

우리는 사실, 노마드보다는 정착민의 삶을 더 좋아하지 않던가. 

그래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던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2호에서 강정마을과 그밖의 다른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처음 시작이 강정마을이고, 거의 끝부분이 다시 강정마을이다. 

아니 풀뿌리 민주주의를, 한밭레츠를 다룬 부분도, 협동조합을 다룬 부분도 다 강정마을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한진중공업을 다룬 부분도 마찬가지고... 

류은숙의 글 '고향에 대한 권리'에서 국가안보라는 말 대신에 인간 안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무기와 군사기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존엄성에 대한 관심사에서 지켜진다'(179쪽)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터를 지키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인간 안보이고, 이는 바로 인권을 지키는 행위가 된다는 이야기다. 

인권은 인간의 권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의 권리를 존중하고, 인간과 그 존재들이 공생을 해야하는 권리로 해석이 된다. 

가장 이기적인 유전자는 자신을 위해서 다른 유전자와 공생하기를 선택한다고 한다. 가장 이기적인 행위가 결국은 이타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존재들을 위해서도 고향을, 삶터를 지켜야 한다. 

이번 호는 이를 말하고 있다. 

제목처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또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세상은 아직도 희망이 넘친다고...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고, 이번 호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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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내가 뽑은 나의 시 - 한국작가회의 시분과
신경림.도종환 외 지음 / 책만드는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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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누가 누가 시를 더 잘 쓰나 

싸우는 나라 

 욕심쟁이 거인 이야기가 

국민교육헌장인 나라 

사법시험이 시 창작인 나라 

그런 나라에 가고 싶다                         (김율도, 율도국에 가고 싶다 2,3연. 이 책 76쪽)  

한국작가회의 시분과에서 내가 뽑은 나의 시를 선보였다.  
  
다른 시선집들이 선정위원이 있고, 이 선정위원들이 한 해 동안 나온 시들 중에 괜찮다고 여기는 시를 뽑아 선집을 만들었다면, 이 시집은 직접 시인들에게 자신들이 한 해 동안 쓴 시 중에서 남에게 알리고 싶은 시, 자신이 아끼는 시 등 한 편을 선정해 보내달라고 하여 그 시들로 책을 엮었다.  

한 시인이 자신의 시들을 엮어 낸 시집을 대학 동창회에 비긴다면, 이렇게 여러 시인들이 보내준 시들을 엮어 만든 시집은 초등학교 동창회에 비길 수 있다. 

대학 동창회는 사는 모습도 엇비슷하고, 생각도 엇비슷해, 그 집단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면, 초등학교 동창회는 서로들 다들 한 시기를 함께 했다는 공통점 외엔 사는 모습도, 생각하는 경향도 매우 다르다. 

이들은 함께 했던 시기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만나 자신들의 삶에 대해, 생각에 대해,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자유롭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또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고. 

이 시집이 그렇다. 

다양한 시인이 한 해 동안 그 시기를 함께 했다는 공통점 외엔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를 썼고, 자신만의 시를 보내 시집으로 엮었다. 

그렇다고 이 시집의 시들이 다 다르지는 않다. 초등학교 동창회의 다양함 속에서도 나름 비슷한 삶을 사는 동창들이 있듯이 이 시집에도 경향이 비슷한 시들이 있고, 정말로 다른 삶을 사는 동창이 있듯이 아주 다른 경향의 시들도 있다. 

말 그대로 시의 백화점이요, 다양한 시가 준비되어 있는 뷔페다. 

우리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시를 고르면 된다. 그리고 그 시를 맛있게 먹으면 된다.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친구들의 말을 재미있게 듣듯이, 그들의 삶에 공감하듯이, 나와 다른 삶을 산다고 배척하지 않듯이, 다양한 시들에서 재미를 느끼고, 마음의 위안을 받고, 정신의 포만감을 느끼면 된다. 

그것이 어느 시든 상관없다. 뷔페에서 모두가 똑같은 음식을 먹지 않듯이, 맛에 대한 품평이 다르듯이, 초등학교 동창들의 삶에 우열을 가르지 않듯이, 그냥 내 맘에 드는 시를 고르면 된다. 

이런 마음이 계속되면 시는 즐거운 내 일상이 된다. 

다양한 경향의 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우리 사회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네 하는 시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시는 결코 어렵지 않다. 이런 말을 누차 하지만... 사실, 아직도 시는 우리에게 어렵게 다가온다. 그럴 때 이런 시집을 보자.  

잘 보이는 곳에 시집을 두고 눈이 갈 때마다 집어들자. 집어들고, 아무 곳이나 펴자. 아무 시나 읽자. 

시집을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을테니까. 빨리 읽을 필요도 없을테니까. 

시간이 날 때, 눈이 갈 때 내가 펴본 시들이 어느 순간 내 맘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러면 성공이다. 

시는 바로 그 때 내 것이 된다. 그리고 계속 내 눈을 끌고, 내 손을 자기 쪽으로 이끌게 된다. 

나를 앞세우는 시대에 이 시집에 나와 있는 이 시... 이성준의 사진을 찍으며 중 한 부분(256쪽) 

(전략) 

나보다는 

카메라 앞의 상대를 먼저 생각해야 했고 

대상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 

나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피사체와 촬영자와의 함수관계 

나와 나의 의지를 지우고 

배경과 빛과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며 

상대 중심으로 나를 움직이다 보면 

(중략) 

나도 어느새 상대와 하나가 되었음을 

끄덕임 속에서 알게 되었다 

시는 이렇듯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때로는 지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감성을 자극하고, 시는 천의 얼굴도 우리에게 다가온다.

특히 이런 시집들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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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충좌돌 - 중도의 재발견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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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적 포퓰리즘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적 발상이다, 현실성이 없다, 이상적이다, 너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등등.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 

아니, 사상들이 난무하는 시대. 가히 백가쟁명의 시대라 할 만하다. 

여기에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자신들의 선명성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 

좌파에 대한 규정도, 우파에 대한 규정도 제대로 하지 않은채, 상대방을 좌파다, 우파다, 다른 말로 하면 빨갱이다, 수구꼴통이다 하고 비난을 일삼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이럴 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자. 

도대체 좌파는 우파는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은 어디에 있는지. 

제목이 특이하다. 우리말에 있는 좌충우돌을 뒤집었다. 우충좌돌이다. 말 그대로 오른쪽에 부딪치고, 다음에 왼쪽에 부딪친단 말이다. 

오른쪽에 먼저 부딪친다는 말은 작가가 왼쪽의 입장에 더 많이 서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즉 비판받을 사항은 우파 쪽에 더 많이 있다는 말인데, 우파에 대한 비판은 많이 있으니, 우파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좌파 쪽에 쓴소리를 하겠다는 말이다. 

쓴소리를 무서워하면 발전이 없으니...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내게 도움이 되는 말은 듣기에 괴롭다고. 

우리는 비판을 비난으로 치환하고, 감정에서부터 거부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는지 반성부터 하고 본다. 

처음 시작이 좋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만 날지 않고, 몸통도 있어야 난다고.. 몸통이 있어야 중심이 잡힌다고. 

즉 잘 나는 새는 좌우 날개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 균형을 바로 몸통이 잡아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몸통. 사상적 경향으로 글쓴이는 중도를 이야기한다. 이 중도라는 개념은 명확하지 않다. 아니 고정되어 있지 않다. 중도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변화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중도라는 개념에는 생명력과 역동성, 불확정성이 있다. 

이 중도의 개념을 좀더 세분하면 중도우파, 중도, 중도좌파로 나눌 수 있다. 우파에 가깝게 가는 사람들을 중도우파라고 하면, 좌파 쪽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을 중도좌파라 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입장을 지닌 사람을 중도라 하겠지만, 이 중도는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고 중도 좌,우파가 명확히 갈리냐면 그도 아니다. 이들 역시 생성, 변화하는 집단이다. 딱히 이거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실체가 있다. 즉 명확한 경계를 이야기 하기 힘들지만, 이들도 하나의 집단으로 실체를 형성하고 있으면, 나름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구름을 생각하면 구름은 분명히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또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며 갈수록 구름의 경계를 확인할 수 없다. 내가 읽은 바로는 중도는 바로 이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집단이다. 

따라서 좌파나 우파는 선명성을 내세워서 자신들의 정체를 잘 드러내지만 중도는 이렇다할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지 않지만 자신들의 힘을 발휘한다. 그게 바로 우리나라 선거에서 투표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중도의 힘을 인식하고, 또 중도를 자신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좌파는 집권을 할 수 있다고 글쓴이는 주장한다. 사실, 중도의 지지를 받지 않는 좌파는 결코 집권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글쓴이는 좌파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정책들을 제시하고,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좌파의 여러 정책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며, 이런 문제점들이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좌파 쪽에서는 감정은 상할지 모르겠으나, 분명 비난이 아닌 비판에는 애정이 담겨 있기에 그 비판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우파 역시 이 책이 좌파를 비판한다고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이 책은 우파는 좌파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기에 더 얘기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비판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파 쪽에서 오히려 이 책을 자신들이 참조해서 정책방향을 정하면 진정한 보수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문제는 여러가지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들이기도 하다.  

등록금 인하 문제, 대졸자 대량 양산 사회 문제, 무상급식으로 사회 이슈가 된 복지 문제, 비정규직 문제, 부동산 문제, 신자유주의 문제, 그리고 경쟁에 관한 문제 

좌파와 우파가 명확히 갈리는 지점이기도 하고, 서로 선명성 경쟁을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들은 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들에서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서로 가능하다고만 하지,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고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면 안된다는 얘기다. 좋은 게 좋은 게 되려면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당연히 실천가능한, 지금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하고 말이다. 

글쓴이는 이 책에서 좌파는 그러한 세부적인, 구체적인 정책들을 제시하는데 실패하고 있지 않나 하는 비판을 하고 있다. 한 번에 세상을 바꾸면 좋지만, 과연 가능하냐를 생각해야 하고, 가능하지 않다면 점진적으로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글쓴이는 그 방법은 좌파만으로 되지 않고, 좌파와 중도, 중도좌파가 연합해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실천방안도 이야기하고 있어 좋은 참고거리가 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우파와 좌파의 주장이 모두 우리의 현실에서 멀어질 수도 있단 생각에 동의한다. 구체적인 방법,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중도를 끌어들일 때 좌파는 좌파의 이념을 잊으면 안된다. 좌파가 중도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좌파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이념을 견지하되, 현실에 맞게 이념을 조정해야 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만이 아니라, 몸통으로도 난다고 할 수 있지만, 몸통이 너무 비대해지면 날지 못한다. 몸통에 있는 살들을 날개를 움직이는 근육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좌파가 좌파의 이념에 갇혀서는 안되지만, 또 좌파의 이념을 잃어서도 안된다. 참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상이 등장하고, 이 사상들이 서로 부딪치며 현실성을 획득해나가는 것이리라. 

자신의 틀에 갇히면 안된다.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날고 싶다면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날 수 있다. 글쓴이가 하는 말이 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났다. 글쓴이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고 주장하니, 읽기에 불편하다. 정말로 어떤 방법이 최선일까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리라. 

또 이 책을 쓴 글쓴이를 바둑이나 장기의 훈수꾼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바둑이나 장기는 자신이 둘 때는 수가 잘 안 보인다. 그러나 옆에서 보는 사람은 직접 두는 사람보다 수가 잘 보인다. 판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에게 수를 가르쳐주는 순간, 그는 훈수꾼 소리를 듣고, 곱지 않은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이 좌파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런 기우도 참... 

오히려 이 책을 바둑이나 장기에서 해설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훈수꾼은 곱지 않은 시선을 맞닥뜨리지만, 해설자는 더 좋은 바둑, 장기를 위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해설자의 해설을 잘 들으면 그 때보다는 더 좋은 수를 둘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 좌파는 이 책을 해설자의 말로 읽어야 한다. 물론 우파도 마찬가지다. 그래야만 발전이 있다. 그렇다고 해설자의 말이 모두 옳다고만 해서는 안된다. 해설자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의 상황에 맞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 

건강한 새는 글쓴이의 말처럼, 좌우의 날개, 그리고 몸통이 조화를 이룬다.  

우리가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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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5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nye91 2011-10-06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괜찮습니다.

우마왕 2011-10-07 10:18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책 읽기 정말 좋은 날씨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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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말이 막히면 사회는 죽는다. 

말이 살아야 사회도 산다.  

이렇듯 말은 사회의 건강 척도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우린 얼마나 말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가? 

혹, 말에 대한 자기 검열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검열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말에 대한 자기 검열,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상태, 즉, 내 말이 아닌 남의 말로 살아가는 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논쟁이란 없고, 오직 사활만이 있을 뿐이다. 말로 인해 더 좋은 방안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말에서 지면 자신과 자신의 집단이 몰락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발전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 

말들과 말들이 서로 부딪히고, 서로를 다듬고, 보듬어 더 좋은 말들을 생산해내도록 해야 하는데... 

윤휴... 

난, 이 사람 이름을 박세당과 같이 사문난적(斯文亂敵)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사문... 유학자들이 자신들을 일컫는 말.. 그러면 사문난적이란 유학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유학을 어지럽힌다는 말이, 결국은 주자의 해석을 반대하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려는 사람이라니... 

공자도 아니고, 맹자도 아닌, 주자를 절대적인 자리에 올려놓고, 주자의 해석만이 바른 공자,맹자 해석인양 하고, 다른 해석을 내놓는 사람들을 사문난적이라 하여 배척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으니... 

윤휴가 중용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했다고 송시열이 그렇게 미워했다니... 원...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하나의 해석에만 매달리는 사회는 경직된 사회,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사회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실감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냥 성리학에 대한 다른 학설을 주장한 사람만으로 알고 있던 내게 이 책은 윤휴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오히려 이 책은 윤휴의 사문난적의 모습보다는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휴가 뼛속까지 북벌을 주장하고, 북벌을 하기 위해서 여러 사회 개혁, 국방 개혁을 시도했다는 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윤휴는 정적에게 미움을 사고, 결국은 이런 일들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한몫하는 것이 바로 당쟁이니... 서인이면 서인, 남인이면 남인, 그리고 서인에서도 노론과 소론으로,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갈리고 있고, 이들은 자기 당의 일이라면 왜곡도 서슴지 않았으니... 당론이면 개인은 따라야 한다는 지금의 모습과 별다른 점이 없다. 

윤휴의 개혁방안은 놀라운 것이다. 이런 정책이 시행이 되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일제시대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호패대신 지패를 쓰게 해서 사람들은 평등하다고 인식한 그, 그리고 서얼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 또 그가 제시한 '호포제는 양반 사대부가도 모두 군포를 납부하자는 방안인 반면, 구산제는 양반 개개인의 숫자를 조사해 모두 군포를 내게 하자는 법(222쪽)'이라고 이 법이 시행이 되면 우리나라 세금이 늘고, 그러면 재정이 풍족해지고, 이는 백성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을텐데... 백성에게는 좋았겠지만, 권력자들에게는 좋지 않았을테니... 

양반들이 들고 일어난 일은 당연한 일. 결국 양반들, 아니 권력가들의 반발에 이 정책은 제대로 시행도 되지 않고 폐지되고 만다. 

지금도 말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외치지만, 이것이 말뿐임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이런 말로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 때부터 유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이 권리는 가지되, 의무는 가지지 않는 역사적인 연원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윤휴는 아마도 제거대상 1호였을 것이다. 그는 정치를 당략에 따라 하지 않고, 옳음에 따라 했으며, 정치의 기본을 백성에게 두었지, 권력자들에게 두지 않았기에...그 시대에 용납이 되지 않았으리라. 

다만 나는 윤휴의 북벌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이유든 저런 이유든 전쟁이 일어나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일진대, 어떻게 백성을 위한다면서, 수비형이 아닌 공격형 무장을 주장했을까. 

청나라에 치욕을 당했다치더라도, 이미 그 치욕은 전의 일이고,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전쟁이라는, 북벌을 추진하기보다는 내실을 기하는 정책을 펼치도록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 시대적 한계이긴 하겠지만...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힌다. 글쓴이의 글솜씨가 어렵게 될 수 있는 역사책을 쉽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숙종이 윤휴를 그리도 중용하다가, 죽일 정도로 미워했는지에 대해서 이 책은 깊게 추적하지 않는다. 다만 숙종이 서인의 쿠테타를 두려워해 그러했으리라고 추측을 하고 있다. 또 이 책에서는 윤휴의 사상이, 도대체 어떤 면에서 다른 성리학자들과 다른지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다만 주자의 해석만이 옳으냐 하는 말과, 중요의 장구를 바꾸어 놓은 것 정도만 나오는데... 어떤 점에서 다른지가 더 구체적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이 책 내용과 제목인 침묵의 제국이라는 말이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윤휴가 죽게 되는 이유가 몇몇 단어 때문이라, 말로 인한 화이기에, 윤휴가 처형됨으로써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얼마나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다른 생각들이 어떻게 탄압을 받았는지를 중심으로 썼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제목하고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고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윤휴에 대해 이렇게 쉽게 읽히게 쓴 책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한다. 

침묵의 세계... 어쩌면 지금 우리도 침묵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닫힌 말의 세계에 살면 안된다. 말은 해방되어야 한다. 그 점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덧말 

식년은 자(子), 묘(卯), 오(吾), 유(酉)자가 들어가는 해라고 했는데... 한자어들은 서로 통한다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십이간지는 오(吾)가 오(午)이어야 하지 않나... 오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대중들이 읽는 책이라면 대중들이 많이 쓰는 한자어로 써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207쪽의 병오(丙吾)는 병오(丙午)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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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참 듣기 민망한 말이다. 

가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에 서야 하는 상황.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일이 바로 성희롱이다.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상대방이 희롱으로 느끼면 그건 바로 성희롱이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더 요구되는 행동이 바로 성과 관련된 행동들이다. 

그간 가부장적인 습성에 젖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던 일들이 이제는 성희롱이라는 잣대에 걸리기 시작했다. 

너무 지나친 거 아냐 하기보다는 이제는 나보다는 남의 처지에서 생각할 줄 아는, 그리고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행동할 줄 아는 사회가 되었구나 하고 자신의 행동을 들여다 보고, 조심해야 한다. 

이게 정상적인 사회로 가는 길이다. 

국회의원의 성희롱 발언이 있었고, 이를 제명하자는 동의안이 제청되었는데, 입법기관인 우리나라 국회에서 성희롱했다고 알려진 의원들이 제명당한 경우는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제명동의안은 부결되었다. 근소한 차이도 아니고, 압도적인 차이로. 

이거 입법기관이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면 그정도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고대 의대생 성추문사건도 마찬가지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피해자가 나와서 하소연할 정도로,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또다른 피해를 보고 있으니... 

명확히 밝혀진 일은 일벌백계해야 한다. 특히 사회지도층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그래야 시대의 변화가 사람의 변화로 바뀌게 된다. 

사람이 변해야 또 시대가 변하니... 이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고... 

국회의원들, 그리고 고대 관계자들, 아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 한 번 이 만화를 보라. 

만화,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송희,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새만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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