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누아르 달달북다 3
한정현 지음 / 북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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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누아르가 함께 쓰일 수가 있을까? 누아르라고 하면 우선 폭력이 떠오르니,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소설은 가장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는 두 낱말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니 폭력을 사랑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하니까 때리는 거야 라는 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자식 매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있으니, 폭력과 사랑이 하나로 묶여 사용된 예가 있다.

 

반대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폭력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에는 폭력에 사랑이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폭력은 폭력일 뿐이고, 이러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러브 누아르는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났던 폭력을 이야기한다고 하면 될까? 이 소설에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한쪽에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기는 나온다. 직위를 이용해 약자의 성을 이용하는 그런 모습.

 

1980년대, 독재자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다. 권위주의적 시대라고 해도 좋다. 여기에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그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지 않았던가. 또한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교육을 받게 하지 않고 직업을 갖도록 내모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동생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공장에 취업한 장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딸들에게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주입시켰던 시대. 그것이 누아르가 아니고 무엇일까? 아들에게는 환한 미래가 보장되는, 적어도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는 때에 딸에게는 캄캄한 현재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사랑,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졌던 그러한 일들이 바로 폭력이다.

 

소설의 주인공 도 마찬가지다. ‘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직장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는 없다. 그냥 성을 따라서 미쓰 박이다. 다른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미쓰 윤, 미쓰 최, 미쓰 리일 뿐이다.

 

이름을 불리지 못하는 존재, 자신의 정체성이 남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였던 것.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러브 누아르라고 하면 이제는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로 바뀌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것.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미쓰 리가 그런 역할을 한다. 차별이 심한 직장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지내는 존재. 그런 존재감만으로 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을 은 사랑한다. 이때 사랑은 이성애적, 또는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지 않고, 동경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사랑.

 

은 미쓰 리가 무엇을 쓰는가를 본다. 그것이 바로 러브 누아르라는 소설이다. 이렇게 작가는 소설 속에서 또다른 소설을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 소설을 통해서 은 비로소 남이 규정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은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이제는 남이 주입한 대로 살아가는 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찾는 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미쓰 리의 이름이 이성희라고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름이 없는 미쓰 리가 아니라 당당한 작가인 이성희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도 마찬가지다. 미쓰 박이 아니라 박 선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려 한다.

 

이것이 러브 누아르. 홍콩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폭력으로 악당들을 물리치지 않나? 이 소설에서는 사랑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아직은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를 강타하기 전, 직장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지 못하던 때, 그때에도 자신들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또 주변의 주입에 넘어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던 사람들이 있었음도 이 짧은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여성들에게는 어둠이었던 시대. 그 시대에서 당당한 주체로 서 나가려는 모습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음을, 그러나 그것이 지금 시대에도 어려운 일임을 소설 마지막에 작가 자신을 등장시켜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젠 사랑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러브 누아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냥 주어지는 일은 없음을, 많은 사람들의 좌절을 딛고 한발 한발 나아간 결과가 지금 그나마 여성들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음을, 그러나 이것이 완결이 아니라 진행형임을 생각하라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러브 누아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하는 듯하다.

 

이 소설은 본래 기획이 칙릿(Chick Lit)’이 주제였다고 한다. 젊은 여성이 자신의 일과 사랑을 당당하게 이뤄나가는 모습을 다룬 작품들을 단순하게 칙릿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렇지만 작가는 과연 우리 시대에도 칙릿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지금도 의문시되는데, 과거에 그런 일이? 물론 있을 수도 있지. 몇몇 뛰어난 인물들에게는. 하지만 그 뛰어남은 보통이 되지 못하고, 개인의 탁월함에 그칠 수밖에 없었으니, ‘칙릿이 하나의 장르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도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등장시킨 인물이 박 선이라고... 칙릿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환상소설이라고, 작가가 꿈꿀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자신의 꿈 앞에, 좋아하는 사람 앞에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기게 희망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그들의 슬픔보다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78)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등장인물인 박 선을 보면 작가의 의도가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고. 이제 굳이 칙릿이라는 장르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당당할 수 있고, 주체성을 지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면, 그러한 인물은 이제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을 테니까.

 

소설에는 현재 없는 인물, 또는 현재와 불화하는 인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니 그런 세상이 온다면 칙릿이란 장르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한 날을 기대하면서... 한정현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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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 온다]에 출판사 직원인 은숙이 나온다. 광주를 겪은, 그러나 민주화가 되지 않은 시대, 출판 검열의 시대. 검열관에게 뺨을 맞은 은숙.


  엄혹한 시대다. 수많은 죽음을 겪고도 다시 죽음과 같은 검열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시대. 소설 속 이야기지만, 그런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시집을 설명하는 글에서 시인 김혜순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다.


  뭐 망설일 것 있나? 읽어봐야지. [소년이 온다]가 소설로 쓰였다면, 시는 그런 사건을 좀더 압축적으로, 감정적으로 전달해줄 테니.


  뺨 일곱 대를 맞았다고 한다. 한 대에 시 한 편. 시인은 그 분노를 시로 쏟아내었다. 하지만 밝힐 수는 없는 일.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일. 시 자체가 직설이 아니라 세계를 자신의 감정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니.


차마 일곱 번째 시는 발표하지 못했다고, 어디엔가 두었다가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하는데... 


'경찰서에 따라가서 뺨을 일곱 대 맞은 적도 있었다. 맞으면서 숫자를 세었다. 하숙집에 엎드려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 출판사를 결근하고 썼다. 그 시들을 몇 년 묵혔다가 이 시집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쓴 일곱번째 시는 걸릴 것 같아 애당초 넣지 않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집엔 여섯 편만 들어 있다.' (2017년 복간본, 시인의 말에서. 아마 1988년 초판본에는 이런 말도 싣지 못했으리라)


이런 사건을 '그곳'이란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세계 제일의 창작소' (그곳 1)이고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져 떨어지는'(그곳 1) 곳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 만들어진 사실은 진실처럼 유통이 된다. 그런 시대를 거쳐 지금은 최소한 그러한 거짓들이 사실로 둔갑하는 세상은 아닐 거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지는, 세계 제일의 창작소'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버젓이 사실을 왜곡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으니... 그곳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그곳에서 창작되는 많은 스토리들이 우리 삶을 옥죄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곳의 존재를 안다. 그곳이 실제했음을, 그곳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스토리와 테마들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곳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나 만나는 '그곳'이 되어야 한다. 


복간된 김혜순의 시집 [어느 별의 지옥] 맨 앞 부분에 실린 '그곳' 연작시 여섯 편. 그러한 그곳이 있는 곳이 지옥이다. 지옥은 꼭 죽어서만 가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시집 제목인 '어느 별의 지옥'을 찾아 없애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 본다. '그곳'과는 다른 의미겠지만.


  어느 별의 지옥


무덤은 여기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숨 들이켜고 있는 곳

바다에 달 뜨고 달 지듯

두 개의 무덤 아래

죽은 자들이 모여

망망대해를 펼치고 오므리는

달을 올리고 끌어당기는

여자의 깊은 몸 구중궁궐

또 한세상

몇 세기 전의 어둠이 아직도

피 흘리며 갇혀 있다가

초승달 떠오를 때

기지개 켜는 곳

뱀과 뱀이 입 맞추고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천 번

되살아나고 뒈지는 곳

어느 별의 지옥은 여기 


김혜순, 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사. 2025년. 초판 2쇄.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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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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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소설이 실렸다. 다른 매체에 발표되었던 작품들. 한 자리에 모인다. 한 작가가 쓴 작품이라도 다 다른 내용일 수밖에 없다. 그때그때 작가는 다른 주제를 가지고, 다른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책으로 묶이면 무언가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같은 작가니까, 그 작가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가 그러한 공통점을 발견하면 역시 그렇지 하지만, 공통점을 찾지 못하면 뭐야? 하는 마음을 먹는다. 작품 한 편이 온전한 세계니까, 그냥 그 세계를 감상하면 되는데도...


이 작품집에서도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먼저 생긴다. 김기태라는 작가는 어떤 점을 주로 소설로 쓰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읽다가 포기한다. 뭐, 꼭 공통점을 찾아야 해. 그냥 작가가 그때그때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계를 같이 거닐면 안돼 하는 마음을 지닌다.


그냥 읽는다. 한편 한편을 독립적으로. 연결지을 생각은 버린 채. 그렇게 읽다가 어떤 작품이 내 맘에 가장 들었지, 우리 현실하고 어떻게 연결이 될까 하는 생각이 또 든다. 참, 가지가지한다. 그냥 읽고 받아들이면 될 것을.


작품에 우위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위가 아니라 내 맘에 얼마나 드냐를 생각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래, 같은 작가의 소설 중에서도 내 맘에 쏙 드는 것이 있고,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는 소설이 있을 수도 있지 뭐.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니까. 그렇게 마음 먹는다.


연예인이 나오는 소설이 두 편이다. '세상 모든 바다''로나, 우리의 별'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연예인이 아니다. 김기태는 특출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 주인공을 바라보는 보통 사람을 등장시킨다. 우린 이런 보통사람들에 가까울 테니까.


이 두 작품을 읽으며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한다. 연예인을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설왕설래들. 그러다 그렇게 설왕설래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생각한다. 연예인을 비판하든 두둔하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지니고 산다.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각을 지니고 산다. 그들의 신념이나 행동이 윤리나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굳이 뭐라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무어라 한다. 이게 문제다.


그런 행태가 두 소설에 나타나 있는데, 그럼에도 연에인을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의 처지에서 소설이 쓰였기에 무언가 따뜻한 느낌이 든다. 악성 댓글로 인해 피곤해지는 마음이 이 소설들을 통해서는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다른 세계를 이해할 마음이 생긴다.


평범한 삶을 평범하게 그려내고 있고, 그런 평범한 삶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덤덤하게 펼쳐진다.


'롤링 선더 러브, 전조등, 태엽은 12와 1/2바퀴, 무겁고 높은, 팍스 아토미카' 등이 그렇다. 교육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보편 교양' 역시 마지막에 가면 평범한 학생들이 등장해서 그들의 삶을 우리가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평범함이 바로 우리 삶이다. 이 평범함은 멀리서 봤을 때 평범함이지만, 각 개인에게는 비범함이다. 자신에게는 하나뿐인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평범한 삶은 곧 비범한 삶이 된다.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할 삶이 된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그 점을 실감한다. 중심에 들지 못하는 삶. 그러나 자신만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듣고 알게 되는 과정. 그리고 '기립하시오. 당신도!'라는 말을 서로에게 주고받는 과정.


이 둘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팍팍한 현실도 삶을 뭉뚱그려 놓고 보면 평범함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비범하지만 평범한 삶.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김기태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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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3-28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관계, 가족, 계급, 교육 등을 상상해 본 책이었습니다.

kinye91 2025-03-28 09:39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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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호명사회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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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를 읽고 많은 내용에 공감했다. 그렇다. 이제는 집단의 일원이 아닌 개인으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집단이나 공동체의 이름 속에 개인이 사라지는 시대는 아니다. 개인이 우뚝 선 시대, 핵개인의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핵개인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핵개인이라는 말이 그냥 너는 너대로만 살라는 말일까? 자립을 이야기하고, 독립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홀로라는 말과는 다르다. 자립이나 독립에는 연대, 함께함이 포함되어 있다. 고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개인은 또다른 핵개인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핵개인이 핵개인을 만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이름을 불러야 한다. 나의 이름을 알리고, 상대의 이름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불러야 한다. 그러면 서로 함께할 수 있다.


이런 사회가 '호명사회'다. 이름을 부르는 사회라는 말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함께한다는 의미다. 즉 독립된 개인들이 모여 연대를 하고 함께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함께하는 모임은 하나일 필요가 없다. 직장도 이제는 하나에서 여럿으로 바뀌는 시대가 되었으니, 호명사회에서 모임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여러 모임을 기웃거린다는 말은 아니다. 모임을 갖는다는 의미는 자신이 이미 그 모임을 할 정도로 숙련되었다는 말이다. 


즉 핵개인의 시대라고 해서 숙련된 기술, 또는 저만의 장점을 지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핵개인의 시대에는 적어도 이름을 알리고 불리기 위해서는 저만의 장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사회와 산업의 혁신 속도가 빨라질수록 개인의 커리어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핵심은 '축적의 시간'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 행위를 팔기보다 의미를 팔고, 자신의 진정성을 제공'(157쪽)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조예와 취향이 될 것이다.'(157쪽)고 하고 있다.


남다른 조예, 자기만의 취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함께한다. 대등하게. 그런 사회가 호명사회다.


이런 호명사회에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남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부르는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지닌 덕목이 '투명성과 동류를 모으고 선의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


자신이 어떻게 하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 이것을 상대에게 투영하면 상대 역시 투명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가 하는 일이 가감없이 내게 전달될 때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면, 그 관계는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핵개인의 시대는 당연히 호명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우리를 이루는데, 그 우리는 굳게 닫혀 있는 '우리'가 아니라 언제든지 축소하고 확장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즉 열려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호명사회라는 말, 듣기에도 좋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오는 말이다. 열린 사회라는 말이 될 테니까. 또한 호명사회라는 말에서 요즘 공유 주거공간을 생각하기도 한다. 따로 하지만 함께하는 공간. 


그런데 읽으면서 명쾌한 이야기에 동감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축적해야 하는 핵개인, 자신의 이름을 지녀야 하는 핵개인이 될 수 있는 사회 환경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에서 논의하는 것은 개인이 어떻게 해야한다가 주를 이루는데, 개인은 바뀐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지 않나. 오히려 이렇게 애쓰는 개인들이 나가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 환경, 제도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개인의 노력이 모여 사회를 바꿀 수도 있지만, 소수의 개인이 성공한다고 다수가 성공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니 다수가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의무이고,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해야할 의무 아닐까? 


개인에서 사회로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했으니, 그렇다면 다음 책에서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정치적 노력을 이야기하고, 함께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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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03-27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로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그곳에서 늘 바뀐다고 느껴요.
꽃이름 벌레이름 나무이름 새이름
이 이름 하나를 마음에 놓으며
서로 만날 수 있고요.

kinye91 2025-03-27 09:2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름을 부르면 서로의 만남이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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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 - 사로잡힌 영혼들의 이야기
비비언 고닉 지음, 성원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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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미국에 공산당이 있었다고?"


매카시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미국에도 공산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카시즘이 바로 미국 사회에 속해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미국 사회에서 축출하고자 벌인 사상투쟁이었으니.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미국에 공산당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 필요도 없다. 사실 공산당은 존재한다고 해도 미미한 영향력만 행사할 뿐이기 때문에... 사회당조차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미국에서 공산당이라니...


그럼에도 미국에 공산당이 있었고, 그들이 힘을 발휘하던 때도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공산당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사건은 매카시즘이 아니라 흐루쇼프가 폭록한 스탈린 시대의 참상들이라고 한다. (12쪽)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미국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던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지금 그들은 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제목이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다.  작은 제목으로는 '사로잡힌 영혼들의 이야기'라고 되어 있고. 즉 한때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활동을 열심히 했던, 그것도 미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물론 과거형이다. 이 책은 1970년대에 쓰여졌다고 한다. 최근에 다시 발간되기는 했지만...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공산주의는 사라졌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공산주의 활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반공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고, 자본가의 삶을 사는 사람도, 여전히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다양한 분포를 보이지만 확실한 것은 미국에서 공산주의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사상이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그때 활동했던 기억들을 모두 다르게 기억하고, 그런 기억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이 책은 현재에 유용하기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과거 회상에 도움이 된다고? 단지, 그것때문에 책을 쓸까? 아니다. 과거 회상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즉 한때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사람들, 당이라는 조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작은 차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차이로 알고 서로를 배척하던 사람들. 그런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들을 읽으면 지금-여기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페미니즘 활동을 하던 때에,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서 벌어진 차이들을 마치 적으로 여기는 듯한 모습들을 발견하면서 저자는 1930-196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걸어온 길에서 지금 걸어갈 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마치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 책이 먼저 나왔지만 읽는 순서는 상관이 없다.


소련이 붕괴된 다음에 소련에 속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책. 이 책에는 수많은 소련 사람들(물론 지금은 독립한 나라들 사람도 속한다. 한때는 소련인이었지만, 이제는 각자 자기 나라의 국민이 된 사람들. 이 사람들이 소련 때를 회상하고, 또 소련이 붕괴된 직후의 사회를 회상하고 있는데, 비비안 고닉이 쓴 이 책은 1970년대에 미국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미국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다른 것은 몰라도 이들은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것. 여기에 개인과 조직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과연 개인을 누르는 조직이 존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조직이 우선이고, 조직에 개인이 종속되면, 언젠가는 조직이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이 책에 나오는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공산주의'하면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으로 취급한다. 공산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종북좌파라는 말로 뭉뚱그려 하나로 취급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편협한 사고인지 알 수 있게 되겠지만... 한 조직에 속한 개인들도 각자의 개성이 있음을, 자신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어떤 한 흐름 속에 개인들을 집어넣으려고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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