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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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로드의 글이다. [자미]를 읽고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은 다음에 읽게 된 글. 두 책을 이미 읽었기에 로드의 주장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함을, 그런 점을 평생에 걸쳐 이야기했던, 여성이자 레즈비언이자 흑인이고, 어머니, 시인이자 전사였던 사람.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으면 전사가 되려 했을까? 아니 전사가 되었을까? 전사로서 싸우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 오드리 로드라고 할 수 있다. 글로, 행동으로, 자신의 삶 전체로 차이를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보여준 사람.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감동적이다. 특히 첫글에 실린 이말. 1960년대에 인기를 끌었다는 포스터에 실린 말을 로드는 인용한다. '그는 흑인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형제입니다!' (36쪽)


무엇이 문제일까? 여기서는 차이를 무시하려 한다. 왜 흑인이 아니라고 하나? 물론 흑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라고,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흑인인 것은 명확하다. 그래서 이 글은 흑인이라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뭉뚱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로드는 이 문장을 바꾼다.


'나는 흑인 레즈비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37쪽)


'그'에서 '나'로 주체를 바꾸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서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면서 형제, 자매라는 말로 함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함께함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그 차이를 품고 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오드리 로드의 이 말이 바로 이러한 차이의 인정, 함께함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다.


'우리는 우리의 차이 속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가장 취약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들 중 두 가지는 차이를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 차이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177-178쪽)


이것, 차이를 다리로 만드는 법. 이것에는 차별에 대한 분노, 그것을 고치려는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알 수 있다. 분노가 배제와 적대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했던 것.


'내가 배워야 했던 것은 통제나 억제가 아니라 나의 분노를 행동의 원료로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나의 분노에 양분을 대는 바로 그 억압적 환경을 바꾸는 행동의 원료로 분노를 활용하는 방법 말이다.'(63쪽)고 하고 있으니, 이 말에서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차이를 없애라고 주문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흑인 레즈비언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정말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36쪽)라고.


그렇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무작정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한 연습을 통해서 고정관념이 무너져 가게 될 테니까.


이렇듯 오드리 로드의 글을 읽으면 고정관념에 갇힐 새가 없다. 고정관념에 숭숭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뚫린 구멍으로 차이가 들어온다. 차이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다리가 된다.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다른 생각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나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 이런 상태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오드리 로드가 시인이자 교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


로드의 이 말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다른 무엇보다 배움의 장치이다. 진실한 감정을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배우는 것들이 있다. 함께 소통한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진실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가르치는 일이다. 참된 시를 쓴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다.' (145쪽)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차이를 무시하거나 차이에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여 그러한 차이들이 세상의 어려움이라는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들이 될 수 있음을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서 깨닫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로드의 말처럼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오드리 로드의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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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티시 - 광신의 언어학
어맨다 몬텔 지음, 김다봄.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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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의 언어학'이라는 작은 제목이 있다.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몰아가는 언어라는 뜻이다. 자기의 삶을 다른 사람의 언어에 의해 틀지워지는 것, 그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어떤 식으로 그런 일이 생기게 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컬트라고 한다. 좋은 의미로 쓰지 않고,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흐름을 컬트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컬티시라는 말은 합리, 이성을 넘어 맹목적으로 휩쓸려 가는 상태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물론 컬트를 긍정적인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다.이 용어 자체의 난해함에 대해서는 28쪽-33쪽에 설명이 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냥 좋지 않은 흐름으로 사람을 빠뜨리는 정도의 언어로 쓰겠다)


'소위 컬트 (컬트 집단에 몸담으려는 움직임과 이에 대한 인류학적 매혹 모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특히 존재론적 고민이 널리 이루어지는 시기에 성황을 누린다.' (40쪽)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불안정한 시대에 사람들이 쉽게 컬트에 휩쓸리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불안한 시대에 단정적이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컬트에 사람들은 위안을 받기 때문에 컬트가 유행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컬트의 특징은 무엇일까?


컬트의 언어는 전향conversion, 조건형성 conditioning, 강제 coercion라는 체계적인 기술을 적용한다고 한다. (97쪽)


전향은 바로 '러브 바밍 love bombing'이라고 할 수 있는 말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특별하고 인정받는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불안한 시대에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 또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에서 위안을 받고, 그 사람이나 집단에 충성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언어 전술을 통해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고. 집단 바깥의 삶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여겨진다.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행동을 학습하는 이 무의식적인 과정은 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이 작업을 조건형성이라고 부른다'(98쪽)고 한다.


마지막으로 '언어는 사람들이 기존의 현실, 윤리의식, 그리고 자의식과 완전히 상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든다. 여기에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태도가 깔려 있으며, 최악의 경우 개인이 파괴될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강제라고 한다'(98쪽)고 하는데, 이 과정까지 가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말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컬트 집단이 지닌 모습이고, 거기에 빠진 사람들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이성적인 인간이 컬트에 빠질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스스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장치가 작동된다고 한다.


첫번째가 바로 편 가르기다. 내 편과 저쪽 편을 갈라 다른 쪽을 배제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언어를 쓰게 되는데, 이를 로드된 언어 loaded language라고 한다. 그 말만 들어도 전율이 이는 언어. 그런 언어들을 우리는 집회에서 많이 보지 않았던가. 특히 몇몇 집단의 경우에서 더더욱. 여기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고 차단 클리셰를 사용하면 컬트는 완성된다고 한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될 때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말들. 그런 말들을 우리 역시 자주 만나지 않았던가. 누군가와 토론을 할 때 아예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말을 차단하는 말들. 그것이 바로 사고 차단 클레셰다.


이 책에서 말한 그러한 '컬티시'가 미국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다. 저자가 들고 있는 컬트의 예는 종교, 외계인을 믿는 집단, 다단계 판매, 피트니스(지금 우리 사회에서 하고 있는 피트니스와는 결이 다르다)와 같은 운동,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 등등이 있다. 이것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컬트에 빠지게 했는지를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보여주는데,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컬티시가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 집단들, 다른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단정적으로 차단하는 말들. 우리 편 아니면 다 나쁜 쪽이라는 사고를 고수하는 집단들. 참 많다. 그런 집단들이 우세하게 되면 안 된다.


이 책에서 컬트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컬트의 위험성을 이 책에서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니,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자가 말한 방법은 너무도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우리가 충분히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적당히 신중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논리적 사고나 (다 이유가 있는) 감정적 직감을 포기하지 않도록 주의하'(322쪽)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생존의 본능을 잃지 않았다. 그러니 감정적 직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 직감에 질문, 논리적 사고를 덧붙이면 컬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 저자는 '마음 한편에서는 동시에 여러 '컬트'에 속하'(324쪽)는 방법도 건강한 방법이라고 한다. 다양한 집단에 속해 있으면 편향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 컬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는 다른 관점을 들을 귀를 갖추라는 말과 통한다. 즉 열린 귀를 가지고 다양한 말들을 듣는다면 편향된 쪽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컬티시한 언어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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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탁 걸리는 것이 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도 마음에 걸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왜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을까'


  쉽게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면...


  '귤을 만지작거리면

  껍질의 두께를 알 수 있듯이'


하지만 알 것 같은데 결국은 모른다. 아니, 애초에 알 수가 없다.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말이다. 말은 기호이기 때문에, 이 기호를 둘러싼 많은 의미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말을 하는 입(혀)를 아무리 살펴도... 말이 밖으로 나와 다른 존재에게 가 닿을 때까지 그 의미, 그 위력을 알지 못한다.


'혀를 굴려보면

말의 두께도 알게 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같은 말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자리가 정해졌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앉는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자세를 지니고. 그러니 하나의 말에도 수많은 의미가 겹쳐 있다. 


'창틀엔 무수한 손

의자 모서리엔 많은 무릎이 겹쳐 있다'


이때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내려 한다면, 오히려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상대의 말을 내가 더 많은 의미를 덧붙여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것이 말의 역할인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지 않은가. 상대의 속, 두께를 가늠하지 않고 앞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


'숨어 있는 의미를 헤아리려

애쓰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내가 한 말들을 잘 살펴야 한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또는 상처를 입은 말들을 하지 않았던가. 잘못된 말이 있었다면 그 말들을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그 말이 지닌 위력을. 좋은 말은 상대와 나를 연결해주는 못과 같은 역할을 하니.


'못이 가득 쌓인 상자 안에서

휘어진 못을 골라내면서'


하지만 잘못된 말은 우리를 잘 연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낸다. 상대만이 아니라 말도 제대로 쓰이지 못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지점에서 부적절한 말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생각한다

빗나간 망치가 내려친 곳을'


자, 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듣는 귀가 중요하다는 말과 같다. 잘 듣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늘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으려 해야 한다. 그런데도 잘 들리지 않으면, 무언가 이상하면 멈출 수밖에 없다. 다시 뒤돌아봐야 한다.


'두 귀를 세우고 뛰어가던 토끼가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처럼'


이때 나를 멈춰 세우는 말은 남의 말이 아니다. 바로 내 말이다. 잘못 나온 말. 상황에 맞지 않는 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 그 말이 화살처럼 나에게 와 박힌다. 아, 말을 걸러내지 못했구나. 


'앞니가 툭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다'


후회가 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발화된 말.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주워담으려 해도 말은 이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말 자체가 혼자라 아님을, 내가 홀로 앉아 있다고 해도, 그 자리가 내 자리라 해도 이미 누군가가 앉았던 자리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앉을 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붉어진 두 눈엔 이유가 없고

나의 혼자는 자꾸 사람들과 있었다'


엄청난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그 많은 말들 중에 남에게 상처주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서로를 이어주는 말들이 아니라 서로를 떨어뜨리는 말들. 그런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 제 자리만 지키려고 하는, 그 자리는 내 자리야 하지만, 아니다. 세상에 지정석이라 해도 나만의 자리는 아니다. 지정석 역시 함께 앉는 자리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19현대문학상수상시집 수상작 '지정석'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말이 나만의 것이 아니듯, 자리 역시 나만의 자리가 아님을... 그래서 더더욱 조심해야 함을.


작은 따옴표(' ') 안의 문장은 수상작인 안미옥의 '지정석'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2019 현대문학상수상시집.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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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꿈
정보라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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쓱쓱 읽힌다. 재미 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된다.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아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꺼번에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무서워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이야기가 바로 귀신 이야기이니, 무섭고도 재미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귀신 이야기다.


이 소설도 일종의 귀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귀신 이야기? 귀신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귀신이 무엇이지? 정말 존재하나? 이런 의문을 가지면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게 된다.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길을 가기 때문에, 문학에서 귀신이 필요하면 귀신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귀신으로 인해 소설이 더 소설다워지기도 한다.


귀신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억울한 일은 당한 사람이 죽음에 임해 하늘로 가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 그 억울함을 풀려고 한다고 했다. 억울한 죽음이 귀신이 되게 한다고 하면, 이 소설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것 또 귀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억울함이 있고, 그러한 억울함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귀신을 보는 한 남자에게 고등학교 동창이 나타난다. 너라면 풀 수 있을 거라며... 귀신이 된 친구,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아니다. 그러니 귀신이 된 것. 귀신을 볼 수 있는 사람 김태경. 이 남자는 동창생인 강문석의 부고를 받고 조문을 간다. 그리고 거기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김태경과 만나는 여자 성연. 죽음으로 태어나 다른 생명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 여자. 당연히 귀신들을 볼 수 있다. 이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성연은 다른 이의 목숨으로 자신의 목숨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태경의 목숨과 성연의 목숨은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이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 둘의 사랑이 정상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귀신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이들의 사랑을 변태라고 할 수는 없다. 남의 생명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성연에게 남에게 받는 고통은 생명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내 생명 유지에 남의 생명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생명체들의 업보는, 자신의 생명에서 고통을 인식하고 감내해야 함을 성연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이 둘에 강문석의 죽음이 끼어들고, 강문석의 죽음을 쫓아가는 와중에 또다른 죽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강문석과 함께 살던 여자의 죽음. 둘의 죽음이 모두 억울한 죽음이다. 


해원, 씻김굿. 소설은 이런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다. 원한을 푸는 일이 어디 간단하겠는가? 그렇게 하기까지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원한을 대신 갚아줄 수는 없는 일.


사건에 사건을 거듭하면서 태경과 성연의 사랑과 강문석에 대한 여인의 사랑이 중첩되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니 사랑을 빙자해서 한 사람을 착취한 인생이 어떤 결말을 맞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삶을 산 자, 남을 속이고 이용하고 착취한 자의 죽음이 과연 억울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들 눈에는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으로 인해 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사랑을 빙자해 한 여성을 착취한 인간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인간이 있었다는 현실에 기반한 이 소설은 다른 결말을 택한다.


귀신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풀지 못한 원한을 귀신을 통해서 풀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해원, 씻김이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씻김굿 한판을 벌였다고 보면 된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사랑을 이용해서 상대를 착취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이 현실에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온전한 사회가 아니다. 그런 자들이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는 귀신을 통해서 온전함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사랑은 남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성연과 태경을 통해 보여주고, 강문석을 통해서는 그것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인간의 최후가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 소설은 귀신을 보여줌으로써 원한을 풀어가는 한판의 씻김굿이 된다. 우리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러한 씻김굿에 참여하게 된다. 더이상 원한이 넘치는 사회가 아닌, 그러한 원한들이 풀려 씻겨나가는 세상, 서로가 서로를 위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세상. 그 세상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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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6-07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작가의 귀신 이야기는 서늘하면서도 뭔가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 좋더라구요. 씻김굿이라는 단어가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5-06-08 08: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보라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저도 위안이 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귀신의 한을 풀어주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도 한다고 생각해요.
 
포션 1
정보라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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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다. 제목이 단 한 글자. 무엇을 이야기할까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표지를 보면 여우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호'는 여우다. 여우하면 구미호를 떠올리니, 이건 전설의 고향과 비슷한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총 3부로 나뉘어 있지만, 디지털 문학상을 받은 작품답게(?) 내용들이 각각 끊어져 있다. 딱 그 내용만 연재될 수 있도록,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지니고, 그 다음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도록. 


디지털 문학이라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런 형식이 아미도 예전에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 역시 그 자체로 이야기가 있지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면서 끝을 맺었으니...


하여 이 소설은 읽기에 편하다. 여우를 만나고 어려움을 겪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전설의 고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현대로 끌어왔다. 


버스 사고가 난다. 혼자만 살아남는다. 우연이다. 이 우연을 구미호와 관련짓는다. 구미호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 할머니가 구미호의 존재를 알아낸다. 헤어짐. 그러다 할머니가 쓰러지고, 이제는 저승사자라 할 수 있는 존재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구미호에서 벗어난다.


이 정도면 쓰러진 할머니 역시 일어나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전설의 고향과 갈라진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고는 어쩔 수가 없다. 환상 속에서 치유가 가능할지라도 현실에서는 아니다.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임. 그리고 거기서 나아감.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구미호 역시 마냥 인간을 이용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구미호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그렇지만 함께할 수 없을 때 물러나는 것. 그것까지 보여준다.


순수한 사랑. 그런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조건을 걸며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런 사랑에는 위험이, 파경이 뒤따르지만 이 소설 인물들처럼(남자 인물이나 구미호나) 조건 없이 그 자체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사랑의 결말과는 관계없이 사랑하던 그 순간만은 서로가 행복했음을 보여준다.


소설 2부의 마지막에 구미호가 한 말, 그것이 이런 순수한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해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평생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걸, 나도 해보고 싶었어, 그 사람이 당신이라서." ... '"행복했던 거.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198쪽)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어쩌면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같은 일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환상을 끌어들이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을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작가의 상상을 따라가면서 읽으면 되는, 재미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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