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션 1
정보라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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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다. 제목이 단 한 글자. 무엇을 이야기할까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표지를 보면 여우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호'는 여우다. 여우하면 구미호를 떠올리니, 이건 전설의 고향과 비슷한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총 3부로 나뉘어 있지만, 디지털 문학상을 받은 작품답게(?) 내용들이 각각 끊어져 있다. 딱 그 내용만 연재될 수 있도록,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지니고, 그 다음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도록. 


디지털 문학이라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런 형식이 아미도 예전에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 역시 그 자체로 이야기가 있지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면서 끝을 맺었으니...


하여 이 소설은 읽기에 편하다. 여우를 만나고 어려움을 겪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전설의 고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현대로 끌어왔다. 


버스 사고가 난다. 혼자만 살아남는다. 우연이다. 이 우연을 구미호와 관련짓는다. 구미호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 할머니가 구미호의 존재를 알아낸다. 헤어짐. 그러다 할머니가 쓰러지고, 이제는 저승사자라 할 수 있는 존재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구미호에서 벗어난다.


이 정도면 쓰러진 할머니 역시 일어나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전설의 고향과 갈라진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고는 어쩔 수가 없다. 환상 속에서 치유가 가능할지라도 현실에서는 아니다.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임. 그리고 거기서 나아감.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구미호 역시 마냥 인간을 이용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구미호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그렇지만 함께할 수 없을 때 물러나는 것. 그것까지 보여준다.


순수한 사랑. 그런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조건을 걸며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런 사랑에는 위험이, 파경이 뒤따르지만 이 소설 인물들처럼(남자 인물이나 구미호나) 조건 없이 그 자체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사랑의 결말과는 관계없이 사랑하던 그 순간만은 서로가 행복했음을 보여준다.


소설 2부의 마지막에 구미호가 한 말, 그것이 이런 순수한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해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평생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걸, 나도 해보고 싶었어, 그 사람이 당신이라서." ... '"행복했던 거.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198쪽)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어쩌면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같은 일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환상을 끌어들이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을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작가의 상상을 따라가면서 읽으면 되는, 재미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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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쓸쓸한 그림 이야기 - 경계의 화가들을 찾아서
안민영 지음 / 빨간소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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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또는 모르던 사람을 알게 되면 기쁘다. 자신이 모르던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기쁨, 내 빈자리를 무언가로 채워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이번 책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관련이 있는 화가들에 대한 내용이다. 이쾌대는 들어봤고, 그의 자화상을 통해서 자신만만하던 이쾌대의 젊은 시절을 보기도 했었고, 이응노 역시 군상이라는 작품으로 이미 알고 있던 화가였지만 이들의 고뇌, 이들의 삶이 경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 책이다.


근원 김용준은 화가로서보다는 수필가로서 알고 있던 사람이고, 물론 그가 화가이자 미술사학자였다는 지식만 알고 있었는데, 이쾌대나 이응노와 마찬가지로 다른 각도에서 그를 만나볼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변월룡, 박경란, 신순남, 전화황,은 처음 들어보는 화가다. 이들의 삶이 한반도에 머물지 않고 외국에까지 뻗어있다는 점,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 민족의 삶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신순남에 대한 '죽음의 이주 열차'라는 글에서 만난 우리 민족의 슬픈 이주의 역사를 그림으로 만나볼 수 있으니, 변월룡의 그림에서 전쟁 직후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는 때를 보여주는 그림을 만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림을 통해 역사를 더욱 생생하게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이 책을 통해서 만난 작가, 도미야마 다에코를 알게 되어서 좋다.


처음 들어본 인물, 일본인임에도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나라가 겪었던 일들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세계에 알린 사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국내의 작가들이 표현할 수 없었을 때 일본에서 도미야마 다에코는 그림으로 그려 그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다는 사실.


나에겐 이 그림 하나로 이 작가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광주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린 사람.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기억하게 한 사람. (우리나라 양심수 문제, 일본군 성노예 문제 등등) 마치 케테 콜비츠나 오윤의 판화 그림을 연상시키듯이 예술이 결코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주는 그림.



이런 작가는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는다. 당연히 경계에 서 있다. 경계에 있다는 말을,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해 있지 못하고 헤매는 존재라는 말이 아니고 양쪽을 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예술가는 경계에 있어야 한다. 경계에 있다는 말은 자신의 세계를 틀지우지 않는다는 말. 즉 경계는 이쪽과 저쪽을 다 볼 수 있는 곳, 이쪽 저쪽을 다 살펴야 하는 곳이 바로 경계다. 그리고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찾을 수 있는 곳.


예술가들은 경계에 있어야 한다. 도미야마 다에코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인으로 태어났다. 그가 일본인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면 이런 활동을 할 수 없었으리라. 


경계에 있어서 일본과 일본이 점령한 식민지, 일본인들과 식민지 사람들의 삶을 살필 수 있었기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리라. 이렇게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그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일본군 성노예를 문제 삼기 전에 이미 도미야마 다에코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런 작가를 만나게 해준 저자가 고마울 따름이다. 하여 이 책에는 이렇게 경계에 서서 이쪽 저쪽을 다 보고,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한 또는 보지 못하는 쪽을 보여주는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그림과 함께. 


'어느 쓸쓸한 그림 이야기'라고 했지만 이 책은 그러한 쓸쓸함을 넘어 우리에게 따스함을, 함께함을 전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저자의 노력으로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왔으므로. 우리가 외면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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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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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를 읽고 흥미를 갖게 된 작가. 그가 쓴 세 번째 장편이라고 하는데, 읽으면서 어라,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고? 소설이니 작가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된 소설.


소설 속 작가를 작가가 창조한 작가라고 보면, 이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해서 자신의 소설을 써나가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엡스타인이라는 68세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39세 작가이다. 변호사로서 성공한 삶을 살던 엡스타인.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가지고 있던 것을 남들에게 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간다. 


또 한 사람은 작가인 니콜. 이 소설을 쓴 니콜 크라우스와 같은 이름이다. 작가라고 착각하게 하는 장치라고 해두자. 성공한 소설가다. 어느 순간 소설 쓰기 힘들어지고 남편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이때 홀린 듯이 이스라엘로 간다.


이 두 사람이 지닌 공통점은 유대인이라는 것밖에는 없다. 한 명은 나이든 남자, 한 명은 젊은 여자. 직업은 변호사와 소설가. 여기에 공통점을 찾으면 이들은 그것을 정점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또는 일에서) 정점에 오른 적이 있다는 점이다.


정점에 오른다. 그것은 이제 다른 길로 가야함을 뜻한다. 자신이 온 길은 끝났음을 인식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점이다. 이들이 도달한 정점이 바로 '어두운 숲'이다. 숲에는 도달했으나 앞길은 보이지 않는, 과거 역시 볼 수 없는 그러한 숲이다.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이 새로운 길이 무엇일까? 엡스타인은 사막으로 걸어들어가고, 니콜은 사막에서 나온다. 둘의 방향은 다르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니콜의 눈에 이미 자신이 있다. 지난 날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자신.


어두운 숲에서 돌아온 니콜이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엡스타인처럼 사막으로 가야만 하는 것인지.


여기에 한 인물이 더 첨가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프카. 물론 카프카는 엡스타인 하고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부모를 생각하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다르게 반응했을 뿐이다. 엡스타인의 부모, 특히 아버지가 굉장히 폭력적이었고, 위협적이었다는 서술은 나오지만, 카프카가 평생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엡스타인은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리고, 그에게서 벗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를 기리는 기부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즉, 카프카와 비슷한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자랐지만 엡스타인은 그것에 머물지 않고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던 그림을 처분하려고 하는데, 심부름하는 사람의 실수로 그림이 분실되고 만다. 엡스타인이 실종되듯이.


니콜은 카프카가 남긴 원고를 받았고 (합법이 아니라, 프리드만이라는 정체가 모호한 사람이 갖고 온 짐꾸러미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 그것을 읽는다. 카프카가 살아서 이스라엘에 살았다고? 이건 허구다. 분명한 허구기 때문에 소설에서 카프카를 등장시키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허구임을 명심하게 한다. 


그런데도 카프카를 등장시킨 이유는 카프카가 문턱을 넘지 못했던 사람, 즉 경계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니콜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카프카가 문턱을 넘었을 수도 있다고 여기는데, '천국과 이 세상 사이의 문턱은 환상에 불과하며, 사실 우리는 천국을 떠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 카프카의 생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 우리는 지금도 바로 거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329쪽)고 니콜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카프카 역시 생전에 넘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는 죽어서 그러한 문턱을 넘었다. 우리에게 문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은 문턱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이 소설에서는 카프카가 죽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정원을 가꾸고, 나중에는 사막에서 홀로 살다가 죽었다고 함으로써 문턱을 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니콜이 사막에서 홀로 지내는 집은 카프카가 마지막에 지냈다는 집이라고 니콜이 추정하고 있으니... 당연히 소설적 장치다) 


니콜이 다시 사막에서 돌아오는 것은, 비록 집에서 이미 자신을 보지만, 그것은 니콜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문턱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읽은 작품에서도 유대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느꼈는데, [사랑의 역사]에는 억압받는 유대인들의 모습만 나온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억압하는 유대인들의 모습도 나온다. 그렇다.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억압받았다는, 홀로코스트에 갇혀 있기만 하면 그것은 문턱을 절대로 넘지 못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엡스타인의 코트를 팔레스타인이 가져간 것이나 (물론 고의가 아니라 실수다), 니콜을 사막에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이제 유대인은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봐야 하는데, 그들 역시 정점에 이르러 어두운 숲에 도달했는데, 여전히 이제는 보지 않아도 될 과거만 보고, 더 나은 미래를 보지 않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여 유대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이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참...


그런 점을 모두 떠나서 우리도 삶의 정점에 이른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 모두 한번쯤은 어두운 숲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과거는 보이지 않고, 미래 역시 보이지 않는 그러한 숲에. 그때 내가 갈 길이 어디인가? 그것을 찾으려면 이미 내게 있는 길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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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에 관한 시가 많다. 


  '슬픔'


  이는 자신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세상과 불화할 때, 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감정 아닌가.


  무언가가 틀어져 있다는 마음. 그런 슬픔이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이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슬픔을 느끼는 주체가 자신이고, 이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행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슬픔은 이기적인가? 아니다. 타인을 위한 슬픔이 있다. 연민이라고도 할까? 무릇 종교는 그러한 연민, 즉 남을 위한 슬픔에서 오지 않았던가. 나만이 아니라 남도 나와 같이 고뇌, 번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느끼는 마음, 슬픔.


시인은 '이기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남보다는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목과 비슷한, 접미사 '-들' 하나 차이인 시를 보자.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김경미,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95년. 16쪽. 


이 시를 보면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꽃은 생명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고, 물을 먹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조차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슬픔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자신만이 지니고 있으려 한다. '벽 위의 박수근'은 박수근 그림을 의미할 텐데, 가난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박수근의 그림.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고, 그 가난함이 슬픔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러한 가난함을 이겨낼 마음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기적인' 슬픔이 된다.


오로지 자신만의 슬픔을 간직하겠다는 것. 이는 사회적인 관계를 떠나 자신의 세계 속에만 머무르겠다는 선언이 될 텐데... 그러한 슬픔은 정호승의 '슬픔'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그 힘으로 다른 존재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것,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슬픔으로 치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김경미의 시에서 슬픔은 오로지 개인적인, 자신에게만 머무는, 그 슬픔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그러한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자신을 유폐시킬 수밖에 없다. '굴원의 불빛'이란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드러난다. 세상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결국 자신 속에 빠져버리는 것. 그래서 시인은 '그냥 가만히 귀양갈까 해요'('굴원의 불빛' 중에서. 49쪽)라고 하는데,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아마도 시인은 지독한 슬픔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나 보다. 그러한 슬픔을 이겨내는 시보다는 슬픔에 빠져 있는 그러한 시들이 많은 것을 보니. 하지만 우리는 시인의 슬픔에 빠져 함께 허우적 댈 수는 없다. 


시인과 더불어 슬픔에 푹 빠져버린 경험, 그 경험을 통해서 슬픔의 밖으로 나가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 그것이 이 시집을 읽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 아닐까? 어쩌면 시인은 자신의 이기적인 슬픔을 통하여 사람들이 슬픔에서 벗어나 홀로가 아닌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시인이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본다'고 한 것은 이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고. 따라서 이기적인 슬픔은 나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로 확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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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 호모심비우스
최재천.팀최마존 지음 / 더클래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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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외면할 수 없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온몸으로 덤벼들자.'(20쪽)


이런 마음가짐, 행동이 바로 양심이고 양심의 실천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욕인가? 그럼에도 자신이 양심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양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런데 양심을 잊고, 또는 잃고 사는데 남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양심 없음은 사회를 어둠으로 몰아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들, 또 생명체가 아닌 존재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이처럼 양심이 없다는 말을 들어도 다 같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더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양심 없는 행동이, 말이 다른 존재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양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재천 교수의 강연 중에 양심과 관련이 있는 강연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총 7개의 강연이 실려 있는데, 영상으로 볼 수도 있게 큐알코드를 제공하고 있으니, 책을 읽고 또 영상을 찾아 봐도 좋겠다.


첫 강연은 서울대 졸업 축사로 시작한다. 서울대라는 이름이 지닌 가치를 우리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누리고 사는지도 다 안다. 그렇게 큰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신들의 말, 행동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다른 존재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최재천 교수는 강연의 마지막에 '부디 혼자만 잘 살지 말고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끌어주십시오'(40쪽)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사회에서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집단이 서울대 출신들이라면, 그들은 그보다 더 남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지닌 양심일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를 보면 서울대 출신들도 그들 나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지만.


다음은 복제한 반려견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복제한 반려견은 진짜 반려견일까라는 질문을 하는데, 여기서 진짜란 세상을 떠난 반려견과 똑같은 존재라는 의미다. 아니라는 것이 최재천 교수의 주장이다. 복제를 했다고 해도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세상을 떠난 반려견을 잊지 못해 복제 반려견을 들이려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여기에 복제 인간에 대한 문제까지 더해지면 과연 우리는 복제를 어떻게 봐야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세 번째, 네 번째 강연은 수족관에 갇힌 동물 이야기다. 제돌이로 대표되는 돌고래와 롯데아쿠아리움에 있는 벨루가 이야기. 


대양을 누벼야 하는 그들이 수족관에 갇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인간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존재의 생활과 환경을 제약하는 것이 지구라는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이 된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고, 자신들의 본성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데, 그것을 인간이 막고 있는 현실. 그래서 그들을 자신들이 본래 살던 환경으로 보내주자는 운동을 하고,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기업 이야기도 있지만. 벨루가는 지금도 롯데아쿠아리움에 있으니.


다섯 번째, 여섯 번째는 과학자(연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 이유도 양심 때문일 것이고,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금에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연구처럼 보이는 그러한 연구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주장.


진정 과학의 발전을 위한다면 기초 연구비를 꾸준히 오랫동안 지급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국가가 해야 한다. 기업은 당장의 성과를 내는 연구에 지원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연구에는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국가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러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것에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마지막 강연은 호주제 폐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우리나라는 호주제라는 제도는 없다. 호주제가 가부장제를 대표하는 남녀불평등을 상징하는 제도였기에 폐지는 당연하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호주제가 폐지되고 나서도 과연 남녀불평등이 완전히 해소되었느냐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한번에 해결할 수는 없으니...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한번에 청소한 헤라클레스는 없다고 해야 할 테니... 이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진화와도 어울린다면, 서두르지 말고 그렇게, 마치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듯이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것이 바로 '양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연구실에서 연구에만 전념하지 않고 사회를 향해, 권력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바로 최재천 교수의 '양심'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인용한 말. 그것이 바로 양심이니, 그런 양심 버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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