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길상사에 다녀오다.

한성대입구 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가 한참을 걷다 보면 길상사가 나온다. 아직은 단풍이 들지 않았지만, 성북동에 자리잡은 안온한 자태를 뽐내는 곳이다.

 

법정 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곳이기도 하고, 시인 백석과 관련이 있기도 한 곳.

 

아니, 시인 백석이라고 하기보다는, 백석을 사랑했던 한 여인과 관련이 된 곳.

 

길상화, 김영한(이름이 김진향이라고도 하고, 자야라고도 한다). 백석을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백석을 잊지 못했던 여인.

 

백석이 우리나라에서 한 동안 잊혀진 시인이었기에 그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지 못하다가, 백석이 해금된 이후에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여인.

 

백석의 시 중에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라고 말했던 여인.

(어떤 책에서는 나타샤가 서로 나라고 하는 여인들이 셋이나 된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내 사랑 백석"이란 책에서 자야는 나타샤가 자신임이 분명하다고 한다. 이 책에는 백석과 만난 자야의 이야기가 소상하게 실려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기생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 말로 하면 종합예술인 정도 될텐데, 자신이 번 돈으로 만든 '대원각'이란 음식점(사실 술집이라고 요정이라고 해야 옳을 듯)을 법정 스님에게 맡아달라고 전부 기증을 했다는 여인.

 

그래서 절 이름이 길상화에서 따와 길상사가 되었다는.

 

길상사에 가면 법정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도 있고, 자야와 백석을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백석을 생각할 수 있는 곳, 그곳이 이곳말고 또 어이 있으랴. 백석은 고향이 북쪽이니 말이다.

 

법정 스님과 백석을 모두 생각할 수있었던 곳.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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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 뭐, 뉴스나 신문만 보면 어지러운 기사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야말로 복마전이다. 이건 지옥도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이었어?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건사고야 예전에도 존재했을테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계속 보도를 하니 더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험사회, 울리히 벡의 책 제목이기도 하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교회들이 있고, 절들이 있는 신들이 늘 함께 하는 나라에서 웬사고들이 이리 많담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는 '신과 함께'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절은 '신과 함께'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무교회운동을 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또 무속신앙을 믿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우리나라는 '신과 함께'하는 나라 아니던가.

 

그렇담 신은 무엇하고 있나? 혹시 신이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신이 있다면 이것은 분명 신의 직무유기다. 신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심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길 바라기 전에 신이 먼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어쩌면 오래 전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 신은 인간세상에서 추방당했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신이 인간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왔다가도 인간에 의해 다시 추방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흔히 부모들에게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식을 싸질러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신이 추방당한 사회라고 하면 이는 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얘기다. 그 많은 교회와 성당과 절들이 있는데, 점집도 있는데...

 

어떤 신이든, 신을 다시 불러올 필요가 있다. 아니, 신의 존재를 제대로 믿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가끔 저승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악해지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웹툰에서 시작하여 단행본으로 나온 책이 있다. 바로 주호민의 "신과 함께"

 

"티벳사자의 서"를 읽기 힘든 사람, 이 만화를 보면 좋겠다. 아니 우리 아이들이, 어른들이 다 보았으면 좋겠다. 저승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동이 조금은 변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 신이 어떤 신이든, 자신이 믿는 신에 대입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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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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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택은 손택이다. 이 말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다르게 말한 말이라고 보면 된다. 동어반복인 말인데, 단순히 동어반복이라고 하기 힘들다. 손택의 이 책에서 한 말대로 하면 '문학은 문학이다'가 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을 손택이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 "해석에 반대한다"이기 때문이다.

 

2. "해석"이란 대상을 대상 자체로 보기보다는 대상을 부분으로 해체해서 본다고 할 수 있다. 즉 문학에서 해석이란 바로 문학을 문학으로 보지 않고, 문학을 문학을 구성하는 어떤 요소들로 나눈다음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방법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3. 이러한 방법으로 문학을 바라보면 문학을 문학자체로 이해하기 보다는 어떤 "사상"으로 보게 된다. 즉 문학을 내용으로 보게 되고, 그 내용의 적실성, 진실성, 또는 현실성 등을 따지게 된다. 이럴 때 문학은 문학으로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을 지닌 존재, 즉 내용을 실어나르는 도구에 불과하게 된다.

 

4. 해석을 중심으로 문학을 보게 되면 검열이 작동하게 된다. 이는 문학을 내용과 형식으로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내용은 외설적이라든지, 폭력적이라든지, 반국가적이라든지, 비도덕적이라든지 하는 딱지를 붙이게 된다. 문학이 문학이 되지 않고 어떤 사상의 도구가 되어 버린다. 손택은 이를 반대한다.

 

5. 하여 이 책의 첫 부분이 바로 제목과 같은 '해석에 반대한다'다. 그리고 다음은 바로 '스타일에 대하여'이다. 손택은 문학은 문학으로 보아야지, 내용과 형식으로 나눠 문학을 보면 안된다고 한다. 

 

6. 이는 문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 작품 내용에 빠져 등장인물에 몰입되어 그 인물과 같이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은 문학을 문학으로 감상하지 못하고 그 내용에만 빠져들었다는 얘기다. 우리가 문학을 문학으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문학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읽고 있는 이 작품이 바로 "문학"이라고 인식하고 읽기 때문이다.

 

7. 브레히트를 손택이 극찬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그의 주장과 통한다고 본다. 내가 알고 있는 브레히트는 연극에서 관객들이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연극을 감상하면서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를 우리나라에선 한 때 '소격효과'라고 번역을 했었는데...

 

8. 내용과 형식이 하나로 완결된 존재로 문학을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검열'이란 불필요한 일이 된다. '검열'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문학을 문학으로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마도 문학을 검열하고자 하는 사람들, 손택의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9. 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구체적인 작품, 평론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연극에 대한 이야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영성(종교)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캠프'에 대한 이야기와 두 문화(과학, 인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캠프'에 대한 개념은 잘 잡히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감수성을 시도하는 그러한 예술이라는 느낌이 들고.. 두 문화에서도 조잡한 두 문화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문화란 두 개, 세 개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임을...

 

10.. 손택. 다방면에 관심이 많고, 다방면에서 자신의 논리를 펼친 사람이다. 적어도 문화라는 것이 소설이나 시, 또는 연극, 음악, 영화 등등 따로따로 존재하지는 않으니, 이러한 분야들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 자신의 글을 통해 보여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러한 점들이 나로 하여금 손택의 책을 계속 읽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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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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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제목이 자극적이다. 뭐야, 국가는 실패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제목이다. 국가가 실패한다는 이야기는 자칫하면 국가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로 비약하기 쉬운데.. 이 책의 제목은 국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이 제목을 좀더 세분화해서 말하면 "왜 어떤 국가는 성공하고, 어떤 국가는 실패했는가"이다. 즉 국가들에 관한 얘기이고, 실패한 국가가 왜 실패하게 되었는지, 성공한 국가는 왜 성공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성공한 나라와 실패한 나라의 기준이 무엇인가부터 따져야 한다. 그 기준은 바로 "풍요"다. 풍요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합친 것이고, 특정 집단만의 풍요가 아니라 국가 구성원 모두의 풍요를 말한다.

 

이 기준에 의하면 성공한 나라는 서유럽의 나라들, 미국, 일본, 한국, 보츠와나 등이고, 실패한 나라는 동유럽의 나라들, 서남아프리카 국가들, 멕시코, 남아메리카 국가들 등이다. 우리가 지금 잘사는 북반부와 못사는 남반부로 쉽게 나누는 그 선이(다소의 변동은 있더라도) 대체로 들어맞는다.

 

이 원인이 무엇일까? 도대체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 왜 국가들에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이런 흥미로운 질문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시작도 흥미롭다. 오랫동안 한 도시였지만 인위적으로 갈린 도시 노갈레스에서 시작한다. 한 쪽은 미국 땅, 한 쪽은 멕시코 땅이고 한 쪽은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한 쪽은 다른 쪽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란 삶을 유지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여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남한과 북한을 예로 들기도 한다. 오랫동안 한 민족으로써 한 국가로써 동질적인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38선이 생긴 이후 엄청나게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어떤 국가는 실패하고 어떤 국가는 성공하는가이다. 답은 명료하다. 포용적인 경제제도, 정치제도를 지니고 있는 국가는 성공하고, 착취적인 경제제도, 정치제도를 지니고 있는 국가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지리적, 문화적, 무지를 이러한 차이를 유발하는 요소로 들었지만 이 책의 2부에서 이 이론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이러한 반박을 토대로 지금 국가들의 차이는 바로 정치와 경제에서 포용적인 제도를 택했느냐, 착취적인 제도를 택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길고 긴 장들을 통해 증명해가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지은이의 주장에 수긍을 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많은 국가들을 통시적으로 그리고 공시적으로 꿰뚫어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책 지은이의 주장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과 지금 현재 국가들의 모습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의 이론이 무척 단순 명료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단순함은 다양한 포용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표용적인 정치, 경제 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그를 추구하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포용적인 정치는 특정 집단에 권력이 독점되지 않고, 다원화된 집단들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또는 함께 하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다당제라고 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는 없고, 정당들이 또는 정치인들이 대표하는 집단이 다양해야 하고, 그리고 그러한 정당, 정치인이 배타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지 않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제도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즉 다양한 집단이 모두 동등한 권리를 지닐 수 있는 제도가 확립된 국가, 그 국가가 포용적인 정치제도를 지닌 국가이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어느 특정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집단들의 이익이 모두 고려되는, 그리고 창조적인 활동이 가능해, 발전을 위한 창조적 파괴가 용인되는 그러한 경제 제도를 택하고 있는 국가가 포용적인 경제제도를 택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 두 요소는 따로따로 가는가? 아니다. 함께 간다. 무엇이 먼저이든 상관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데,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 선순환이 되어 풍요로운 국가로 가는 길이 열리고, 나쁜 쪽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 악순환이 되어 빈곤과 독재에 시달리는 국가로 가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선순환인지 악순환인지는 우발적인 요소도 있지만, 결정적인 분기점에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두 요소를 우리나라에 대입해보자. 우리나라는 이 책에 의하면 상당히 발전해온 국가에 해당당한다. 포용적인 경제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독재정권이 집권하기도 했지만 민주화가 된 이후 포용적인 정치제도도 어느 정도 확립해가고 있는 국가이다.

 

그러나 지금 선진국인 북유럽에 비하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포용적인 정치,경제 제도를 지니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에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고, 국민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 아니면 여기서 멈추고 지지부진한 상태로 계속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을 구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때마침 대선을 앞두고 있기에 정치적인 면에 대입을 해 볼 수도 있고, 경제 쪽에서는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되고 있는데, 이를 이 책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해가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국가들의 부, 그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물론 우발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 나라의 제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 그것을 명심한다면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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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1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용적인 국가가 성공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세부적인 사항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겟네요. 착취하는 제도가 있는 나라는 실패한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의문이 듭니다.
 
고우영 열국지 세트 - 전6권 고우영 열국지
고우영 글 그림 / 자음과모음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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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의 열국지 세트를 구입했다. 만화 책을 사놓기란 많이 망설여지는 일인데, 고우영이란 작가에 대한 믿음이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사게 만들었다.

 

고우영의 만화는 만화를 어린이의 영역에서 어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일지매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을 보면 말이다.

 

어린이들보다는 오히려 어른들이 읽어야 더 감칠맛이 나는 만화, 어른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풍자, 해학, 그리고 약간의 성적인 요소들이 그의 만화들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열국지 하면 소설 식으로 편찬한 책도 많고, 집에 있는 것도 김구용이 편역한 "동주 열국지" 10권짜리가 있는데, 그런데도 고우영의 열국지를 산 이유는 만화라는 장르와 소설이라는 장르는 차이가 있고, 또한 열국지라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고우영 나름대로의 해석을 바탕으로 만화를 만들었으리라는 생각, 그리고 아이들이 열국지라는 방대한 소설을 읽기보다는 이 만화를 통해 열국지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결론은 아이들이 읽기에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글이 많다. 지금 아이들은 가능하면 글이 적은 만화를 좋아하는데, 고우영의 만화는 글에서 느끼는 재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낄낄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이 만화를 아이들은 "학습"한다는 생각으로 읽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두 번째는 아이들에게 읽히기에는 "열국지" 내용에 성적인 부분이 많은데, 이게 참, 신문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라 나름대로 검열을 해서 별로 선정적이지는 않지만, 고등학생 이상에게는 좋겠지만 중학생은 이런 표현들을 잘 이해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림체도 요즘 웹툰의 그림체에 익숙한 아이들에게는 좀 뭐랄까 고답적이라고 할까, 촌스럽다고 할까 아니면 눈에 확 안 들어온다고 할까 하는 인상을 주기 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고등학생 이상에게는 이처럼 재미있는 만화는 없으리라. 슬픈 대목에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해학이 잘 살아있고, 그림과 더불어 글들이 종횡무진 나타남으로써 풍자를 해주고 있으며, 단지 열국지-중국의 과거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연재 당시 사회상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상황도 제시되고 있어서 볼만하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꼭 봐야하는 만화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고사성어를 아는 즐거움이야 그렇다고 쳐도 중국의 방대한 역사를 만화를 통해서 재미있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만화는 커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다.

 

주나라의 실질적인 멸망부터 시작하여(그래서 사람들은 동주 열국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하는 부분까지 춘추전국시대의 주요한 사건 또는 인물을 다루고

있으니, 만화로 보는 이야기 중국사라고 할 만도 하다.  

 

책의 겉표지에는 그의 유고작이 되어버린 작품이라고 했는데, 연재를 마치고 단행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의 말을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의 말이 없는 무언가 한 군데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만화인데, 그 비어있음을 독자인 우리들이 채워야 하겠단 생각이 든다.

 

아마, 이 만화를 먼저 보았다면 소설로 된 열국지를 읽으면 더 좋을 것이고, 소설로 된 열국지를 먼저 읽었다면 이 만화를 보면 또다른 재미와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틀 동안 나를 열국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 고우영의 만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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