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 갈색 눈 -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야기
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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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차별을 구별해야 한다고, 양적인 동일성을 추구하면 안된다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해야 차이를 차별로 바꾸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과연 나는 차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그런 생각을 하면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땅에서 남성이자, 고학력자(?), 중산층(?), 수도권에서 지내는 일은 차별을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차별을 느끼지 못한다고 차별을 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예였으면 좋겠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예라는 대답보다는 아니요라는 대답이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별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약자가 되어 있을 때일테니 말이다. 약자가 되기 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알지 못하고 하는 차별.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학생들을 갈색 눈과 푸른 눈으로 나누고 하루씩 엄청난 차별을 받게 한 수업. 실제 미국에서 일어난 수업이라니... 일명 차별 체험 수업

 

철저하게 눈 색깔만으로 우월하다고 인정하고 온갖 특권을 주고, 다른 집단은 눈 색깔만으로 열등하다는 소리를 하루 동안 들어야 하다니... 게다가 반론을 제기할수록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 열등한 집단이라는 증거로 되돌아오니... 엄청난 차별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수업으로 했다. 그것도 온종일, 하루씩, 이틀을. 이 수업을 한 교사인 엘리어트도 항의 전화가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차별 교육이었는데...

 

무엇보다 우선은 교사와 학생 간에 신뢰가 쌓여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실험이라고 해도 의지나 감성이 한창 발달 중에 있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하루동안 온갖 차별을 받게하는 일은 그 학생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하루의 수업으로 학생은 평생동안 상처를 안은채 (우리는 이를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살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수업을 한다는 사실은 학생과 교사간에 쌓인 신뢰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을 어루만져주고, 그 학생들로 하여금 그 하루동안의 차별교육이 자신의 몸에 각인이 되어 평생을 가게 한 사실... 이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누구도 전제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인간이 지닌 유약함을 보았다고나 할까. 권위에 매달리는 성질, 또는 집단에서 일탈될까 두려워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전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할 일만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한다. 아무리 초등학교 3학년이라도 눈 색깔만으로 자신들의 능력을 구분하는데, 그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이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2부는 이런 차별 수업 그 후라고 할 수 있는데,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어른들 역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기존에 깔려 있는 전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권위나 기존 상식에 반하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존재를 걸어야 하고, 자신을 낯선 장소에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전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루시퍼 이펙트였던가? 권위를 지닌 인간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함을 보여주었던 실험. 이 실험과 엘리어트가 한 차별수업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전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차별수업은 사람들의 몸에, 마음에 완전히 녹아들어가게 된다. 즉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이런 수업을 모든 학교에서 하기는 힘들다. 교사와 학생 간에 신뢰가 쌓여 있지 않다면 이 수업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의 신뢰관계가 학교에 있는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이 수업을 응용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 책의 번역자가 실험한 역할극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역할극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왜 차별 수업을 차별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차별을 받지도 않고 하고 있지도 않은 사람이 배워야 하는가? 이것은 이 책에 답이 나와 있다. 보통의 사람, 또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은 차별을 받고 그것을 몸에 체화하여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별을 받는다는 사실이 어떻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 도처에 차별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차별과는 상관없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차별 수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선한 충격. 나는 차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생각해보게 만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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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한 번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영화관 가서 보지 못하고, 집에서 DVD를 빌려서 보게 되었으니...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간 아이. 그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기 위해서 분투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집 나간(?) 엄마, 전직 권투 선수인 마초라 할 수 있는 아빠 그 사이에서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의 일보다는 여자의 일을 더 좋아하는 아이가, 엄마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받고, 아버지에게도 확실하게 말하는 그러한 영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주제를 그리 무겁지 않게 표현해 낸 영화여서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여성이 되고 싶어하는 남주인공의 친구이다. 분명 고등학생이 분명한 남학생이고, 학교 공부와는 거리가 먼 남학생인데, 이 남학생이 주인공을 그리도 잘 이해해 준다. 그냥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찾는다.

 

어쩌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기에 이 친구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의 친구를 이해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은 친구가 어떻게 성정체성을 가지고 남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영화를 볼 때 중심을 주인공에게 두지 말고, 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은 자기의 아들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아빠에게 두지도 말고, 바로 주인공의 곁에서 끊임없이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찾는 그 친구에게 두면 좋겠다.

 

그 친구에게 두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그리고 내 친구는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그 친구가 그것을 못할 때 얼마나 힘들어 하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이 아닌 친구가 추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친구. 어쩌면 그 친구로 인해 이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찾아갈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한다. 

이런 성에 관한 한 구절을 서울시 학생 인권조례에 넣기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지금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시대를 앞서갔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아직도 성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언가 꽉 짜여진 틀에 사람들을 가두려고 한다는 느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성에 관해서도 왜 공적인 잣대를 들이대려고 하는지... 이 영화를 봐라. 그 친구의 입장에서. 그 친구가 되어서. 그냥 내가 나이듯이 그 사람도 그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인정 못하는 이유는 나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그처럼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영화 보고 책도 읽자.

 

일리치의 "젠더"를 읽어도 좋고...

아니면 바로 이 책 "성적 다양성, 두렵거나 혹은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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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사회 - 벌거벗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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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

친숙한 숫자다. 아니 친숙해서는 안되는 숫자다. 이는 악마의 숫자라고 하니까. 적그리스도. 그리스도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나 인류의 파멸을 이끌 존재라고 하고, 이 존재를 상징하는 숫자가 바로 666. 신의 숫자를 3이라고 하면 6은 악마의 숫자이고, 이 악마의 숫자인 6이 신의 숫자인 3으로 나타나니 악마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신처럼 행세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무서운 종말론이다. 젊은 시절, 휴거를 믿는 사람도 있었고, 이러한 666에 대해서 공포감을 지닌 사람도 있었다. 곧 인류 종말의 시대가 오리라고. 하긴 마야의 달력에 2012년이 없다고 인류의 멸망이 2012년에 일어난다고 하는 공포 조장도 있었으니.

 

그런데 이런 666이 우리에게 편리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진짜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편리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에도 나오지만 국가인권위에서 파악한 바로는 우리가 하루 동안에 CCTV에 나오는 횟수만 해도 80회가 넘는다고 하니, 이런 공적인 통계말고 사적인 출연하기 합치면 우리는 하루에도 100회 이상 CCTV에 등장하게 된다는 얘기가 성립한다.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안전을 이유로 도처에 설치되어 있는 이 CCTV에 나라는 존재가 무작위로 촬영되고 남의 눈에 띈다는 얘기다. 내 사생활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얘기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건, 그래도 CCTV는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고, 우리가 의식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카드는 우리를 더 잘 드러내준다. 무엇을 사고, 어디에 가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등등의 생활 패턴이 카드 사용으로 드러나게 되며, 공적 권력이 아닌 사적 권력이 이러한 취향을 수집, 분석해서 자신들이 이윤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자주 겪는 일이지 않은가. 취향을 분석해서 상품 홍보에 관한 메일이 온다든지, 아니면 인터넷서점 같은 경우에는 취향에 맞는 추천도서 목록이 온다든지 하는 일 말이다. 굳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밖으로 돌지 않아도 되니 참 편리하다. 이런 편리함은 또 있다. 

 

직장인이라면 한 해에 한 번은 하는 연말정산을 생각해보면 안다. 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연말정산을 할 때 연말정산 간소화라고 하여 국세청에 들어가 내가 사요한 신용카드 액수 및 지출한 교육비, 그리고 의료비, 여기에 기부금까지 국세청에서 자료를 받아 제출할 수 있다. 이상하다. 본래 이를 국세청에 내가 제출해야 하는데, 반대로 국세청에서 받아 다시 국세청에 제출한다. 그런데 편리하다.

 

이 편리함 속에 들어 있는 감시와 공적 권력에 대한 내 사생활의 공개는 늘 겪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데... 이번엔 대형 통신사인 KT에 가입되어 있는 수백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소식도 있다. 이런 일에는 분개를 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공적 권력에 자료가 넘어가는 일과 사적 권력에 자료가 공개되는 일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공적 권력은 이윤이 아니라, 통제와 관리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이익을 얻고 있지 않은가.

 

정보의 집적은 언젠가 정보의 유출을 초래하고, 또 정보의 집적은 권력의 집중을 초래하게 되는데... 너무도 쉽게 위는 이를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책은 다섯 번의 강연을 모은 책이다.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감시가 이루어졌는지 역사적 고찰을 하고, 자발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정보를 어떻게 넘겼는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왜 존중되어야 하느니, 또 그것과 법과 인권의 관계는 어떤지,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사람이면 특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요즘은 지문 채취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어서, 주민등록증 발급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니고 있는 주민등록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무섭다. 언젠가는 아마도 카드 형식으로 이런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니게 하지 않고, 사람 몸에 칩을 이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 우리 몸에 바코드가 새겨질 때 이 때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라고 했는데...

 

설마,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 있는 21세기에 자신의 편리를 위해서 인간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그런 움직임에 찬성하지는 않겠지 하면서도 공적 권력인 국가와 사적 권력인 시장이 이렇게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 이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긴다.

 

정보의 집적을 막고, 정보가 한 군데에서 통제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지만 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분명 실시하고가 아니라 실시되고라는 피동형이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교육행정정보 시스템(NEIS)만 해도 예전에는 각자 떨어져 있던 학교 전산 프로그램들이 이제는 업무포털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고, 이 곳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집적되고 있다.

 

아마도 몇 십년만 지나면 우리나라 국민의 모든 정보가 이곳에 모여 있게 되리라.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학생 때는 심지어는 자신이 읽은 책까지도 이곳에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신체정보는 물론이고.

 

이런 감시사회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벗어나기는 힘들겠단 생각이 든다. 그렇담, 벗어날 수 없다면 감시를 해야 한다. 감시란 권력을 쥔 자가 권력을 쥐지 않은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이 권력을 쥔 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하는데... 우선은 전자주민등록증이 도입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테고, 전자사회가 반드시 우리에게 편리만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의 부작용에 대해서 인식하는, 편리 뒤에 숨어있는 권력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힘든 일이겠지만, 깨어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통제는 더욱 힘들어질테니...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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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필 - 인권감수성을 깨우는 54개의 공감
공선옥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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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천부적인 권리라고 했던가. 천부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살듯이 인권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공기가 오염되어 나를 괴롭히기 전까지는 공기의 소중함을 생각 못하고, 또 예전에 '물 쓰듯 쓴다'는 말이 있듯이 물의 귀중함을 잊고 살았지만 요즘은 물부족이다 물 오염이다 하여 물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듯이 말이다.

 

어느 순간 인권은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 순간은 내가 강했을 때가 아니다. 내가 약해졌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 때 인권은 내 문제로 내게 다가온다. 공기나 물의 소중함을 인식하듯이.

 

그렇다면 건강할 때, 또는 강할 때 인권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 이 때 인권을 생각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삶을 산다면 세상은 조금 더 건강하고 살 만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인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면서...

 

인권이 결코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남의 일이 아님을 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이도 아니고 인권에 대해서 머리 속으로도 얼마나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가.

 

아직도 우리나라는 인권 후진국에 들지 않는가. 이것은 약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가 겪어야 할 불편함과 내가 볼 손해를 우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해서 상대를 배제하려고 하지 않는가. 겨우 차이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차별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살색이라는 말을 제외하더라고, 예전에 많이 썼던 바른손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거의 사라지지 않았던가.

 

우리 생활에서, 우리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인권의 문제를,아주 소소하다고 우리는 그냥 넘겼던 문제들을 인권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글들이 이 책에 모여 있다. 아마도 우리가 이것도 문제야 하는 이야기들도 나오리라. 하지만 확실이 그것도 문제다.

 

인권에는 문제가 아닌 것이 없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 있으면 인권에 이미 한 발짝 들여놓았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다름과 틀림을, 차이와 차별을 구분할 수 있으면 말이다. 그렇게 문제를 인식하면 아무래도 자신의 행동이 조금씩은 변하게 된다.

 

어떤 문제들이 인권과 관련이 있을까?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남녀, 인종, 차종, 장애유무, 군대에서의 문제, 통행권, 가족구조, 아버지의 직업, 공부에 대한 강요, 이주 노동자, 모유 수유 등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이 책에 나온 그 많은 인권 사례들도 아직은 다 고쳐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남을 바로 또 다른 나로 인식하고 대우하는 일.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여기에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칸트의 말,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도 역시 통하고, 예수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 다 인권과 통한다.

 

남을 나처럼 대우하면 곧 그것이 인권이 된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다. 읽으면서 내 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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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해도 괜찮아 - 법륜 스님의 청춘 멘토링
법륜 지음, 박승순 그림 / 지식채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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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 한참 꿈을 꿀 나이에 오히려 좌절과 절망을 배우고 있는 세대.

 

오죽하면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생기고 희망을 찾기 힘든 비정규직 세대라는 말이 생겼을까.

 

그러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책도 있듯이 아픔을 겪고, 그 아픔을 이겨내는 일 또한 청춘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백척간두 진일보. 그 험준한 곳에서, 더 이상 발을 디딜 곳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밀어내듯 한 발을 더 내딛는 용기, 그 용기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세대가 바로  청춘 아니겠는가.

 

고 장영희 교수의 글 중에서 "괜찮아"란 제목을 지닌 수필이 있다. 이 수필에서 장영희 교수는 자신에게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말이 바로 이 괜찮아라는 말이라고 했다. 괜찮아. 힘든 사람에게 지금 네 상황은 견딜만해. 견딜 수 있어. 지금 네 모습 괜찮아. 이런 말.

 

법륜 스님이 아픈 청춘들에게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방황해도 괜찮다고. 아니 오히려 방황을 해야 한다고.

 

방황을 하되 자신을 들여다 보라고.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바로 자신에서 찾으라고. 그리고 그런 자신을 사랑하라고. 자신을 사랑하다 보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우리가 많이 갈등하고 방황하는 이유는 어쩌면 원인을 나 자신에서 찾지 않고 외부에서 찾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부에서 찾았기에 책임도 내 책임이 아닌 외부의 책임이고 그러다 보니 변할 가능성이 없는 외부에 모든 것을 투영하다 보니 자신이 더욱 상처받고 갈등은 해결이 안되고 하지 않았던가.

 

청춘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과연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는 법륜 스님도 말씀해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이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주변을 사랑하고, 자기 만족 하에 세상을 살아간다면 행복은 자연스레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는 책이다.

 

자꾸 눈을 외부로 돌리고 있었다. 남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무언가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쩌면 나를 판단하는 기준을 내 자신이 아닌 외부의 그 무엇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어가면서 꼭 청춘이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중년의 나이에도 아직도 외부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중년은 방황하면 안 되는가? 아니다. 중년도 방황해도 괜찮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 이는 자신을 외부의 사슬에 얽매게 하는 구실에 불과하다.

 

나를 들여다보고, 나 자신이 책임을 지어야 한다. 기준은 나다. 그리고 책임을 질 사람도 나다.

 

남들보다 우선 나를 볼 수 있고,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니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방황해도 괜찮다. 우리는 언제나 흔들리는 존재다. 다만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 그를 명심해야 한다. "나"를 보고 읽고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행복을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 스님이 하는 얘기도 바로 이것이다.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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