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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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책이기도 하고, 인간의 삶을 조건지우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책이기도 하다.

 

유명한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노동, 작업,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세가지 조건이라고 한다. 여기에 사유니 관조니 하는 다른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활동적 삶이라고 하는 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는 노동, 작업, 행위가 주요 요소로 나오고 있다.

 

노동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에서, 필연성에서 도래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자유를 느낄 틈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을 한다. 여기에 자유가 개입할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노동은 순환적이다. 이는 자신의 후손들을 생산하는 데서, 즉 다산성으로 나타난다. 노동의 필연성이 다산성을 유발하고, 이 다산성이 인간의 조건을 형성한다.

 

그러나 죽음의 존재들은 불멸을 꿈꾸기도 한다. 아니 꿈꾼다. 의식이 있는 존재가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았을 때, 그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생각이 없는 존재, 즉 사물에 불과하다. 그러한 불멸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작업이다. 자신이 생산물을, 즉 노동에서처럼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지고 마는, 그래서 사라져서 순환성을 일으키는 노동 생산물이 아니라, 순환성을 깨는 불멸성을 지니는 대상을 창조하는 노력이 바로 작업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꿈꾸며 자신의 현존을 후대에게도 알리고 싶은 욕구가 바로 작업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과 작업은 결국 생산물에 관계하고, 이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공론 영역, 즉, 공적인 영역이다. 이 공적 영역을 정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고, 정치 영역을 구성하는 인간의 조건이 바로 행위이다. 이 행위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던지는 용기가 필요하고, 이 용기는 바로 자유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또한 이 행위는 바로 나와 같은 남을 전제로 해야만 하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용서와, 남을 의식한 약속 이행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고 한다.

 

나와 남이 관계를 맺어가는 공간에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용서와 믿음이 필수적이라고 하는데, 이를 행하는 공간이 바로 정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삶을 유지하는 공간이 아닌, 실존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략 정리를 하면 노동과 작업은 개인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이를 사적 영역이라고 하자. 행위는 공적 영역,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태어남이라는 기적을 지닌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요소로 노동과 작업을 지니고 있다면, 같은 기적을 지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간적 삶을 유지하는 요소에는 행위가 있다.

 

이러한 행위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노동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 사태가 지금의 현실이고, 우리는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유의 힘을 필요로 한다. 노동이 행위를 전복시키고, 노동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 이유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지만, 이에 몰입하다보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자유를 상실하고, 필연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바로 이 현실을 직시할 정신의 힘, 아렌트가 나중에 전개하고자 했던 사유, 의지, 판단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의 활동적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므로, 노동, 작업 ,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다.

 

쉽지 않은 책이고, 어떻게 이해해야 잘 이해했는지 알 수 없는 책이다. 많은 부분이 그리스 철학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근대 철학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핵심을 잘 잡아내기 힘들다. 철학적 소양이 부족한 나에게는 말이다.

 

다만, 그냥 내 맘대로 이해하고, 이를 내 삶에 적용시켜야지 하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고 나간 책인데...

 

과연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일까...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인간적인 삶을 향유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든 책이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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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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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 조건이다.-50쪽

말의 적실성이 위태로운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문제들은 당연히 정치적이 된다. 왜냐하면 말은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52쪽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로 나는 인간의 세 가지 근본활동을 나타내고자 한다. 노동, 작업, 행위가 그것이다.
... 노동은 인간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 작업은 인간실존의 비자연적인 것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 작업은 자연적 환경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해준다. ... 작업의 인간조건은 세속성, 다시 말해 대상성과 객관성에 대한 인간 실존의 의존성이다.
...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이다. 행위의 근본조건은 다원성으로서 인간조건, 즉 보편적 인간이 아닌 복수의 인간들이 지구상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상응한다. ... 다원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55-56쪽

인간조건은 지상의 삶을 영위하는데 인간에게 주어진 제반조건 그 이상을, 즉 인간적 제약성 자체를 의미한다.
... 인간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인간은 무엇을 하든 언제나 조건지어진 존재라고 하는 이유이다.-57-58쪽

행위만이 인간의 배타적 특권이다. ... 행위만이 오로지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을 자신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74쪽

대부분의 정치적 행위는 그것이 폭력의 영역 밖에서 아루어지는 한, 말을 통해 실행되며 또 더 나아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발견하는 것이 행위라는 점이다. 말로 하지 않는 것은 단지 폭력이다. ... 정치적이라는 것, 즉 폴리스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힘과 폭력이 아니라 말과 설득을 통하여 모든 것을 결정함을 의미한다.-78쪽

단순한 삶의 필연성을 지배하고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자신의 생존에 대해 모든 피조물이 갖는 내적 충동을 극복하는 정도에 이르러서 더이상 생물학적 과정에 매여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이를 '좋은 삶'이라 부를 수 있다.-89쪽

공동세계의 조건에서 실재성을 보증하는 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본성'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언제나 같은 대상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 공동세계의 파괴는 대개 한 대상이 인간의 다원성 속에서도 자신의 동일성을 드러내고 유지할 수 있는 다영성이 파괴됨으로써 실행된다. ... 공동세계는 오직 이 세계의 관점들의 다양성 속에서만 실존한다.-111-112쪽

사적 영역과 공론 영역의 구별이 필연성과 자유, 무상성과 영속성, 수치와 명예의 대립과 일치하더라고... 두 영역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한편으로는 숨겨져야 할 것이 존재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공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127쪽

제작인은 군주이자 지배자이다. ... 제작인은 장차의 생산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혼자서 자유롭게 생산할 수 있고, 다시금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작품에 홀로 맞서서 자유롭게 파괴할 수 있다.-202쪽

가치는 사물이 사적 영역에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지만 그것이 공적으로 나타나는 순간 자동적으로 획득하는 질이다.-223쪽

말과 행위의 기본 조건인 인간의 다원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지닌다.-235쪽

말과 행위로서 우리는 인간세계에 참여한다. 이 참여는 제2의 탄생과 비숫하다. ... 이 참여는 우리가 결합하기를 원하는 타인의 현존에 의해 자극받는다. -237쪽

사람들은 행위하고 말하면서 자신을 보여주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인간 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239쪽

제작은 세상에 둘러싸여, 세상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이루어진다. 행위와 말은 타인의 행위 및 말의 그물망에 둘러싸여 그것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이루어진다.-249쪽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곳에서, 말이 공허하지 않고 행위가 야만적이지 않은 곳에서, 말이 의도를 숨기지 않고 행위가 실재를 현시하는 곳에서, 권력은 실현된다. 그리고 행위가 관계를 침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립하고 새로운 실재들을 창조하는 곳에서만 권력은 실현된다. 행위하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 현상 공간인 공론 영역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권력'이다.-262쪽

행위의 불행은 모두 인간조건인 다원성에서 발생한다. 다원성은 공론 영역인 현상의 공간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므로 다원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공론 영역 자체를 제거하려는 시도와 같다.-284쪽

자신이 무엇을 행했는가를 알지 못하고, 알 수 있다 할지라도 행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무능력인 환원불가능성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용서하는 능력이다. ... 미래의 불확실성인 예측불가능의 치유책은 약속을 하고 또 그 약속을 지키는 인간의 능력에 내재해 있다. 이 두 능력 가운데 하나인 용서하는 능력이 ... 과거의 행위를 구제한다는 점에서 이 두 능력은 동질적이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능력은 미래라는 불확실성의 바다에 안전한 섬을 세우게 한다.-301쪽

예측불가능성은 '인간 마음의 어두움', 즉 오늘의 이 사람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에서 발생하며, 동시에 모든 사람이 동일한 행위능력을 가지는 동등한 사람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행위의 결과들을 예견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 약속의 능력은 인간사의 이러한 이중적 어둠을 극복하는 기능을 한다. -309쪽

활동적 삶은 자신의 유일한 준거점인 삶에 구속되어 있다는 오로지 이 이유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노동하는 신진대사인 삶 자체는 능동적으로 될 수 있고 자신의 완전한 다산성을 펼쳐보일 수 있다.-389쪽

사유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가능하며 또 실제로 이루어진다.-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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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불교 살림지식총서 256
오세영 지음 / 살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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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불교와 시의 연관성은.

그런데 언뜻 생각해 보아도 불교와 시는 상당히 연관이 있다.

부처가 그 많은 말들을 해놓고도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역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온갖 상징들.

그리고 이렇듯 언어를 절대시하지 않지만, 또한 언어로부터 진리를 설파할 수밖에 없는 모습.

비록 염화시중, 이심전심, 교외별전이라는 말로 언어로부터 독립한 진리의 설파를 더 강조하고 있지만.

 

시란 말을 분석해보면, 시는 말과 절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또한 절이라는 말은 땅과 마디로 나뉘어져 있고, 결국 시란 아주 작은 땅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생계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의 언어가 중언부언 길어질 이유가 없으니, 시가 추구하는 모습과 너무도 비슷할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든다.

 

불교와 현대시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아주 작은 책이다. 이 작은 책을 다시 3부로 나누고 있는데, 1부는 불교와 시의 연관성을 불교와 시의 특성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점을 이론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어, 불교와 현대시의 관련성이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2부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분석하고 있다. 거창하게 독립을 염원한 시다, 아니 그런 거창한 의미를 찾기 보다는 이 시는 그냥 이별을 다룬 시다 등등 많이도 해석이 되어 이 시를 우리나라 형이상시, 또는 사상시의 세계를 개척한 시라고들 말하는데, 여기서는 선시(불교시)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있다. 절대 진리의 세계를 추구하는 선시라고 말이다. 또 하나의 타당한 해석이 이 시에 붙여지고 있으니, 좋은 시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되고, 향유가 된다는 사실을 한용운의 시를 통해 알 수 있으니, 이 부분은 시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참 좋겠단 생각이 든다.

 

3부에서는 조오현의 시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선시, 즉 불교시를 다루는데, 일반인들이 깨달음을 쓴 시를 다루기보다는 스님이 쓴 선시를 이야기하는 편이 이해하기에 훨씬 쉬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조오현의 시조는 일상의 감정에서부터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시조까지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이 책의 제목과 연관되는 시조는 후기의 시조이리라.

 

스님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시조로 표현하고 있고, 이 조오현의 시조가 지니는 의의는 한시로 표현하지 않고, 이를 우리의 전통적인 시가 형식인 시조로 표현하고 있는데 있다고 한다. 그렇다. 천 년을 넘게 이어져 온 이 시조 양식 속에 깨달음을 담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조오현의 시조는 선시조로서의 면모도 있지만, 우리의 형식을 살려, 그 속에 깨달음을 담았다는 문학사적 특서오 지니고 있게 된다. 이 점을 이 작은 책에서 지은이는 말하고 있다.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그렇다고 어렵다고 할 수만은 없다. 2부와 3부는 쉽게 다가온다. 그리고 시를 해석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가까이 두고 읽어볼만한 책이다.

 

덧말

 

조오현 스님의 "절간이야기"란 시집이 있다. 앞부분은 산문시이고, 뒷부분이 이 책에서 이야기한 시조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부분 산문으로 길게 쓰인, 이야기가 있는 그 시들, 참 좋다. 가슴이 뭉클하다. 한 번쯤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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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교 폭력에 관한 문제가 날마다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개개인의 싸움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인 폭력이라고, 이거는 미성년자라고 봐줄 수준이 아니라고, 법에 의해 엄정히 처벌해야 한다고 한다.

 

학교와 시와 경찰이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고 한다.

 

마치 지금까지는 안해왔다는 듯이 호들갑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퇴직경찰이나 퇴직 교사들이 학교 지킴이란 명목으로 학교에 배치된 경우도 있고, 학교폭력대책위원회에는 지역 경찰이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전문 상담인력까지 학교에 배치하려는 노력도 있어왔고.

 

그럼에도 왜 이놈의 학교폭력은 근절되지 않을까? 집단 생활을 하면서 근절될 수 없는 문제일까? 그건 아니다.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게 되어 있다. 학교 폭력도 마찬가지다. 다만 어디서부터 풀어갈지 고민을 해야 한다.

 

학생들을 범죄자 취급을 하고, 학교에 경찰이 상주하면 학교 폭력이 해결될까? 아니다. 이는 다른 여러나라에서 보더라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학교의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결이 될까? 이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형제가 있는 나라에서 흉악범죄는 이미 다 없어졌어야 한다.

 

결국 학교 폭력은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처벌이 문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학교의 구조, 교육의 구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교육의 목표를 민주시민의 양성이라고 해놓고는, 민주시민이 어떻게 해야 양성되는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교육의 목표는 거창하나 도대체 민주시민교육을 하는 경우는 없다. 아니, 오히려 민주적이지 않은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가?

 

축산업에서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가르는 사업을 옳지 않은 축산방법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교육현장인 지금 학교 공간에 들어서 있는 아이들을 보라. 과연 학교 교실이 인간적인 공간인가? 인간적을 쾌적함을 느끼는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있는가? 자신이 배워야 할 과목조차도 선택할 수 없고, 오직 주어진 대로 배워야 하는 아이들, 그리고 교칙이라는 선험적으로 정해진 규율에 자신을 맞춰야 하기에 머리부터 옷까지 어느 하나 자유가 없는 아이들이 과연 "나"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라도 할 기회가 있었던가?

 

"나"도 생각 못하는데, "남"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남"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전혀 없는데,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을까? "나, 남,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도 없는 아이들에게 학교 폭력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최소한 교육의 구조부터 바꾸어야 하고, 아이들이 "나, 남,우리"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이들이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나? 이게 선행이 되어야 배려, 남에 대한 존중, 차이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나? 이게 이루어져야 폭력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나?

 

단순히 처벌 위주로 가면 학교 폭력은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 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때다.

 

예전부터 학교 폭력에 대해 고민한 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책으로 펴냈었는데... 많은 경우가 나타나 있고, 교사들의 노력이 들어 있다. 교사들, 지금까지 손놓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소설 중에서 학교 폭력을 다룬 소설이 있다. 해결방법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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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제3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79
서효인 지음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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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했다는데, 시가 시로서 성립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한탄일텐데, 오히려 이러한 시대일수록 시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데, 근대라는 시기를 혁명의 시대, 또는 폭력의 시대라고 하고, 현대를 정보화의 시대, 개인주의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간이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이 시대에 과연 시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시대에 대응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들을 하는데, 그럼에도 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어려운 시대일수록 꿈을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요소가 희망이라는 사실에서, 시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처럼 우리가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삶이 공허해지고 말텐데, 이런 의미를 찾는 노력을 시가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까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데...

 

시집을 읽으면 그래도 대표시가 제목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고 그 시를 더욱 더 주목해서 보게 되는데, 이게 웬일인가 제목이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이다. 세계 대전은 달랑 두 번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백 년 동안이라니, 무슨 서양의 백년 전쟁도 아니고, 그래서 이 시를 읽는데, 아니 시집 자체가 폭력, 전쟁, 공포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아도, 이런 내용이 도처에서 넘쳐나고 있는데, 결국 이 시집의 제목에 나와 있는 시처럼 우리는 백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누구 말대로 전쟁의 목적이 바로 평화라는 역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탄압을 하는 이 역설이 바로 이 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이 나온다. 이 시에는 얌전한 사람, 순한 사람, 현명한 사람, 정확한 사람, 배운 사람, 인내심 강한 사람, 멋진 사람,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순서대로 나온다. 이들을 이렇게 명명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들은 어떤 행위로 이렇게 명명되었다. 이들이 명명된 사실은 사회에서 어떤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을 떠나서 우선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이라고 한다. 우린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어야 한다. 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동일성이 있고, 이 사실이 다양성 속에서도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동일성에 기반해 다양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아니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은 지속된다. 앞으로도 죽. 이 전쟁이 단지 물리적인 전쟁만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 시집 2부와 3부에 나와 있다. 2부와 3부의 제목만 보면 "아주 도덕적인 자의 5분"과 "핍진성"이다. 아주 도덕적인 자라는 말에서 아주란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도덕이 우리를 얼마나 길들이는지, 우리를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존재로 강제하는지 알려주고 있고, 핍진성이라는 말은 진짜는 아니되 진짜와 같음을 의미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핍진성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감추진 진실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시인은 시에서 핍진성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가짜 진실에 속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는 아도르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를 겪고도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야만적이다.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시 속에서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사람들은 시를 읽어야 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어두운 모습을 표현해내는 시를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얌전한, 순한, 멋진, 배운, 인내심 강한, 유머스러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된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을 바로 시가 주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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