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원자력 핵의 진실 - 원자력 전문가가 원자력을 반대하는 이유
고이데 히로아키 지음, 김원식.고노 다이스케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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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많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하다. 진실로 가는 길에는 이정표가 없거나, 중간 중간 길이 끊겨 있기도 한다. 또 갖가지 위험요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에서 포기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감춰지게 된다.

 

감춰진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그 자리를 거짓이 차지하게 된다. 거짓이 진실인양 가장하고서.

 

원자력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 지구 환경오염을 없애는데, 줄이는데 도움을 주는 청정에너지일까? 인류를 대재앙으로 이끌 핵발전일까?

 

영어로 'nuclear'라고 쓰는 이 말이, 미국 등 선진국에서 쓰면 '원자력'이고 북한이나 이란 등에서 쓰면 '핵'이 되는데, 같은 대상을 놓고도 이렇게 다른 용어로 쓰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원자력에 대한 정확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같은 사물을 다르게 사용할 때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부정적 작용과 긍정적 작용이 있을 때 어느 면을 우선 고려해야 할까를 생각하면 원자력의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령 의약품의 경우 두 경우가 다 있을 때 과연 우리는 그 약품을 사용하게 될까, 극단적인 경우 아니면 사용하지 않을텐데... 이 경우를 원자력에 적용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아직 우리 인류는 에너지 자원에서 극단적인 경우에 처하지 않았고, 오히려 에너지 과잉 상황에 처해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에 우리는 원자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에너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즉 극단의 경우에 처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원자력 발전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원자력으로 이득을 얻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 집단은 엄청난 이익을 얻고 있으며, 이 이익을 감추기 위해 여러 통계들을 조작하거나 누락하여 제시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자료들에 대한 접근이 어렵도록 하는 비민주적 운영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연간 방사능피폭량이 정해져 있기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자주 바뀔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자주 바뀌다 보니 숙련된 노동력이 원자력 발전소에 투입되기는 힘들고, 따라서 이들 노동력들은 대부분 하청, 재하청업자에 속하게 되고, 사회에서 이중으로 고통을 받게 되기 쉽다고 한다.

 

이산화탄소 발생이 적다는 통계도 역시 원자력 발전에만 한정하고 있는데, 발전을 하기 위해 우라늄을 채취, 이동, 정련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고의로 누락시키고 있으며, 또한 원자력 발전으로 인해 생기는 쓰레기의 처리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양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들을 다 계산에 넣으면 오히려 화력발전보다도 이산화탄소의 양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원자력 발전을 추진하는 이유가 사라지므로 이들은 이런 식으로 은폐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바닷물이 이산화탄소를 많이 머금고 있는데, 바닷물의 온도가 올라가면 바닷물 속에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으로 배출이 된다고 하는데,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바닷물 온도는 다른 곳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곳에서도 역시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양이 말이다. 이 얘기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는데... 작가는 이런 예를 사이다로 들고 있다. 사이다에 열을 가하면 탄소가 증발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닷물도 같은 현상을 보일 것이라고 한다.

 

책의 곳곳에서 원자력 발전이 안되는 이유를, 그리고 원자력 발전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진실을 감추고 있는지를 쉽게 잘 알려주고 있다. 원자력 하면 고도의 과학지식을 알고 있어야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원자력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어도 우리가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원자력에 대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원자력에 대한 공방. 아니, 이는 공방할거리도 아니다. 이제는 원자력 발전은 멈춰야만 한다. 그렇다면 원자력에 많은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하는 의문이 들면 이 책을 읽어보라.

 

원자력에 우리나라만큼 의존하던 일본도 원자력 발전 없이도 충분히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에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 충분히 에너지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한다. 우리는 충분히가 아니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지 않은지, 불필요한 에너지 사용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그렇게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쓰면서, 후손에까지 엄청난 부담을 주는 원자력을 쓰겠다고 할 수 있는지 저자는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이제 대답은 우리가 할 차례다. 우리는 원자력을 필요로 하는가, 필요로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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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지금 왜 녹색당인가이다. 얼마 전 호부터 곁표지에 제목을 달기 시작했다. 그 호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 또는 중요한 말이 제목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번 호는 녹색당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제목을 잊혀져선 안되는 원자력 발전 사고라고 하고 있다. 좀 다른 쪽으로 이 책을 읽었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아니다. 녹색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원자력 발전이기 때문이다.

 

지금 각 정당들 중에서 원자력 발전 중지를 선명하게 내세운 정당이 어디인가? 아니 원자력 발전 전면 중지, 기존 가동 원자력발전소는 점점 폐기 등으로 정강을 내세운 정당이 있던가? 그냥 말로만 우리는 원자력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뿐이지 않은가?

 

정부는 강원도에 원자력 발전소 부지를 선정했다고 한다. 20기가 넘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나라에서 건설 중이거나 건설 예정 중인 원자력 발전소가 10여 개가 넘는다고 하니, 우리나라는 원자력 발전의 천국이라고 할만하다.

 

이런 원자력 발전에 대하여 올해 이루어지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게 쟁점이 될 수 있을까? 이를 쟁점으로 내세우는 정당이 있을까? 다들, 복지, 복지 하면서도, 민주, 민주 하면서도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폐기되어야 할 가장 비민주적인 발전인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지 않은가?

 

원자력 발전을 문제삼을 수 있는 정당은, 아니 문제삼을 정당은 녹색당이고, 이렇게 중요한 문제점을 기존의 정당이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기에 녹색당의 필요성이 대두했다고 볼 수 있다.

 

야권통합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른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겠지만, 녹색당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니고 정강을 정하고,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시급한 환경, 생태 문제들이 뒤로 처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에, 그리고 따로 가되, 함께 간다는 원칙을 견지한다는 생각에서 녹색당은 창당되어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되어갈지 지켜볼 일이고...

 

이번 호를 읽으면서도 참으로 답답했다. 아직도 원자력 발전을 하려고 하다니... 그것도 국민들이 반대를 하는데... 서울 도심 한 복판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는데도, 바로 이웃 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지금도 고통받고 있고, 우리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교과서에만 존재하나 보다. 우리나라 위정자들에겐. 그들은 이미 원자력 발전은 돌이킬 수 없다고, 이미 너무 진행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말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가 있다는 말, 학교 다닐 때 배우지 않았단 말인가.

 

제 필요에 의해서만 배움이 이루어졌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이번 호에 실린 배병삼의 글에서 자로의 경우를 다시 한 번 읽어야 한다. 세계 문제, 우리나라 문제, 그리고 바로 자신의 문제에서, 크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자로의 경우에서 배워야 하는데...

 

녹색당, 창당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원자력 발전을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게 주요한 쟁점사항으로 제기하길 바란다. 그래야만,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 폭발의 위험이 우리들에게 각인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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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에 광고가 크게 났다. 흑백사진인데... 어, 많이 보던 얼굴인데 했더니, 이런 박인환이었구나. 목마와 숙녀의 시인, 아니 세월이 가면의 시인. 김수영의 친구. 195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 등등. 그의 얼굴이 정말로 멋있게 난 사진이 신문에 실려 있으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그동안 임응식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으니, 내 무식을 탓할 수밖에 없겠지만, 사진가 하면 최민식밖에는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내 문화적 한계도 이 광고를 통해 통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광고 사진이 바뀐다. 김환기 사진도 있고, 구직이라는 글자를 가슴에 단 사람의 사진도 있다. 야, 보고 싶다. 한 번 가보고 싶다. 어디서 하나? 덕수궁 미술관에서 한다. 가격은 5000원. 이 정도면 갈만하다. 아니 가야겠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니, 생각난 김에 가야겠다. 하여 오늘 갔다 온 길.

 

4개의 전시관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하나도 놓치기 싫을 정도로 좋았다. 모두가 흑백사진인데, 사진을 감상하는 능력이, 사진의 기법을 읽는 능력이 있는 나는 아니지만, 그 사진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일제시대부터 1980년대까지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우리나라 근대사의 모습 중에서 여러 인물들과, 우리 문화재들과 그리고 우리 역사, 우리 자연이 사진 속에 녹아 있었다.

 

특히 내 맘에 든 전시관은 3관. 명동시대 전시관. 여기에는 명동에서 생활했던 작가들의 사진이 나열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작가들. 지금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작가만 해도 김동리, 백철, 손소희, 최정희, 오상순, 조병화, 정한모, 그리고 박인환이니... 그들의 사진과 더불어 그들의 작품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기쁨. 오길 잘했다는 생각.

 

사진사에서 유명하다는 임응식. 그를 발견하고 즐거워진 오늘이다.

 

사진으로 남긴 기록.

글과는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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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그레이트북스 84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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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묶였으면 상당히 읽기 힘들었으리라. 다행히도 출판사가 두 권으로 분리해서 읽기가 그나마 쉬웠다고 할까?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1권에 실린 내용이었는데, 이는 상당히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읽기였다. 반면에 2권에 실린 전체주의에 대한 내용은 그래도 우리 시대와 가깝다는 점에서 읽기가 앞부분 보다는 조금 수월했다고나 할까.

 

읽어가면서 이런 전체주의가 과연 히틀러와 스탈린에게만 해당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체주의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묶어버리고(이는 개성이 없는 인간으로 동질화 한다는 말이다), 또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국가, 하나의 인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요즘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말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와 동일한 전체주의는 나타날 수가 없다. 이미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해졌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최첨단 기기들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을 통해서, 테러를 통해서, 아니면 강제수용소를 통해서, 커다란 거짓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서 말이다.

 

이미 세상은 국경이 의미없어졌고(그놈의 자유무역협정!으로 관세라는 국경을 철통처럼 지키던 장벽이 사라지고 있으며, 교통수단의 발달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언어도 이상하게 하나로 통일되어 가고 있으며(이게 축복일지, 재앙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점점 정치에서 멀어지고 있으며(정치라는 행위를 하는 순간은 투표용지에 기표할 때뿐이라는 자조섞인 말도 있지 않은가), 자신만의 생각을 잃어가고(세상의 미는 표준이 되어 있고, 질병 또한 표준화되어 있으며, 입고 있는 옷들과 신발, 또 먹는 음식까지 이상하게 개성이 있어야 한다면서, 개성을 말살하고 있지 않은가) 있지 않은가. 인종이야 세계는 하나라는 구호로 뭉쳐지고 있으니, 인종차별은 불가능한 시대라고 보아야 하지만, 인종차별이 없는 대신, 하나의 인종으로 통일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 더 쉽게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는 운동이 성립하지 않을까? 이거 갑자기 소설 속의 '빅 브라더'가 뛰쳐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빅 브라더'가 존재하는 세상은 이미 전체주의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너무 거창하다.. 그렇담 우리나라는? 아니 바로 우리랑 같은 민족인 저 위쪽에 있는 나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북한 사회를 분석하는 틀로서 아렌트의 이 전체주의 논의가 유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가고 들었다. 물론 차이점도 있지만, 유사점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도 국민들을 숫자로 통제하고 있는 면에서는, 그것도 대다수 국민들이 별다른 저항도 없이 그 속에서 안주하고 있으니, 이제는 주민번호라는 숫자뿐만이 아니라, 전자주민증이라는 칩으로 국민을 통제하려고 하니, 도처에 까려 있는 폐쇄회로 테레비전을 보아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개성을 잃지 않았으니, 또한 우리의 언어를 잃지 않았으니 전체주의에 빠져들지 않았다고 위안을 삼는다. 우리는 아직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284쪽)"이니 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시작할 능력이 있으니 전체주의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개성을 없애려고 하는 운동이 전체주의라면 우리는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우리의 인격을 확보해야 하며, 어떤 순간에도 나라는 개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전체 인간으로 존재하되, 개별적으로도 존재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개별적 인간, 이는 나와 남을 함께 볼 수 있는 인간이고, 남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인간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인간이다. 

 

그렇지 않고 나를 남에게 맡기는 순간, 전체주의는 한걸음 다가오게 된다. 이를 명심하자.

 

내 멋대로 읽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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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그레이트북스 84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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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운동은 대중의 조직을 목표로 하며, 그것에 성공한다. ... 전체주의 운동은 순전히 수의 힘에 의존...-20쪽

대중은 잠재적으로 어느 국가에나 존재하며, 정당에 참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투표하러 가지도 않는 중립적이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이 다수를 형성한다. -25쪽

대중 사이에서 전체주의 운동이 성공한 것은 일반적으로는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국가, 특수하게는 유럽 국가 정당 체제가 가진 두 가지 환상의 종말을 의미했다. 첫번째 환상은 대다수 국민은 공공업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또 모든 개인은 특정한 정당에 동조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운동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무관심한 대중이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국가에서 쉽게 다수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민주주의는 소수에 의해서만 적극적으로 인정되는 규칙에 따라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전체주의 운동이 파괴한 민주주의의 두번째 환상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무관심한 이 대중이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또 그들은 정말 중립적이어서 국가의 정치저 삶에서 불분명한 배경을 이룰 뿐이라는 것이었다.-26쪽

민주주의의 자유는, 시민들이 어떤 집단에 속해있고 또 그 집단에 의해 대변되거나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곳에서만 의미가 있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다.-27쪽

대중사회가 가진 철저하게 이질적인 균등성은 전체주의의 일차적 조건 중 하나이다. ...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들의 대중조직이다. ... 전체주의 운동의 ... 외적 특징은, 개인 성원에게 총체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이고 변치 않는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42,43쪽

전체주의는 절대 통제권을 소유하면 항상 선전을 교화로 대체한다. ... 이데올로기 교의와 실천적 거짓말을 끊임없이 실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72쪽

운동이 작을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단순한 선전에 소비한다. 전체주의 정권에 가해지는 외부 세계의 압력이 크면 클수록 전체주의 독재자들은 더욱 활발하게 선전에 관여하고자 한다. ... 반대로 테러와 불가피하게 결합된 주입식 교화는 운동의 힘이 커지고 전체주의 정부가 외부 세계로부터 더욱 고립되어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증가한다. ... 선전은 비전체주의 세계를 다루기 위해 전체주의가 사용하는 하나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 그 반대로 테러는 전체주의 통치형식의 본질이다.-75,76쪽

전체주의 운동은 사회주의와 인종주의를 사용하면서 거기서 공리주의적 내용, 즉 계급이나 국가의 이해 관계를 지워버렸다.-82쪽

전체주의 선전의 진정한 목표는 설득이 아니라 조직이다.-103쪽

엘리트 교육은 진리와 거짓,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이론가적 능력을 없애는 데 맞추어져 있다. 그들의 우수성은 모든 사실적 진술을 목적의 선언으로 즉각 해체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138쪽

히틀러나 스탈린은 영구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감추기 위해 안정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 그(전체주의 통치자)는 운동의 허구세계를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현실로 확립해야만 했고, 다른 한 편으로 이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안정을 구축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148쪽

전체주의 국가에서 누구나 다 확실하게 아는 단 하나의 규칙은 어떤 통치기구가 더 많이 알려진 통치기구일수록 권력이 적고 그 존재가 공개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비밀이 시작되는 곳에서 실질적인 권력이 존재하기 시작했다.-167쪽

어떤 전체주의 독재자도 왕조를 세워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옛방식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적이다.-173쪽

전체주의 운동과 전체주의 국가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전체주의 독재자가 운동의 지도자보다 더 큰 스케일로 더 일관성있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는 것이다.-180쪽

전체주의 정권의 문제점은...전혀 새로운 미증유의 권력개념이 그들의 정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 직접적인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문제가 되며, 민족주의보다 민족 이익을 무시하는 태도와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 문제가 된다. ... 실용주의 동기를 경멸하는 태도가, 또 권력욕보다 '이상주의',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 허구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더 문제점이 많다. ... 전체주의가 생각하는 권력은 오로지 조직을 통해 산출되는 힘에 놓여 있다. -187,188쪽

전체주의 경찰의 과제는 범죄의 적발이 아니라 정부가 특정한 범주의 주민들을 체포하기로 결정할 때를 위해 항상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 흥미로운 현상은 전체주의가 위반 혐의를 가능한 범죄로 대체한 것이다.-200,201쪽

용의자라는 범주는 전체주의 조건에서는 전 주민을 포함한다. 공식적으로 정해졌지만 수시로 변하는 노선에서 일탈한 사상은, 어떤 활동 영역에서 일어나든 모두 이미 혐의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생각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자가 되며...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동시에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207쪽

총체적 지배로 향한 최초의 중요한 행보는 사람에게서 법적 인격을 죽이는 것이다.-233쪽

산송장을 마련하는 일에서 그 다음 결정적인 단계는 인간 내면의 도덕적 인격의 실종이다.-239쪽

양심이 부적절해지는 조건, 선을 행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을 만듦으로써 전체주의 정권의 범죄에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조직적인 가담을 하게 되고, 이 공모관계는 희생자에게까지 확대되며 그렇게 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전체주의적이 된다.-241쪽

도덕적 인격과 법적 인격을 살해한 후에 개성의 파괴는 항상 성공적이었다. ... 개성을 파괴하는 것은 자발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스스로 새로운 일, 즉 환경과 사건에 대한 단순한 반응의 토대 위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45쪽

전체주의는 권력을 얻고 지킬 수 있는 곳은 조건반사의 세계, 자발성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꼭두각시의 세계뿐이다.-248쪽

이 내적 강요는 논리성의 독재로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외에 어떤 것도 그에 대항할 수 없다.-275쪽

통치형태로서 전체주의 지배는 이 고립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생활도 파괴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전체주의 지배는 고독에, 세상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경험에 기반을 둔다. 그런데 이 경험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절망적인 경험ㅇ다.-278쪽

역사에서 모든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진리도 그대로 유효하다. ...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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