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담는 시선, 최민식 - 우리시대 마이스터 3
최민식 지음 / 예문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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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사진]이라는 책이 최근에 발간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변화를 이끈 사진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또 퓰리처상 사진전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들을 보면 사진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사진은, 베트남 전쟁에서 폭탄을 피해(?) 달리는 어느 소녀의 모습이 찍힌 사진과, 1987년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을 친구가 안고 있는 모습, 그리고 걸프만에서 기름에 흠뻑 젖어 있는 새의 모습인데... 

하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해 냈고, 이한열의 사진은 우리나라가 민주화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새의 모습은 석유로 인한 전쟁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인지를 알려주는역할을 했다. 

여기에 50년이 넘게 사람을 찍어온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최민식이다. 

최민식은 "나는 사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다. 사진으로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화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제나 현실을 담기를 원한다. 그것이 내 삶이고, 내 사진에 담긴 구호다(142쪽)"라고  말한다. 

이런 철학으로 사진을 찍어왔기에 그는 독재정권시대에 사진으로 인해 엄청난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지닌 철학을 지키고 굳건하게 사진으로 우리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그의 사진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고, "인간 중에서도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렌즈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사진의 램브란트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작품은 베토벤의 심포니에 비겨 "휴먼 심포니" 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어렸을 때 영향을 받은 밀레의 그림을 그는 사진 속에서 구현했다고 볼 수 있어서, 그의 사진은 사진으로 보는 밀레의 그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은 이유는 "사진을 찍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 평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해서(77쪽)"이고, 그럼에 "그 안에 담긴 철학은 리얼리즘이(77쪽)"라고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찍은 이유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없는, 그들이 활기차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추구하기에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고 그들을 촬영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 꿈이 있었기에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런 활동이 지금의 최민식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최민식의 사상과 활동을 담은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의 출생에서부터 사진작가가 되기까지, 그리고 자신작가가 되어서 활동한 내용과 그의 사진에 담긴 사진철학, 인생관까지 모두가 담겨 있다. 

꼭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격동기에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감동을 준다. 

특히 사진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사진은 기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말, 그리고 꾸준한 노력만이 좋은 사진을 만든다는 그의 말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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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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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문학은 죽었다는 선언이 있었다. 문학이 사회 현실에 대응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이어 나온 말이다. 그만큼 문학은 작은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회 현실을 포괄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횟수가 점점 줄어 요즘은 거의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읽은 책이 [광장]이었고, 이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우습다. 문학이 죽었다고 선언된 시대에 한참 옛날에 쓰인 소설을 읽고 있다니. 그런데도 이 책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소설 속의 현실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으니... 

옛날 책을 뒤져보니 1978년 초판이라고 하던데...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은 2009년 114쇄고. 

무려 114번이나 찍어냈는데... 그래도 읽히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젠 그 땐 그랬지 하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노동자들의 지난한 삶도, 자본가들의 몰상식한 삶도 웃으며 그 때는 왜 그랬을까 이러면서 지냈으면 좋겠는데... 

70년대에 비해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을까? 

이 질문을 던진다. 이 소설 속의 난장이들에서 우리는 거인이 되었나? 아니 거인은 아니더라도 보통사람은 되었나? 

2대8사회니, 승자독식사회니 하면서, 가뜩이나 살기 힘든데, 자유무역협정이다 뭐다 하여 일반 소시민은 더욱 살기 힘들어지지 않았나? 

고등학교 교실에서 시작하여 고등학교 교실에서 끝나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반복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난의 재생산, 부의 세습... 

난장이 아들의 저항을 이해할 수 없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편의 주인공처럼,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으니... 하긴 얼마 전엔 의무교육에서 급식을 의무로 하자는 주장도 포퓰리즘이라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201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이 70년대를 다룬 소설이 가슴에 와닿으니,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난장이 아들 영수의 행동이 결국 개인적인 저항으로 그치고 말았다면, 아니 그의 저항이 다른 이들의 의식을 깨우치는데 일조를 했으니, 개인적인 저항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해야 하나, 지금 우리는 1%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세계적인 움직임에 동참해야 하지 않나. 

이 책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슬프게도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70년대엔 난장이들이 내국인들로 채워져 있었다면, 이젠 난장이들은 내국인에다가 외국인노동자까지 더해져 있는 상태이니... 

난장이 딸인 영희가 난장이들이 함께 남들을 의식하지 않으며 사는 마을, 릴리푸트를 꿈꾸었듯이 우리도 우리들만의 릴리푸트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움직임이 이미 있지 않은가? 작은 마을, 또는 생태 마을, 협동 조합 만들기. 이것이 은강그룹과 같은 거대 자본과 맞설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오랫만에 읽은 소설. 

마음이 편하진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알려주는 소설이기에, 아직도 진행 중인 이야기기에 이 소설은 2010년대인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에게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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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의 사진문고를 보았다. 

사람, 또 얼굴을 중심으로 낸 사진집들 중에서 몇 편을 골라 문고로 낸 책이다. 

사진은1957년 소녀의 사진으로 시작해, 1987년 청년의 사진으로 끝난다. 30년의 삶이 이 작은 사진문고에 들어 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이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싶다고 했는데, 그의 사진을 보면 없는 사람들, 힘든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애정은 이들이 아직도 이렇게 힘들게 살게 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로 바뀌기도 한다. 

그는 "내 사진은 일상에서 일어나는소소한 사건들에서 비롯된, 일종의 사소설(私小說)에 비유할 수 있겠다."고 했다. 그의 사진에는 우리의 일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일상은 저 멀리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 우리보다 더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책에 나온 한 사진, 선거벽보의 사진과 초상화들이 대조를 이루듯이, 최민식의 이 사진문고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오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과 대조를 이룬다. 

사진은 모두 흑백이고, 이 흑백이 삶의 지난함을 오히려 따스함으로 감싸고 있다.  

더 화려하게, 더 예쁘게 꾸미려고 하는 지금, 자신의 본 모습은 사라지고 가식적인, 오로지 남의 눈을 의식하는 모습만 남아있는 삶은 최민식이 포착하려는 현실이 아니다.  

서민들의 삶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물이 나도록 보아왔다. 우리는 아직도 이 사진에 나오는 삶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 삶을 가린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삶을 바로 볼 수 있게 최민식과 같은 작가의 작품이 자주 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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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다리로 서 있는 새 리토피아시인선 22
임강빈 지음 / 리토피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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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늘 어지럽다. 

그래서 세상을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던가. 얼마나 많은 답들을 내놓았던가. 그런데도 세상은 아직도 어지럽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조그마한 돌멩이를 던지는 일. 그게 시를 쓰는 일이다. 그 조그만 돌멩이가 일으키는 파장에 마음을 맡기는 일, 그게 시를 읽는 일이다. 

이런 상황을 임강빈 시인은 이렇게 파악하고 있다. 마음이 간다. 그래 수긍이 인다. 

조용한 수면에/돌을 던진다/풍덩 하는 소리가 크다/파문이 인다/돌 하나로 시작되는/TV동화 <행복한 세상>/짤막한 이야기/밖으로 밖으로 원을 그린다/이 잔잔한 울림          -TV동화 전문 

시는 이처럼 잔잔한 울림을 준다. 이 울림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너가 사람들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이런 따스함 이는 바로 임강빈 시인이 말하는 이러한 사랑이다. 

오랜 사랑은/빙점(氷點) 언저리에서 머물다가/손을 잡아주는 일이다/따스하게 감싸주는 일이다-사랑 3연 

시는 우리를 채근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 곁에 있다가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이 우울할 때, 우리의 손을 잡아준다. 그 따스함이 어지러운 세상을 견디게 해준다. 

그래서 시는 가난을 극복하게 해준다. 물질적인 가난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그 물질적 가난을 우리가 해결해야 하겠지만,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우리의 행복은 찾을 수 없다. 물질적 가난을 해결하고, 정신적 가난까지 해결한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운, 살만한 곳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 어찌 넉넉함에 비하랴 /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간다 / 시린 나무 등에 업히는 찬 바람 

가난은 춥다 / 불을 지펴도 / 여전 썰렁하다 

이 가난에서 벗는 날은 / 파릇파릇 새싹이 / 시가 되는 날이다 / 시가 부자 되는 날이다. 

 - 가난 전문

이 시집에는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부터 나이들어감이 여유로움으로 변하는 내용까지 다양하게 시들이 펼쳐져 있다. 머리 속으로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하는 난감함은 없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젊은 사람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아무나 아무 때나 손에 들고 읽으면, 이 시는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처럼 우리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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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광장], 몇 번이나 개작을 했던가? 

처음에 읽었던 책은 세로로 조판된 책이었는데, 나중에 다시 가로로 조판된 책을 읽었고, 이번에 다시 읽었다. 

나이 20대에 읽고, 30대에 읽고, 40대에 읽고, 각자 다른 책으로 읽었는데, 20대에 느낀 감동이 40대에는 조금 이성적이 되었지만, 그래도 [광장]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읽히는 좋은 책임은 틀림없다. 

뭐... [광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으니, [광장]에 대한 평이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고, 이번에 [광장]을 읽으면서는 이명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며 읽었다. 

그가 남한에 있을 때는 철학도였고, 돈에는 초탈했으며, 북한에 있을 때에는 언론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끌었다고나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의 효용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명준은 생활인이 되지 못한 관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에서 돈과 관계가 없는 일은 없는데, 그는 돈에 대해서 아예 모르쇠로 일관한다. 세상에 부모가 없는 아버지 친구 집에서 기식하는 사람이 돈에 대한 관념을 지니지 못하고 지내다니... 

이 점에서 그는 생활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생활을 멀리서 관찰하기만 한다. 즉 그는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객체로 만들고 있다. 결국 그가 존경하는 정선생 집에서 본 미라는 결국 이명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그는 이념의 화신이 되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의 눈에 생활이 보인다. 그러나 생활은 보이되 생활을 바꿀 주체는 되지 못한다. 그가 언론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생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생활을 밖에서 관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자세는 철저한 이념을 우선시 하는 북한 사회 속에서도 그의 자리는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담, 남과 북 모두에서 실패한 삶을 산 이명준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제3국으로 도피하는 길밖에 없다. 자신의 분열된 모습을 모두 버리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곳, 이 곳에선 삶을 관조하지 않는 생활인이 되길 꿈꾼다. 이것이 그가 머리를 쓰는 직업을 이야기 하지 않고, 오직 몸을 움직이는 직업을 갖고자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생활인이 되지 못한다. 그를 끝까지 따라오는 갈매기, 이 갈매기는 다른 세상을 그에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생활인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연 그는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나? 

구원이 아니라, 이러한 관념인은 우리나라처럼 비극을 겪은 현대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야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여기에 비극이 있다. 문제는 알되, 해결할 의지는 없다. 그는 문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문제를 온몸으로 맞이할 마음이 없다. 그가 몸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기껏해야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몸을 느낄 뿐이다. 그에게 생활인으로서의 몸은 없다. 그에게는 오직 '체'만 있을 뿐이다. 남에서는 부르조아적인 삶에 어울리는 '체', 북에서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체'. 

이 '체'는 생활과 정신이 하나가 되지 않은, 분열된, 늘, 사회로부터 미끌어지는 사람의 자세일 뿐이다. 이런 '체'가 내면화된 이명준은 어디에서도 '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제3국행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 소설이 나온 지 50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읽힌다. 바로 우리 현실 때문이다. 우리나라, 남북의 관계는 이명준이 생활과 정신 사이에서 분열을 느끼고, 계속 미끄러지듯이 우리 현실도 이러한 분리, 미끌어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이, 자주, 지속적으로 우리는 미끄러지고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이명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현실을 직시하되, 현실을 밖에서 보지 않고, 현실 안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미끌어짐을 방지할 수 있다. 관념인 이명준이 아니라, 생활인 이명준으로 우리는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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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장>..
    from 말의 양심 2011-11-10 11:05 
    최인훈의 <광장>이 100쇄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구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도 98년 쯔음인가 생각이 된다.조세희의 <난소공>과 더불어 100쇄를 넘었다는 건 당시 내게는 상징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왜냐하면, 두 책은 일반 소설책이라기보다는 이념서나 사회비판서에 가까웠기 때문에 100쇄 돌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사실, 최인훈의 <광장>을 처음 접했던 건 고등학교 교과서 작품 해설집에서였다. 입시용 텍스트로 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