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세기 -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
니얼 퍼거슨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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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아(我) 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말도,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는 역사를 소홀히 다루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역사에 소홀하면 자신을 바르게 바라볼 수가 없다. 즉 자신을 비출 거울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국가, 민족, 세계의 역사라면 이는 단지 자신만을 비추지 않고, 인류의 운명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니, 역사에 소홀하면 인류는 자신이 건설한 찬란한 문명을 한 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했지만, 역사가 반복되는 순간 인류는 또다시 비극에 빠지게 된다. 

가장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기 시작한 20세기에 왜 그토록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많은 학살이 일어났을까? 원인이 뭘까? 막을 수 없었을까?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통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아니, 대비해야만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인간은 경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일까, 아니면 협동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기 위해서 홉스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사실 20세기에 일어난 많은 학살들은 국가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홉스식의 국가는 폐기 되어야 하지 않나. 오히려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대로 국가 자체가 폭력이니 우리는 국가권력을 포기하고, 상호연대성에 기반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나.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빼놓지 않고 많은 살륙이 있었는데, 이 살륙들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가 되려고 하는 광기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던가. 다만 더 많은 국가들이 참여한 학살은 세계 전쟁이란 이름으로, 한 국가에서 일어난 학살은 내전, 또는 학살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가 이러한 역사에서 배울 것은 더 이상 이런 학살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여야 할까인데, 21세기가 된 지금도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말한 증오의 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서양부터 동양까지 방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20세기가 얼마나 증오로 점철되어 있는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은,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차이에 대한 포용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잘 지내던 이웃이, 어느 날 학살자로 변한 모습을 이 책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또다른 줄긋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협동, 용서, 상호연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이 세 요소가 얼마나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지 알 수 있다. 남은 바로 나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 명심하자. 그러면 우리는 증오의 세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증오의 세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이 책 증오의 세기는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인류의 거울을 하나 마련해야 한다. 우리 인류를 잘 비춰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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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날이라고, 참 많은 날들 중 하나인데... 

책은 우리에게 뗄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을 이만큼 발전하게 한 존재도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책에 관한 소설 두 편클라스 후이징, 책 벌레-문학동네,  

                           발터 뫼르스, 꿈꾸는 책들의 도시1,2-들녘              (얼마나 재미있던지, 세상에 책과 관련된 이런 상상력이 존재하다니. 특히 뷔허링 족, 책을 밥으로 삼는 그 종족은 얼마나 대단한가? 아주 재미있다. 읽어보면 좋다.)

책읽기에 관한 책 : 고미숙, 호모 쿵푸스-그린비, (중학교 3학년 이상의 아이들에게 읽히면 좋은 책이다. 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책을 읽는 방법이 이렇게 다양하게 변해왔다니)

어린이책 또는 옛이야기의 매력 : 김환희,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창비,  

                                                              베텔하임, 옛이야기의 매력1,2-시공주니어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옛이야기에 들어있는 매력들이 이렇게 잘 펼쳐진 책도 드물다. 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을까? 아이들은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다.)

책에 관한 수필, 이태준의 (나는 책 하면 이태준의 책이라는 아주 짧은 수필이 생각난다. 아마 그의 수필집인 무서록에 실려 있을텐데...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책'답다고 시작하는 이 수필. 책에 관한 이렇게 아름다운 수필이 있던가)

그리고 이럴 땐 이런 책을 알려주는 책 : 김이경, 마녀의 독서처방 -서해문집(아무 때나 아무 쪽이나 펼쳐 읽자. 아니면 자신의 상태에 따라 그에 맞는 부분을 찾아 읽자. 이 책, 책들에 대해서 정말 잘 소개해 놓았다. 소개하는 책말고도 이 책 자체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들의 운명사 : 릭 게코스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르네상스(책, 우리에게 다가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이 책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너무도 유명한 책이 나올 당시에는 얼마나 천대를 받았는지, 또 책 한 권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그냥 읽어도 재미있고,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책의 이력을 공부하며 읽어도 좋다.) 

우리나리에 있던 정말로 책을 좋아했던 사람. 실학자 이덕무. 그의 글 '간서치' 는 말 그대로 책에 미친 바보라는 뜻이다. 그가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 책을 통해 만나보자.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책 속에 갇히면 안 된다. 우리는 책 속에 들어가되, 언제든 나와야 한다. 만약 나오지 못하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끝없는 이야기(비룡소) 에 나오는 것처럼 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현실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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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산문선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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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릭 게코스키 지음, 차익종 옮김 / 르네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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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의 매력 2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김옥순.주옥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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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의 매력 1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김옥순.주옥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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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날이란다. 꼭 이 날이면 온 나라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둥, 장애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둥 말들이 많아진다. 

사실, 장애인이라고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이 비장애인보다는 느리게 일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사회가 그런 느림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장애인 문제가 달려 있다고 본다. 

몇 년 전에 정말로 인기가 있었던 책이다.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쓴  "오체 불만족 "

그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비장애인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장애를 인식하되, 그 인식을 뛰어넘어 자신의 몸을 인정하고 사회에서 살아가려고 노력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사람이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한 환경이, 주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차별과 차이를 구분해야 하듯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분명 다르다. 이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인정한 상태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의무가 아닐까. 

이 사람은 이렇게 잘 살아가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하니 하는 생각은 이미 장애인에게 폭력일 뿐이다. 그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차별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뿐이다. 즉 장애인의 의지에 맡겨서는 안되고,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을 지녀야 한다.

장애인의 날에만 반짝하지 말고,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자. 장애인들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얼마나 불편한지. 장애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고, 또 비장애인들도 스스로 다시 한 번 자신들 위주로 되어 있는 이 환경을 낯설게 바라보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오체 불만족의 저자가 사는 삶이 특정한 장애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장애인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도 차이를 인정하고 그 다름과 함께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 때서야 나는 장애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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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4월이 되면 진달래가 흐르러지게 피고... 

우리는 4.19기념 마라톤을 하곤 했다. 

그리고는 불렀던 노래가 이영도의 시에 곡을 붙인 진달래.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 그날 스러져 간 젊은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진달래로 대변되는 4.19 

비록 일년만에 끝나긴 했지만, 우리나라 헌법에도 표명이 되듯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앞당긴 일대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지금, 많이들 잊고 있지만, 이 4.19를 지식으로 기억하지 않고, 우리 마음으로 기억하기 위해선 좋은 시를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4.19하면 나는 신동엽 시인이 떠오른다. 그도 진달래를 소재로 많은 시를 썼고, 또한 장편 서사시인 금강도 이 4.19와도 관련이 되지 않던가. 

신동엽 시인의 시를 읽고 4.19를 몸으로 기억하자, 우리 마음으로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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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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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가 쓴 글은 잘 읽힌다. 그가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쉽다는 느낌을 준다. 세상에 철학에 관한 글인데, 쉽단 생각을 하게 하다니... 그래서 제목에 철학이 들어가도 별로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 대단한 글솜씨다. 아니, 그만큼 내공의 힘이 깊다고 해야 하나.

장자부터 시작했다. 그의 글을 읽게 된 계기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이 책에서 소백산 칼바람 얘기가 나온다. 그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소백산을 걷는 일.. 그러나 철학은 이러한 칼바람을 맞는 일과는 다르다. 아니다. 철학은 이렇게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칼바람 맞고서도 정상에 서는 것이다. 그,렇게 정상에 섰을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소리칠 수 있다. 철학, 별거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자에 대해 참 재미있게 읽었다고나 할까.

두 번째 책,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시와 철학이 따로 떨어질 수 없으니, 그가 시도한 시읽기를 통한 철학에 다가가기도 참 좋다. 결국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얘기이고, 이는 바로 자신이 철학적으로 산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철학은 우리 삶에서 떨어져 나온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을 구성하는 어떤 것, 우리 삶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도 읽고, 철학에 대한 생각도 하고, 일석이조(一石二鳥)

이들에 이어서 읽게 된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 

이 책을 읽으면서 강신주는 어쩌면 무림의 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림의 고수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실력이 있다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혹 제자를 받게 되면 제자에게 딱딱한 이론을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원론을 가르치고, 이게 기본이야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하게 한다. 그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무공을 익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무림고수다. 

금강경의 첫부분에 대한 글을 가끔 읽는다. 세상을 제도한다는 부처도 금강경이라는 난해한 경전에서 처음 시작은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다. 그냥 밥 먹고 앉아 쉰다. 그 행위에 부처가 되는 법이 있단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어려워서는 안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철학이 이미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철학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철학이라고 하면 난해한 용어부터 생각하고, 무슨 무슨 주의부터 생각하게 된다. 이는 학교교육이 잘못된 데 있겠지만, 이 잘못된 교육에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우리가 하지 않는데도 책임이 있다. 

즉 모든 잘못을 교육자에게만 돌려서는 안된다. 우리 자신이 철학하면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앞의 경우와는 다르게 강신주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우리가 철학에 대해 배워온 것을 잊게 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게 한다. 결코 어렵지 않게, 저 멀리 구름 따먹는 소리가 아닌, 바로 우리 일상생활에 있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금강경의 부처처럼, 철학이 결코 우리 일상에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자연스레 알게 한다. 그는 고수다. 엄청난 내공을 지닌 고수.

처음부분도 시작하게에 참 좋은데, 끝부분도 좋다. 나는 이 책은 끝부분을 먼저 읽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에필로그(지나가는 말이지만 에필로그라는 어려운 말 대신, 맺음말, 또는 나가는 말 정도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에서 저자는 독서를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 자신을 비우고, 간 곳에 감응하고, 결국 자신의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을 하는 것, 그 때서야 한층 성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이 책을 읽고 독자가 조금이라도 감응을 했다면 그게 다행이라고. 

그렇다. 48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저서가 나오는데, 이 저서들을 안 읽었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 걱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이 책들을 다 읽었다면 굳이 강신주가 쓴 이 책을 읽겠는가. 우리는 이 책을 아예 안 읽었거나 일부만 읽었기 때문에 강신주의 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는다. 그리고 그가 얘기해준 내용에 감응도 하고, 반발도 하고 한다. 이 책을 읽다가 어떤 철학자에게 꽂혔다면 그 철학자의 책을 읽으면 된다. 읽어서 제 것으로 만들면 된다.   

이렇듯 이 책을 읽으며 감응하고, 반발하는 과정이 바로 철학을 하는 시간이고,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는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서 나를 낯설게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결국 여행이든, 독서든, 철학이든 여유에서 나온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책을 읽는다면 이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기계적 행위로 취급하는 것밖에는 안된다.  

여유, 그것에서 낯섬이 나오고, 낯섬에서 성찰이 나온다. 성찰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이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로 되어 있다.  그 중에 마지막 11번째 테제가 생각이 났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대학 시절, 얼마나 마음을 울리던 말이었던가. 아니 지금도 이 말은 유효하고, 이 책을 읽은 다음에도 역시 유효하다.  

책을 읽는다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단지 해석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변혁, 실천을 한다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나면 조금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 이 때문에 이 책은 단지 해석의 차원이 아니라, 실천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마음에 드는 부분을 읽고 그만 책을 접어도 된다. 그래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고 자신을 다르게 바라보는 능력을 알게모르게 키워줬으니 말이다. 

그래서 강신주는 고수다. 어려운 철학용어를 얘기하지 않아도, 철학적으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우리 몸에 철학함이 밴다. 고기집에 가면 고기 냄새가 배듯이 그의 책을 읽으면 철학이 우리 몸에 자연스레 밴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으면 즐겁다. 읽는 과정도 즐겁고, 읽은 뒤에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즐겁다. 

덧말: 근데, 내가 알던 지식과는 다른 게 하나 있다. 이거 기억이란 믿을 게 못된다지만, 아무래도 이건 내 기억이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270쪽 노자의 도덕경을 설명하면서, 덕치를 이야기할 때 세종을 예로 드는데, 집현전 학사 중에 세종이 어의를 벗어주었다는 학사는 성삼문이 아니고 신숙주 아니었던가. 나는 일화를 통해 이를 신숙주로 알고 있었고, 이 일이 나중에 사육신에게 신숙주가 욕 먹는 계기가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허나 근거를 찾지는 못 하겠고, 오직 기억에 그러하니...이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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