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식탁
박현수 지음 / 이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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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식민지의 식탁이라니... 식민지 음식이 따로 있단 말인가 하는 의구심.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식민지란 바로 일제강점기를 의미하고, 식탁이란 그 당시 사람들이 조선에서 먹었던 음식을 말한다. 그것도 집에서 먹는 가정식보다는 외식을 할 때 먹는 음식들.


즉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 아니라 돈을 주고 먹어야 하는 음식들에 대한 소개라고 보면 된다. 근대가 되면서 우리나라에 어떤 음식들이 들어왔고, 그것들이 음식 문화로 자리잡았는지를 알려주는 책.


첫 시작을 이광수의 <무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광수의 <무정>. 여기서 샌드위치가 나온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무정>에 나오는 음식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차 안에서 병욱이 영채에게 음식을 준 장면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음식이 샌드위치였다는 사실을 어찌 기억하겠는가.


이렇게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설이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문학이니, 소설 속에 나온 음식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식일 수밖에 없다. 또한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언급할 정도라면 이미 사회에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고.


<무정>이라는 소설부터 시작해서 거의 발표된 연대 순으로 음식들을 등장시킨다. <무정>에 이어서는 염상섭이 쓴 <만세전>이다. 물론 예전에 읽었을 때는 음식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책을 통해서나 이인화가 먹게 되는 음식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무정>이나 <만세전>에 나오는 음식은 여행하면서 먹는 음식이다. 기차라는 근대 문명의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끼니를 해결하는 음식들. 그만큼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서 제국주의는 철도를 부설하고, 기차를 운용했으며, 그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또 기차와 기차를 연결하는데 바다로 막혀 있으면 배를 이용해서 연결을 시키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개발하게 된다. (관부연락선이라는 말이 바로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의 철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배를 의미한다고)


낯선 음식이었을 것이다. 기차라는 문물도 낯설었을테니.. 그러다 이런 문물이 일상이 되면서 다른 음식들이 등장한다.


이제는 가게에서 파는 음식들 이야기로 가게 된다. 현진건이 쓴 <운수 좋은 날>이다. 바로 설렁탕이야기. 지금도 많이 먹는 설렁탕이니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 없을 듯하지만 아니다. 설렁탕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읽을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왜 하필 현진건이 김첨지 아내를 통해 '설렁탕'이 먹고 싶다고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에 영양이 좋아 보양식으로 많이 먹었다는 사실.


이제 책은 선술집, 카페, 빠에 대한 이야기로 가다가 김유정으로 오면 시골 주막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감자'도 빼놓지 않고. 


30년대가 되면 서양식이 소설에 나오기 시작한다. 카페는 기본이다. 이상이 '제비'라는 카페를 차렸다는 사실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상과 친구인 박태원이 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로 '카페'를 선택했다는 사실. 이상도 선술집을 무척 좋아했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 언급된다.


여기에 <날개>에 나왔던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파는 음식들 이야기가 나오고, 조선호텔에서 파는 음식들까지 다양한 일제강점기 시대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서 당시 어떤 음식들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즐겨 찾았으며, 그것들의 가격은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당시 발표되었던 소설을 만나게 되고, 그 소설을 통해서 음식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사람들이 외식으로 먹었던 음식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소설과 음식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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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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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소설집을 읽다. 7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공통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소설이란 원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아니던가. 그러니 삶에서 겪음직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욕망?'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 다양한 욕망이 있겠지만, 우선 '돈'에 대한 욕망을 꼽을 수 있겠다.


돈이라는 말, 자본이라는 말, 어느 정도는 생계에 꼭 필요한 돈. 이 돈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대부분 돈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들의 모습 아닌가?


'돈'은 어느 정도는 있어야겠지만, 더 많아지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를 욕망으로 바꾸어보자. 욕망은 삶을 능동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내가 이룰 것을 다 이루었노라 한다면? 그 다음 삶은 어떤 모습을 띨까?


'너를 사랑해, 들소, 내 아들의 연인'에서는 돈을 매개로 욕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해서, 돈 때문에 위기 상황에 처한 자산관리사와 여전히 시간 강사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관계. 그것이 너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또다른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바로 '돈'이다. 자신들이 바라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돈'.  그 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지만, 과연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들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쩌면 욕망의 크기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이용하는 그런 관계. 이런 관계의 뒤틀림이 '들소'라는 소설에서 잘 나타난다.


조각가. 예술가다. 돈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인공이 남편과 갈등을 하는 이유는 돈에 있다. 자신의 일을 돈과 관련지어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상적인, 사회사업가라 할 수 있는 남편에게 반했지만, 함께 살아가면서는 그 점이 바로 싫어지는 이유가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돈을 위한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사회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회사업에는 '돈'이 필수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별이든 죽음이든.


소설 속 남편의 죽음은 그래서 필연이다. 다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찾는다면 다시 남편의 일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들소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미 사라져 버린 동물. 여기서는 이제 '돈'은 개입하지 않는다. '돈'이 개입하지 않을 때 예술은 자기만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돈'에 얽힌 이야기는 '내 아들의 연인'으로 넘어가면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된다.


가난한 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관계가 문제가 된다. 결국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관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차이, 그 사람을 욕망하지만, 그 사람이 지닌 관계는 용납할 수가 없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이 적확한 것이 개인으로서 만났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의 테두리에 개인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개인이 지니고 있는 관계들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또 내 욕망의 테두리가 아닌 내가 지니고 있는 관계의 테두리로 확장하면 그 개인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에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관계가 있음을, 그러한 집단이 서로 다르면 어울리기 힘들어짐을 '내 아들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욕망의 끝을 보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니 욕망의 끝을 본 다음에는 더 이상의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바로 '밤이여, 나뉘어라'다.


늘 내 앞에 있던 존재, 천재라고 불리던 친구가 몰락한 모습,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 역시 내 욕망의 끝을 보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친구의 몰락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 친구 역시 아마도 자신의 욕망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결국 순간이여 멈추어라 하고 말하는 순간, 사람의 삶은 끝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욕망해야 한다. 인간이 용납할 수 없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 그러니 돈을 위해서 사랑을 이용하는 것은 관계의 파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맹목적인 이상 추구 역시 파탄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을 갖지 않아서도 안 된다. 욕망이 없는 상태, 이를 갈망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삶이 무의미해진다. '밤이여, 나뉘어라'에 나오는 천재처럼. 


결국 이 소설집을 읽으며 어떤 욕망을 지녀야 하는가? 욕망이라는 말이 부정적이라면 어떤 갈망을 지녀야 하는가로 바꾸면 된다.


다양한 내용의 소설들이지만, 돈에 대한 욕망이 결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욕망(갈망)을 상실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삶이란 이렇게 다양한 욕망과 갈등들이 얽혀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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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상 시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말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읽기 편하다.


  읽기 편한 만큼 짧은 시도 많다. 물론 산문시에 해당하는 시들도 있다. 그리고 삶에 관한 많은 일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다.


  시인이 겪었음직한 일들도 시로 나와 있는데, 그 중에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도 있으니...('사진 안에 내가 있다' 60-61쪽)


  하지만 이 시집을 읽으면 무엇보다도 시란 무엇인가, 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책을 통해 인간은 인간답게 된다고 하면 오만일까? 아니, 책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존재들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움을 주는 존재. 무엇에게도 배울 수 있으니, 그런 존재는 바로 책이다. 이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가 그런 울림을 준다.


 마지막 말


신은 없다

그러니, 책을 의지하면서 살아라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106쪽.


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나 책은 보인다. 아니, 보이지 않는 존재조차도 책이 될 수 있다. 책은 무궁무진하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영향을 미친다.


그 중에 가장 큰책(물질적으로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많은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자연이다. 자연은 늘 인간과 함께 해 온 책이었다.


시인은 말한다.


  땅이 책이다


책을 읽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안타깝다는 농부에게

내가 말했다


별말씀을요

괜찮아요

땅이 책이잖아요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27쪽.


땅은 책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런데 이런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 있다. 멀리할 뿐만 아니라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또 읽으려고 하지 않고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다. 책은 읽어야 하는데, 무슨 땔감으로 쓰듯이 한번 쓰면 그뿐이라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땅을 죽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책을 없애는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사람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종이로 된 책만이 아니라 사람도 책이 될 수 있음을, 하긴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는 공자의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스승이 된다는 말, 시인의 말대로 하면 사람이 책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사람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한다.' 특히 사람책에서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야 하는데, 반면교사가 아니라 그냥 교사가 되는 사람책들이 있다. 참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고 고쳐야 하는데, 와, 저렇게 해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책.


그래서 시집에서 한 시인의 '마지막 말'이란 시에서 '책에 의지하면서 살아라'는 말을 의지할 수 있는 책을 읽으면서 살아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책도 책 나름이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하면 안 된다. 사람책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반면'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요즘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반면'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기를 바라면서... 시집을 읽는다.


사실 이 시집을 사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윤희상 시인이 쓴 '소를 웃긴 꽃'이라는 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례를 훑어보다 발견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 묘소를 내려 오면서'를 읽고서다.


내게도 최인훈이라는 작가는 그의 소설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람책이었기 때문. 물론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최인훈에 관한 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 묘소를 내려오면서


  어느 해 선생님 댁의 거실에서, 

  선생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생간난다


  생각해봐라 우리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말했을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니 우리가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라고 말했을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니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38쪽.


그래, 적어도 사람책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사람책을 가까이 한다면 '반면'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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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된 시집이다.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너무도 인용이 많이 되어서 집에 구비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이 시집을 손에 넣었는데, 찾아보니 집에 없다. 잘 됐다. 보관해 두고 틈 나는 대로 읽으면 좋을 시집이다.


  시란 시대에 갇히지 않고, 시대를 넘어 다가오기 때문에 오래 되었다고 내 곁을 떠나게 할 필요가 없다.


  언제든 필요한 때 다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니까.


  제목이 된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너무도 많이 인용이 되어 더 인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 시집에서는 소위 '민중가요'로 불렸던 노래도 있으니, 그 중에 한 편이 바로 '너를 부르마'라는 시다. (검색하면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런 시 말고도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시가 있다. 집중호우가 너무 심해 산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난 올해. 이 집중호우가 꼭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온몸으로 맞고 있는 집중호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비를 내리는 집단들이 있으니..


첨단과학기술로 무장하고, 이제는 아이티(IT) 강국이라고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우리나라지만, 기후 재앙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이 당하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고,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지금에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난이 있으니...


하긴 기후 재앙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이 더 울창했다면, 산사태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민주주의란 결국 사람들이 숲을 이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숲을 파괴해 버린 결과가 이렇게 산사태, 홍수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이제는 되었다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숲 이루기를 그만두고 있어서 이런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이것이 어찌 자연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국민들을, 시민들을, 사람들이 숲을 이루지 못하게 오로지 나무로만, 식물로만 존재하게 만드는 갈라치기에 우리들 역시 숲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인이 광화문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숲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듯이, 숲을 이뤄야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함께 있어도 각자인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시가 더 귀하다. 1970년대 엄혹했던 시절, 국민들이 숲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로만 존재하게 했던 시절에 숲을 그리워했던 시인의 마음이, 지금 2020년대에도 마찬가지가 되었다면...


촛불이라는 숲을 이루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숲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개별로만 남아 있다. 혼자서는 힘을 쓸 수도 없는데, 버티기도 힘든데...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1979. 동아일보>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93쪽.1997년 개정 6쇄.


숲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모여 숲을 이루자고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숲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이 시집에 실린, 민중가요로도 불린 '너를 부르마'에 나오는 말처럼, 다르게 쓰이고 있는 그 '너'를 다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 된 시집, 그러나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시집. 정희성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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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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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어봐야지만 하다가 미루고 또 미뤘던 소설. 반지의 제왕. 영화를 먼저 보아서 그런지,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선뜻 손에 잡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러다 영화와 소설이 같지 않음을, 서로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옴을 알고 있으면서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톨킨의 이 작품을 르 귄이 엄청나게 칭찬하고 있으니, 안 읽을 수가 없다.


사서 소장하면서 꼼꼼하게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예전 판본이다. 예전 판본답게(?) 글자도 작고 빽빽하다. 눈이 피곤하다. 게다가 6권이나 되지 않나.


1부, 2부, 3부 각 2권씩.


오랜 시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읽다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 물론 읽으면서 영화에서 받던 인물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영화와 다른 점을 찾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란 점은 호빗 족의 나이다. 프로도를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화에서 호빗들이 작은 키로 나오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다. 소년의 모험이 아니다. 호빗의 나이로 프로도는 50이 되어서야 모험에 나서게 된다. 


함께 모험에 나서는 샘이나 메리, 피핀 역시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없고. 하지만 나이가 중요하랴? 자신의 공간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가 다른 공간을 여행한 다음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성장소설의 구조라고 해도 좋다.


환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 환상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만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지금처럼 문명을 이루지 않고 살던 시대, 자연과 공생하면서 살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을 떠나게 되었나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한다.


그래서 엔트 족들이나 요정들의 이야기를 그냥 환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제는 자연과 소통을 할 수 없게 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1기, 2기, 3기라고 시대를 구분하고 3기가 반지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 반지의 시대는 아직 인간이 자연과 분리가 되지 않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반지의 시대가 지나면 인간의 시대가 되고, 자연은(요정이나 엔트와 같은 다른 존재들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 장면을 읽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 동물들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장면, 인간이 철(총)을 이용해 신을 죽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톨킨은 이 소설에서 인간이 죽이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중심인 시대로 흐르게 됨을 보여준다.


반지를 운반하는 사명을 띤 프로도, 그를 수행하는 샘, 그리고 같은 호빗족으로 프로도와 함께 하겠다는 메리와 피핀, 여기에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아라고른(영화에서는 아라곤으로 나온다)과 요정 레골라스, 난장이 김리 그리고 보로미르. 이들을 인솔하는 마법사 간달프.


이야기는 단순하다. 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조력자들과 함께 떠난다. 그 과정에서 갈등도 겪고, 어려움도 겪는다. 그러나 결국은 반지를 없앤다. 


단순히 이렇게만 판단할 수가 없음을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반지를 운반하는 여정에 함께 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빌보가 쓴 이야기를 프로도가 이어서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모험이 이야기로 전승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반지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프로도는 책을 끝내지 않는다. 책을 끝낼 사람은 샘이다.


프로도가 끝까지 반지를 운반하는데 함께 했던 충실한 조력자 샘. 샘은 호빗 마을에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험의 끝이다. 영웅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삶으로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샘의 말로 끝난다.


"자, 내가 돌아왔어."(6권 228쪽)


소설은 위대한 여정을 끝난 인물들의 위대한 삶으로 끝나지 않는다. 혁명은 위대함을 넘어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때 완성된다.


파괴된 것들의 재건. 일상성의 회복. 여기에 영웅은 퇴장해야 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프로도로 끝맺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고 샘에게 다음 이야기는 샘의 이야기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이 된 아라고른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마법사인 간달프도 또 반지 운반자였던 프로도도 모험의 시대가 끝났을 때 물러나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모험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일상의 회복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 그런 모습이 일상이 된 사회여야 한다고 톨킨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그들의 모험은 일상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니 샘이 자신이 돌아왔다고 하는 말로 소설을 끝맺을 수밖에 없다.


반지를 없애고 사우론을 퇴치하면서 소설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호빗으로의 귀환. 그리고 호빗에서의 또다른 일들. 그 일들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일상이 회복됨을 보여주고 있어서 더 좋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냥 읽어보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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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3-07-2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안녕하세요? <밤의 언어>에서 르 귄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톨킨을 알게 된 사람들을 부러워 한다고 고백했었지요. 르 귄의 <반지의 제왕> 해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늘 kinye91님이 읽으신 것을 몇 년 후에 읽고 있더라구요. 어쩌면 이 <반지의 제왕>도 몇 년 뒤에는 읽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kinye91 2023-07-29 13:22   좋아요 1 | URL
에로이카 님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르 귄의 말을 조금 바꾸면 저는 조금 더 젊은 시절에 르 귄의 작품을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소설도 또 다른 글들도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기도 했고요. 저 역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