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의 스마트 도어락이 저 혼자 삑삑거리기를 1년이 넘은 것 같다. 중문을 닫고 TV를 보고 있자면 삑삑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냥저냥 놔두었다. 그러던 것이 이젠 숫자 터치를 먹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순간 당혹스러웠지만 카드키가 있어서 문을 열고 닫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언제 이 카드키마저 작동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교체를 결정했다. 직접 도어락을 교체하기로 마음 먹고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주문 시 설치까지 해 주는 옵션도 있는데 설치비가 최저 3~4만원은 하는 듯했다. 단독주택에 살면서 수리, 교체를 맡기기 시작하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집이 아니라 관리비를 내고 위탁하는 아파트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직접 설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단 기존의 도어락을 해체하고,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부품이 그렇게 많지 않아 어려운 작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직접 교체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그림 설명서나 동영상 안내가 없어서 아쉬웠다. 해체했던 기억을 떠올려 반대 순으로 하나 하나 결합을 해 가면서 도어락을 달았다. 



그런데 두 개의 잠금장치가 꼼짝을 않는다. 위에 것은 수동으로 작동시켜 보려 단추를 누르지만 '윙' 소리만 나고 움직이지를 않는다. 아래 것은 손잡이가 움직이지조차 않는다. 구멍을 잘 맞추어서 나사를 풀었다 다시 조립해 보지만, 위 잠금장치만 움직이던가, 아래 잠금장치만 작동하던가 할 뿐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이리 허술하게 만들진 않았을텐데 생각하면서도 점점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풀었다 잠그기를 몇 번 하다 문득 틀의 앞 뒷면을 바꿔 보기로 생각했다. 맞았다. 앞 뒷면이 바뀌어서 작동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참, 어떻게 앞 뒷면을 바꾸었다고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그것도 신기했다. 구멍의 위치나 크기는 똑같은데 왜 앞 뒤를 바꾼 것 만으로 열리고 닫히는 게 달라질까. 아무래도 구멍 밖의 좌우가 완전히 대칭되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아주 조금의 차이로 걸쇠가 틀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제 잠금쇠가 잘 움직이니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생각했다. 모든 부품들을 다 조립하고 비밀번호와 카드키를 등록하고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문이 잠긴 후에 밖에서 여는데 그냥 열리는 것이다. 이게 뭐야? 왜 안 잠기는 거지? 어라? 이번엔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꼼짝을 않는다. 이런! 안과 밖이 바뀐 것이다. 도대체 이번엔 뭐가 잘못된 거지?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해결책이 떠오르질 않는다.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다시 분해를 하고 조립을 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안과 밖이 바뀌었다. 잘못된 제품인가 싶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보지만 휴일이라 통화를 할 수가 없다. 천천히 다시 분해해서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며 조립을 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미더운 부분이 보였다. 손잡이 뭉치에 IN과 OUT이 써 있는데, 아무리 해도 인을 안쪽으로 아웃을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조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립이 가능하도록 인과 아웃을 바꾼 채로 조립했던 것이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고민 하다 도어락 뭉치 전체를 거꾸로 하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손잡이와 숫자 위치가 위아래 뒤바뀌고, 문의 타공이 보이게 된다. 설마 이렇게 조립하도록 만들었을까? 


문제는 알 것 같은데 해결책은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렇게 다시 분해와 조립만 두어 번 더 했다. 그러다 문득 손잡이 뭉치를 왜 꼭 안에서 집어 넣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잡이 뭉치를 밖에서 안으로 집어 넣으면 인과 아웃도 제대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맞았다. 그게 정답이었다. 손잡이 뭉치를 밖에서 집어넣어 인과 아웃을 제대로 위치에 놓으니 도어락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30분 이면 끝날 작업을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사고의 경직성. 한 번 떠올린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벌어진 고생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한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정말 '한' 생각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한 느낌이다.

도어락을 교체하면서 경직된 사고가 얼마나 고생스러운지를 체감했다. 언제든 열려있는 <사고의 유연성>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가장 근거가 되는 전제조차도 의심해보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논리의 도약으로 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불교의 '중도'에 대해서도 고찰해본다. 제법무아, 제행무상. 틀에 갇히지 않는 삶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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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5년 4월 3일) 자동차 사고를 제법 크게 당했다. 맞은편에서 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들이받아버린 것이다. 중앙선을 넘는 것이 보여 경적을 울리고 급하게 피해보려 했지만, 사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속도가 시속 40~50키로미터 정도로 빠르지 않았고, 자동차 앞 부분을 피하면서 뒷 부분이 받쳤다는 것. 그럼에도 차 뒷바퀴 쪽 축이 완전히 나가버려 거의 반파수준이다. 상대차량은 에어백이 터지면서 운전자분이 꽤 많이 놀란듯하다. 다행히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타박상이라고 한다. 나 또한 조금 놀란 마음에 어디 아픈 곳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왜 중앙선을 넘어왔는지 물어보니,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기 위해 차 안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주우려다 상체를 숙이는 통에 핸들이 꺾여버렸다고 한다.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쾅' 부딪첬다고 한다. 그랬으니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었던 것이다. (제발 운전 중엔 휴대폰을 만지지 맙시다!)


이 전 과정에서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량을 최대한 피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것과 함께, 어떻게 정확히 이 시간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차를 탄 지 5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차를 조금 일찍 탔거나, 조금 늦게 탔더라면, 또는 차를 운전했던 5분 사이 속도가 조금 빨랐거나 반대로 늦었다면 등등 갖은 생각이 떠올랐다. 흔히들 이런 경우 어떤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사고는 말 그대로 그냥 사고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우연일 뿐이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운명이라 함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할 텐데, 이런 사고가 필연적일 수는 없다. 하필 그 때 전화가 울렸고, 전화를 받으려 했고, 운전대의 중심을 잡지 못했고... 상대방에게 닥친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고를 당하고 렉카차를 타고 공업사에 들르고, 차를 렌트하고 등등. 이후 일처리를 진행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진정이 되어가자 문득 이 문구가 떠올랐다.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가 쓴 것으로 알려진 <평온을 비는 기도>다.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가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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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기가 어렵다 보니 지갑을 쉽게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문을 닫는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숫자도 늘어나 코로나19 시절만큼 자영업자의 수가 줄었다고도 한다. 


이렇게 소비자가 지갑을 닫는 행위를 미국에서는 노바이(No Buy) 현상으로 말하고, 우리는 요노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노는 You Only Need One 이라는 영문 단어의 첫 글자를 따 온 말이다. 즉 꼭 필요한 것만 사고, 필요치 않는 것은 구매하지 않는 행동을 일컫는다. 노바이 또한 어떤 물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며 새로운 것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소비자의 지갑이 닫히면서 소비가 침체되어지면, 당연히 경기도 침체된다. 자본주의란 소비가 지탱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소비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우리가 '발전'이라고 칭하는 일이 벌어진다. 소비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생산 또한 많아지고, 이렇게 생산된 것은 또 새로운 소비를 욕망하게 만들어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경제발전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경제발전이 진짜 우리 인류에게 필요한 발전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할 때 국경은 폐쇄되고 사람들 간의 교류가 끊어지면서 경제 행위도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공장 굴뚝에서 나오던 연기도, 자동차의 배기가스도 줄어들면서 지구의 공기가 깨끗해졌다. 평상시 보이지도 않던 먼 곳의 설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서 발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이번 소비침체를 통해 인류가 꼭 소비 지향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면 좋겠다. 욕망을 끝없이 자극해 소비하지 않는 삶을 꿈꾸는 것조차 힘들었던 자본의 세상 속에서, 편의를 찾되 절제할 수 있는 삶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지구에서의 인류의 삶이 지속가능할 것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것. 이런 삶의 방식이 침체가 아니라 발전으로 인식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더 많이 갖고 소비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갖고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방법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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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2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러니하게도 저도 코로나 기간 자연이 살아나는 현상을 바라보며 경제발전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소비지향은 많은 측면중 경제학적인 측면에만 해당된다는 거죠. 삶의 많은 다양한 시선중 유독 경제적 측면에만 귀속되는 삶을 하나의 정답으로 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 같습니다. 조금만 비껴서면 다른 많은 삶이 보일 것 같습니다.

하루살이 2025-03-12 09:48   좋아요 0 | URL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자원이 무한할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이 과연 지속가능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시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노와 같은 삶의 방식이 꽤나 긍정적으로 느껴져요. ^^;; 쓰지도 않는 여분을 갖가지 미사여구로 비축해 놓고 사는 것은 아닌지 둘러보게 됩니다. ㅎ
 

유난히 길었던 여름 탓인지 농사를 짓는 하우스에서는 병해충 피해가 심한 듯하다. 특히 벌레들의 피해가 커서, 노지에 키우는 배추와 무에도 성한 것을 찾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집에 들어앉아 방에 앉거나 누워 있을 때 이 벌레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집 안에서 이 벌레들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설령 이 벌레들이 있다고 한들 사람을 괴롭힐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집에 있으면 벌레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여름밤 잠을 청하려 누우면 어디서인지 몰래 다가온 모기의 날갯소리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여름이 지난 지금은 파리가 성가시게 군다. 책이라도 한 장 읽을라 치면, 이제 막 집중해서 문장을 쉬이 쉬이 넘나들려는 찰나 귓가에 날갯소리를 드리우거나 눈 앞에 어른거려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모기처럼 피를 빨아 먹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모른 척 하면 가끔 자리를 떠 다시 평온을 되찾지만, 이 평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또다시 찾아와 내 몸의 오감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침범해 들어와 자극한다. 결국 책을 읽는 등의 하던 일을 멈추고 파리채를 집어 든다. 내가 원하지 않는 오감을 자극한 벌로 쫓고 쫓기는 관계로 바뀐다. 파리는 날래어서 쉽게 잡히지는 않지만, 모기만큼은 아니다. 계속 날아다니거나 어디 숨어버리지 않고, 어딘가에 내려앉는 경우가 많아 파리와의 추격은 결국 파리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파리가 불러온 간단한 사건 사이에는 이성이 들어갈 틈이 없다. 신경을 거스린다는 나쁜 기분은 곧바로 응징을 결정한다. 


혹시 지금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갖가지 변명이나 설명으로 치장되어져 있지만, 파리와의 관계처럼 즉각적 응징으로만 대처하는 일은 없는 것은 아닌지 살펴본다. 누군가의 죽음으로만 끝을 맺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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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루게 된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배고픔을 해결했다고 먹는 것을 멈추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피하면 그 뿐인 거처에 그치지 않고, 보다 더! 보다 더! 원하는 마음이 문명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문자를 만들고 소통을 하며 대규모의 집단을 구성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행동을 이끌어 온 것도 모두 욕망이 작동해서라고 보여진다. 특히 권력에 대한 욕망이 한계 없는 기본적인 욕구와 맞물리면서 인류는 현재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인간이라는 속성이 다른 동물들처럼 기본적인 (생존)욕구를 채우면 멈출 줄 알았다면, 권력욕이 작동할 수 있는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멈출 줄 모르는 욕망과 욕구는 인간이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가축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쳐, 소위 비만이라는 질병 등을 불러온다. 


이런 인간의 욕망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색깔도 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생존에 대한 욕구와 권력욕을 넘어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욕망은 세분화되고 다양해지고 있다. 마인드 마이너 송길영은 빅데이터를 통해 이렇게 변해가는 욕망의 흐름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 결핍을 느끼는지를 밝혀 준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지만, 실은 사람의 욕망을 읽는 셈이다. 그는 이렇게 다양해진 욕망의 변화를 긍정하고, 이 욕망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물론 그는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안고 있는 듯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욕망은 돈을 많이 벌겠다거나, 유명해지겠다는 재산이나 권력 등을 얻는 수집에 대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고 깊게 파고드는 성취하는 욕망이다. 그 욕망을 통해 재산이나 권력은 자연스레 따라올 수도 있다. 이런 욕망은 지금의 시대가 그만큼 세분화되었기에 가능한 욕망들이다. 예를 들면 커피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콜드브루와 더치커피 같은 추출법의 차이라든가, 아라비카, 로부스타, 수프리모, 블루마운틴 같은 원두의 종류 등등, 미세한 차이를 통한 맛의 차이에 민감하다. 커피에 대한 열정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물론 개인에 따라 좋다라는 의미도 달라지겠지만- 커피를 선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공부와 관찰, 실험 등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 좋은 커피에 대한 욕망이 타인에게 공감을 불러와 팬덤을 형성하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의 의미까지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겐 믹스커피를 먹든 인스턴트 커피를 먹든, 원두커피를 먹든 별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커피에 대한 욕망과 열정을 완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모두에게 동일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욕망이란 과거의 일일뿐, 이제 이런 거대 욕망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분화된 욕망의 실현은 일종의 과시욕의 하나일 수도 있으며, 여전히 이것은 권력욕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한편으론 욕망의 세분화와 다양화는 먹고 사는 것 이외에 자신의 무가치함을 덜어내고자 하는 의미에 대한 욕망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그 의미에 대한 욕망을 자신이 이끌고 가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 욕망에 끄달린다면 인생은 괴로움으로 빠질 것이다. 의미나 가치가 사라져버리기에 말이다.(어찌보면 의미와 가치를 매기는 것이 바로 권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욕망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필요해 보인다.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즉 집착하지 않는 욕망의 자세 말이다. 불교가 인생을 고해라고 여기는 원인으로 말하고 있는 그 '집착' 말이다. 욕망이 욕망임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것. 이것이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현대인에게 욕망을 대하는 또 다른 삶의 길은 아닌 것인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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