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했던 논에 트랙터가 들어선다. 논이 갈리고 물이 들어간다. 물 댄 논이 찰랑찰랑 연못이 되어 간다. 몇 일 후 이앙기가 들어가 모내기를 시작한다. 두어 시간이면 모내기가 끝나고 모가 심겨져 있다.



5월 중순의 풍경이다. 이윽고 해가 저물면 논 이곳저곳에서 개굴 개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한 마리, 두 마리로 시작해 수 백 마리, 수천 마리가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5~7월이 산란기인 참개구리들에게 논 만큼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알맞은 물 높이와 먹이가 되는 각종 벌레들. 혹시나 들이닥칠 천적들을 피할 수 있는 땅 속까지. 제초제와 농약이 뿌려지지 않은 논이라면 정말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다보면 창문 너머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올 것임을 알게 된다. 개구리 울음소리는 어떤 날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려 잠을 부추기고, 어떤 날은 소음으로 들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든다. 개구리 울음은 그대로인데, 그걸 듣는 나의 마음은 같지 않아, 소음으로도 음악으로도 들려온다. '개구리 소리도 들을 탓'인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것이다(一切唯心造). 아니, 마음마저도 한결 같지 않아(無常) 그 때 그 때 다른 상을 만든다. 개구리 울음 소리를 통해 시절을 알고, 마음을 안다. 이렇게 알아 차려진 마음으로 다시 개구리 울음을 들으면 개구리 울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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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꼭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차로 2분 정도만 벗어나도 고요하다. 한정된 좁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비가 왔다 그쳤다 지 멋대로다. 지금 내가 맞고 있는 이 비는 수만년 전 백두산의 호랑이가 맞았던 그 비이고, 임진왜란 때 큰 칼을 휘두르며 지휘했을 이순신 장군이 맞았을 그 비이며, 저 멀리 <사랑은 비를 타고>에 출연한 배우 진 켈리가 맞았을 비 일지도 모른다. 


물은 순환한다. 태고적부터 존재했던 물은 그 장소를 달리하고 모습을 달리하며 지금까지 존재해왔다. 절대량의 변화가 거의 없이 땅 속에서, 강과 바다에서, 얼음으로, 또는 구름으로 모습을 변해가며 생명을 지켜줬다. 그런데 물의 순환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지구 대기의 기온이 올라가면서 수증기의 발생량도 많아지고, 이로 인해 홍수가 자주 발생한다. 한 쪽에 홍수로 물 난리가 나면 물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에 다른 쪽은 가뭄으로 곤란을 겪게 된다. 홍수와 가뭄 등 물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지하수가 말라가면서 물 부족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곳도 늘어난다. 물의 격차가 지구온난화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의 격차는 마치 인간 사회의 부의 격차와 닮아 보인다. 한정된 부를 나눠 갖는 인간 사회에서 이 부가 점점 한쪽으로 치우쳐 가고 있다. 부의 차이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원시공산시대에서 개인의 소유가 등장하면서 격차가 발생하고, 자본주의라는 제도가 가져온 부의 확대 이면엔 상위 20%와 나머지 80%의 부가 비슷해지더니, 이젠 상위 1%의 부가 나머지 99%의 부와 맞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빈부격차는 물의 격차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폭탄이 될지 모른다. 우리가 감당하고 감내할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부의 격차가 가져올 재난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머지않아 이 부의 격차가 건강은 물론 수명의 차이를 불러올 것이고, 이는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크다. 탄소의 증가가 지구의 기온을 끌어올려 기후변화를 야기하듯, 경쟁의 극심화가 욕망을 끌어올려 부의 격차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경쟁을 적절하게 억누르고 협동, 공생이 어우러지는 제도를 마련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우리가 탄소를 억제하고 친환경 기술을 연구하고 실용화 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듯이 우리 사회제도 또한 경쟁을 적절히 억제하고 공생의 기술을 연구하고 실용화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퍼붓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공상에 잠겨본다. 올 한 해 홍수와 가뭄의 피해가 없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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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의 스마트 도어락이 저 혼자 삑삑거리기를 1년이 넘은 것 같다. 중문을 닫고 TV를 보고 있자면 삑삑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냥저냥 놔두었다. 그러던 것이 이젠 숫자 터치를 먹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순간 당혹스러웠지만 카드키가 있어서 문을 열고 닫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언제 이 카드키마저 작동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교체를 결정했다. 직접 도어락을 교체하기로 마음 먹고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주문 시 설치까지 해 주는 옵션도 있는데 설치비가 최저 3~4만원은 하는 듯했다. 단독주택에 살면서 수리, 교체를 맡기기 시작하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집이 아니라 관리비를 내고 위탁하는 아파트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직접 설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단 기존의 도어락을 해체하고,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부품이 그렇게 많지 않아 어려운 작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직접 교체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그림 설명서나 동영상 안내가 없어서 아쉬웠다. 해체했던 기억을 떠올려 반대 순으로 하나 하나 결합을 해 가면서 도어락을 달았다. 



그런데 두 개의 잠금장치가 꼼짝을 않는다. 위에 것은 수동으로 작동시켜 보려 단추를 누르지만 '윙' 소리만 나고 움직이지를 않는다. 아래 것은 손잡이가 움직이지조차 않는다. 구멍을 잘 맞추어서 나사를 풀었다 다시 조립해 보지만, 위 잠금장치만 움직이던가, 아래 잠금장치만 작동하던가 할 뿐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이리 허술하게 만들진 않았을텐데 생각하면서도 점점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풀었다 잠그기를 몇 번 하다 문득 틀의 앞 뒷면을 바꿔 보기로 생각했다. 맞았다. 앞 뒷면이 바뀌어서 작동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참, 어떻게 앞 뒷면을 바꾸었다고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그것도 신기했다. 구멍의 위치나 크기는 똑같은데 왜 앞 뒤를 바꾼 것 만으로 열리고 닫히는 게 달라질까. 아무래도 구멍 밖의 좌우가 완전히 대칭되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아주 조금의 차이로 걸쇠가 틀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제 잠금쇠가 잘 움직이니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생각했다. 모든 부품들을 다 조립하고 비밀번호와 카드키를 등록하고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문이 잠긴 후에 밖에서 여는데 그냥 열리는 것이다. 이게 뭐야? 왜 안 잠기는 거지? 어라? 이번엔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꼼짝을 않는다. 이런! 안과 밖이 바뀐 것이다. 도대체 이번엔 뭐가 잘못된 거지?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해결책이 떠오르질 않는다.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다시 분해를 하고 조립을 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안과 밖이 바뀌었다. 잘못된 제품인가 싶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보지만 휴일이라 통화를 할 수가 없다. 천천히 다시 분해해서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며 조립을 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미더운 부분이 보였다. 손잡이 뭉치에 IN과 OUT이 써 있는데, 아무리 해도 인을 안쪽으로 아웃을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조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립이 가능하도록 인과 아웃을 바꾼 채로 조립했던 것이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고민 하다 도어락 뭉치 전체를 거꾸로 하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손잡이와 숫자 위치가 위아래 뒤바뀌고, 문의 타공이 보이게 된다. 설마 이렇게 조립하도록 만들었을까? 


문제는 알 것 같은데 해결책은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렇게 다시 분해와 조립만 두어 번 더 했다. 그러다 문득 손잡이 뭉치를 왜 꼭 안에서 집어 넣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잡이 뭉치를 밖에서 안으로 집어 넣으면 인과 아웃도 제대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맞았다. 그게 정답이었다. 손잡이 뭉치를 밖에서 집어넣어 인과 아웃을 제대로 위치에 놓으니 도어락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30분 이면 끝날 작업을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사고의 경직성. 한 번 떠올린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벌어진 고생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한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정말 '한' 생각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한 느낌이다.

도어락을 교체하면서 경직된 사고가 얼마나 고생스러운지를 체감했다. 언제든 열려있는 <사고의 유연성>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가장 근거가 되는 전제조차도 의심해보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논리의 도약으로 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불교의 '중도'에 대해서도 고찰해본다. 제법무아, 제행무상. 틀에 갇히지 않는 삶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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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5년 4월 3일) 자동차 사고를 제법 크게 당했다. 맞은편에서 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들이받아버린 것이다. 중앙선을 넘는 것이 보여 경적을 울리고 급하게 피해보려 했지만, 사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속도가 시속 40~50키로미터 정도로 빠르지 않았고, 자동차 앞 부분을 피하면서 뒷 부분이 받쳤다는 것. 그럼에도 차 뒷바퀴 쪽 축이 완전히 나가버려 거의 반파수준이다. 상대차량은 에어백이 터지면서 운전자분이 꽤 많이 놀란듯하다. 다행히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타박상이라고 한다. 나 또한 조금 놀란 마음에 어디 아픈 곳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왜 중앙선을 넘어왔는지 물어보니,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기 위해 차 안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주우려다 상체를 숙이는 통에 핸들이 꺾여버렸다고 한다.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쾅' 부딪첬다고 한다. 그랬으니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었던 것이다. (제발 운전 중엔 휴대폰을 만지지 맙시다!)


이 전 과정에서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량을 최대한 피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것과 함께, 어떻게 정확히 이 시간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차를 탄 지 5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차를 조금 일찍 탔거나, 조금 늦게 탔더라면, 또는 차를 운전했던 5분 사이 속도가 조금 빨랐거나 반대로 늦었다면 등등 갖은 생각이 떠올랐다. 흔히들 이런 경우 어떤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사고는 말 그대로 그냥 사고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우연일 뿐이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운명이라 함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할 텐데, 이런 사고가 필연적일 수는 없다. 하필 그 때 전화가 울렸고, 전화를 받으려 했고, 운전대의 중심을 잡지 못했고... 상대방에게 닥친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고를 당하고 렉카차를 타고 공업사에 들르고, 차를 렌트하고 등등. 이후 일처리를 진행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진정이 되어가자 문득 이 문구가 떠올랐다.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가 쓴 것으로 알려진 <평온을 비는 기도>다.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가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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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기가 어렵다 보니 지갑을 쉽게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문을 닫는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숫자도 늘어나 코로나19 시절만큼 자영업자의 수가 줄었다고도 한다. 


이렇게 소비자가 지갑을 닫는 행위를 미국에서는 노바이(No Buy) 현상으로 말하고, 우리는 요노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노는 You Only Need One 이라는 영문 단어의 첫 글자를 따 온 말이다. 즉 꼭 필요한 것만 사고, 필요치 않는 것은 구매하지 않는 행동을 일컫는다. 노바이 또한 어떤 물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며 새로운 것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소비자의 지갑이 닫히면서 소비가 침체되어지면, 당연히 경기도 침체된다. 자본주의란 소비가 지탱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소비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우리가 '발전'이라고 칭하는 일이 벌어진다. 소비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생산 또한 많아지고, 이렇게 생산된 것은 또 새로운 소비를 욕망하게 만들어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경제발전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경제발전이 진짜 우리 인류에게 필요한 발전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할 때 국경은 폐쇄되고 사람들 간의 교류가 끊어지면서 경제 행위도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공장 굴뚝에서 나오던 연기도, 자동차의 배기가스도 줄어들면서 지구의 공기가 깨끗해졌다. 평상시 보이지도 않던 먼 곳의 설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서 발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이번 소비침체를 통해 인류가 꼭 소비 지향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면 좋겠다. 욕망을 끝없이 자극해 소비하지 않는 삶을 꿈꾸는 것조차 힘들었던 자본의 세상 속에서, 편의를 찾되 절제할 수 있는 삶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지구에서의 인류의 삶이 지속가능할 것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것. 이런 삶의 방식이 침체가 아니라 발전으로 인식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더 많이 갖고 소비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갖고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방법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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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2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러니하게도 저도 코로나 기간 자연이 살아나는 현상을 바라보며 경제발전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소비지향은 많은 측면중 경제학적인 측면에만 해당된다는 거죠. 삶의 많은 다양한 시선중 유독 경제적 측면에만 귀속되는 삶을 하나의 정답으로 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 같습니다. 조금만 비껴서면 다른 많은 삶이 보일 것 같습니다.

하루살이 2025-03-12 09:48   좋아요 0 | URL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자원이 무한할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이 과연 지속가능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시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노와 같은 삶의 방식이 꽤나 긍정적으로 느껴져요. ^^;; 쓰지도 않는 여분을 갖가지 미사여구로 비축해 놓고 사는 것은 아닌지 둘러보게 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