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 지구의 동식물들 중에서 미루는 것을 발명한 것은 인간뿐이다. (P141)

 

아마도 류시화는 미루지 말자는 뜻에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책 속의 기억으론 한 마을 사람들이 순례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각자 핑계를 대다 결국 나치들에 의해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후회를 했다는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맞다. 인간만이 미룬다. 인간만이 어떤 목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정해놓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럼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삶을 산다면... 그렇다, 아무것도 미루는 것은 없을 것이다. 무엇인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산꼭대기로 바위를 끌고 올라가야만 하는 시지푸스와 같은 인간. 바위를 바다에 던져버려라. 그리고 맨 손으로 산으로 오르라. 거기서 바위가 빠진 바다를 내려다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바위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미룸은 그래서 우리에게 한줌의 휴식을 준다. 결국 바다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바위를 짊어져야 할 사람들에게 땀을 씻을 한 줌의 휴식이 어찌보면 미룸이다.

난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내일 하리라. 지금 당장은 그저 눕고 싶다. 바위마저 버려버리고 싶지만 그건 아직 내가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떠밀지만 말아다오. 난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니. 지금은 그저 쉬고 싶은뿐이니. 아직 그것은 나에게 절실함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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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류시화 지음 / 열림원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인도를 꿈꾸었던 적이 있다. 그곳에선 무엇인가 인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듯 싶기도 했고, 마음의 평화를 선사받을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곳은 아직도 계급이라는 악령이 횡행하고 가난과 병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끔찍한 곳으로도 다가왔다.

인도는 그랬다. 내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나라.

수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냐, 혁명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냐에 따라 그곳은 천지차이다. 류시화처럼 구도자로서 바라본 인도는 만나는 이 모두가 구루가 되는 것이며, 혁명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뜯어고쳐야 할 악습으로 가득찬 곳이기도 하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은 오히려 인도로의 여행을 꿈꾸어 왔던 나에게 현실감을 심어주었다. 정말 내가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모든 걸 노 프라블럼 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들, 그 속엔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좀 더 나아지고자 하는 <이성>이 자리하지 못하는 사회, 즉 이성적이지 못하는 사회가 바로 인도일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의 뜻을 화이트헤드처럼 정의한다면 종교라는 것 또한 이성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도는 노 프라블럼이다. 그것이 이성이든 종교든 노 프라블럼이다.

물론 류시화가 만났던 문둥병 환자이면서 화장터 인부로 사는 쿠마르와 같은 경우는 이 노 프라블럼의 마음이 중요할 것이다. 정말 신이 준 것으로밖에 설명이 안되는 시련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낸단 말인가? 그것은 그저 노 프라블럼 하며 이런 시련에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땐 인도인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진정 경이롭다. 하지만 현실 제도가 가져오는 문제에 대해서도 노 프라블럼을 외쳐서야 되겠는가? (가난과 병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의 개선을 통해 그것은 개선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서도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잠시 맡고 있었던 것이라는 논리를 펴는 배짱, 맞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어느 기간동안 임시로 쓰겠다고 한 약속이다. 그 기간을 훔쳐간 것은 분명 도둑이지 않는가? 물건을 훔친 것이 아니라 그 기간에 대한 약속을 훔친 것이다. 기차 시간이나 버스 시간의 연착에 대해서도 무사태평. 아마도 기관사나 운전사가 친구를 만났을 것이라는 아량, 그렇지만 지금 내가 연착하지 않고 갔더라면 만났을 수도 있는 친구는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푸하하하, 간단하지. 그건 운명이다. 오랜 시간 전에 정해져 있던 운명.

그래 문제는 운명이다.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거역하느냐.  제도가 가져다준 운명은 바꾸려 노력하고 삶이 주는 운명은 받아들이자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모두가 운명으로 취급되어지는 인도인과는 그래서 이제 그 만남조차 두렵다. 정해진 길로만 걸어가는 사람들이지 않는가? 나는 때론 길이 아닌 곳을 가고 싶은데, 그들은 운명이라는 길로만 나를 인도할테니까.

편안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것. 그것은 운명을 거역했을 때인가, 운명에 순응했을 때인가?

인도는 그래서 아직도 나에겐 물음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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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 ㅡㅡ 브레히트

새들은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난다. 하지만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선 리빙스턴은 바람을 거슬러보기도 하고 수직낙하를 연습하기도 한다. 또 강산에가 노래하지 않았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을.

순리에 따라 물결을 거스리지 않고 사는 삶이 있다. 그리고 끝내 그 물결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선택의 문제일뿐.

그러나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의미를 찾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결을 거슬리지 않는 삶은 결코 그 강의 상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상류를 알지 못한 삶이 꼭 불행한 삶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강의 상류로부터 바다까지 한번은 꼭 경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물결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져야 할텐데......

그래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가보다. 단순하게 사는 것마저도 어려운, 그래서 애착이 가는 나의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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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女心 2004-05-0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라... 지금 저는 죽은 물고기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제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있는 물고기가 되고 싶네요 ^^;;

icaru 2004-05-0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음...^^ 선택의 문제라...

물결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성미정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중 <곰국을 끓이다 보면> 중에서

곰국을 끓이다 보면 더 이상 우려낼 게 없을 때

맑은 물이 우러나온다 그걸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뽀얀 국물 다 우러내야 나오는

마시면 속이 개운해지는 저 눈물이

진짜 진주라는 생각이 든다

뼈에 숭숭 꿇린 구멍은

진주가 박혀 있던 자리라는 생각도

 

---곰국은 오래 끓여야 제맛이다. 사람도 진국이 있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어떤 품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 단순히 그 표면적 인상을 좋게 하기 위해 교언영색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그 진주같은 눈물일 것이다.

그 진주를 알아보기 위해선 오래 오래 끓여야 한다. 오랜 시간 사귄 친구들, 그리고 변함없는 우정, 내게도 진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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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rk829 2004-09-1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곰국을 싫어해서 180이 안된거라고 엄마가 그러셨습니다. 헤헤

2004-09-13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고 :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전부 거짓이라면 어떡하겠습니까?

주인공 콜먼(안소니 홉킨스)은 유대인으로서 첫 대학총장에 올랐지만 흑인비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내려섭니다. 그 충격에 자신의 아내는 숨지고 그는 시간이 조금 흐른후 우연히 만나게 된 상처입은 젊은 여자(니콜 키드먼)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평생을 간직해왔던 비밀을 그녀에게 털어놓습니다. 자신이 왜 그토록 억울해 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이 위선으로 가득차 있을 수밖에 없었음을, 가족과도 연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죽기전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남편에게 폭행받고 자식마저 불에타 숨진 비극을 품고 사는 여인에게 털어놓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까지 할 수 없더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을 서로 어루만질수 있다는 것, 그의 가슴에 자신의 슬픈 마음을 전달할 수 있기에 그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끝내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사랑은 비극이라기 보다는 희극입니다. 참사랑이 완성되었기 때문이죠.

1. 비아그라 먹은 아킬라스

콜먼은 강의중에 아킬라스 얘기를 합니다. 세상의 가장 막강한 전사가 오직 사랑하는 여인때문에 무너졌음을 이야기합니다. 총장을 그만두고 나서 젊은 작부를 사랑하게 됐을때 그의 제자는 콜먼을 비아그라 먹은 아킬라스라고 빈정댑니다. 자신이 비판했던 신화속 인물로 조롱받는 신세가 된 콜먼은 자신의 제자이자 변호사에게 버럭 화를 냅니다. 친구라면 심판하려 들지 말라구요.

그렇습니다. 사랑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친구라면 그렇지 말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어리숙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가 아닙니까? 친구의 사랑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위로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요. 비아그라를 먹으면서까지 사랑받고 싶어했던 그 늙은 친구를 어찌 욕할 수 있단 말입니까?

2.까마귀로서 살아갈 수 없는 까마귀

집에서 키우던 까마귀를 숲으로 보내주어도 그 까마귀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까마귀들의 왕따. 까마귀는 결국 다시 사람의 손으로 되돌아옵니다. 까마귀지만 까마귀로서 살 수 없는 일, 누구를 한탄해야 할까요.

콜먼은 사실 흑인입니다. 하지만 흑인으로서의 삶이 가지고 있는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하얀피부를 가지고 있음을 이용해 세상을 속입니다.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으나 결국 자신의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게 됩니다. 가족과도 인연을 끊어야 하고, 인종모독에 대한 진실조차 말하지 못합니다.

휴먼 스태인. 인간의 결점은 이렇게도 큽니다. 사람의 영혼을 자유롭게 놔두지 못할정도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나는 얼마나 많은 벽들을 세워 놓고 있습니까?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편견은 그 벽을 더욱 공고히 만듭니다.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선천적으로 가지게 되는 벽들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배우는 많은 것들중 벽을 높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야 할 것입니다. 현명한 바보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3. 슬픔은 주관적.

콜먼의 안타까움과 함께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여주인공 또한 우리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남편, 도망쳐도 끝내 쫓아오는 그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희망이던 아이들이 불에 타 죽어버린 순간 그녀는 생의 모든 걸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콜먼을 만나면서 자신만이 절대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님을 깨우칩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그깟 정도야 생각하는 것들도 어떤 사람들에겐 목숨을 던질만큼 아픈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자신의 손톱밑의 가시가 더 아픈법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내 손톱밑의 가시를 아파했던 것처럼 타인의 손톱 밑의 가시를 뽑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주관적인 슬픔도 안아줄 수 있겠죠. 아파하는 마음. 아무리 그것이 작아보이더라도 꼭 꼭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결점투성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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